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 인문학자 8인의 절망을 이기는 인문학 명강의
강신주 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살다보면 어떤 순간 숨이 멈춰 버릴 때가 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인재(人災)들이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의 통증은 심하다. 슬픔으로 치유할 수 없는 분노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만 현실을 벗어나 환상을 보게 된다. 적어도 환상에서는 인재는 일어나지 않겠지, 절망보다는 희망적으로 숨 쉴 수 있겠지, 라는 기대감이 없지 않다. 한편 현재에서는 인문(人文)이라는 시대정신을 찾아 나서고 있다. 흔히 인문이라고 하면 문(), (), ()을 말한다. 물리학이나 생태학이 사실적 차원을 다룬다고 한다면 인문학은 사실적 이해와 진실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쉽게 인문(人文)을 풀이하면 인간()이 만든 무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 인문학자 8인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를 읽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성난 얼굴이 뭔가 돌직구를 던져 줄 것만 같았다. 적어도 인문학자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이란 현재의 상태에서 어떤 불만족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최후의 인간에게는 모든 게 적당하면 그만이지 싶다. 하지만 인문학자는 성난 얼굴의 인간에 가깝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로 분노한다. ‘말할 수 없다(unsayablue)’라고 침묵하지도 않는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은 성난 얼굴에 대해 진보적이라고 너무 빨리 이해를 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진실을 숨기기 위한 성급한 주장이 아닐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정여울이 말한 대로 성난 얼굴은 사악하지 않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한 자들의 폭력에 맞서 사악하게 맞서는 것은 사악한 얼굴이지 결코 성난 얼굴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에 맞서 악으로 되갚는 것은 사악한 얼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악에 맞서는 선의와 용기와 실천이다. 이쯤에서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원이나 해경은 세월호 참사라는 악에 맞서 선의와 용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구조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책임을 회피했다. 이유인즉 그들은 에픽테토스가엥케이리디온에서 말한 외모, 평판, 재산 같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에 골몰했다. 그 때 그들이 지혜, 용기, 우정, 신념이라는 나에게 달린 것을 실천했다고 한다면 오디세우스가 되었을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을 승리한 영웅이다. 그렇다고 이현우가 지적한 대로 우리가 오디세우스의 분신이 되려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욕구와 달리 끝이 없다. 결과적으로 무한한 욕망은 불안하다. 오늘날에도 오디세우스가 매력적인 인간으로 불리는 것은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겪는 시련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오디세우스는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했다. 놀랍게도 운명에 대한 고미숙의 접근은 신체적이다. 고미숙은 운명이란 신체에 새겨진 욕망의 지도라고 했다. 욕망의 계보학에 있어 신체와 존재의 간격을 고민하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신체에 무지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앞서 말했듯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이 대단했던 만큼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기성세대들에 대하여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또렷했다. 그런데도 기성세대들은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싸움판을 벌이고 있다. 정말이지 인간다운 감정보다는 허망함이 다시금 몰려와 우리를 산산조각 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강준만이 권력 중심적인 인정투쟁 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그 말이 너무도 생생했다. 권력 중심적인 인정투쟁 문화가 일으키는 증오의 소용돌이가 이 세상을 얼마나 각박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초강력 일극주의, 승자독식, 속도주의, 연고주의, 미디어 당파주의라는 병폐는 우리 사회를 시스템적으로 부패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일상이 사각(死角)이다. ()진 세상에서는 절망(切望)뿐이다. 희망()을 끊어()버린다. 절망은 지옥이라는 머릿속의 관념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의 고통이다. 이런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이렇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사각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고 있다. 처음에는 사각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위험을 해결하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이 절망감으로 역류하여 결과적으로 프로이트가 문명속의 불안에서 표현한 대로 망망대해에 있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럴 때 성난 얼굴로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으로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난 얼굴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성난 얼굴은 너무나 정직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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