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와이프한테 상처(?)를 받았다. 새벽 밤공기를 마시며 아파트 주위를 한시간여 방황했다. 내 나름 상처라고 하지만 원인 제공은 역시 나다. 그리고 그 원인의 원인은 역시 술이다. 

난 이번에는 절대 아내를 용서하지 않겠다 맘을 다부지게 먹고, 상처 받은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후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와이프도 역시. 니가 먼저 사과하기 전까지 난 절대로 한마디도 안하겠다 다짐에 또 다짐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밥이였다. 와이프가 차려줄 일 만무하고, 굶자니 배고프고. 그래서 혼자 냄비에 물 붓고 라면을 끊이려 했다. 순간 와이프 얼굴이 보였다. 와이프도 저녁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야, 너도 라면 먹을래?"했다. 그랬더니 와이프가 '피식~~' 웃더라. 그래서 나도 '픽'하고 웃었다. 이로써 우리의 싸움은 나름 종결 되었다. 

어찌보면 싸움의 시작은 사소하고 화풀는 단순하다. 우리의 싸움은 "피식~~" 웃음 한마디로 끝났다.

규진이를 재우고 둘이서 나의 상처와 우리의 싸움에 대해 애기했다.(사실 지나간 싸움에 대해 서로 사과하고 풀려다 오히려 싸움 크게 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날도 위태위태했다.) 나도 사과하고 와이프도 사과했다. 근데 와이프가 하는 말이 "너 내가 너한테 왜 화 났는지 아냐?"하더라, 그래서 "뭔데, 속시원이 애기해봐"했다. 와이프 왈 "니가 술 먹고 한 행동은 표면적인 이유고, 내가 더 화가 난건 난 규진이 엄마인것만 같은데, 넌 규진이 아빠이면서 oo의 친구이면서, oo의 동료이고, 할 건 다한다."였다.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어찌보면 나도 다 아는 사실이다. 

사람이 태어나 사는 동안 '나'는 '나' 하나가 아니다. 학교에서는 누구의 선배이기도 하면서 후배이기도 하고 직장에 가면 동료이면서 상사이기도 하고, 집에서는 남편이면서 아빠이기도 하고 또한 엄마와 아빠의 아들이기도 하다. 이 무수한 '나'의 소용돌이에서 도대체 진짜 '나'는 누구일까? 아니다, 하나만의  '나'는 무의미 할 것이다. 각 상황 맥락에 맞게 행동하는 여러가지 '나'가 존재할 뿐이다.  

이런 여러 맥락적인 '나'의 존재 속에서 대한민국의 여자들은 '엄마'가 되는 순간 모든 '나'는 잊혀지고 한 아이의 '엄마'로서만 의미지워진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그리고 사회는 이걸 '엄마'의 당연한 책무라고 의무 지운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아이들이 엄마들이 상처받고 있다. 난 SBS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면서 우울하고 눈물이 날뻔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엄마'들이 상처받고 있다. 물론 아이들도.  

   
 

사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 속 아이와 부모들은 모두 상처 받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작은 결심을 하나 했다. 술을 당분간 끊기로 했다. 단, 당분간! 난 정말 술 좋아하는 인간이다. 점심에 반주로 소주 한 병이 기본이라 생각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러니 내가 술을 끊는다는 건 있을수 없다. 단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잠시 술을 않 먹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알콜'에게서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것도 우리 둘의 사랑을 돈독히 해주는 그 무엇이 되어 주리라 생각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지 않던가!

와이프도 여러 '나'가 존재한다. 사실 결혼 전에는 나보다도 더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어서 인기도 많았다. 운동도 잘한다. 둘 다 배드민턴을 좋아하는데, 나보다 더 잘한다. 뭐 내가 좀 운동신경이 둔하긴 하지만. 그런 와이프가 규진이가 생긴 후로 친구 만나고 술 마시고 운동하는 것 등 모든 외부 활동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난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현실 인식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아내의 희생과 노고를 감사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사실 이것이 얼마 전 싸움의 원인이었다. 그러니 나도 뭔가 반성과 행동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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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29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읽으면서 저희 부모님이 생각났어요. 싸움 원인부터 시작해서 화해하시는
모습마저 똑같아요 ^^;; 저희 아버지도 최근에 저에게도 몰레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 당분간 술 좀 끊어야겠다 ' 라구요,, 그런데, 저한테 이 말을 한지
벌써 수십번 넘게(!) 했으니,,, 글쎄요 ㅎㅎ ^^;;
그래도 햇빛눈물님은 자신과의 약속 꼭 지켜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

햇빛눈물 2011-01-30 01:08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러시군요. 남자가 아빠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과정은 모두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도 꼭 약속이 지속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부천에서 2012-06-2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오늘 와이프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사과를 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와이프한테 더 잘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 모두들 힘들지만 조금 더 가족을 생각하는 가장이 됩시다!!

햇빛눈물 2012-07-03 22: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 덕분에 오랜만에 저도 서재에 들어오게 되었네요. 님도 힘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