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와 관련된 상당히 논리적이며 통찰력 있는 글 같아 옮겨 본다. 핵심음 중간 소제목인 '낙태로 내몰고 낙태를 금하다'라는 글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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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플로마티크 19호(2010.4)  낙태를 줄이려거든 낙태를 허하라  

낙태는 여러 겹에 싸여 있는 미스터리이다. 한국은 낙태가 가장 많은 국가군에 속한다지만, 낙태가 불법인지라 그 전체 수와 동향은 베일에 싸여 있다. 전체 낙태 수는 많게는 연간 150만 건 혹은 60만 건, 적게는 35만 건 등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대다수 낙태는 모자보건법상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사유에 해당하지 않기에 형법상 범죄에 해당하지만, 형사상 기소되는 예는 매년(1980~2002) 10건 내외이며, 이 중 유죄판결을 받는 예는 드물다. 인식조사를 보아도 낙태가 불법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이다. 이렇게 법과 낙태 현실이 괴리되어 있는데도 입법부는 낙태 관련 법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낙태는 배우자가 있는 한국 여성이라면 전체의 절반 내지 적어도 3분의 1 정도가 ‘보편적으로’ 경험함에도, 한국에선 낙태를 옹호하고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는 담론이나 사회운동은 별로 없다. 낙태를 하거나 당하는 여성의 경험은 불법이기에 말해지지 않고 지지되지 않으며, 공적 사안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여성의 낙태 경험은 무서울 정도로 침묵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여성에게는 사실상 낙태의 자유가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낙태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한국의 만연한 낙태는 한국 여성의 신체적·성적 자기선택권의 발현인가. 한국에서 이 많은 낙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낙태와 ‘출산전체주의’ 국가  

 최근 ‘프로라이프의사회’는 한국의 높은 낙태율을 저출산의 맥락에서 제기해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들을 고소·고발하면서 엄정한 법의 집행을 요청하고, 생명의 숭고함을 주장하며, 가엾은 태아의 생명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들은 현재 모자보건법이 임신중절의 합법적 사유로 인정하는 강간으로 인한 임신마저, 그리고 합법적 사유로 인정치 않는 10대의 임신 역시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태도를 가진 것 같다. 21세기 한복판에서 남녀의 성교는 모두 출산으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출산전체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것인지 우려된다. 과연 낙태를 금지하고 엄격히 처벌하면 낙태가 줄어들까. 나아가, 낙태가 근절되고 출산이 늘어나는 것만이 바람직한 목표인가. 국민이, 특히 미혼 여성이 성교를 하지 않으면 낙태는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낙태 문제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생명론·출산론·성성(Sexuality)론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먼저, 여성의 낙태 결정을 단지 ‘생명권’에 반하는 ‘선택권’으로 관념하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널리 알려진 미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법정 의견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가는 의학·철학·신학 분야의 주제로서 이들 전문가가 합의에 도달할 수 없다면 법원은 이에 답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고 선언했다. 이런 물음에 누구도 간단히 답할 수 없음에도, 낙태에 대해서는 반생명적이라고 잘라 말하는 태도가 오히려 오만하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체외수정이 이루어지고, 인공적으로 다수의 수정란이 배양되며, 자궁에 이식되지 않은 채 동결 보존된 수정란이 존재하며, 다태아 임신 때 선택적 태아 감소술이 행해지는데, 이런 생명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


▲ <거리의 여성>, 2001-돌로레 마라  

 인간은 언제나 모체 안에서 잉태되고 형성되고, 태어나서도 취약한 존재로서 지속적인 보살핌을 받아야 사람 구실을 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그렇다면 자녀를 낳기로 한 여성과 남성의 선택, 아동을 양육해온 대다수 여성의 노고에 대해서 우리 사회와 국가는 ‘생명 존중성’을 인정해준 적이 있는가. 잉태보다 훨씬 더 길고 복잡하게 이루어지는 보살핌 속에서만 가능한, 과정(Becoming)으로서 생명이 자궁 안에서 수태되는 수정란으로서의 생명과 견줘 지나치게 도외시돼온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 국가와 시민, 더 나아가 서양과 동양이라는 비대칭적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잉태됨으로써 존재하는 생명뿐 아니라 끊임없이 재생됨으로써 존재하는 생명관이 요청된다.  

 더 나아가, 몸속 태아와 임부를 마치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는 지금의 선택권 대 생명권 구도가 허구적이다. 임신한 여성은 한 생명 안에 두 생명을 키우는 신비하고 생산적인 경험을 하는데, 이러한 ‘연결성’이 임신 종결 결정에서 완전히 부재하는 것일까. 말할 나위도 없이 임부는 자신과 아이의 장래를 예견하고, 양육 환경을 돌아보고, 불가피한 사유에 의해 임신 종결을 결정한다. 그렇게 ‘믿어준다면’ 이 역시 아이와 자신의 복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모성적 사유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낙태를 바라보는 ‘아이의 생명 대 임부의 생명’과 같은 이분법이야말로 아이와 어머니의 연속성에 대해 알지 못하는 ‘비모성적 사유’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낙태로 내몰고 낙태를 금하다  

 낙태한 임부를 비난할 뿐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이 사회는 임부의 임신 종결 결정과 그 이후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어렵다. 우리 형법의 낙태죄 보호법익은 태아의 생명을 주법익으로, 임부의 생명과 신체를 부차적 법익으로 한다. 낙태(즉, 출산 여부)에 걸린 여성의 이익과 낙태를 하지 않아서 당할 여성의 불이익을 그저 임부의 생명·신체라고 보는 법의 태도에서 볼 때, 여성의 법익에 대한 법리가 얼마나 미진한지, 모성과 아이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를 절감한다.  

 나는 한국 여성의 대다수 임신 종결 결정은 더 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감수하는 행위로 이해한다. 한국에서 청소녀, 미혼·이혼 여성 등 법적 배우자가 없는 여성은 출산하지 않도록 규율되고 있다. 이 여성이 출산했을 경우, 그 아이는 ‘사생아’(私生兒)로서 한 국가의 정상적 성원에서 배제된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게 사생아 지위를 주면서까지 그 어려운 출산과 양육의 길을 가려 할 것인가.  

 비혼 여성에게조차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여성은 ‘임신하지 말라’는 것이고 성관계를 하지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산부인과 의사들도 인정하듯이, 어떤 피임 방법도 100% 성공률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이든 원치 않은 임신은 근절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낙태 규제는 여성의 낙태와 출산 선택권의 규제 이전에 성생활의 규제이자 훈육이다. 낙태가 금지된 나라에서 비혼 여성은 성교 때마다 임신의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여성과 여성의 성을 가부장적 결혼에 종속시키는 것인가.  

 한국 여성의 낙태 선택권을 말하려면 그 전제로서 성적 자기결정권, 즉 성교 결정 자유와 권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낙태하는 것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여태아로 판명되어 낙태하는 것을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캐서린 매키넌의 말을 빌리자면, 무쇠 주먹에 씌워진 벨벳 장갑처럼 현실을 은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대다수 낙태의 현실은 선택권 대 생명권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곳에 있다.  

 게다가 자녀 양육이 거의 전적으로 ‘사적 가족’(친밀성 집단)에 맡겨진 상황에서 국가, 종교단체 혹은 의사회 등 어떤 제3자도 친밀성 집단에 아이 출산과 낙태에 대해 명령할 권한이 없다. 아이 낳을 것을 강요하는 공적 주체가 있다면,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제10조), 양성평등(헌법 제11조 제1항, 제36조), 사생활의 권리(제17조) 등에 반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 국가와 법의 낙태 금지는 단지 선택권의 제한일 뿐 아니라 신체통합권과 운명통제권, 시민권의 제한이다.  

 일각에서는 낙태 선택권에 편향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낙태한 여성도 불행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이다. 한국 여성에게 부족한 것은 낙태할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권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낙태 정책의 목적은 그저 낙태를 줄이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의 성과 재생산 자유, 즉 낳고 싶은 자는 잘 낳아 기를 수 있는 자유와 책임, 낳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을 의미하는 ‘재생산 권리’(Reproductive Rights)와 ‘재생산 정의’에 있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재생산’이란 인간의 재생산을 뜻하고, ‘재생산 권리’란 성교·임신·출산·양육에 이어지는 자유권과 사회권을 통합하는 인권의 틀이다. 국가 인구정책 관점에서 좌우되던 재생산 문제를 이제 시민인 여성과 남성이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권한을 돌려주어야 한다.  

 요청하는 바는, 첫째 불가피한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모자보건법의 큰 틀을 현재 인공임신중절의 정당화 사유 방식에서 기한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모자보건법 시행령에 비춰 24주까지는 낙태 가능 시기로 하고, 12주까지 낙태는 임부의 의사에 기초해 합법적 의사로 이루어졌다면 처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미성년의 임신과 사회·경제적 사유(빈곤, 기존 자녀 수 등)의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 외국 사례에서 볼 때, 낙태의 범죄화와 낙태 빈도 간에는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낙태가 줄어드는 것은 법률적 규제 때문이 아니라, 피임의 실천, 민주적 성관계, 자녀 양육의 호조건, 다양한 가족 형태 인정, 또 이것들을 위한 교육 등 여러 조건에서 가능하다.  

 둘째, 원치 않은 임신을 줄이는 것이 낙태 감소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다. 성교육과 피임교육의 현실화뿐 아니라, 성관계의 의미를 단지 남녀 간 성교가 아니라 임신과 출산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피임 실패를 예견할 때, 사후 피임약의 쉬운 보급도 요청된다.  

 셋째, 미혼·동거·동성애 관계 등도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고 지원하는 사회문화가 필요하다. 이들이 법률혼 가족에 비해 차별받지 않게 하는 제도와 문화가 요청된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낙태는 그리 미스터리적인 것만도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교육, 민주적 성관계, 피임 보급처럼 낙태를 줄이는 문화가 없기에, 낙태는 최종 혹은 유일의 여성의 자기방어 수단이 돼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낙태는 여성의 낙태 권리 실현을 나타내는 정도보다 한국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출산권의 제약을 나타내는 정도가 강하다고 해석된다. 요컨대, 한국 여성의 높은 낙태율은 남성 성 자유의 귀결인 셈이다.

 차별 없는 민주적 성관계를  

 원치 않은 임신에 따른 낙태는 대다수 불가피한 결정이며, 국가가 처벌하지 않더라도 임부에게 긴 육체적·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체험이다. 국가가 낙태를 범죄로 규정해놓는다면 낙태는 임부에게 깊은 죄의식을 남길 것이고, 그 체험은 침묵 아래 짓눌린 채, 태아는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불가피한 낙태를 허용하는 등 관련 법을 합리화해 태아와 그 어머니의 관계를 해명해주어야 한다.


글•양현아
한국젠더법학회 회장. 법사회학과 법여성학을 강의하고 있다. 사회학 박사로서 사회문화이론, 가족법, 일본 군위안부, 구술 증언, 재생산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관심과 사회변동은 지식과 이성뿐 아니라 정서와 미감에서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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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아 2011년 6월호에 실린 김용택 시인이 쓴 "노을 아래 가난했던 당신"을 옮겨 봅니다. 개인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아름다운 글이었습니다. 요즘처럼 풍요로운 세상에 어찌보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일 수 있겠지만, 부족하던 시절 날 생각해주는 친구, 사람간의 '정'이 있던 시절이 그리운건 아이러니 하지만, 결핍의 기억과 결핍의 공유, 결핍의 나눔이 삶의 자양분이 되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건 어쩔수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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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닐 때 내 소원은 소풍날 반찬으로 멸치 볶음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고추장에다가 빨갛게 볶은 멸치나, 아니면 볶은 멸치에다 고춧가루를 섞은 양념을 넣어 버루린 멸치. 다른 아이들의 멸치 볶음을 보면 나는 기가 죽기도 하고 부럽기 그지없었다.

어쩌다가 한 번쯤 멸치 볶음을 얻어먹을 때의 그 맛은 참말로 대단했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소풍 때나 보통 때 도시락 반찬으로 멸치 볶음을 가져간 적이 없었다. 소풍 갈 때의 반찬은 늘 볶은 소금이었다. 소금을 볶은 다음 깨를 넣고 고춧가루를 치고 참기름을 조금 넣으면 맛있는 깨소금이 되었다.
...

중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 동안 자취를 했기 때문에 반찬은 늘 김치뿐이었다. 김치 이외의 반찬을 나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어쩌다가 큰아버님이나 아버님께서 순창 장에 오셔서 국밥을 사먹은 적이 있고, 친구 집에 가서 밥을 먹을 때 외엔 한 번도 김치로부터 해방된 적이 없었다.
...

시디신 김치, 궁댕내가 풍풍 나는 신 김치, 그 김치로 6년을 살았어도 나는 지금 신 김치를 새로 담은 김치보다 좋아한다. 어쩔 땐 김치마저 모자라 시디신 김치 국물을 아껴가며 몇 끼 밥을 때웠던 적이 많았다. 그렇다고 새 김치가 맛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사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맛이 없는 음식을 먹어보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먹는 것은 지금도 다 맛이 있다. 어떤 음식이 맛이 있고 어떤 음식이 맛이 없는지 나는 모른다. 반찬 투정이니 뭐니 하는 것을, 나는 말로만 들었다. 어떻게 먹는 음식이 맛이 있고 없단 말인가.
...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차비와 등록금 이외의 그 어떤 용돈도 써본 기억이 없다. 군것질을 할 수 없는 나의 유일한 군것질 거리는 늘 생쌀이었다.
...

그렇게 김치로만 중고등학교 6년을 살았으니, 소풍을 가도 나는 한 번도 멸치 볶음은커녕 도시락 한번 제대로 싸가지고 소풍을 가본 적이 없다. 소풍, 하면 나는 잊을 수 없는 친구 둘이 생각난다. 시계방을 하던 백운행이란 친구와 문종해라는 친구이다. 소풍날이면 그냥 밥만 덜렁 싸가지고 가는 나를 위해 이 친구들이 내 도시락 반찬까지 많이 싸가지고 왔다. 점심시간이 되면 우리들은 같이 앉아서 밥을 먹었다.
...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 깔아 놓은 이불 속에 발을 넣으면 냉랭하다 못해 발이 시려오던 내 자취방에 앉을 자리가 없어 멍하니 서 있을 때 이따금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연탄불로 따뜻해진 아랫목 이불 속에 내 손발을 넣어 몸을 녹이게 하고 밥을 주던 종해와 종해의 어머니. 어머님은 아마 돌아가셨겠지만 종해는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6년, 그리고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소풍 때 그렇게도 싸가고 싶었던 멸치 볶음을  끝내 한 번도 싸가지 못하고 나는 그만 졸업을 하고 말았다.
...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딸랑거리는 빈 도시락 통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해 저문 강 길을 가 보았을 것이다. 그 아름답던 노을 아래 가난했던 당신.
나는 멸치에 대한 글을 자주 썼다. 오늘도 또 쓰고 말았다.
  

ps : 여러분 과연 어떤 '음식' 어떤 '친구'가  떠오르나요? 오늘 그 '음식'을 그 '친구'와 함께 먹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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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좀 가벼운듯 하나 절대 가벼운 책은 아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니 주변 학생들이 "돈가스 무슨 요리 책이예요?"한다. 

사실 부제를 보면 이 책의 내용을 알 수 있다. <돈가스의 탄생 - 튀김옷을 입은 일본근대사>. 돈가스라고 하는 일본 음식을 통해 일본의 서구 문명 흡수 방식과 이질적 문화를 어떻게 자신들만의 문화로 융화시켰는지에 관한 일본의 문화적 특징을 읽기 쉽게 서술한 책이다. 

난 개인적으로 돈가스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돈가스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메이지 시대 전에는 일본이 육식을 하지 않았다는지, 하야시라이스의 하야시가 이 요리를 만든 사람의 이름에서 나온건지 단팥빵이 서구의 빵을 일본식으로 만든 일본빵인지 알지 못했다. 책을 읽으며 알지 못하는 일본의 여러 요리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와 일본 근대 문화사에 대해 알아가는 일석이조의 재미를 느낄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이다. 더불어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도 읽으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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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0-1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다양한 책을 읽으시는군요~

많이 쌀쌀해져서 바람도 찬데, 몸 건강히 학교(?) 생활 하셨음 합니다. ㅎ

햇빛눈물 2011-10-18 13:05   좋아요 0 | URL
네 좀 잡다하게 읽고 동시에 5-6권씩 읽는 스타일이라 가끔 저도 헷갈릴때가 많습니다. ㅋㅋ 열심히 학교(?) 생활하고 있습니다. 바람결님도 감기 조심하셔요!!!
 

이 기사도 르디에 실려있는 도시화 관련 기사이다. 그런데 웹에 올려져있는 제목과 내가 보고 있는 인쇄된 책자에 실려 있는 제목이 다르다. 내가 본 기사 제목은 "기하급수적 도시화 제국 식민지에서 내부 식민지로"이다. 웹에 있는 제목보다는 위 제목이 훨씬 더 내용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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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플로마티크 19호(2010.4)  산업화와 세계화의 쌍끌이, 도시 남획사
[Spécial] 세계의 거대 도시화 

신석기시대 이래 시작된 세계의 도시화 움직임은 산업혁명과 맞물리면서 일대 격변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도시는 사회적 관계의 재구성에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됐다.

 도시에 거주하는 세계 인구의 비율이 2007∼2008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농촌 거주 인구의 비율을 넘어섰다. 오늘날 도시에 살고 있는 인구는 33억 명이 넘으며, 그중 5억 명 이상이 인구 1천만 명 이상의 거대도시 또는 인구 500만 명 이상의 대도시에 거주한다. 유엔은 세계의 도시화율이 향후 수십 년 동안 크게 증가해 2030년에는 59.7%, 2050년에는 69.6%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장차 증가할 인구의 대부분을 구·신도시가 흡수할 것이라는 이야기다.(1)

 40년 뒤 인구 70%가 도시 거주  

 이러한 대대적 변화는 인구밀도가 높은 신흥·빈곤 지역에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미 상당한 수준의 도시화를 이룬 선진국의 도시인구는 비교적 서서히 증가해 현재 74%인 도시화율이 21세기 중반에는 약 85%가 될 것이다. 이 도시의 팽창 가능성도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신흥 지역에서는 이례적으로 20세기 초부터 조기 도시화가 형성된 덕분이다. 하지만 이는 부국의 도시화와는 또 다른 유형에 해당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균형이 깨질 것이며, 이미 이런 현상이 진행 중인 곳도 있다. 아프리카의 도시인구는 1950년 이후 10배 이상 증가해 3300만 명에서 3억7300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2050년에는 12억 명으로 인구의 약 63%를 차지할 것이다. 20세기 중반에는 2억3700만 명, 오늘날엔 16억5천만 명에 달하는 아시아의 도시인구는 2배 이상 증가해 35억 명에 육박할 것이다.
 요컨대, 선견지명이 있던 역사가 루이스 멈포드(2)의 표현을 빌리면 온 세계는 “하나의 도시가 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화된 경제구역의 연결고리를 이루면서 때로는 과도하게 커진 도시 거점의 집합이 될 것이다. 신흥·빈곤 지역의 도시화 확대는 많은 인류의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갈수록 급속히 진행될 것이다. 도시화는 이주의 원인인 동시에 그로 인해 심화된 결과물인데, 이는 새로운 사회계층 분화를 유발하는 한편 인간에 의한 지구 생태계의 변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를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해야 한다. 대규모 도시화 확대는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의 등장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인류세란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지질시대(주거환경)를 지칭하기 위해 일각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산업혁명에 필요한 화석에너지 자원을 집중적으로 사용한 결과, 주거 환경이 획기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단절이 발생하기 전까지 수천 년 동안 경제·사회 생활은 “자연환경과 공생관계”(3)를 유지하는 마을 및 초기 도시로 이루어진 전통적 경제의 느린 리듬을 따랐다. 물론 사회가 자연에 국지적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생태계의 균형에 문제를 야기할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으로 인구의 정착 및 집중화가 시작된 이래 19세기까지 세계 인구 가운데 도시인구의 비율은 일정 수준을 넘지 않았다. 역사가 폴 베로크는 이전 추정치를 상향 조정하면서 이 비율이 지역 및 시대에 따라 9∼14%에 달했을 것으로 보았다.(4)
 물론 이처럼 기나긴 산업혁명 이전 시기에도 대규모 밀집지가 형성되기는 했다. 바빌론, 로마,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시안, 베이징, 항저우, 난징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도시들 중 일부는 제국의 수도였으며 인구는 수만, 많게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 서기 1300년경 베이징의 인구는 50만~60만 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5) 중세 유럽은 인구 2만 명 이상의 상업도시와 도시국가가 형성되면서 베로크가 말한 ‘도시 팽창’ 현상을 겪었다. 하지만 이는 도시와 농촌 간의 균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도, 사회적 관계에 혁명을 가져오지도 않았다.
 1780년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는 100곳도 채 되지 않았다. 즉, 유럽이든 그외의 곳이든 도시의 지배를 논할 상황은 아니었다. 자본주의시대 이전의 사회적 재생산은 어디에서든 농업이 근간을 이루었다. 농업은 사회의 전반적 활동 구도를 제공한 농촌의 기반이었다.

 산업혁명, 다른 두 도시의 분기점  

 그러다가 산업혁명 이후 “도시화와 산업화 간의 새로운 공생관계”가 자리잡았다.(6) 산업화는 노동과 자본의 집중화를 필요로 했고, 이로 인해 노동 분업 구조가 새로이 조직되면서 전례 없는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1750년 20%에 조금 못 미치던 영국의 도시인구 비율도 당시로서는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는데 1세기 중반 이후에는 80%에 달했다. 평균적으로, 새로이 산업화가 이루어진 지역(일본 제외)의 도시인구 비율은 1800∼1914년 10배로 늘어나 2억1200만 명에 이르렀다. 도시 일자리의 절반가량을 공업 부문이 차지하는 가운데, 이러한 증가의 기저에는 농업 생산성의 꾸준한 향상이 깔려 있었다. 변화가 얼마나 과격하게 이루어졌는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19세기 후반의 아동 및 성인 노동자층의 심각한 생활·근로 여건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지만 이런 움직임은 20세기에 이룩한 전반적인 생활수준 향상으로 서서히 이어지는 변화의 일환이었다.
 세계 식민지 도시는 이와 또 다른 경험을 했다. 산업혁명은 서구의 영토 확장과 결합되면서 새로운 국제 노동 분업을 구축했고, 원거리 무역도 늘어났다. 1848년 마르크스는 이러한 첫 번째 세계화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옛 산업이 새로운 산업으로 대체되고 있다. (…) 새로운 산업은 머나먼 지역에서 온 원자재를 이용하며, 그 생산품은 해당 국가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소비된다. 자국의 생산품으로 충당되던 옛 수요를 대신해 머나먼 고장과 기후의 생산품으로 충족돼야 할 새로운 수요가 탄생하고 있다. 자급자족하던 과거의 마을 및 국가를 대신해 보편적인 관계, 한마디로 국가 간 보편적 상호의존성이 발달하고 있다.”(7)
 ‘중심-변방’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이러한 비대칭적 상호의존성은 식민지 혹은 의존적 지역의 경제와 공간을 새로운 형태로 변모시켰다. 이 지역들이 세계시장에 강제적으로 편입되면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전통적 연결고리가 와해됐고 내부 경제순환망도 피해를 입었다. 대신 수출용 기초생산품(면화, 설탕, 아편, 곡물, 금속 등)의 생산이 발달했다. 강제적인 식민 중상주의 조약의 제약 때문에,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도·중국 등지에서는 원초적 산업활동이 뒷걸음질쳤다. 그 결과, 1750년 이전까지 세계 제1의 섬유 생산국이던 인도에서는 탈산업화가 거세게 이루어졌다.
 이렇듯 도시화의 수준은 비교적 미약했다. 그러나 국제교역이 새로운 구조를 보이면서 해안도시는 인구가 급증했으며 세계시장에 판매될 기초생산품의 창고가 되었다. 19세기 중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경제는 ‘탈대륙화’해 해안 지역으로 이전했고, 인도의 경우 뭄바이·캘커타·마드라스 등은 인구가 증가한 반면 내륙도시 인구는 감소했다.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던 북아프리카 해안도시의 모습이 변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지역은 20세기, 특히 1950년대 이후 급속한 도시화를 겪었지만 제대로 된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 다만 신흥 개발도상국의 대도시(서울, 타이베이, 싱가포르, 홍콩 그리고 오늘날 상하이와 베이징)는 예외였다. 그외의 지역을 보면 옛 식민 시절에 무질서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식민지배의 구조적 산물인 동시에 세계시장의 위력으로 강화된 내부의 경제·사회적 불균형에 기인한 것이었다.

 글로벌 도시와 글로벌화된 도시

 농촌 지역의 빈곤으로 인구의 도시 유입 현상이 심화되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남아시아에서는 거대한 연담도시(聯擔都市·Conurbation)가 형성됐다. 이 도시들(라고스·다카르·멕시코시티·카라카스·콜카타·다카·자카르타·마닐라 등)의 인구와 공간은 끊임없이 늘어났고 대량 실업, 빈민촌, 열악한 인프라, 가공할 만한 환경문제 등을 겪게 되었다. 이 도시권에서는 막대한 부와 대규모 빈곤이 공존하면서 세계적 규모의 ‘지구 빈민촌’(8)이 탄생했다.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이 밝혔듯이 부국의 대도시는 선진 북반구에 저개발 남반구를 결합한 ‘이중적’ 도시이기도 하다. 강력한 사회계층 분화가 된 이 도시에는 하인으로 일하는 이들과 많은 소외계층이 집중돼 있는데, 이는 상당수가 옛 식민국가의 유물이다.(9) 그렇지만 부·문화·지식·기술이 한데 모인 ‘글로벌’ 도시의 사회적 불평등은 ‘제3세계’의 ‘글로벌화된’ 도시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다.
 도시화는 산업화 및 세계화의 긴장과 갈등을 집결해 드러낸다. 이를 두고 앙리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산업화의 방향이자 귀결점인 도시사회는 스스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형태를 잡아나간다.”(10) 돌이킬 수 없는 현상이 된 도시화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교육, 문화, 보건, 건전한 환경 등 공공재를 생산할 능력을 과연 갖추고 있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러한 생산능력이야말로 집단적 복지와 아울러 개인의 자유 확대를 보장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의 1차적 조건이니 말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산업국가에 대규모 중심지가 형성되면서 이에 대한 고찰이 넘쳐났다. 빅토리아 시대 개혁적 도시계획가들은 빈민촌으로 인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작고 더 ‘살 만한’ 군집 지역을 새로 건설함으로써 도시를 분산하도록 제안했다. 그리하면 많은 인구를 더욱 쉽게 관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오늘날 중국과 인도의 정부 및 지역 당국도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훗날 멈포드를 비롯한 이들은 현지 자원과 단거리 공급망 활용에 기반을 둔 지역과 하위 지역의 계획화를 통해 도시 혼잡을 완화하는 구상을 했는데, 환경적 균형을 이룩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오늘날에는 이를 도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0∼80년대에 이르러 시민이 자신들의 생활공간을 직접 관장하는 ‘공동체(Community)형’ 도시 개발의 구상이 꽃을 피웠다.(11) 하지만 오늘날에도 시민의 도시 점유와 도시공간 생산 조건에 관한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이는 21세기에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각주>
(1) <세계 도시화 전망, 2007년 개정 인구 데이터베이스>, 유엔인구국(UNPD) 경제사회부. http://esa.un.or/unpd.
(2) Lewis Mumford, <역사 속 도시: 기원, 변형 및 전망>(The City in History: Its Origins, Its Transformation, and Its Prospects), Harcourt Brace, International, New York, [1961] 1986.
(3) Mumford, 앞의 책.
(4) Paul Bairoch, <예리고에서 멕시코까지: 역사 속 도시와 경제>(De Jéricho é Mexico : villes et économie dans l’histoire), Gallimard, Paris, 1985.
(5) Tertius Chandler, <도시 성장 4천 년>(Four Thousands Years of Urban Growth), Edwin Mellen, Lewiston, 1987.
(6) Edward W. Soja, <포스트메트로폴리스: 도시와 지역에 관한 중대 연구>(Postmetropolis: Critical Studies of Cities and Regions), Blackwell, Oxford, 2000.
(7) Karl Marx & Friedrich Engels, <공산당 선언>, Flammarion, Paris, 1999.
(8) Mike Davis, <지구 빈민촌>(Planète bidonville), Ab Irato, Paris, 2005.
(9) Manuel Castells, <정보도시: 정보, 기술, 경제 재구조화 및 도시-지역 프로세스>(The Informational City: Information, Technology, Economic Restructuring and the Urban-Regional Process), Blackwell, Cambridge, 1989, <이중적 도시: 뉴욕의 재구조화>(Dual City: Restructuring New York), Russel Sage Foundation, New York, 1991.
(10) Rémi Hess, <앙리 르페브르와 세기의 모험>(Henri Lefebvre et l‘aventure du siècle), Métaillé, Paris, 1988, p.276 인용.
(11) Peter Hall, <내일의 도시>(Cities of Tomorrow), Blackwell, Oxford, 1996.

글•필리프 S. 골뤼브 Philips S. Golub
저서 <권력, 이익, 영예: 제국 팽창의 역사>(Power, Profit and Prestige: a History of Imperial Expansion), Pluto Press, London, 5월 출간 예정.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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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보지 못했던 르디에 실려있는 기사를 스크랩한다. 도시화와 재개발과 관련된 참고할 수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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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플로마티크 19호(2010.4)  분리와 배제, 지구화된 도시의 삽질  

[Spécial] 세계의 거대 도시화  

2007년 무렵, 인류의 반 이상이 도시에 살게 되는 조용한 대변혁이 일어났다. 6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도시에서부터 수천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현대의 거대 도시까지, 도시화 과정은 연속이 아니라 간헐적이었다. 그러나 도시화 과정은 항상 일자리 배분, 계급 형성, 권력과 지식의 집중과 연관돼 있었다. 현대의 도시문명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생겨난다. 도시문명은 산업혁명의 이중적 측면을 물려받고 있다. 도시에서는 사회적 격리에 의해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 주변부로 밀려난다. 빈민촌의 수평적 확장이 미래 기술도시의 수직적 발전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익의 집적지라 할 대도시는 자본, 상품, 돈 많은 주민들의 유출을 막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결국 부동산 거품과 대중의 분노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창조적 파괴’라는 명목으로 도시 재개발이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뭄바이에서 런던·뉴욕·파리를 거쳐 베이징까지 투자자, 부동산 개발업자, 기업체 사장, 고급 간부와 부유한 여행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호화 주택, 기업 본사, 매혹적인 문화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좋은 구역에 자리잡은 서민 구역이 재정비되고, 예전 거주자들은 저급 주택이 모여 있는 외곽으로 쫓겨났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전세계 빈민촌이 저마다 건설 공사장으로 변해 서로 충돌하고 있는데, 우리는 명백한 계층 대립의 형태로밖에 해석될 수 없는 잔인한 불균형을 목격하고 있다”(1)고 지적한다.
 이같은 도시 재개발은 공간의 정복(혹은 재정복)을 놓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오랫동안 전개돼온 투쟁의 연장선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하지만 이런 시각은 특히 3차 서비스 산업국가로 진입한 국가에서 진행되는 사회그룹의 재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효과를 도외시하는 측면이 있다.

 빈민촌서 격돌하는 힘의 비대칭성

 서비스 산업이라 불리는 분야는 신중산계층의 확장과 더불어 성장했다. 이는 20세기 후반부, 전세계적 차원 혹은 적어도 국가적 차원에서 대도시의 일부로 조성된 도시공간 내부에 재정적·사법적·문화적 기능이 집중된 것과 연관이 있다. 우리는 이런 변화의 두 가지 주요 특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편으로 교육중심지(고등교육기관과 졸업증서 수여기관)에 잘 갖춰진 지적 노동력이 엄청나게 증가했고, 무엇보다 지적 노동의 열매를 따먹으려 애쓰는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부르주아의 운명과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또 한편으로 전통적 산업조직의 쇠퇴, 노동운동의 약화와 해체로 사회의 근본적 변화 계획과 이 계획의 기반이 되는 공동체 해방의 이상(理想)이 붕괴됐다는 점이다.  

 하비의 표현을 빌리면 ‘대립’(Confrontation)을 말하는 사람들이 꼭 ‘대결’(Affrontement)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도시공간에서 계층 분열이 일어나는 방식은 차라리 분리주의 방식에 의거하고 있다고 하겠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정면 충돌은 드물어졌다. 도시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전투원이 없어서 멈춘 것이 아니라, 항상 공격적 부르주아에 대해 프롤레타리아가 대결할 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노동계를 약화하는 행동을 전개할 뿐만 아니라, 운명 공동체, 귀속감을 위한 다양한 전략 등 모든 계층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2) 반면에 프롤레타리아는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그들에게 가르쳐준, 기존 질서를 전복해야 하는 혁명 주체의 ‘역사적 역할’과 공동체적 존재에 대한 인식을 상실해버렸다.  

 서민층의 영토를 빼앗기 위한 지배계급의 술책은 당연히 서민층의 저항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청소년 범죄나 체제전복 반대투쟁이란 명목으로 도시 재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칠레의 캄파멘토스, 시우다데스 카얌파스 같은 빈민가 거주민, 다른 호화 지역의 거주민, 경찰 혹은 군대 사이의 대결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마그레브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빈민촌 ‘퇴거’ 군사작전이 전개됐다. 시장세계화 시대에 대형 도시의 건물과 인프라를 설치하는 데 필요한 토지를 마련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옛날 거주자들을 강제 퇴거하고 그들의 집을 철거했다. 독일에서는 재통일 뒤 자금을 투자한 신부르주아가 재정비를 명분으로 베를린의 예전 낙후 지역에 대형 방화차를 동원해 불을 질렀다. 1960년대 미국 게토 지역의 흑인 폭동과, 1980년 초 마거릿 대처 정부가 ‘정비’한다고 약속한 영국 교외의 빈민 지역에서 아프리카와 카리브 연안 출신 젊은 이민자들이 일으킨 폭동도 있다.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에서 1970년대 발생한 시위, 점령, 수많은 무단 거주, 임대료 자진 삭감운동, 거주민 연합과 구역 위원회의 활성화 같은 여러 사건은 비평사회학이 ‘도시투쟁’으로 명명한 새로운 유형의 사회운동 출현을 믿게 만들었다. 이런 사건은 모두가 ‘도시에 살 권리’를 요구하는 신호로 여겨졌다. 그러나 반자본주의 투쟁의 새로운 전선을 개척했다고 믿던 극좌파 이론가들과 사회운동가들은 곧바로 환상을 버려야 했다.  

 계급투쟁에서 거주지 투쟁으로 영역을 확장한 노동자와 서민의 결합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공장에서의 노동자 착취 반대투쟁과 부동산 업자와 토지 소유자, 이들의 정치지원 세력에 대한 시민의 반대투쟁을 결합하는 시도가 칠레, 아르헨티나 혹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몇몇 도시(투렌, 볼로냐, 바르셀로나)에서 있었지만, 그 저항은 억압의 바람에 순식간에 꺼져버리는 기약 없는 촛불과 같았다. 게다가 결합투쟁은 회유로 무력화되었다. 권좌에 앉은 권력과의 협상은 폭동을 일으킨 주민들의 투쟁성과 급진성을 감퇴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한때 ‘반체제 인사’ 출신의 다니엘 콘벤디트(Daniel Chon-Bendit)가 1989년 프랑크푸르트-쉬르멩에서 다문화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민주당(SPD) 소속 부시장으로 등극한 사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투쟁 지도자들이 기득권 세력에 영입됐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운동 대체 못한 도시투쟁  

 반자본주의 투쟁에서 다른 사회계층을 프롤레타리아 계층에 합류시킬 것으로 본 ‘도시투쟁’은, 훨씬 더 이론적으로 무장한 대학 출신의 ‘반체제’ 투사들(교사, 연구자, 건축가, 사회운동가…)이 이끌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삶의 환경’을 얻기 위한 투쟁이, 단순히 무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노동계’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사실상 사회적 자유주의의 선구자인 프랑수아 뒤베, 디디에 라페이로니 등과 같은 ‘제2의 좌파 대학 지식인’의 지휘 아래 프랑스에서 전개된 도시투쟁은 고갈된 노동운동을 대신해줄 ‘새로운 사회운동’ 중 하나였다. 이 운동은 이제는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자본주의와 결별하지 않고도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됐다. ‘도시를 바꾸는 것’은 사회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회에 더 ‘도시적’인 얼굴을 부여함으로써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자본주의식 도시화를 극렬하게 비판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전력투구했다. 사회학자, 도시 지리학자, 건축가, 도시계획가, 도시 정비기술자와 지역 의원들은 ‘후기’ 자본주의의 필요조건에 도시공간을 조화롭게 맞추기 위해 지금 공동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3)가 이론화한 몇몇 주제에서 모든 혁명적 함의를 제거하고 나서, 그것들을 주저 없이 채택했다. 양보다 질을 우선시하고, 한 구역의 역사성, 진정성과 개성을 보존·복원하기 위해 틀의 표준화를 거부하고, 특히 자발적 사회성을 상징하는 공공 공간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이런 주제에 해당한다.  

 이것은 ‘불도저식 재개발’ 시대처럼 도시의 과거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에는 ‘호화’ 건물, 주택 혹은 사무실에 사용될 ‘토지’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방치된 ‘비위생적’ 지역을 완전히 헐어버렸다. 또한 수세기 전부터 물려받은 구불구불하고 혼잡한 도로를 ‘자동차에 적합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 ‘우회 도로’와 ‘방사선 도로’로 교체했다. 이제는 도저히 재생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그것을 파괴하지 않고 ‘재개발’, ‘쇄신’, ‘재활성화’, ‘재생’한다. “‘재(re)’라는 접두어로 시작되는 이런 용어들은 우선적으로 도시에 긍정적 이미지를 부과하지만 내재하는 사회문제를 완전히 은폐하는 용어다. 하나의 구역이 재개발될 때, 그것은 당연히 상당수 거주민이 거기에서 쫓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구역은 당연히 ‘더 나아지겠지만’ 똑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4)라고 벨기에 지리학자 마티우 반 크리킹겐은 지적한다. 프랑스 좌파연합 정부의 ‘도시정책’ 안에서 실시된 또 다른 유사 개념인 ‘도시 정비’라는 개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거대도시의 중심지역 인구 수를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메트로폴리스들’처럼 조정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기존 인구를 재정비한다는 의미다.  

 예전 노동자 구역에 봉급생활자의 중간층이나 상위층, ‘정보통신’ 사회의 발전에 따른 자유전문직 계층에 속하는 사회그룹이 유입되면 원주민은 그것을 침입으로 느꼈다. 대다수 원주민은 토지와 부동산 투기를 연상했고, 이런 투기 때문에 원주민이 쫓겨나고, 사회적 정체성에 걸맞은 주거 정체성을 만들어내려는 유복하고 교양 있는 시민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귀족계급화’는 만들어진 공간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공간, 특히 대중 기반이 끊임없이 축소되는 좌파의 본질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유럽 차원의 현상이다. 즉, 곳곳에서 우리가 사회민주주의의 ‘귀족계급화’를 목격하는 것이다”(5)라고 지리학자 크리스토프 기이이는 지적한다. 사람들은 좌파 성향의 시와 읍이 도시계획을 세울 때, 주택과 문화 소비의 새로운 사회기반 시설을 열정적으로 건설하려 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21세기 파리의 바람직한 미래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정비계획을 설명한 호화 소책자에서 도시계획 건축 담당 수석보좌관인 안 이달고는 대도시 지역 의원에게 부과된 문제를 요약했다. 즉 ‘세계적 차원의 도시’ 중에서 자기 도시의 서열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 다시 말해 “세계의 수많은 중심도시와 경쟁하는 프랑스 수도의 지위 문제”(6)를 지적했다. ‘대도시 중심부와 그 주변 지역을 연결해야 하고’, ‘광역 지역 내에서 그 주변 지역의 지위를 새롭게 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멋진 서정적 담화가 일으키는 환상에 속아서는 안 된다. 가상의 ‘대(大)파리’ 계획에 들어 있는 자동화된 순환 RER(지역 간 고속전철)는 앙베르의 구시가를 에워싸는 렌 구역 주민이 이동수단에 접근하는 것을 오히려 봉쇄한다. 그 목적은 수도의 교통순환에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지점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파리를 유럽의 경쟁도시에 비해 손색이 없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광역도시 지역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연결해 ‘공동의 운명’에 처하게 한다는 ‘공유 프로젝트’는 전 지구의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중요 원칙인 ‘거칠 것 없는 자유경쟁’을 공간 속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각주>
(1) 데이비드 하비, ‘도시에 대한 권리’, <뉴 레프트 리뷰>, 53호, 런던, 2008년 9~10월.
(2) 폴 부파르티그, <사회계층의 부활: 불평등, 지배, 분쟁>, 라디스퓌트, 파리, 2004.
(3) 앙리 르페브르, <도시에 살 권리>, 앙트로포스, 파리, 1968.
(4) 마티우 반 크리킹겐, <라 트리뷴 드 브뤼셀>, 2007년 12월 6일자.
(5) 크리스토프 기이이, <선거 공략을 위한 새로운 사회 지리학>, 프랑스 정치생활 연구센터(Cevifop), 파리, 2002.
(6) 안 이달고, ‘파리는 전세계의 급속한 변화에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 <21세기 파리>, 파리도시계획 연구회-르 파사주, 파리, 2008.

글•장피에르 가르니에 Jean-Pierre Garnier
<현대의 극렬한 폭력: 도시, 지적 소시민, 서민계층의 소멸에 대한 소론>(아곤· 마르세유·2010)의 저자. 이 기사는 이 책의 서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파리8대학 언어학 박사. 역서로 <카인>, <성의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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