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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한 안내서
김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평점 :
혐오하지 말고 분노하라.
-누스바움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를 알리는 포스터에 나오는 말이다. 1960년대 우주선을 쏘아 올린 나사(NASA)의 숨은 인물을 그린 영화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숨은 인물들이 캐서린, 도로시, 메리라는 세 명의 흑인이라는 것. 이들이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나사, 아니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종, 성(性)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일까? 이 영화에서 캐서린이 흑인 여성 전용 화장실을 가기 위해 다른 건물을 향해 비를 맞으며 800미터를 달려가는 장면이 애틋하게 남아있다.
그런가 하면 ‘방 안에 코끼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면 여러모로 불편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방 밖으로 내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쫒을 방법이 없을 때 뜻밖에도 가장 좋은 방법을 김지윤의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마치 코끼리는 존재하지 않은 듯 살아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이렇듯 방 안의 코끼리는 누구에게나 뚜렷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커다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모른 척 외면하는 상황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두 가지 계층으로 나뉜다.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류(主流)이며 반대로 방 안의 코끼리를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은 비주류(非主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통해 정체성을 모색한다.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내 안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부자(富者)의 경우 그 사람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주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가 성소수자라고 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별과 혐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주류 사회에서 멀어지면서 비주류가 되고 만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에게 주류와 비주류라는 권리의 사각지대가 있다. 주류의 권리는 눈에 잘 보이는 반면에 비주류의 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설령 보인다고 해도 애써 외면하기 일쑤다. 하지만 주류의 권리는 어떤가? 오죽했으면 주류의 권리는 특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특권이라고 해서 뭔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너무나 평범한 나머지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방 안에 코끼리가 있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며 무시할 수 있다는 건 만큼 안전한 것은 없다. 제도적으로도 주류는 평등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평등은 차별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차별을 덜 인식하면서 한편으로는 비주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성의 권리가 현재진행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절반이라는 물리적인 숫자로 보면 여성은 당연히 소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성이라는 이름만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으며 사회적인 소수자가 되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과거보다 여성의 권리는 발전했다. 투표도 할 수 있고 능력만 되면 얼마든지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만큼 성평등의 지표도 높아지는 게 이상적인 사회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여성에게 불리하다. 사회적인 차별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만큼 참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
점차로 성차별이 사회 문제로 가시화되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성의 권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구체척인 감각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권리라고 하면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회적인 약자이며 비주류인 사람들에게 권리는 희망사항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힘들더라도 희망을 가져보라는 것이다. 듣기에는 사회적 약자들을 격려하는 메시지 같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희망에 문제를 제기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빼앗긴 권리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를 찾아 나서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불행을 당연시하는 것은 공정할까? 차별일까? 저자는 오에 겐자브로의 『개인적인 체험』에 나오는 중증 장애아를 책임져야 할 버드의 생각과는 달랐다. 이 소설에서 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분명히 이건 나 개인에게 한정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야.”
사회적인 약자의 문제는 어렵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사회적인 약자는 괴롭힘, 왕따, 성폭력 등 수많은 사건들에서 보듯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공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불편한 방향으로 사건의 진실을 왜곡한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사건의 원인을 따지고 묻는다. 사회적인 약자들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라는 의심을 먼저 하면서 말이다. 침묵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침묵은 또 다른 침묵을 만들어낸다. 그럴수록 차별이 당연시되는 불합리한 세상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 선량한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약자의 불행을 불행의 당사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인 약자를 다시 한 번 차별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사회적 약자들이 물리적으로 사회 안에 있다고 해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거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권이라는 영역에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들 같다. 인간으로서 권리를 잃어버려 투명인간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사회적인 약자의 권리가 더 이상 희생되지 않아야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들이 안전하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사회적 체험’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생활이 가능하도록 사회적인 인식이 필요하며 사회는 공정한 세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차별금지법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차별을 없애자는 기본원칙을 제정했다고 해서 그 결과로 차별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간에 동등한 권리를 희생하지 않아야 우리가 바라는 차별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차별은 전염병이 강한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를 대응하기 위해 예전에 없던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 전염병의 결과로 보면 사람이 바이러스의 전파자 되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당연시함을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를 통해 의심해보는 것도 좋은 예방법이 될 것이다. 차별이 전염병이라면 권리는 면역력이기 때문이다. 면역력이 취약한 원인은 놔두고 전염병의 결과만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게 되면 ‘사회적 고립’이라는 불치병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늘 연결’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동안 외면되었던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 이슈화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약자들의 무력해 보이는 현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사회적 연결 고리가 얼마가 느슨하며 허약한지 깨닫게 된다. 침묵은 차별이며 또 다른 침묵을 불러일으킨다. 침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정의로운 세상이다. 그리고 침묵에 맞서 사회적 연결이 강할수록 면역력이 좋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가 권리를 희생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으면 얼마든지 방 안에 어슬렁거리는 코끼리를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공정한 세상은 서로가 차별하지 말고 연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