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법(法)을 수학으로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려운 수학 문제라고 해도 숫자와 공식으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법도 충분히 그럴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세상 문제라고 해도 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곧 법의 올바른 정신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의문으로 넘쳐난다. 법이 있음에도 오히려 무법천지 같다. 이유인즉 법전의 법과 현실 속의 법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법전의 법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현실 속의 법은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이어야만 하는 법이 ‘편한 진실’만을 추구한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권석천의 칼럼을 담아낸『정의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편한 진실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알게 되었다. 저자 말대로 편한 진실이란 정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편한 진실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대신에 추상적, 관념적으로 의심하여 사건의 진실을 불투명하거나 왜곡한다. 이러한 편한 진실 때문에 우리는 분노하게 된다. 억울하다고 하며 법의 심판자에게 양심에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일 수밖에 상황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양심에 호소해야만 하는 걸까?

 

 

그래서『정의를 부탁해』는 불편하다. 우리 사회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대한 진실의 이면에는 정의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보수와 진보의 양대 산맥으로 분열된 싸움이 피곤할 정도로 반복될 뿐이다. 지금 이 시각 국정교과서에 대한 찬반 논쟁도 마찬가지다.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면 무조건 종북(從北)이 되고 마는 불평등하고 불합리적인 사회. 이렇게 진실이 민주화에 역행하거나 은폐되거나 사상 통제에 갇혀 버린 것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복잡해졌다. 무엇보다도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며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을 더 이상 애기한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누구도 정부의 공권력(公權力)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이든 국가 일을 하는 정부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권선천의 시각은 다르다. 즉,

 

 

나는 공권력이란 말이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權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公)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私)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p75).

 

 

결코 공(公)이 민(民)을 아래에 두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 제1조 제2항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이런 시대에 정부의 공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또한 일상적으로 사회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정부의 권위주의적인 발상은 삼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하여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을 만큼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한다. 세상이 지랄 같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숨길 수 없다. 그러면서 ‘정의를 부탁해’ 한다. 단지 우리가 바둑판의 미생(未生)처럼 아직 살아있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저자 말대로 ‘사춘기 불변의 법칙’ 때문이다. 정의를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나이만을 따져서 사춘기가 아니라고 말할 까닭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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