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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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신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을 과연 정복할 수 있을까?  

- 폴 발레리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근대에 대한 수많은 해석 중에서도 ‘액체 근대’는 낯설다. 하지만 막상 책장을 넘겨보면 근대를 움직이는 새로운 힘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사회학적 관점으로 근대의 다채로운 향연을 만끽하고 있다. 시와 역사 다음으로 사회학을 제 3흐름이라고 하는 보는 저자는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 그의 명제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근대를 20세기 근대와 21세기 근대로 나눈다. 20세기 근대를 근대라고 했을 대 21세기 근대는 이차 근대, 탈근대 등등 여러 가지 용어로 쓰여 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저자는 감각적이면서도 쉽게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고체 근대가 견고해서 무거운 근대라고 한다면 액체 근대는 유동적이어서 가벼운 근대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 정신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고체와 액체라는 물리적 특성을 통해 파악한다. 그래서 인간 정시이란 고체에서 액체로 되는 과정을 통해 충분히 정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유동성이라는 액화 과정은 견고한 것들을 녹여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한다. 어쩌면 창조라는 것이 결국에는 다시 고체화되겠지만 얼마든지 창조적 파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액체성 즉 유동성(流動性)의 가장 큰 특징이다.

가령, 문명의 역사를 '유목민에 대한 정착민의 승리‘의 특징이라고 하였다. 유목민이 원시적이며 자연적이며 비공간적이라고 한다면 정착민은 문명적이며 지배적이며 공간적이다. 정착민이 공간에 대한 지배를 통해 문명화를 가속화시키고 고체 근대를 포드주의적 세계로 결합시켰다. 포드주의적 세계는 생산자 사회이며 규격화된 시간 아래 노동을 지상에 묶어 두었다. 곧 육체화된 노동이며 개인의 자유는 통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액체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목민의 가치가 새삼스럽게 조명되고 있다. 유목민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공간의 지배는 무의미하다. 그 보다는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화두가 되면서 ‘더 빠른 것과 더 느린 것 사이의 게임’이 되었다. 휴대폰의 등장이 말해주듯 소비자 사회에서는 즉시성(卽時性)이 삶을 주도하고 있다. 공간이라는 지속성보다는 시간이라는 순간적인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탈 육체화된 노동인 소비자 사회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인은 사회로부터 해방되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액체 근대에서 개인화의 역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사회에 복종하는데, 복종은 개인의 해방 조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화는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모호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법률상으로 시민이 되지 않고서는 실제상 개인’으로 변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액체 근대』에서 발견한 독특한 사회 현상은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의 차이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차이는 ‘이성이 완전히 잠에서 깨지 못하거나 다시 잠에 빠져들 때 생겨났다.’라고 했다. 이성이 완전하다면 인간적 삶은 견고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 이성의 힘을 해방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 해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판단력 차이에서 오는 공동체 사회의 ‘안전 부재’에 대한 부작용을 성찰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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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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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Homo Sspiens)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로 생각의 잔가지를 잘라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데카르트를 볼 수 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럴 때 생각은 만만하지 않다. 생각은 양식이며 에너지다. 아주 일상적이어서 우리가 굳이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생각의 무감각과 생각의 감각은 다르다. 전자가 생각의 권태라고 한다면 후자는 생각의 쾌락이다. 전자가 생각하는데 불편하지 않는 반면에 후자는 오히려 불편하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의 별종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별종이란 바로 이현우의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나오는 호모 사피엔자(Homo Sapienza)이다. 호모 사피엔스와 인플루엔자의 합성어인 호모 사피엔자는 제목에 나와 있듯 인문학자에 가깝다. 우선적으로 저자는 수잔 손택이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를 인용하고 있다. 인문학자는 폭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인문학자는 로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로쟈는『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며 살인자다. 살인자에 대한 변명을 카프카의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는 말을 빌려보면 좀 더 의미가 있다. 견고한 학문을 깨트리는 것 못지않게 새로운 뭔가를 창조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로쟈만의 인문학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곁다리 인문학자’의 세상 보는 법이 매우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이 책을 몇 장만 읽어보면 금세 곁다리의 놀라운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책읽기와 종횡무진 경계를 넘나드는 명쾌한 비평은 확실히 뒤샹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뒤샹의「자전거바퀴」는 자전거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리 이동’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곳(도구)에서 저곳(이미지)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것이다. 혹은 저자 말대로 ‘아직도 내가 알아야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더 관심으로 저공비행하는 것이다.

가령, 로쟈는 영화「나쁜 피」에 나오는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두려운 사랑의 흔적을 찾아내고 있다. 순간은 시간적이면서 동시에 반시간적이다. 이로 인해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감성적 사랑이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라면 초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제어되지 않는다. 그래서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죽음을 무릅쓰는 사랑인 탓에 숭고하고 두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로쟈의 유쾌한 철학은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텐가?”라고 도발적인 물음을 던졌던 니체의 사유와 가깝다. 남성의 진리는 어린아이며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도둑질 한 것이다. 반면에 여성의 진리는 위버멘쉬(초인)이며 바다며 자궁이다. 전자가 “이게 다가 아니야.”라는 이데아 철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이게 다 예요.”라는 아줌마 철학이라고 한다. 즉 이데아 철학이 현실 너머라고 한다면 아줌마 철학은 충만한 현실이다.

로쟈에게 니체가 아줌마 철학자였다면 괴물 같은 지젝은 대중적인 철학자였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젝주의자’라고 주저하지 않는다.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라는 지젝의 주장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환상’이 눈여겨 볼만 했다.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이 ‘앎’이 아니라 ‘행함’에 있다는 것이다. 지젝은 변기의 물을 내리는 하찮은 일에서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지 설명한다. 그리고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화장실에 들르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이데올로기에 몰입하게 된다고 한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그야말로 잡학(雜學)하고 다식(多識)하다. 누군가 뭘 물어봐도 막힘없이 대답하고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책 읽기가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모두가 아는 것에서 모두가 모르는 것’으로 뒤집어 본다. 그래서 이 책은 즐겁게 읽혀지는 좋은 번역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원저나 다른 언어의 번역본을 참조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게 한다.

그런가하면 시오랑이 말한 ‘눈물의 일반이론’을 웅숭깊게 감싸고 있다. 어려움이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철학의 무능력을 부정하면서 그의 글쓰기는 쉽고 명쾌하며 무엇보다도 고전(古典)이다. 결과적으로 철학이 메마른 시대에 이 책은 대중지성을 적시는 단비와 같다. 고리타분하고 변화의 가능성이 희박한 고체(固體)라는 학문의 빈틈을 파고든다. 이것은 마치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대로 유동하는 액체(液體), 유동하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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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에쎄 시리즈 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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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있다.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호에서 펼쳐지는 불멸의 사랑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빙산과 충돌하면서 타이타닉 호는 이제까지 안전했던 모든 것들이 와르르 부서지고 만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랑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는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남자 주인공의 잭의 가치 있는 죽음 때문에 이들의 사랑이 더욱 돋보인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타이타닉>은 빙산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빙산 때문에 타이타닉 호는 침몰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침몰하지 않았다. 만약 빙산이 아니더라도 이것과 파괴력이 다를 바 없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빙산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 것은 폴란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의『유동하는 공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와 끊임없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빙산을 공포라고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빙산은 그 자체의 물리적인 힘은 고정적(solid)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빙산이 불러일으키는 정신적인 불안감은 유동적(liquid)이라는 사실을 파헤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주장하는 타이타닉 콤플렉스, 즉 유동적 공포다.

바우만은 공포를 세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1차적 공포(바우만의 2차적 공포에 비유)와 2차적 공포 그리고 유동적 공포다. 1차적 공포는 우리의 신체와 재산을 위협하는 공포다. 여기에는 사회질서의 지속성과 가능성을 위협하거나 사회적 지위 및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도 포함된다. 다음으로 2차적 공포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순환하며 파생되는 공포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경험에서 나오는 침전물이며 이에 반응을 보이게 되는 자가 발전하는 공포다. 끝으로 유동적 공포는 언제 어디에나 있는 공포며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공포다.

이 책은 유동적 공포의 여러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죽음의 공포에 있어 한 번 걸러낸 죽음이 아니라 두 번 걸러낸 죽음이다. 자크 데리다의 표현대로 죽음은 한 세계의 종말이며 회복 불가능성이다. 이때 전자는 나와 너의 세계의 종말이며 후자는 사람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종말이다. 또한 전자가 질병이나 노쇠에 따른 자연적인 죽음이라면 후자는 살인, 범죄라는 인위적인 죽음이다.

그리고 악과 공포는 말 그대로 불가분의 관계다. 한나 아렌트는『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파헤치고 있다. 우리는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과 이웃으로 지내고 있는 탓에 그들을 식별한다는 것은 어렵다. 아니 무감각하다고 해야 옳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 되었을까?

바우만은 적당한 조건이라는 것을 비판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적당한 조건은 칸트가 말한 인간의 이성에 따른 보편적인 입법이 아니었다. 칸트는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하지 마라.” 고 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에게 살인은 자기 자신에 맞는 이중 잣대였다. 규칙에 복종한 아이히만은 근대적 관료의 완성품이자 희생자였다.

이밖에도 통제 불가능한 것과 공포에서는 이해 불능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공포에서는 부정적 세계화를 경고하고 있다. 특히 통제 불가능한 것과의 공포에 있어 그는 태풍이나 테러 같은 천재든 인재든 피할 수 있는 재난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결국에는 도덕적인 문제 즉 도덕 지체에 따라 무방비 상태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데 유동적 공포가 노골적으로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예리하면서도 낯선 유동적 공포에 전율하게 된다. 한마디로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유동적 근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유동적 근대는 저자 말대로 끊임없는 의심과 휴식이 없는 경계의 삶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가 빠르게 분열했다가 이루어진다. 더 이상 이성이 공포의 탈출로가 아니라 단지 우회로(detour)에 불과했다.

이러한 바우만의 따끔한 충고와 달리 공포에 맞서는 유일한 치료법은 단순하다. 공포의 실체를 바로 보는 것이다. 앞서 말한 <타이타닉>에 나오는 잭의 죽음은 분명 효과가 있다. 개인적 불멸성은 삶을 치열하게 살 것을 주문한다. 따라서 공포가 출렁거리는 시대에서 그람시가 말했던 ‘역사적 행위자’로써 문명화의 부작용으로 심각한 위기에 놓인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도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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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들 - 셰익스피어에서 월트 디즈니까지, 위대한 예술가 17인의 창조 전략
폴 존슨 지음, 이창신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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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찍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세상에는 고군분투대신 나태와 오만함에 몸을 맡겨 버리는 천재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한때 면도날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번쩍임과 예리함을 잃어버린 채 아무 의미도 없는 쇠붙이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폴 존슨은『창조자들』에서 위대한 예술가 17명의 특혜 받은 삶을 조명하고 있다. 제프리 초서, 알브레히트 뒤러, 파블로 피카소, 월트 디즈니 등등 한 번 들어도 결코 뇌에서 사라지지 않을 쟁쟁한 인물들이다. 저자는 그들의 색다르고 낯선 만족감으로 가득 찬 흥미진진한 삶이라는 예술가들의 지적 궤도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면도날이 될 수밖에 없는 뒷 얘기들을 치열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렸다. 

먼저 영어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가장 창조적인 인물은 제프리 초서였다. 영문학의 창시자며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시인의 자리라는 곳에 가장 먼저 시신이 안치된 사람이 바로 초서였다. 그가 어휘 8000개를 구사한 창조성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사건을 두루 다루면서 그것을 표현하는 어휘까지 새로 만들었다.

그런데 초서보다 약 24000개의 어휘를 구사했지만 정작 새로 추가한 단어는 1000개가 넘지 않았던 셰익스피어를 인류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보고 있다. 초서와 달리 마을에서 장갑을 팔았던 아버지의 평범함에서 벗어나 ‘햄릿’이라는 인물을 창조한 분별력에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개성 강한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영국문학에서 가장 창조적인 이들과 함께 나란히 어깨를 같이 할 수 있는 예술가는 다름 아닌 제인 오스틴이었다. 작품이 불과 여섯 편에 불과했지만 200년 동안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었다. 괜찮은 아가씨 즉 미모가 보통이었던 오스틴의 작품에는 악마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앞서 말한 두 거장에는 자기만의 악마를 품고 있으며 내부의 악마가 타오르기 시작하면 곧 마법이 펼쳐졌다. 하지만 오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현실적이며 독창적으로 창조했다.

이와는 다르게 마크 트웨인의『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극과 극이다. 한쪽에서는 ‘쓰레기 중에 쓰레기’라고 했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이제까지 나온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했다. 마크 트웨인은 놀랍게도 공인된 이야기꾼이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이야기를 잘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야기 잘하는 법을 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끝으로 대단히 광범위한 면에서 창조적인 예술가였던 빅토르 위고는 무식한 천재라는 것이 귀를 기울이게 했다. 그의 지적 수준이 너무나 평범하고 진부하다는 것이다. 그는 엄청난 양의 책을 탐독하면서 동시에 마구 잡이로 흡수했다. 이로 인해 그는 언어를 감지하는 귀가 발달했고 어느 누구보다도 언어를 사랑한 재능이 위대한 예술가가 되게 했다.

이렇듯『창조자들』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창조성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있다. 창조성의 다양한 해석 중에서도 오스틴을 말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중에서도 무엇을 가장 잘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줄 아는 뛰어난 심판관’에 공감했다. 가령, 패션 역사에 있어 두 명의 거장 즉 발렌시아가와 디오르는 단춧구멍으로 서로를 심판했다. 디오르가 만든 드레스 등에 작은 단추가 36개나 달린 것을 보고 발렌시아가는 24개면 충분하다고 했다. 발렌시아가는 바느질 솜씨가 좋은 양재사였다면 디오르는 바느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디자이너였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심판관이 앞서 말한 면도날과 쇠붙이의 결정적 차이였다. 저자 말대로 우리 역시 창조자들이다. 다만 위대한 창조자들과 달리 선천적(先天的)이다. 선천적에서 위대함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조적 용기가 절실하다. 또한 두 가지 교양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두 가지 교양이란 스노우가『두 문화』에서 말한 예술과 과학을 말한다. 사실상 창조적 사고에 있어 예술과 과학은 불가분의 관계다. 좀 더 말하면 자크 라강이 “모든 욕망은 은유다.”라고 했듯이 폴 존슨은 “모든 도식은 은유다.”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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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단련법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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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0년 엘리자베스 뉴턴은 ‘두드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간단한 놀이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심리학 박사가 되었다. 두드리는 사람이 어떤 노래의 리듬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면 듣는 사람이 이 노래의 제목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두드리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정답을 맞힐 확률을 50% 예상했지만 듣는 사람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러면 왜 이런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을까?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지식의 저주’를 문제 삼는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두드리는 사람은 머릿속에 익숙한 선율이 흐르는 반면에 듣는 사람에게는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노래의 제목을 알게 되면 두드리는 사람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저주’였다.

지식의 가치를 다루는 데 있어 엘리자베스 뉴턴 못지않게 지(智)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저작들이 국내에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쿄 한복판에 그가 세운 고양이 빌딩이 보통의 일반인에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 빌딩 전체가 서가(書家)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의『지식의 단련법』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智)의 소프트웨어’라는 원제에 나와 있듯 이 책은 지식의 입력과 출력에 관한 저자의 독특한 전략이 사뭇 인상적이었다. 저자 말대로 이런 전략은 수많은 시행착오에서 얻어진 결과였다. 덕분에 우리는 쓸데없는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입력에 있어 ‘지적 생산형’과 ‘지적 생활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자가 입력이 수단이라면 후자는 입력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러한 차이는 정보를 가진 의미를 이해하면서 입력하는 데 있다. 바로 이렇게 해야만 정보가 지식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목적선행형 독서법을 지향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독서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출력에 있어 좋은 문장을 쓰는 실용적인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면 매끄러워질 때까지 과감하게 쳐내라고 한다. 불필요한 수식어를 덜어내고 연문(連文), 복문을 단문화해서 가능한 단순하고 짧은 문장으로 만들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인 방법에 앞서 좋은 문장을 많이 읽으면서 좋은 문장에 대한 감각을 익히라고 당부한다. 문장의 본질적인 가치는 어떻게 쓰여져 있는가보다 무엇이 쓰여져 있는가, 라는 것의 그의 문장론이다.

이 밖에도 입력과 출력 사이에 지식을 단련하기 위한 방법들이 귀를 기울이게 했다. 즉 목적 없는 스크랩은 그만둬라, 방대한 분량의 잡지를 독파하라, 문체는 옷에 불과하다, 내면적 상상력을 키우라, 무의식층의 거대한 잠재력을 파악하라,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연역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일본 최고의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을 섭렵하게 된다. 그리고 1984년에 출간된 이 책이 여전히 웹 2.0 시대에도 유효한 것은 아무래도 “독서는 정신적인 식사”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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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4-06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아님, 오랜만이에요.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이군요.

오우아 2009-04-11 00:38   좋아요 0 | URL
혜경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정말이지 오랜만이네요..
꽃들이 예쁜 4월..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여전히 저는 책 욕심때문에 제 할일 못하고 있는... 늘 감사합니다..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