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고명섭 기자의 글이 하나 올라왔다. 자주 올라오지 않기에 반갑게 읽었다. 그런데 왠걸...제목이 이상하다. '주요 타격 방향과 우정의 정치'라...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는데, 읽다보니 알겠다. 얼마전에 한겨레 신문 지상을 통해 벌어진 두 사람간의 논쟁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 두 사람은 김규항씨와 진중권씨이다. 근데 두 사람은 둘 다 흔히들 애기하는 '진보' 논객이 아닌가, 뭘 가지고 싸웠을까? 바로 '진보'에 대해서다. 뭐, 간단히 애기하면 '넌 진보라고 하지만 넌 짝퉁이야!'라고 누가 애기하니 상대방은 '니가 진보가 뭔지 알아, 어이없다!' 그러니 또 상대방은 '넌 한국말 모르냐, 왜 내 말을 이해 못해'하는 식이었다. 

그 이후에 또 논쟁이 이어진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이런식의 논쟁 정말 재미없다. 논리적이건 감정적이건, 정말 흥미없다. 넌 진보 아니야, 니가 진보가 뭔지나 알어 하는 순간 '진보'는 없어진다. 제발 이런 소모적이고 초보적이며 감정적인 말다툼같은 논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한겨레신문 2011.3.9   주요 타격 방향과 우정의 정치 
 
   

» 고명섭 책·지성팀장 
 
1924년 1월21일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숨을 거두었다. 뇌졸중과 심장병으로 오래 병석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레닌은 당의 구심이었다. 1월27일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부하린이 레닌의 주검이 든 관을 어깨에 메고 엄숙하게 붉은광장으로 들어서는 동안, 그들 각자의 마음속에서 이제 이 신생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누가 이끌 것인가 하는 물음이 맴돌았을 것이다. 운구 행렬을 이끄는 스탈린이 될 것인가, 운구 행렬에서 빠진 트로츠키가 될 것인가. 레닌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공교롭게도 트로츠키는 독감에 걸려 요양차 남쪽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는 돌아오기를 포기했다.  

스탈린은 당 서기국을 이끄는 서기장이었고 중간간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지적 권위가 없었다. 혁명 전에 쓴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가 그때까지 스탈린의 거의 유일한 이론적 저술이었다. 반면에 스탈린의 경쟁자들은 이론가로서 입지를 탄탄히 굳힌 상태였다. 혁명이론에 관한 한 트로츠키는 레닌 다음의 권위를 누렸다. 그는 동지들을 한 수 아래로 보았다. 정치국 회의에서조차 지루할 때면 프랑스어 소설을 꺼내놓고 읽을 정도였다. 지노비예프·카메네프·부하린도 ‘지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스탈린을 밑으로 내려다보았다. 스탈린은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지적 토대가 탄탄한 이론가임을 입증해야 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석 달 뒤 스탈린은 스베르들로프대학에서 아홉 차례에 걸쳐 레닌의 혁명이론을 해설하는 강연을 했다. 그 강연 내용을 묶은 것이 뒷날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교과서가 된 <레닌주의의 기초>다.

이 팸플릿에서 스탈린은 레닌주의를 성실하게 요약하면서, 거기에 더해 그 자신의 개성을 심었다. 그는 레닌보다 더 편협하게 세계를 해석했다. 그리하여 나중에 이 팸플릿의 세계관은 공산주의자들의 시각구조를 결정하는 이론적 프레임 구실을 했다. ‘주요 타격 방향’이라는 말이 그런 프레임을 보여주는 핵심 용어 가운데 하나다. 스탈린은 ‘혁명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전략이란 해당 혁명 단계에서 ‘주요 타격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세력을 설정해 타격하는 것이 핵심 전략이라는 독특한 이론이다. 이 이론에 입각해 혁명의 제1단계에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이, 제2단계에서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이어 제3단계에서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가 주요 타격 방향으로 설정된다.

이 제3단계 혁명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가 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를 가리키는 ‘만능 용어’임이 금세 드러났다. 스탈린은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손잡고 트로츠키를 무력화한 뒤, 다시 부하린과 손잡고 지노비예프·카메네프를 숙청했고, 마지막에는 부하린마저 축출했다. 동지의 대열에서 제거되기 전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으로 고발당했다. ‘주요 타격 방향’ 이론의 파괴성은 이렇게 모든 차이와 대립을 계급적 적대로 환원해 증오와 척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이웃과 동지를 적으로 돌리는 ‘주요 타격 방향’의 정치에서는 차이를 용인하고 대립 속에서 대화하는 ‘우정의 정치’가 서기 어렵다. 독일에서 나치가 발호할 때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을 계급의 적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공동 대응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스탈린주의 정치학은 1980년대의 변혁운동기에 한국 사회에서도 번졌고, 그 그림자가 아직도 진보 정치 일각의 프레임을 규정하는 요소로 남아 있다. 적대의 정치를 넘어서지 않고서 연대와 연합의 정치를 구현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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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1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규항도 진중권도 고명섭도 다 좋아해요.
김,진 두분의 논쟁도 뼈 아프게 읽었구요.
김규항 님 같은 경우엔 개혁이라고 불러야지, 진보라고 하면 좀 섭섭해 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두분의 논쟁이 뼈 아픈건 사실이지만, 전혀 아무것도 안하고 손 놓고 있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의 논쟁으로라도...가열찬 당신들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저어하기도 힘듭니다~ㅠ.ㅠ

햇빛눈물 2011-03-16 09:40   좋아요 0 | URL
물론, '이런식의 논쟁'도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보다 뭔가 효과가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런식의 논쟁이 감정싸움으로 흐른다면 역효과가 클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녀고양이 2011-03-16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논쟁 기억해요,
두 분이 한겨레 지면에서 번갈아 올린 글들이었는데....
글쎄요, 왜 저런 말로 서로 상채기를 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글이었어요.
즉 발전적이지 못 하다는 느낌이 드는 글들이었지요.

논쟁도 좋고 토론도 좋지만,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감정적이거나 편협한 논쟁은 글쎄요.. 특히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려는 자세 자체가 없는 글들은 읽기 불편하더라구요.

오늘 너무 추워요... 따스한 차 한잔 하세요, 햇빛님~

햇빛눈물 2011-03-16 11:15   좋아요 0 | URL
저도 마고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서로에게 '생채기'만 주는, 그것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이에게 받은 상처는 더욱 크게 느껴지겠죠. 안그래도 같이 근무하시는 선생님이 멀리서 친히 홍차(다즐링)을 가져다 주셔서 맛나게 먹었습니다. 내일은 더 춥다는데 마고님도 맛나는 차 한잔 드시는 여유있는 날이 되시길~~

노이에자이트 2011-03-1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 씨는 재기발랄한 것은 좋은데...진득한 맛이 없다고 할까요...그래서 민노당도 탈당하고 이번엔 진보신당도 탈당하고...아무래도 방랑의 무소속 같은 게 어울리죠.

햇빛눈물 2011-03-17 08:50   좋아요 0 | URL
저도 좀 그럴듯 합니다. 이름하고는 다르게 '진중'한 맛이 없죠. 나름 그런것들을 장점으로 보는 이들도 있으나, 저도 한때 그랬는데 지금은 왠지 거부감이 생깁니다.
 

한겨레신문 2010.6.29  시대가 요구하는 것

포르투나(fortuna), 비르투(virtu), 네체시타(necessita).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가 군주, 그러니까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필요하다고 적시한 세 가지 요건이다. 마키아벨리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포르투나는 운·운명을 뜻한다. 운명은 두 얼굴이다. 사나운 얼굴의 악운이 있는가 하면, 환하게 웃는 행운이 있다. 운명은 불안정한 것, 알 수 없는 것이다. 운명은 험한 강물과 같아서, 한번 노하면 평야를 덮치고 나무를 뿌리째 뽑고 집을 통째로 쓸어버린다. 들판과 도시가 폐허로 변한다. 그러나 운명이 웃을 때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지도자는 이 행운의 손을 잡아야 한다. 이 대목에서 마키아벨리의 저 유명한 비유가 등장한다. 운명의 신을 손아귀에 넣으려면 신중하기보다는 과감해야 한다. 운명의 신은 여신이어서 젊은이에게 끌린다. 젊은이는 더 과감하고 더 공격적이며 더 대담하기 때문이다.  

이 고색창연한 비유는 비르투의 성분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비르투는 남성을 뜻하는 라틴어 ‘비르’(vir)에서 나온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그 시대의 일반적인 용법과는 달리 어원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비르투는 ‘덕’이라기보다는 ‘힘’이다. 운명의 여신을 낚아채는 남성적인 힘이 비르투다. 비르투를 지닌 사람은 활력과 기백이 넘치고 결단력이 있다. 요컨대, 비르투는 육체적·정신적 역량이다. 비르투가 충만하면 악운의 범람을 막을 수 있으며 행운을 제편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러나 비르투가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네체시타’다. 네체시타란 시대가 요구하는 것, 시대에 어울리는 것, 곧 시대 적합성이다. 역사철학적 용어로 말하면, 시대정신이며 역사적 필연성이다. 당대의 역사가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네체시타인바, 이 요구를 충족시키는 지도자가 승리하고 그 요구에 미달하는 지도자는 패배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비르투에 더해 네체시타를 간파하는 혜안을 지녀야 한다.

커뮤니케이션학자 강준만 교수가 <인물과 사상> 최근호에서 버락 오바마의 경우를 들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의 덕목으로 ‘화합’을 지목했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한몸으로 뜨고 집니다.” “세계를 분열시키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패배시킬 것입니다.” “우리 정치를 그토록 오랫동안 망쳐온 당파주의와 협소함으로 다시 빠져들게 할 유혹에 저항해야 합니다.” 이 화합의 메시지로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다. 강 교수는 한국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며 6·2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김두관·송영길·안희정·이광재, 아깝게 진 유시민·한명숙, 그리고 다른 지도적 인물들을 거론한다. “이들 가운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나는 ‘화합’이야말로 차기 대선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될 것이며, 그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해내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다고 본다.”

비르투라고 해서 다 같은 비르투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를 폭주하고 있는 것은 거칠기 짝이 없는 시대착오적 비르투다. 천안함 사태의 진실을 밝히려는 시민사회를 적으로 몰고, 국민의 저항을 깔아뭉개며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인다. 남북이 적대해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집권당의 주류와 비주류가 반목해 내분으로 휘청거린다. 나라를 사분오열시키는 미성숙한 비르투, 그것이 지금 이 나라 집권세력의 모습이다. 국민은 이 분열·불화·불통에 지쳤다. 강 교수의 진단대로 화해·화합·통합이 이 시대의 네체시타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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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글쓰기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자신이 글 쓰는 사람이 되는 데 두 가지 조건이 기여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나는 정신적 조건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적 조건이다. 극심한 우울증을 앓지 않았다면, 그는 글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물려받은 재산이 허락한 여유가 없었다면, 그는 글만 쓰면서 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한다. 이 점에서 현실적 궁핍을 견디며 진정한 정신생활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나는 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키르케고르의 이 겸사는 문인 혹은 작가의 삶이 돈이라는 조건을 떠나 지속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역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올해 초 정부가 지원금 3400만원을 미끼로 삼아 한국작가회의에 ‘불법 시위 불참 확인서’를 제출하라고 했을 때, 키르케고르의 이 고백이 떠올랐다. 돈의 지배에 맞서 싸우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겠지만, 돈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작가의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 삶의 원초적 조건을 흔들어 정신을 순치시키려 든다면, 그것은 문학을 모독하는 짓이다. 이 모독적 처사에 맞서 작가들이 ‘저항의 글쓰기 실천위원회’를 만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키르케고르가 앓았던 우울증이란 말하자면 삶을 짓누르는 온갖 정신적 고통의 통칭일 것이다. 그 고통이 없다면 문학적 창조도 없다. 키르케고르는 창조를 낳는 그 고통을 ‘시칠리아의 암소’의 고통에 비유하기도 했다. 시칠리아의 암소는 기원전 6세기 시칠리아의 참주 팔라리스가 만든 암소 모양의 청동 고문도구를 말한다. 그 암소 안에 사람을 가둬 불을 지피면 폭군의 귀에는 희생자의 울부짖음이 아름다운 소리로 들렸다고 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첫머리에서 키르케고르는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고 물은 뒤 시칠리아 암소의 고문에 빗대 이렇게 말한다. “격렬한 고통을 가슴속에 품고 있지만 탄식과 비명이 입술을 빠져나올 때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불행한 사람이 시인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도 본질은 고통이다. 시인의 고통은 다른 말로 하면, 세계의 고통이다. 이 세계가 아프지 않다면, 시인의 아픔은 아무런 공감도 얻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 작가들이 ‘저항의 글쓰기 실천’의 하나로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의 ‘생태 고문’ 현장을 찾아가 그 고통의 소리를 청취했다. 포클레인과 불도저로 된 그 시칠리아 암소 앞에서 시인들의 통증 어린 말들이 퍼졌다. “강이 아픕니다. 우리도 함께 아프겠습니다.”

독일 문예비평가 발터 베냐민(1892~1940)은 우울의 깊이로 치면 키르케고르에게 뒤지지 않았다. 파시즘을 맹렬히 비판했던 그는 나치를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던 중 삶을 마쳤다. 친구 브레히트가 쓴 시구를 빌리면, “추적에 지쳐 육신을 눕히고는 다시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 마지막 해에 삶을 정리하듯 쓴 최후의 글이 ‘역사철학 테제’다. 그는 거기서 <새로운 천사>라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 속에서는 난폭한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댄다. 그 바람을 맞으며 천사가 서 있다. 작은 날개를 편 채 미친 바람 앞에서 버티는 천사. 천사는 뒤로 떠밀리면서도 끝까지 저항한다. 광풍을 이길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저항하는 것이다. 진군하는 이 시대 불도저 앞에서 작가들의 글쓰기는 천사의 날갯짓처럼 허약해 보인다. 그러나 천사가 꼭 패배하란 법은 없다. 같은 글에서 베냐민은 메시아는 온다고, “적그리스도를 이겨내며” 온다고 속삭인다.


한겨레신문 2010.4.15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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