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0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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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資本)이 뭘까? 자본이라는 말은 아주 익숙하게 들리지만 자본이 뭘까? 라는 질문은 아주 오랜 만에 듣는다. 자본이 곧 돈이라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우리가 짐작하고 있듯 자본이라는 단어는 그리 간단한 개념은 아니다. 홍기빈이『자본주의』에서 지적하고 있듯 자본은 하나의 수수께끼며 모호한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본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굳이 알려고 하더라도 개념이 다양하고 방대한 탓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본에 대해 궁금해 하는 식자층이 아니라면 일반인들이 자본을 운운하는 것은 자칫 반사회적인 다툼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홍기빈은『자본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땅한 이론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이론을 무리하게 내세우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본주의를 세 가지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생산, 화폐, 권력이다. 이것을 다시 생산, 화폐를 경제적인 측면으로, 권력을 정신적으로 측면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생산, 화폐가 순수 경제 논리인 반면에 권력은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소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세 가지 요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주의가 나타나게 된 역사적 원인과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저자가 말하는 ‘자본주의 이행’이다. 자본주의 이행은 중세의 장원(莊園)에서 시작되었다. 장원은 폐쇄적인 자급자족의 경제단위이며 노동 분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중세 유럽문명은 11~16세기 말에 이르는 기간 완전히 새로운 문명으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의 하나가 다름 아닌 ‘시장 혹은 화폐 경제’다. 그러나 금전에 욕구만으로 근대적 자본주의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저자가 16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울타리치기(Enclosures)’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화폐를 척도로 하는 생산성의 향상’이 전면적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성의 향상은 화폐적 이윤이 좌우했다. 가령, 오늘날 개선이라는 improvement의 어원은 ‘이윤을 낳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 말이 19세기를 통과하면서 ‘더 좋게 만들다(make better)’라는 의미로 확장되는 데 이것은 곧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게 만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윤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확대되면서 이윤의 개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산업에서는 다양한 생산 투입물들이 소비재가 아니라 다시 투입하기 위해 저축하여 쌓아놓은 ‘자재(stock)’이다. 그래서 이윤이 노동의 대가인 임금이 아니라 ‘자재의 생산성에 나온 대가’가 되었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대략적으로 소개하면서 ‘고전적 자본주의 이론들’을 앞서 말한 생산, 화폐, 권력의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생산으로서의 저본은 리카도와 마르크스의 견해다. 산업혁명을 전후로 하여 기계라는 자본은 생산과정의 주요한 주역이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 사회적 관계는 모두 돈만 주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동원할 수 있는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칼 폴라니가 말한 ‘허구적 상품’의 개념이다. 이에 대해 리카도는 ‘불변자본’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사회적 관계’로 파악했다.

둘째, 화폐로서의 자본에서는 좀바르트와 베버의 견해다. 좀바르트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더 많은 화폐를 얻기 위한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정신적인 태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제 조직’과 ‘경제 체제’를 구별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계산적 합리성은 단지 몇몇 직종이나 경제 조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원들에게서 그리고 체제 전체의 조직 및 작동 원리에 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 또한 자본주의가 단순한 화폐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고 했다. 베버는 ‘합리적인 이윤 추구’를 주장했다.

셋째, 권력으로서의 자본에서는 브로델과 베블런의 견해다. 브로델은 문명의 경제생활을 유명한 ‘삼층 구조’로 파악했다. 1층은 물질생활, 2층은 시장과 교환의 질서 그리고 3층은 자본주의다. 그는 자본을 시장 경제에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흐름을 독점하거나 뜻대로 바꾸어 그것으로 큰 액수의 화폐를 벌어들일 수 있는 권력으로 봤다. 그런가 하면 베블런은 ‘투자의 자연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공동체 전체의 생산력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유형, 무형의 계기들을 자산으로 만들어 소유하는 권력으로 봤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펴보았다. 일찍이 브로델은 “사건은 먼지”라고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너무 많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변화해 왔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개념은 먼지처럼 불투명하다. 투명하기 위해서는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자본주의』라는 개념사를 통해 먼지가 가라앉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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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1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타 악비타 시리즈,, 사회과학 시리즈치고는 개념에 대한 내용도 잘 정리되어 있어서
이 책 참 좋은거 같에요. <자본주의>편도 한 번 읽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
 
인권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
최현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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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발전하면 민주주의가 성숙될 것 같은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촛불집회를 과잉 진압하는가 하면 표현의 자유마저 침해당하는 등 여러 가지 좋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인권이 권력보다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시적으로 직장 내에서의 여성의 불평등은 위선적이다. 남성의 정신적 잔향이 아주 강하게 남아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에도 불구하고 여성 경제 활동인구는 최저 수준이다. 순전히 여성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여기저기서 감정싸움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권이 나빠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권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의 정의만을 절대화하는 한계에 부딪치면서 사회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인권(Human Right)이란 무엇일까? 최현의『인권』은 이 물음에 대해 개념사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인권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인권의 역사를 다루면서 인권에 대한 인식을 넓혀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권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확대되었는지 깊이 있게 답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로 정의되는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며 오늘날 ‘지구적 가치’로 전환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인권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을 관찰하면서 저자는 아직까지 당위적인 가치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은 현실에 바탕을 둔 시민권(Citizen Right)을 통해 인권을 바로 보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인권이 도덕적, 당위적, 추상적인 권리라고 한다면 시민권은 제도적, 법적, 현실적인 권리였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 문제를 정의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권이라는 당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여 시민권과 연계하여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시민권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의 고전적 시민권에서 근대의 보편주의적 시민권(온전한 시민권)으로 그리고 현대의 사회권으로 확대되었다. 인권과 달리 시민권에는 ‘의무와 권리가 함께 한다,’는 원리에 근거한다. 그러나 시민권이 사회를 통합하는 과정의 이면에는 여전히 개인주의-보편주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 논리도 빼놓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소수자 집단들은 여전히 필요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의 불평등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던 아이리스 영(Iris Marin Young)의 ‘집단 인지적(group-differentiated) 시민권’은 공동체 방안이다. 그녀에 따르며 더욱 공정한 시미권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것은 ‘사회 경제적 지위 때문에 온전한 시민권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심리적, 신체적 정체성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 그녀의 견해였다. 저자도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 개인주의적 보편주의라는 부당한 불평등을 줄여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전망했다.

이 책을 통해 인권에 대한 욕구는 대하여 이것을 실현시키는 시민권 제도의 개선이 필요한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인권에 대한 편향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권을 확대, 심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국민적 시민권에서 지구적 시민권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소수자들에게 대한 관심이 절실할 때이다. 그래서 다문화 시민권의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인권의 회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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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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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삽질공화국이 대한민국의 4대강을 파헤치고 있다. 오로지 인간만을 위한 경제이다 보니 4대강 하나쯤 희생양이 되는 것쯤이야 ‘나쁜 사마리안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4대강이 아니더라도 무분별한 개발 독주는 맹렬하게 확산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4대강만 특별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라는 궁색한 변명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러한 폭력적인 방식은 한 나라의 경제성장의 지표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GNP에서 GDP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GNP는 한 나라가 소유한 생산요소를 국내외의 생산활동에 투여한 대로 받은 소득을 산출하는 ‘소득지표’다. 반면에 GDP는 국내에 있는 모든 생산요소를 결합하여 만들어낸 최종생산물의 합인 ‘생산활동지표’다. 거시경제에서는 GNP가 경제성장의 지표였으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GDP의 체계가 되었다. GNP가 국내경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세계 경제가 빠르게 세계화로 변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시장을 개방하면 한 나라의 경제 문제는 시장의 자연적인 힘으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시장자유주의가 필수다. 이른바 탈규제, 최소국가론이라는 구조조정을 통해서 모든 나라가 ‘하나 밖에 없는 최선의 모델(one-best way)'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의 장밋빛 미래는 전 세계의 모든 국가는 비슷한 정도로 성장하고 부유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낙관적인 기대와 달리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나 밖에 없는 모델이란 미국식 자본주의를 말한다. 이 모델은 신자유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에 있어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는 획일적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칼 폴라니가『거대한 전환』이라고 부른 대변동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생겨났다. 즉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는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1980년 대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본격화되면서 세계는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래서 세계는 시장을 전폭적으로 개방하는 ‘우월한 자본주의’와 시장 개방을 억제하는 ‘열등한 자본주의’가 있을 뿐이라고 우려의 목소리가 팽배하고 있다.

장하준은『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하여 가장 명료하게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만큼 우월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 노엄 촘스키가 이 책을 ‘현실로서의 경제학’이라고 추천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충돌이 불공평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독일식 자본주의를 주장했던 리스트는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고 비난했다. 즉 정상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올 수 없도록 자신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말했듯 미국식 자본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위반한 결과였다.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금으로 국가가 경제시스템을 장악하면서 오늘날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들에게는 자유무역을 일관되게 실천해온 최상의 국가라고 하면서 유인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악순환을 부각시키고 있는『나쁜 사마리아인들』의 내용을 보면 ‘세계화에 관한 신화와 진실’을 알리는 데 있다. 저자에 따르면 토머스 L 프리드먼의『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다시 읽는데서 시작하고 있다. 토마스 L 프리드먼은『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새로운 글로벌 패션을 주장했다. 냉전 시대에는 인민복, 네루 의상, 러시아의 가죽 모자와 가죽 코트가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는 오직 황금 구속복(golden straitjacket)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황금 구속복은 곧 세계화 시대를 규정짓는 정치, 경제적 의복이었다.

저자는 황금 구속복을 입고자 하는 나라는 16가지 황금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거나 인하할 것, 외국인 투자를 저해하는 규제를 폐지할 것, 공기업과 수도, 전기, 가스 등 국유 사업이나 공익사업을 민영화할 것, 자본 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것 등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황금 구속복을 입어야 세계화가 덫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만약 방직기 제조사로 출발한 도요타가 프리드먼 말대로 황금 구속복을 입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렉서스를 수출하는 국민이 아니라 누가 뽕나무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싸우는 국민이 되었을 것‘이라고 비유한 저자의 통찰력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이쯤에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세계화의 상징이 된 렉서스와 반세계화의 상징이 된 올리브나무의 역학 관계다. 돌이켜보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는 불가분의 관계다. 렉서스인 동시에 올리브나무여야 한다.

다음으로 부패하고 비민주적인 나라에는 등을 돌려야 하는가? 에 있다. 저자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부정부패를 부당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을 통해 부정부패를 줄일 수 있다고 했지만 ‘시장의 힘이 지나치게 작아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부정부패의 원칙을 간과한 나머지 실패하고 마는 것을 역설적으로 경고했다. 그리고 시장과 민주주의에 있어 결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는 타고난 짝이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1인 1표라고 한다면 시장은 1달러 1표의 원리였다. 이로 인해 ‘강한 긴장’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끝으로 문화는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가? 를 살폈다. 보통 가난한 사람들의 특징으로 게으름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저자는 ‘국민들이 게을러서 나라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게으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경제와 문화의 관계에 있어 경제를 발전시키기 전에 먼저 문화 혁명을 단행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앞서 말했듯 경제 발전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크며 문화의 재발명에 있어 그를 뒷받침하는 경제 구조와 제도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속셈을 파악하게 되었다. 세계화라는 승자독식 게임에서 그들은 줄기차게 ‘경기장을 평평하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그러나 저자는 ‘기울어진 경기장’이어야 한다고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경기장의 높은 쪽이 개발도상국이고 낮은 쪽이 선진국이어야 한다. 그래서 평평한 경기장에서는 불공정했던 게임이 오히려 기울어진 경기장에서는 공정해진다는 것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 있다. 조지프 스티클리츠가 “GDP가 보여주는 숫자 너머를 봐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같이 일하고 주말에도 쉬지 않는다면 GDP는 증가하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세계화를 단순한 성장 논리만으로 질주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그만큼 삶의 질을 나타내는 ‘인간개발지수(HDI)’는 밑바닥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HDI는 아마르티아 센 교수의 ‘역량’ 개념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행위자가 자신의 목적, 지향, 가치 등을 실제로 수행할 수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세계화라는 자본주의의 단일성이 가진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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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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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경제학』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기존의 경제학은 말 그대로 경제라는 수치내지 성장이라는 양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경제의 문외한으로써는 어렵고 지루했다. 반면에 ‘괴짜 경제학’은 달랐다. 경제학자인 노르베르트 해링(Norbert Haring)의 ‘이코노미 2.0’이라는 개념처럼 일상의 경제학을 알기 쉽게 파헤쳤다. 그래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상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교 교사와 스모 선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라는 것이다.

사회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괴짜 사회학』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도시의 빈민을 연구하던 대학생일 때 시카고의 흑인빈민 거주 지역인 레이크 파크 주택단지에서 설문조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명의 위협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그곳에서 만난 마약 판매 갱단인 블랙 킹스의 보스였던 제이티를 흑인으로 불러야 할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답은 놀랍게도 ‘깜둥이’였다.

이처럼 흑인 빈민을 연구했던 그는 민족지학(民族誌學)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흔히 사회학 분야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한 가지는 양적, 통계학적 기법을 이용하는 입장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삶을 연구하는 입장이다. 앞서 말한 민족지학은 후자에 속했다. 다시 말하면 흑인들의 복잡한 삶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흑인 빈민 주택 단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눈으로 보게 된다. 마약, 섹스 그리고 싸움질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지역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이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것을 보게 된다. 갱단과 지역 주민들에게는 도덕주의보다 실용주의가 우세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이 주택단지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 편견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은 서로가 공동체라고 느끼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돕고’ 살았다. 이른바 자경(自警)주의적 정의로운 사회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안타까운 현실은 위기 그 자체였다. 온갖 사회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은 가난했다. 더구나 공공기관의 부패는 역설적이었다. 그곳에서 경찰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해도 오지 않았다. 대신에 ‘경찰도 하나의 갱단이야.’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면서 그들에게 시달리는 중압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흑인 빈민들의 진짜 얼굴을 마주대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 말대로 ‘깜둥이면서 가난한 것은 어떤 느낌인가?’라는 질문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자리를 얻을 수조차 없다는 절망감이 그들의 희생을 강요하게 했다. 이런 고통 속에서 ‘왜 가난한가, 왜 이렇게 범죄가 많을까.’ 반문하는 흑인 여성에게서 그들의 깊은 상처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럼, 이제는 백인을 연구하겠나?’라는 날선 충고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사회학이라는 희망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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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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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민심은 천심이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촛불을 든 민심은 무엇일까? 오스트리아의 시인 트라클은 “촛불은 높이 타오르고 그서의 주홍빛은 불끈 일어서다.”라고 노래했다. 촛불은 타오른다. 그것도 수직성으로 타오른다. 설령 한순간 바람 탓에 넘어져도 다시 수직성이다. 촛불이 하나 둘이 아니고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이면 그것은 마치 베토벤의「운명」교향곡같다. 

얼마 전 촛불 같은 책을 통속적으로 들리겠지만 운명적으로 만났다. 바로 Vita Activa(비타 악티바: 실천하는 삶) 시리즈 중 하나인 하승우가 지은『아나키즘』을 꼼꼼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촛불 민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우선적으로 아나키즘이 나쁜 사상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게 한다. 흔히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국가)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은 정부를 말한다. 한마디로 정부의 권력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주목하며 저자는 아나키즘을 ‘반강권주의’라고 말한다.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세상은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었다. 그 보다는 내가 합의한 질서에 따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데 있었다.

일찍이 루소는『사회계약론』에서 이상적인 국가 모델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주권자와 국가의 관계는 연비례의 외항 관계로 나타낼 수 있으며 그 비례 중앙이 정부이다.’는 것이다. 가령, 주권자를 S, 국민을 P, 정부를 G로 하여 공식을 만들면 S:G=G=P 즉 S×P=G²이다. 이 식의 가운데 항은 정부이고 그 제곱이 주권자와 국민의 적과 같으므로 주권자와 국민의 관계가 변하면 정부의 힘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권자를 1로 하고 국민을 16으로 하면 정부의 힘은 4가 된다.

하지만 오늘날 국가 지상주의에서 주권자의 힘에 따라 정부의 힘이 좌지우지 되고 있다.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세상에서 민심은 외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아나키즘은 크로포토킨의 표현대로 “현실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부 없이도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유로운 협약, 자유로운 조직은 저 해롭고 값비싼 기구를 대신해서 더욱 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하나 더 변명해보면 바로 테러리즘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희생양일 수밖에 없다. 국가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철저하게 탄압한 결과다. 폭력이라고 해서 모든 폭력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양심을 파는 것이 아닌 당당한 행동은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책임이다.

바야흐로 촛불 민심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를 나타내고 있다. 촛불은 든 사람들은 약자(弱者)다. 그러나 무능하거나 무기력한 것은 아니다. 약자들이 단결할 때 세상을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촛불은 아나키즘으로 불끈 일어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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