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목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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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위한 고민으로 어떻게 하면 낙타형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처럼 탈바꿈할 수 있을까?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낙타형 인간은 ‘짐깨나 지는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낙타는 사막에서 훌륭한 짐꾼이다. 낙타는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낙타는 짐이 무겁다고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 이보다 힘겨운 노동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문제는 이것이 낙타의 강인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낙타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을 묵묵히 ‘예’라고 하면서 거부하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이 무료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낙타의 어리석음보다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니오’라는 용기에 감탄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의 ‘아니오’라는 용기 덕분에 우리는 불을 인간답게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

 

어둠을 밝히는 불을 보면서 깨닫는다. 불은 어둠을 싹둑싹둑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스며들면서 타오른다는 것을. 그래서 니체는『즐거운 지식』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이 사람을 보라'고 했던 것이다. 즉,

 

이 사람을 보라

 

그렇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불꽃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는 나는

타오른다, 나를 탕진해버리기 위해.

내가 손에 쥔 것들은 빛이 되고,

내가 방치한 것은 재가 된다.

나는 확실히 불꽃이기 때문이다!

 

2011년 스테판 에셀이라는 불꽃같은 혁명가를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분노하라』를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분노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를 주목하게 된 것은 우리가 삶의 부조리 앞에서 침묵해온 지 오랜 탓이다. 그래서 분노하라는 메시지는 잠든 영혼을 깨울 정도로 강렬하였다. 하지만 분노가 분노에서 끝난다고 하면 그것은 감정의 폭발이지 싶다. 진정한 분노라고 하면 뭔가를 창조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런 그가『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자서전(自敍傳)을 마지막으로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스테판 에셀이 죽었다.”라는 짧은 부음(訃音)에는 한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안타까움 못지않게 완벽한 믿음에 대한 찬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란 어려웠다. 비록 그는 저 세상에 있지만 완벽한 믿음은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 불꽃처럼 더 타올랐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확신한다. 루소의『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사슬에 묶여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가? 우리는 거꾸로 사슬에 묶여 있는 체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면서 태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제어’가 요구된다. 자기 제어는 오만의 반대말인데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법에 반하는 꿈을 종결짓는 다시 말해 ‘법률에 의한 욕망의 제어장치’라는 것이다. 더구나 양심에 의한 자기 제어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한낮 공상에 불과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세계인권선언문에 참여하면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법 앞에서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인간의 존엄성과 법이 같은 운명체라고 역설하면서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복!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행복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행복이 끊임없는 패배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얼마나 조화롭게 할 수 있는가에 있다. 더불어 개인의 행복이 개인만의 행복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야한 하는 사회적 소명과 함께 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즉, 행복은 우리가 상호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그를 행복한 혁명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행복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 3단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면서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고 한다. 먼저 1단계는 앞서 말한대로 ‘분노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2단계는 ‘희망하라’는 것이다. 희망은 혼란에 맞서 다시 도약하는 ‘용기’와 절망을 극복하는 ‘회복 탄련성’에 있다. 그리고 3단계는 ‘사랑을 사랑하라, 감탄을 감탄하라’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사랑하고 감탄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탈바꿈이 없다고 한다면 행복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인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잡는 문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행복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 시(詩)를 낭송했다. 그의 애송시 중 하나가 페르난두 페소아의『뱀의 길』이다.

 

진실을 진실로서 인정하는 것, 동시에 실수를 인정하는 것, 순응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살아가는 것, 모든 방법을 통해 모든 것을 느끼는 일은 결국 모든 것에 지성을 갖는 일이다. 사람이 하나의 정상에 우뚝 섰을 때, 그는 모든 정상들로부터 자유롭다. 마치 하늘의 한 점에 모인 모든 정상들 위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그러나 인간은 결코 하늘의 한 점에 모이지 않는다. 모든 정상에 서 있는 자들이 그런 것처럼.

 

그는 시를 낭송하면서 타인과 소통하였고 더 나아가 삶을 찬미할 줄 알았으며 행복을 전파했다. 이 책을 옮긴 목수정의 말대로 그는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 지치지 않는 낙관주의, 행복에 대한 변함없는 취향을 이 지닌 사내’였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좋은 인생’을 살았다. 좋은 인생이란 우리가 쌓아온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다. 그러니 우리는 좋은 인생의 정상에 홀로 서 있는 이 사람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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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산업혁명 - 수평적 권력은 에너지, 경제,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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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체계는 문명의 성격을 결정한다.

『3차 산업혁명』중에서

 

 

 

미래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해온 저명한 사회 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의『3차 산업혁명』은 『소유의 종말』, 『공감의 시대』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현대적(現代的)인 대작(大作)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분류된 고정된 시간이 아니라, 늘 새롭게 접근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작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 경제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인식하면서 통찰하는 새로운 관점이 대단히 진지하면서도 흥미롭게 읽히는 묘한 중독성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3차 산업 혁명』을 주목하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탐구이다. 지금,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혹은 살아야 할 문명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차 산업혁명』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세계 경제의 몰락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면서 전지구적(全地球的) 문제로 한층 더 부각시키고 있다. 앞서 설명했듯 저자의 혁신은 문명의 성격을 에너지 체계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에너지 체계가 중요한가? 1차, 2차 산업혁명은 석탄, 석유,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에 의존했다. 화석연료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에 엘리트 에너지라고 불렸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은 태양열, 지열, 풍력 같은 재생 에너지를 사용한다. 화석연료에서 재생 에너지로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단순히 지구 온난화라는 기후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엔트로피의 증가에 있다는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는 사용 가능한 형태에서 불가능한 형태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흐른다. 이것이 곧 엔트로피다. 가령, 석탄을 태우면서 생겨난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흩어진 에너지를 다시 모은다고 해서 석탄 덩어리를 만들어 재사용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런 에너지의 양이 제한되어 있어 지구의 파괴적 결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열역학 관점에서 지구는 태양과 우주에 대해서 닫힌계(系), 즉 에너지는 교환하지만 물질을 교환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구의 화석연료는 엔트로피의 증가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고갈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탄소 시대 화석연료 사람들은 산업화가 유발한 막대한 엔트로피 청구서를 간과했다.

 

 

 

그래서 저자는 3차 산업혁명의 다서 가지 핵심 요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한다.

2. 모든 대륙의 건물을 현장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미니 발전소로 변형한 3. 모든 건물과 인프라 전체에 수소 저장 기술 및 여타의 저장 기술을 보급하여 불규칙적으로 생성되는 에너지를 보존한다.

4.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여 모든 대륙의 동력 그리드를 인터넷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는 에너지 공유 인터그리드로 전환한다.

5. 교통수단을 전원 연결 및 연료전지 차량으로 교체하고 대륙별 양방향 스마트 동력 그리드상에서 전기를 사고팔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화석연료가 아닌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녹색 경제를 지양해야 한다. 1차, 2차 산업혁명은 사람들을 근면하게 했다. 각 개인의 근면함은 생산성이 높은 노동력이었으며 물질적 진보를 이뤄냈다. 아메리칸 드림에서 보듯 승수 쌓기라는 이기적인 자아를 강조한다. 하지만 3차 산업혁명에서는 ‘생명애’(biophila)에 공감하는 ‘생태학적 자아’(ecological self)다. 생명애는 생물권 의식으로 지구상의 모든 다른 종들이 공동 생물권 안에서 협동과 상호 의존함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근면함이 아니라 공감해야 한다.

 

 

 

그런데 3차 산업혁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있다. 저자 말대로 이것은 모든 역사적인 거대 경제 혁명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체제다. 즉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체제는 새로운 에너지 체계를 만들어 내는 활동의 흐름을 관리하는 매커니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령, 1차, 2차 산업혁명에서 전화나 텔레비전이라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중앙집권화된 에너지를 관리하기 위한 수직적 권력의 체제였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에서 인터넷이라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분산형 에너지를 관리하기 위한 수평적 권력이 핵심이다. 우리의 의식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 피라미드 세상에서 수평적인 세상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상생하기 위해서는 협업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 잘 보여주고 있다.

 

 

 

『3차 산업혁명』을 공감해서 그럴까? 우리는 ‘깨끗한 부자’를 간절히 희망하게 된다. 데이비드 캘러핸에 따르면 깨끗한 부자란 3차 산업혁명의 첨단 기술 정보산업을 통해 새롭게 부자가 된 사람을 말한다. 반면에 더러운 부자는 2차 산업혁명의 환경 오염적인 채굴 산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을 말한다. 문명의 위기 속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에 공감해야 한다는 제러미 리프킨의 해법은 첨예한 이익관계를 돌파하는 대단한 용기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살아있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놀이’에 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사람이 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다고 느낄 때가 있는가?’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끗한 부자는 매우 새로운 의미에서 우리의 현재이며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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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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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분노는 어떻게 가능할까? 2011 올해의 책 중에서 스테판 에셀의『분노하라』를 주목한 까닭이다. 제목이 주는 인상이 강하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제목이 파편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럴수록 제목은 균열이 생기면서 단순해져 누군가는 ‘분노하라’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내용을 지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메시지는 무관심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관심이 덧셈법으로 증폭됐다. 하나, 93세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외침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분노 신드롬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토로시가 그랬던 것처럼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토로시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고부터 삶의 부당함에 맞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꼭, 그래야만 한다.’고 발설하지 않았던가?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인 저자에게 프랑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사르트르와 히틀러가 복잡하게 공존하는 충격 속에서 그는 ‘역사의 흐름’에 대한 자신의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즉, 사르트르의 ‘책임’과 히틀러의 ‘광기’라는 개인의 명암(明暗)에서 저자는 헤겔 철학을 비판하는 과녁으로 삼았다. 헤겔 철학은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의미 있는 어떤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그 의미란 인간의 자유가 한 단계 한 단계씩 진보한다는 것이다.’(19쪽) 1948년 유엔 세계 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였고,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 등을 역임한 후에도 저자는 사회운동가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이렇게 저자는 역사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기 위해 ‘참여’야말로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발전시키며 삶의 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역사를 보는 또 다른 관점, 즉 ‘자유, 경쟁, 언제나 더 많이 갖기 위한 질주,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진보란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풍처럼 체험될 수도 있다.’(20쪽)고 경고하였다. 삶이 예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한계는 오히려 투명해졌다. 문제는 투명하다는 것이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다. 생산 위주의 사고방식이 불러일으킨 부작용으로 인해 경제적 양극화와 고용 없는 성장은 커다란 사회적 문제다.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인권은 사각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어느 때보다 우리는 상호연결성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사회적 위험에 대한 보편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절감하고 있는 세계 인권 선언 제 22항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 사회보장제도는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에 힘입어, 각국의 조직과 경제적 형편을 감안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그 인성의 자유로운 계발에 필수불가결한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권리의 충족을 성취함을 근간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의 보편적 힘은 약하다.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낯설다고 해야 옳다. 불안정한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속도를 따라가는데 급급하다. 가령, 자동차로 출근하는 일상은 평범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평범하고 단순하다고 해서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이면에는 내 앞만 잘 보면 된다는 것으로 개인적인 앞가림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개인적인 앞가림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듭 무관심이라는 정신적 결과물을 분석하면서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린 결과라고 강조하고 있다. 다름 아닌 기본 요소 하나란 참여 의지를 위한 중요한 버팀목이며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무관심의 역설은 독특하다. 누구나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을 보면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이 넘쳐난다. 참을 수 없는 일들이 터질 때마다 사건의 당사자들만이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얼마든지 우리도 고통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앞가림의 평범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아이히만 예루살렘』에서 지적했던 ‘악의 평범성’과 같은 맥락이다. 악의 평범성은 다름 아닌 ‘무사유’(無思惟)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무사유, 즉 생각이 있는 존재가 생각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특징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면 간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저자가 말한 ‘분노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만큼이나 ‘분노하라’는 것은 절실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를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15쪽)고 말한다. 이유는 우리가 참여하는 투사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분노를 어떤 감정의 발현이라고 하는 대신에 참여의 의지로 해석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분노하지 않는다면 참여의 기회를 잃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할 일에 대해 분노를 촉발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불의에 맞서는 참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며 참여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인간의 표본이라는 저자의 윤리를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을 펼치는 것을 보면서 어떤 편견이 아닌 그들의 윤리를 공감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김제동은 잘나가는 연예인이었다. 그런 그가 검찰 수사의 그물망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아무래도 권력은 그의 사회적 발언을 달가워하지 않아 공인(公人)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도 부족하여 법정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법정에 가면 그의 무죄는 공인(公認)되지 않을까? 개그콘서트가 따로 없다. 진정한 공인은 공익(公益)에 참여하는 것을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는 누가 뭐래도 ‘염치’(廉恥)를 제대로 알고 행동했다. 그는 등록금 투쟁에 대해서도 “젊어서 고생사서도 해, 이렇게 얘기하는 건 약 올리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거부터 먼저 얘기하면 안 되죠. ‘미안하다.’가 먼저라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염치를 응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분노를 염치의 문화로 응시하는 것은 분노의 성질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주시하면서 테러리즘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에 하마스가 로켓포를 발사하면 효과가 있는가? 물으면서 ‘없다.’가 답이라고 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눈(eye)에는 눈, 이(tooth)에는 이라는 테러리즘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격분에 의한 행동’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격분이란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말하며 부정적 표현으로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31쪽)

 

이러한 폭력이라는 유감스러운 결론에 대해 저자는 비폭력에는 희망이 들어 있다고 성찰했다. 그래서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더 확실한 수단이라고 했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이든,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나는 수긍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실패다. 왜냐하면 우리는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더라도 저자의 100%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비폭력은 ‘좋은 분노’이기 때문이다. 혹은 역사학자 E. H. 카는『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지체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는 의미가 심장한 실패들이 있으며 오늘날 명백한 실패도 내일의 성공에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의 승리를 저자는 확신한다.

 

프랑스에서만 200만부가 팔린 이 책! 전 세계적으로 분노 신드롬을 일으키며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놀라며 저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때맞춰 세상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하여 비명을 지르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타이타닉 콤플렉스'인지 모른다. 타이타닉을 침몰 시켰던 것은 빙산이 아니라 빙산이 불러일으킨 공포 때문이었다.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하여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들이 훼손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의 미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분노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르동드』지는 다음과 같이 서평 머리기사를 게재했다. "레지스탕스, 현재를 감전시키다-'분노하라!'는 현재의 우리들이 적절히 포착해 이용할 대상으로서, 전달의 몸짓으로서 더욱더 관심을 모으는 책이다."(61쪽)

 

한국 사회에서도 전달의 몸짓은 형식만 다를 뿐 의미하는 바는 똑같을 것이다. '꼼수' 정치에 대해 '나는 꼼수다.'라는 정치적 윤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꼼수는 과속경쟁 사회의 페달을 밟으며 앞만 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꼼수다.'는 지속가능한 균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며 '옆'과 '뒤'도 보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며, 이는 현재의 상태를 묵인, 방조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이다. 반대로 희망은 반대다. 저자가 아폴리네르의「미라보 다리」를 인용하고 있듯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는 한 구절과 같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하며 "꼭, 그래야만 한다!" 신영복 교수가 말한 것처럼『분노하라』는 것은 책의 제호가 아니라 93세 노투사의 육성이다. 즉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는 메시지는 삶을 관통하는 묵직한 보편적 가치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분노하라! 이것은 우리의 정신을 번쩍 깨닫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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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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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경제 위기에 흔들리고 있다.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빛을 바래면서 오히려 우리는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경제 위기는 그 이전에도 꾸준히 되풀이 되어 왔다. 그럴 때마다 최선의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유효한 전략이더라도 시대적이 한계에 노출되면서 더 이상 효력을 상실했다. 현 시점에서 경제 위기의 주범인 신자유주의도 같은 궤도에 있다. 신자유주의의는 말 그대로 ‘큰 정부가 나쁘고 작은 정부가 좋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경제학으로 당면한 문제들의 해법을 찾아보면 경제 주체인 것을 두고 ‘시장’과 ‘정부’ 중에서 어느 것이 선택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에서 경제 주체는 ‘시장’이다. 신자유주의의 주장대로 집을 사면 부자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우스 푸어, 즉 집을 사면 가난해지고 있다.




이러한 역설에 대해 장하준의『국가의 역할』은 갈채를 받을 만하다. 신자유주의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그의 담대한 도전뿐만 아니라 탄탄한 구성과 시의성 있는 문제 제기는 충분히 주목할 만했다. 앞으로의 경제가 불투명하고 마땅한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경제학은 우리들이 선택해야 할 새로운 기회가 되기에 충분했다. 저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우선성’(primacy of market)이다. 좀 더 말하면 ‘정부 실패론’이며 ‘규제 완화’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을 주장하고 있다. 이제는 국가가 설계자, 옹호자, 개혁자라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국가를 경제학으로 영역으로 이끈 것은 피구의 ‘후생경제학’(welfar economicse)과 ‘케인스의 경제학’( Keynesian economics)임을 알 수 있다. 후생경제학은 자유방임적 정책이 최적의 자원 배분을 달성하지 못하는 설명하면서 ‘국가의 가격 신호’ 조작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케인스의 경제학은 자유 시장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에서도 최적의 자원 배분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실업과 경기 변동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예산 정책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 개입주의는 2차 대전 후 신자유주의의 구조로 팽창되었다. 여기에는 케인스를 비판한 통화주의(Monetarism), 제도적 경화증(institutional)과 관련된 신계약주의(new contractarianism), 관료주의의 주인-대리인 모델(Principal-Agent Model)이라는 반개입주의의 이론들이 있다.

  

그러면 신자유주의는 무엇이 문제일까? 저자는 먼저 신자유주의의 내적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일관성 없는 지적 독특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신자유주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전통간의 정략결혼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고전학파는 자신의 개입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외부경제 효과론’을 정치적인 영역에서 다루지 않았다. 다음으로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자유 시장을 논하면서 국가 개입이 없는 시장이 자유 시장인가? 라는 회의적인 물음을 던졌다. 또한 그는 시장이 실패했다고 해서 꼭 경제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시장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구성하는 수많은 제도적 매커니즘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그리고 시장과 정치의 관계를 조명하는 데 있어 그는 ‘모든 가격은 정치적이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범위를 제한하고, 자유재량 정책의 여지를 줄이며, 관료주의적 운영의 규칙을 강화하는 등의 엄격한 규칙에 기반한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기관의 설립 등을 통해 경제를 탈정치화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자원 배본에 있어 어느 정도까지는 ‘객관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정치적 정당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심층적으로 볼 때 정치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가격이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경제의 탈정치화는 사실상 민주주의를 거세하겠다는 완곡한 어법이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문제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발전과 진보를 위한 경제학’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주장들을 펼치고 있다. 가령, 경제발전을 위해서 초국적기업의 유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기술경제학(economics of technology)에 따르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기술적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외국인의 직접 투자 유치의 성패가 규제 시스템의 ‘자유도’가 아니라 그 나라 시장의 ‘규모’가 어떤가에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초국적 기업의 역할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국가의 전략적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적재산권(IPR)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지식 창출을 위한 혹은 지식을 공개하는 인센티브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래서 저자는 ‘규제의 경제학과 정치학’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고 있다. 규제의 경제학에 따르면 ‘규제가 없다면 시장도 없다’는 것이다. 정부개입이 단순히 시장을 규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규제의 정태적 효율성이 아닌 동태적 효율성의 변화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규제의 정치학에 따르면 ‘자기 이익을 대단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는 것이다. 그 보다는 도덕적 가치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부 실패론자들에게는 ‘순진한 생각’이겠지만 사람들의 가치가 사회화 과정을 통해 변화된다는 것은 권력의 남용을 통제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장하준의『국가의 역할』은 발행 연도가 2006년 11월이라 지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현재 및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경제 행위(신자유주의)로 인한 현재의 경제적 위기는 앞서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희생양’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이 미미하다면 미래의 경제 또한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어떠한 희생양이 요구될지 모를 뿐이다. 그리고 비록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국가의 역할이 제시되고 있지만 시장과 정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경제의 위기에서 보다 중요한 관심사항은 시장과 정부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통합적인 사고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 위기가 경제학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 말대로 ‘정치경제학’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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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
마크 보일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뭘까? 이러한 질문에 어렵지 않게 답하는 것이 ‘의식주’다. 돌이켜보면 의식주에 대한 고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전보다는 살기 좋아졌다고 하지만 갈수록 부담이 커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욕망은 보다 더 좋은 의식주를 충족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돈의 지배를 달갑지 않게 받고 있다. 의식주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롭다고 한다면 하루하루를 돈을 벌기 위해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삶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의식주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돈과 끊임없이 사투를 벌어야 한다. 이러한 무한경쟁에서 승자는 당연히 돈이다. 돈만 주면 다 되는 세상이 아닌가? 그러니 돈 없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의식주는 돈의 위조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프리코노미’(freeconomy)운동을 벌이고 있는 마크 보일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놀랍게도 돈의 문명에 대해 빛과 소금을 선물해주고 있다. 그의『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는 우리들 눈으로 허구 같지만 사실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여 자연과 더불어 펼쳐지고 있다. 정말로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가 가능할까? 라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우리가 돈을 위해 일한다. 돈이 이 세상을 접수하고 말았다, 라는 저자의 충고를 깊이 있게 받아 들여야 했다. 더구나 ‘화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불평등과 환경파괴와 인간에 대한 경멸을 추진하는 한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당면한 지구의 위기다. 신용경색이 구제받을 수 있다면 조지 몬비오트가 ‘자연경색’(nature crunch)은 구제 받을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이 책을 보면 자연경색은 우리들이 돈과 수많은 갈등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말한 ‘돈이 곧 빚이다’라는 은유는 매우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다. 그래서 저자는 ‘응용 영성’(applied spirituality)을 실천하고자 했다. 응용 영성이란 나의 믿음들을 물질적인 세계에적용하는 것이다. 저자는 머리와 가슴과 손 사이에 모순이 적을수록 정직한 삶에 그만큼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돈 없이 사는 삶에서 비(非)물질적인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누군가의 삶을 더욱 즐겁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신이 무엇인가를 아낌없이 준다면 그 행위는 유대와 우정을 돈독하고 그 결과 밝은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충돌이 아니라 공동체를 투쟁이 아니라 우정을 그리고 지구의 모든 종(種)들과 화합하는 것을 원했다.


저자는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라는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규칙을 정했다. 먼저 ‘노 머니’에 관한 원칙이다. 1년 동안 어떠한 돈도 받을 수 없고 지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정상’에 관한 원칙이다. 1년 동안 나 스스로 해결하며 살아가겠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전기를 켠다고 해서 그 방을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받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재능의 하나였다. 셋째, 다음 사람에게 베푸는 행위에 관한 원칙이다. ‘다음 사람에게 베풀기’(pay it forward)는 무조건적이 베풂이다. 넷째, 타인에 대한 존경에 관한 원칙이다. 다른 사람의 희망을 존중해준다면 그 사람도 당신의 생활방식을 존경해줄 것이다. 다섯째, ‘화석연료 반대’에 대한 원칙이다. 국경을 넘는 것처럼 걸어서나 자전거로 불가능한 여행일 경우만 히치하이킹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경비 선(先)지급 불가에 관한 원칙이다. 평소 예상할 수 있는 청구서에 대해 돈을 미리 지급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가 말한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라는 체험을 다양하게 공감할 수 이었다. 저자 말대로 돈을 포기한 삶의 구석구석은 황량했다. 그것은 그 삶 자체가 힘들어서 아니라 현대 서구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안락에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비지상주의가 우리의 행복을 비틀거리게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소비지상주의는 아마도 정상적인 삶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는데도 여전히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만족할 줄 모르고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데 있다. 그래서 저자가 지향하는 ‘슬로우 라이프’는 아주 소중한 삶의 지혜다. 단순히 전통적인 기술을 사용하는 경이로움이거나 환겨에 이로운 점이 많다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 보다는 자신이 사용하는 물건과 더욱 가까워질수록 감사의 마음이 더욱 커지는 덕분에 있다.


일찍이 E. F. 슈마허는『자발적 가난』에서 삶에 있어 ‘직선의 논리’와 ‘곡선의 논리’를 말했다. 직선의 논리가 많음이 곧 많음이라고 한다면 곡선의 논리는 적음이 곧 많음이라고 했다. 전자가 생존의 논리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삶의 가치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부(富)가 가져오는 문제에 있어 전자가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발적 가난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돈의 지배에 대한 비판 의식과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를 직접 부대끼며 느낀 실존적 고민은 다름 아닌 ‘베풂의 정신’이었다. 즉 아무런 보답도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베풀면 당신도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 무료로 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의 유기적 흐름이며 마법의 댄스다. 그래서 우리가 마법의 댄스와 함께 여럿이 춤을 추면서 돈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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