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 / 동아시아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움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에 분노했다. 정부의 무능력함 때문에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고 있다. 수많은 생명을 담보로 할 정도로 우리 사회 안전망이 이렇게까지 허술했는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의 구조 능력이 이 정도로 비민주적이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울리히 벡은『위험사회』에서 사회가 발전할수록 위험이 발생하는 것도 그만큼 많아진다고 경고했다. 그리고는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능력마저 비민주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위험은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평등하게 일어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위험에 따른 사고를 어느 개인만의 불행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질병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적 질병을 정부가 비민주적인방법으로 치료한다고 하면 우리는 더 이상 정부를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게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투표로 선택한 정부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에 실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정부의 주인(主人)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 순진하거나 바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가지고 오구마 에이지의『사회를 바꾸려면』을 읽었다. 저자는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행동하라!고 소리 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행진한다. 행동하라!는 말을 오래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데모 혹은 시위하는 행동으로 우리의 생존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인재(人災)가 날 때마다 정부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조용히 있으라는 완고한 주장만 되풀이 해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고 입 다물고 있기가 어렵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내보내면서 묵묵히 참고 사는 데도 인내심이 바닥을 훤히 드러낼 정도로 불편하다.

 

우리가 사회를 바꾸려는 목적은 간단하다. 지금 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러면 저자의 주장대로 사회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대의민주주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위기’는 간과할 수 없다. 투표를 통해 우리의 대표를 뽑았으나 우리의 희망이란 그 한 순간에 불과해졌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투표가 끝나고 나면 노예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데모를 하면 사회가 바뀌게 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데모의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되다보니 대중의 참여마저도 회의적이다. 투표도 안 되고 데모도 안 되었을 때 제3의 선택, 즉 무관심하면 그만이지 싶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행동하라!를 실천전략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말한 행동은 투표보다는 데모인데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데모를 풀이하면 ‘피플즈 파워’(people' power)이다. 저자가 민주주의의 역사를 분석하고 유용성을 재검토하는 것은 정치적 구호내지 행동만을 요구하는 사회현실에서는 데모의 성격이 결여되었다는 반증이다. 대중의 참여 없이는 사회를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한다. 하지만 데모의 성격이 ‘관계론’이 아닌 ‘개체론’이라고 한다면 사회를 바꿀 수 없다. 개체론에 따르면 나와 너는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관계론에 따르면 나와 너는 서로가 만들고 만들어진다. 즉,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행위와 관계와 역할의 연결체’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정치가와 관료는 악마가 아니며 그렇다고 신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데모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분명 상대방이든 자신이든 저마다 한계가 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상대방을 이해하며 대화하면서 공동으로 만들어나간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데모라는 운동에서도 이와 같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개별적인 차이를 넘어 더욱 더 관계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데모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힘이 생기며 활기가 뿜어져 나와 ‘나’를 넘어선 ‘우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단순히 정부를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데모를 벌이는 것은 생생하지도 않고 호소력도 없는 불행한 의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보다는 사회 전반의 체질을 바꿔나가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그래서 일까? 우리 또한 어느 순간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데모할 수 있는 사회를”, “대화를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화할 수 있는 사회를”, “참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참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바꾸려는 저자의 새로운 가능성과 행동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바뀔 수 있는지?를 예측해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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