이덕일의 고금통의 1 - 오늘을 위한 성찰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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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의 법칙(Murphy’ law)이 있다. 1949년 항공 엔지니어 에드워드 머피가 충격완화장치 실험이 실패로 끝나자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항상 잘못된다”고 말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는 머피의 법칙을 생각할 때마다 재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잘못될 가능성이 항상 잘못 일어날 확률은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는 나쁜 상황에서는 일어날 확률이 1퍼센트라고 하더라도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는 것을 머피의 법칙에 따라 재수가 없다고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덕일의 『고금통의』를 읽었다.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춘 역사학자(오마이뉴스)’, ‘역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해럴드경제)’는 추천사에 걸맞았다. 저자는 1000여개의 광범위한 역사적인 순간을 다시 읽으면서 불멸의 지혜를 생각한다. 또한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책임감 있게 사회비평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읽다보면 제목이 말해주듯 ‘고금통의’를 하게 된다. 고금통의(古今通義)는 『사기(史記)』「삼왕세가(三王世家)」에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관통하는 의(義)는 같다’는 의미다.

 

온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눈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분노했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서로 간의 이권(利權)으로 설전(舌戰)을 펼치고 있다. 이익(利益)에 눈 먼 사람들에게서 도덕심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할 짓이 못될 정도로 부끄러울 지경이다. 소통을 해야 하는 관계에서 도덕심을 배제하고 그 빈자리를 이익으로 채우고 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경계하기는 마찬가지다.

 

이(利)가 편법이라고 한다면 의(義)는 원칙을 뜻한다. 『고금통의』를 통해 견리사의(見利思義)를 궁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먼저 편견이 확고한 역사 인식에 대한 근거를 밝힌다. 즉, ‘석기 시대 문명은 국가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한다. 석기 시대는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고정 관념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남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잉카 제국, 마야 제국 등을 보면 우리의 역사 인식은 방향감각을 잃고 만다. 잉카 제국, 마야 제국 등은 석기 시대에 대제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세계사의 상식이 우리나라에서만 통하지 않고 있다. 누가 봐도 거대한 역사적 오산이지만 ‘청동기 시대=국가 성립’이 역사적인 공식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일제 식민 사학의 고정된 틀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관피아에 대한 충고도 빼놓을 수 없다. 관피아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사회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와 마피아가 결합한 관피아는 청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기의『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와 있듯 ‘낮도적(晝賊)’이라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관피아는 우리 사회에서 업종을 불문하고 다양한 형태로 검버섯처럼 퍼져있다. 정약용은『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지금 도둑질로 재물을 얻는 데 무릇 도둑질로 얻은 만금(萬金)은 정당하게 얻은 일글(一金)을 당할 수 없다’고 했다. 관피아를 볼 때마다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리고 공직자 후보들의 인사청문회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사람’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라는 걱정이 앞선다. 일찍이 공자도 ‘그 사람이 있을 때 정치가 일어서고 그 사람이 없으면 정치가 주저않게 된다’고 말했다. 최한기도『인정(人政)』에서 ‘만 마디 말로써 백성에게 선(善)을 권하는 것은 한 사람의 현인(賢人)을 천거해 선을 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공직자 후보들은 하나같이 ‘신상털기식’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하고 말았다. 자격 검증에서 신상털기도 통과하지도 못한다고 딴죽을 걸겠지만 인품과 실력을 갖춘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그래야 민심(民心)을 얻을 수 있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역사를 앞선 수레바퀴라는 뜻으로 전철(前轍)이라고 했다. 때로는 수레바퀴가 엎어진다고 해서 복거(覆車)라고 했으며 이를 경계하는 의미로 ‘복거지계(覆車之戒)’라고 했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언젠가는 금(今)의 사(事)를 고(古)에 비춰서 의(義)를 찾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을 산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만든 역사적 구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는 머피의 법칙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역사와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 한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재수가 있고 없고는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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