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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감옥에 가보지도 않았고(군대 신병 시절에 정신교육 차원에서 사단에 있는 헌병대 감옥에는 가봤다) 생활해 보지도 않았다. 내가 초임발령을 받았을때 학교 영어 선생님으로부터 간접적으로 들어본게 다다. 그분도 도종환 시인과 같은 해직 출신으로,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감옥생활 경험이 있다고 하셨다. 그 부자유스러움, 답답함, 기묘함에 대해 들었을때의 느낌 아직도 생각난다. 글을 쓰고 싶은데 펜이 없어서 글을 쓸 종이가 없어서 남몰래 슬퍼했을 시인을 생각해본다. 동시에 쓰고 싶을때 읽고 싶을때 쓰고 읽을 수 있는 현재의 상황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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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2.4  손발 묶인 한 편의 시 감옥 밖으로 보냈습니다 

일천오백 교사가 학교를 쫓겨났고
영어의 몸 된 교사도 백명
처절한 여름이었습니다
볼펜도 종이도 없는 교도소에서
아이들 가슴속에 새긴 우리 이름
우리가 가는 곧은 길을 노래했습니다

감옥 생활을 시작하면서 장이 안 좋아 고생을 했습니다. 배탈과 설사가 멈추지 않는데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어 몸은 쇠약해져 가고 기력은 떨어졌습니다. 교도소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스스로 면도를 하도록 면도기가 제공되는 곳이 아닙니다. 칼이나 가위 같은 게 제공될 수 없고 끈이나 유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유리창도 없고 쇠창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로 겨울이면 찬바람이 몰아닥치고 여름이면 빗줄기가 지나갑니다. 머리를 깎거나 면도를 하는 일도 정해진 날이나 되어야 그 일을 맡은 재소자들 앞에 불려나가 했기 때문에 몰골은 갈수록 초췌해져 갔습니다.

정신적으로 더 힘든 건 바깥과 단절되어 소식을 잘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녁때면 방송뉴스가 나오긴 하지만 지나간 걸 편집해서 내보내주는 것이었고, 신문도 배달되어 오는데 저와 관련된 소식이나 제가 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가위로 오려내고 넣어 주었습니다. 걸레처럼 누더기가 된 신문이 들어오는 날도 종종 있었습니다.

면회 온 사람들을 통해서 소식을 듣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이 전국의 교사들이 명동성당 차가운 돌바닥에 모여 무기한 단식농성을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단식농성을 하다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거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나 병원노련 소속 의사·간호사들의 진료를 받으면서 여선생님들이 돌바닥에 누워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1500명이 넘는 교사가 해임 파면되어 학교를 쫓겨났으며, 100명이 넘는 남녀 교사가 감옥에 갇힌 처절한 여름이었습니다. 연일 비가 내리고 있는데 날바닥에서 굶어 쓰러지고 있는 선생님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잔인한 칠월이었습니다. 쥐들은 교도소 여기저기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 저는 단 몇 발짝도 걸어 다닐 수 없는 감방에 갇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때마다 터질 것 같은 심정을 어디에 써놓고 싶은데 교도소에서는 볼펜 한 개도 종이 한 장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교도소 교무과장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집필허가를 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교무과장은 미결수라서 집필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독립 운동가들도 감옥 안에서 집필을 하였고, 만해 한용운 선생 같은 분들도 일제 치하의 감옥에서 글을 쓰시지 않았느냐? 민주화되었다는 세상에 문인에게 글 한 줄 쓸 수 없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 하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건 오직 교도관이 보는 앞에서 봉함엽서에 편지를 쓸 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봉함엽서도 한 달에 몇 장밖에 쓸 수 없었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건 만년노트밖에 없었습니다. 만년노트라는 건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먹이고 그 위에 비닐을 덮은 것으로 연필 모양의 뾰족한 플라스틱 물건으로 눌러 쓰면 글씨가 써지고 비닐을 들면 글씨가 날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년노트에 글을 써볼 수는 있으나 남기거나 저장을 할 수 있는 노트가 아닙니다. 크기가 사륙배판 공책만했습니다. 에이(A)4 용지보다도 작은 크기의 물건입니다. 글을 쓰고 싶은 갈망은 넘치는데 글을 쓸 수 있는 연필이나 종이가 없다는 건 제게 고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만년노트에다 긴 시 한 편을 썼습니다. 취침나팔이 울리고 난 뒤 배설물과 누군가 흘린 정액 흔적과 땟물로 얼룩진 모포를 뒤집어쓴 채 마룻바닥에 엎드려 썼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쇠창살이 더욱 또렷해 옵니다.
잠 못 들어 뒤척이는 수인의 고적한 어깨 너머로
또 하루가 흔적 없이 저물었습니다.
때 묻은 모포를 끌어 덮으며
아직도 다하지 못한 일들을 생각합니다.
한 가닥 외로운 진실을 놓지 않고
굶어 쓰러지면서도 우리와 함께 있는
이름들을 조용히 불러 봅니다.
세상 밖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벗기우고
지금 알몸 위에 흰 수의를 걸치고 살아도
우리가 빼앗긴 세월을 반드시 돌려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감옥의 안에서나 밖에서나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빼앗긴 채 가슴에 수인번호를 낙인처럼 달고 살아도
아이들의 가슴속에 새기고 온 우리의 이름은
아무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뜻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이곳에서 거미줄에 날개를 묶인 곤충처럼
몸을 떨며 있기를 바란다 해도
설령 우리가 몸을 적실 물 한 방울에 얽매이게 하고
배를 채울 보리밥 한 술에 무릎을 꿇게 하여도
그리하여 우리를 짐승처럼 마룻장에 뒹굴게 하여도
우리는 이 길을 곧게 갑니다.
그렇게 살다 장승죽음으로 실려 나간다 해도
우리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허공에 풀잎처럼 걸려 있는 동안도
자기의 자리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며
한 톨의 사랑도 실천하지 않는 동료들이
아직도 내 빈 의자의 옆에 가득가득하다 해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습니다.
옳다고 믿어 이 길을 택했으므로
옳은 것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라고 믿었으므로
우리는 새벽이 오는 쪽을 향해
담담히 웃으며 갈 수 있습니다.
서슬 푸른 칼날에 수천의 목이 잘리고
이 나라 땅의 곳곳이 새남터가 된다 하여도
우리는 이 감옥에서 칼날에 꺾이지 않는
마지막 이름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쓰러져 있어도
빛나고 높은 그곳을 향해
우리는 이 길을 곧게 갑니다.

1989. 7. 24. 도종환 올림

- 졸시 <정 선생님, 그리고 보고 싶은 여러 선생님께> 전문

다음날 봉함엽서를 신청해서 교도관이 보는 앞에 앉아 만년노트에 쓴 시를 편지형식으로 엽서에 옮겨 적었습니다. 교도관은 이게 ‘편지냐, 시냐?’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시인이 편지를 시처럼 쓴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던 교도관은 그걸 윗사람에게 가지고 갔고, 여러 번의 검열을 거쳐 전교조 충북지부 사무실에 우편으로 배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는 곧 명동성당의 단식농성장에 대자보로 붙게 되었고 그 대자보를 본 <한겨레신문> 기자가 신문에 옮겨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감방 문이 화들짝 하고 열리더니 “나와!” 하고 외치는 교도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먹다 만 밥그릇과 국그릇을 마룻장에 둔 채 끌려 나갔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시를 내보냈어?” 하는 호통과 함께 다그치는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저는 “시를 몰래 내보낸 게 아니라, 정식으로 엽서를 써서 보냈다. 편지 형식으로 쓴 건데, 그걸 시라고 행 가름해서 실었나 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의 시가 신문에 실린 경위를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법무부에서 직접 연락이 왔다고 했습니다. 결국 제 시 때문에 교도소장을 포함한 아홉 명의 담당 교도관들이 줄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 때문에 징계를 받은 교도관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 시는 노래 테이프 속에 낭송으로 삽입되어 전국의 교사들에게 배포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같이 수감되어 있던 백상진 청주대 학생회장(현 충청북도지사 보좌관)이 이쑤시개보다 약간 작은 볼펜심을 구해다 주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고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 볼펜심 도막으로 몰래 숨어 시를 썼습니다. 그걸 검방 때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룻장 나무판자 하나를 들어내 그 밑에다가도 감추고 플라스틱 빗자루 손잡이 뚜껑을 분리해 그 안에다가도 감추고 별의별 곳에다가 그걸 숨겼습니다. 종이가 없어서 비누를 싼 속포장지에다가도 시를 쓰고 화장지 겉을 싼 종이 안쪽에다가도 썼습니다. 책 맨 뒷장 백지에다 깨알같이 쓰고 그걸 풀로 붙여 감추었습니다. 그렇게 쓴 시들을 모아 출옥 후 네 번째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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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24  첫 시집 낼 무렵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속삭였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⑬ 신경림 선생의 전화를 받고 

원고를 올려보냈습니다
몇편을 바꿨으면 한다는 편지에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시는 삶 속에, 이 땅 위에 뿌리박은
서정과 용기여야 한다고 믿었지만
형상화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동인지 <분단시대>를 내고 바쁘게 뛰어다니던 어느 날, 신경림 선생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 시집을 내고자 하니 원고를 보내라는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받으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전화 중의 하나였습니다. 원고를 들고 여기저기 출판사를 쫓아다녀야 할 신인에 지나지 않는 제게 시집을 내 주시겠다고 전화를 하셨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것도 창비에서. 부랴부랴 원고를 정리해서 올려 보내고 난 뒤 이시영 시인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낭창낭창 휘어지는 가는 글씨로 원고지에 써 보낸 편지 속에는 다른 시로 바꾸었으면 하는 십여 편의 시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좋은 시집을 내고자 하는 의도로 그러는 것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고 써 있었지만 낯이 뜨거웠습니다. 그 편지를 아직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습니다. 시집이 나오고서 보니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부족한 데가 많은 시집이었습니다. 시집을 내면서 저는 후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민중이니 민족이니 역사니 하는 것을 먼 곳에서 찾지 않는다. 식민지 시절에 앗기우며 한 세월을 보낸 할아버지, 태평양전쟁 말기 남양군도에 징용으로 끌려가 돌아가신 큰아버지, 그 큰아버지와도 싸웠을 군대에 배속되어 분단의 전쟁을 치른 아버지, 소금장수, 이발쟁이, 날품팔이, 농사꾼 형제들, 언청이, 못난이 누이들,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내 이웃의 삶 속에는 생생한 역사와 아리고 한스러운 흔적들이 흉터처럼 박히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민중은 내 가까운 피붙이와 내 자신 속에서 늘 꿈틀거리고 있다.

(…)시는 삶 속에, 이 땅 위에 튼튼히 뿌리를 박는 서정과 용기이어야 하리라 믿는다. 분단시대 약소민족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들 속에 서서 튼튼한 시를 쓰고 싶었다.”

민중문학, 민족문학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던 때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제게 민중이 어떻게 다가와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글입니다. 이 시집 안에는 <삼대>라는 연작시와 <죠센데이신따이>(조선정신대)라는 연작시가 들어 있습니다. <삼대>라는 연작시를 통해서 할아버지 때부터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의 이 나라의 역사를 우리 가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죠센데이신따이> 연작시는 애국봉사대 간호원이라고 속아서 열여섯 살에 버마전선에 정신대로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으나 조국에서 더 냉대를 당하고 있는 배옥수 할머니의 사례를 중심으로 아픈 역사를 재확인하고 우리 모두를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해설을 써 주신 이동순 교수께서는 이 작품이 평면적인 서술에 그친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다른 시들도 당시의 민중시들에서 보이는 고정화된 틀과, 따분한 투식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비판과 문학의 소집단 활동이 정서의 개별성을 거부하거나 문학성을 위축시키는 강박이 된다면 그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라는 지적도 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우려를 의식하면서 문학성과 문학운동성을 잘 아우르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시가 삶 속에, 이 땅 위에 튼튼히 뿌리를 박는 서정과 용기”이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서정과 용기를 조화시키는 일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문학의 서정성과 민족문학적 정신 두 가지가 서로 잘 스며들게 하는 시는 말처럼 잘 써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삶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는 시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의욕은 앞서 있었지만 그 앞선 의욕 때문에 어딘가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러운 데가 드러나곤 했습니다. 첫 시집 제목으로 삼은 시 <고두미 마을에서>도 그런 우려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 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뫼 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무꾼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발에 지워진다.
복숭나무 가지 끝 봄물에 탄다는
삼월이라 초하루 이 땅에 돌아와도
영당각 문풍질 찢고 드는 바람소리
발 굵은 돗자리 위를 서성이다 돌아가고
욱리하 냇가에 봄이 오면 꽃 피어
비바람 불면 상에 누워 옛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랴 쪽발이 발에 채이기 싫어
내 자란 집 구들장 밑 오그려 누워 지냈더니
오십 년 지난 물소리 비켜 돌아갈 줄을.
눈녹이물에 뿌리 적신 진달래 창꽃들이
앞산에 붉게 돋아 이 나라 내려볼 때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릴 줄줄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 12~14행은 단재 선생의 한시 <가형기일>에서 인용
-졸시 <고두미 마을에서-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오며> 전문


고두미라는 동네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의 옛이름입니다. 청주시 근교인 그곳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이 있습니다. 신규식, 신홍식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령신씨 문중이 그 근방에 모여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찾는 이가 많지 않고,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삼일절에 가 보면 문풍지가 다 찢어져 있곤 했습니다. 가장 비타협적인 독립운동 노선을 걸었고 이승만의 위임통치노선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탓에 해방된 조국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속이 상했습니다. 1936년에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뒤에도 일제가 매장허가를 내 주지 않아 유해를 몰래 암매장해야 했고, 최근까지도 국적을 회복해 주지 않아 후손들은 재산권 행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과연 해방된 나라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분단시대’ 동인들과 단재사당을 찾아갔는데 묘소 주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젊은이 둘이 근처를 서성이는 게 보였습니다. 형사들이었습니다. 거기까지 저희를 미행하며 따라온 것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첫 시집이니 출판기념회라는 걸 하자고 해서 시내에서 동인들과 선후배 문인들이 모였습니다. 돌아가신 채광석 선배가 오셔서 강연을 해 주셨습니다.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던 채광석 선배는 그날도 뒷주머니에 박노해의 노동시 원고를 복사해서 넣고 와 뒤풀이 자리에서 열정적으로 낭송을 하거나 혼자 몇십 분씩 노래를 해서 모인 사람들 기가 질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미운오리새끼’의 신동인 선배도 술이 취해서 참석하였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 같은 신 선배를 바라보며 조마조마했습니다. 이 따위를 시라고 써 가지고 출판기념회라고 이렇게 사람들 불러놓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냐고 소리치며 판을 뒤집을 것 같았습니다. 신 선배는 전두환 정권 칠년간 신문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금강경만 읽는다고 했습니다. 그의 눈에 저는 타락한 현실의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가는 걱정스러운 사람으로 비쳤을 겁니다.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일행들이 뒤풀이 장소로 옮겨가는 동안 신 선배는 마지막까지 출판기념회장에 남아 제게 걱정스러워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신 선배의 모습을 보며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생각했습니다. 구도의 길을 끝까지 벗어나지 않았던 사문 고빈다와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가 현실의 온갖 오탁을 경험하며 순례하는 싯다르타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불도의 길에서 떠나 카마라에게 가서 애욕을 배웠고 카마스바미에게서 장사를 배워 돈을 모은 뒤 그것을 낭비하고, 위를 사랑하고 관능에 아첨하며 사는 싯다르타를 보고 고빈다는 자네는 순례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순례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강에서 황제의 음성과 투사의 음성과 황소의 음성과 밤새의 음성과 산모의 음성과 탄식의 음성 이런 수천 가지 음성을 동시에 가진 강물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곧 깨달음의 소리 ‘옴’이라는 걸 압니다. 그걸 들을 줄 아는 것, 그 듣는 법 자체가 중요하다는 걸 배우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것, 세계를 경멸하지 않는 것, 세계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세계와 나 그리고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과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신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싯다르타의 그 말을 생각했습니다. 싯다르타가 거쳐 간 길과 고빈다가 지켜 간 길이 하나의 강에서 만나게 되듯 우리도 어디쯤에선가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채광석 선배가 있는 뒤풀이 장소로 내려갔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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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17  절망을 버리고 ‘분단시대’에 어깨를 결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⑪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공간’에서 그들과 통했고
어설프고 서툰 채
우리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무궁화 전설에 민중을 담은 시
‘울타리꽃’이 창간호에 실리고
경찰사찰도 시작되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그랬던가요?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김수영 <절망> 중에서)라고.

헤맴 십 년, 절망 십 년, 방황 십 년. 그렇게 십 년을 보내고도 “절망이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반성할 줄 모른 채 졸렬과 수치 속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문득문득 찔레 한 송이보다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아까시꽃만큼이나 향기를 지니고 살고 있는 것일까? 불두화만큼은 뿌리내리고 있는 것일까? 꽃 한 송이를 보며 그 생각이 치밀어오를 때가 있었습니다. 끝까지 문학의 길을 가자던 이들은 하나씩 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이중섭을 죽도록 좋아해서 “마누라가 창녀가 되고 자식새끼가 거지가 될 때까지 문학을 하자”고 소리치던 이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율도 감동도 없이 세월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나이 삼십이 되어간다는 것을 자꾸 의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은 시인은 “20대의 열정, 희망, 감수성, 방황, 함성 속을 지나서 30대는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해체 정리하지 않으면 한 편의 시도 남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30대 작가란 그들 자신의 20대적 문학을 전부 약탈해서 불태워 버리는 세대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삼십이립’(三十而立)의 동양적 세대론 속에 ‘선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절망과 헤맴 십 년 따위를 고은 시인은 해체하고 불태워버리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체하고 정리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를 만났습니다.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보았습니다. 나는 헤맴밖에 자랑할 게 없는데 동갑인 그녀는 삶으로 우뚝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몸 전체로의 삶이었습니다.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으로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일하는 가게는 헤매는 이들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우선 글쟁이들이 모였고, 모여서 시낭송을 하면 음악 하는 이들이 피아노를 치거나 플루트를 불었습니다. 연극쟁이들이 모여 마임을 할 때도 있었고, 가난한 화가들이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공간’이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그녀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같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김희식이라는 국문과 대학생을 만난 것도 그곳이었습니다. 한참 물이 오른 운동권 대학생인 김희식은 김창규라는 자기 선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광주항쟁 관련 유인물을 돌리려고 자전거에 싣고 가다가 붙잡혀 곤욕을 치르고 나온 전도사였습니다. ‘공간’에서 만나서 떠들다가 열이 오르면 근처 막걸리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습니다. 거기서 다시 대구에 있는 친구들을 소개해 주는 이가 있어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배창환, 김종인, 김용락, 김윤현, 정대호, 김형근 이런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곧 의기투합해서 청주와 대구를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정만진, 김승환, 김시천, 김성장, 정원도 등이 합류하였습니다. 대구 쪽에서는 정대호 시인이 학생운동을 한 경험이 있는 문청이었고 나머지는 교사가 많았습니다.

‘분단시대’. 여러 번의 만남 끝에 우리 모임의 이름이 이렇게 지어졌습니다. ‘분단시대’라는 말은 강만길 선생이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라는 책에서 쓰신 용어이기도 합니다. 강만길 선생은 “20세기 전반기의 민족사가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는 일을 그 최고 차원의 목적으로 삼은 시대라면 20세기 후반기, 즉 해방 후의 시대는 민족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을 민족사의 일차적 과제로 삼는 시대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 이 시기는 ‘분단시대’로 이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중서 선생 역시 <분단시대의 문학>이라는 책에서 “남북 역사의 모든 불행과 결핍의 근원이 바로 분단 현실 자체”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하셨고, “문학예술은 역사와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발견하고 인간의 불행과 기쁨, 필요와 능력을 밝혀주며 인간의 더 나은 운명을 개척해 나아가는 능력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 바 있는데, 두 분의 글과 백낙청·염무웅 선생의 글 등을 읽고 토론하면서 모임의 이름을 ‘분단시대’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몰려다니다 첫 번째 동인지를 내면서 우리는 동인지 맨 앞에 이런 머리말을 썼습니다.

“시는 만남이다. 안과 밖의 만남, 개인과 시대와의 만남, 자아와 그 자아를 둘러싼 상황과의 만남, 나아가서 민중적 진실과 역사적 진실의 만남, 정신적 구조와 역학적 구조와의 만남이다. 시는 그것들의 화해이어야 하고 악수이어야 한다.

시적 진실은 안에만 머물고 삶의 진실은 외면된 채 방치되어 있거나 불행한 시대와 역사는 왜곡된 파행을 계속해 가는데 시인은 폐쇄적인 자아의 성 내부에서 공허한 탄식을 되풀이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한 시대의 삶이 비극적이라고 할 때 시가 획득한 예술성이 전혀 그 비극의 진원지를 향해 바로 서 있지 못하다면 시는 그 속에서 개인을 구제하고 소극적 감상을 되풀이하면서 결국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

오늘날, 개인의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족과 민족의 역사적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은 단절되어 있다. (…) 국토의 분단에서 시작한 그것들은 결국 민족의 분단, 진실의 분단, 진리의 분단, 시대의 분단, 정신의 분단을 가져오고 만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나뉘어진 모든 것을 향하여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려 한다.”

-<분단시대> 제1집 머리말 (1984년, 온누리)

과학적으로 정돈이 덜 되어 있는 글입니다. 마음만 앞서 있고 논리가 정연하지 못한 글이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인 고백도 글 안에 들어 있고, 고은 시인의 보이지 않는 영향도 문맥에 배어 있는 걸 느낍니다. 분단시대와 분단 극복이라는 명제를 만나기는 했지만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토대로 하고 국가간 체제를 상부구조로 하며 분단구조가 응축된”(하정일, ‘탈식민과 근대극복’) 복잡하고 특수한 체제, 백낙청 선생이 말씀하신 ‘분단체제’의 극복이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태로 출발한 문학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설프고 서툰 통과제의를 겪으며 우리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1980년대 전반기 그때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기간행물이 다 폐간되어 글을 발표할 매체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과 같은 우리나라의 지성을 대표하는 문학지들이 폐간되어 발행되지 못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제 막 문단에 얼굴을 내밀려고 하는 때에 글을 발표할 매체가 폐간되고 없다는 것은 자연히 시대와 불화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문인들은 <실천문학>과 같은 부정기 간행물 즉, 무크지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와 경제> <오월시> <삶의 문학> <반시> <목요시> <자유시> 같은 동인지들이 쏟아져 나오며 이른바 동인지 문단 시대를 열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춘문예나 추천 등의 등단 방식에 얽매여 신춘문예용 시에 매달리거나 추천해줄 문인의 아류가 되는 길을 택하는 것이 못마땅하던 우리들은 이참에 등단제도 자체를 혁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으로 시대적·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 어떤 신문을 통해 등단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인지 <분단시대> 창간호에 저는 <고두미마을에서> <울타리꽃> <진눈깨비> <분꽃> <삼대>(연작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아직도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보다 더 절박한 시대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뷔작 중의 한 편인 <울타리꽃>은 이런 시입니다.


아들아, 나 죽어 이 집의 울타리가 되리라.
칼 뽑아 네 어미 아름다움 버혀 가려던
눈먼 무리 앞에 무릎 꿇 순 결코 없어
황망한 칼빛 아래 내가 죽거든
아들아, 억새풀 엉겅퀴 새 돌 눌러 날 묻지 말고
우리집 마당 가운데 나직하게 묻어다오.
혹 떨어져 나간 내 뼈 있거든
밤마다 숫돌에 갈고 갈아 화살촉 만들고
흩어져 날리는 머리칼 있거들랑
빠짐없이 추려 모아 화살줄 매어다오.
앞 못 보는 너희 아빌 핍박하러 오는 무리
날만 새면 사립문 앞에 눈 치뜨고 모이리니
내 어이 죽어선들 한적한 산그늘이나 떠돌며 다니리
아들아, 이 어민 속 붉은 꽃으로 꼭 다시 피어난다.
나 죽어도 내 집의 울타리꽃으로 피어난다.

-졸시 <울타리꽃> 전문


울타리꽃은 무궁화의 다른 이름입니다. 나라꽃인 무궁화의 전설을 바탕으로 쓴 시인데 권력에 대한 저항과 져도 져도 끝없이 다시 피어나는 민중의 끈질긴 정신을 표현해 보려고 했던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실려 있는 동인지 <분단시대> 창간호를 서울대학교 학생회에서 필독도서로 선정하는 바람에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경찰의 사찰을 받는 일이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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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10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시가 제게 물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제대하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소작농이 되어있고 시도 삶도 어설픈 채 겉돌았습니다
농사일을 시작하고 원고더미에 불을 질렀습니다
죽 한솥 끓여먹고 나니 문청의 얼룩들도 사라졌습니다 
 
어느 늦가을 저는 야간 근무를 하다 초소에서 몰래 박 신부님께 보내는 긴 편지를 썼습니다.

“신부님,

여린 햇볕에 녹았던 서릿발을 다시 얼게 하는 밤의 냉기가 적요한 모습으로 대지를 지나고 있습니다. 가끔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신비하게 앞산 계곡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신부님 당신의 옷빛 같은 어둠이 짙게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신부님,

살아 있다는 것이 눈물겹습니다. 한 술의 밥을 입안 가득히 넣고 씹는 순간 울음이 북받쳐 오릅니다. 내 떠돌며 지나온 곳마다 지은 카타콤 같은 밀실에서 올리던 묵도와 그 묵도하는 모음이 꺾어져 가는 공포로 밤 꿈은 어지럽혀져 있습니다. 무덤 속에서만 항거하고 빛을 향해 서서는 말을 잃는 서툰 진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지하의 기도 소리들을 지상에 올려 실존하는 사원 앞에 이끌어 가야겠습니다. 

중이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혼자만 득도하고 유아각성(唯我覺性)하여 무엇을 하겠다는 뜻도 없었습니다. 비록 갈라지고 때 묻은 손이지만 노동하는 이 손의 정직함을 바라보며 좀 더 분명하게 살아야겠습니다. 파티마성당의 풀과 나무 위에 숱하게 뿌린 내 오만의 이파리들이 썩어 새로운 한 포기 언어의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신부님,

어쩌면 당신의 눈동자가 이리도 오래 내게 살아 있는지요? 이렇게 고적한 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나는 또 무엇을 향해 이 밤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요? 이제는 꽃 하나 보이지 않고 어루러기처럼 번지는 갈대꽃, 환한 갈대꽃만이 시혼을 채찍질하는 바닷가. 언제 나는 긴긴 동면에서 깨어나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마주하고 슬픔을 마주하며 걸어가려는지요? 어울려 한바탕 마당굿이라도 하며 살 수 있을는지요?

칼로 일어선 자 칼로 스러지고, 파도는 파도를 삼키고, 밀려오고 밀려가면 변함없는 것은 의로운 바람. 이 땅에 태어나 할 일을 남겨두고 나는 다만 내부로 파들어가는 조개처럼 문을 닫고 깊디깊은 심연으로만 침전해 있었습니다. 언제 구슬을 품어 이 끝없던 기다림의 아픔을 길어 올리는 신의 그물에 온몸을 드러내 놓고 설 수 있을는지요? 부끄러운 하루, 비굴한 일상의 양식으로 배를 채우고 한 덩이 떡에도 매달리는 손은 검게 그을고 때가 끼어 하루 이틀 속죄로 아니 지워질 상흔만이 남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람은 어디까지 나를 이끌어 가려는 것일까요?

신부님,

오늘은 이상히도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말씀으로 하여 비어 있는 나의 이 잔을 가득 채우게 하고 싶습니다…”

몰래 그런 짓을 많이 했습니다. 몰래 편지를 쓰거나, 좋은 글이 있으면 근무 중에 공책에 베껴 적었습니다. 이청준의 <조율사>,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 에리히 헬레의 카프카 평전 <나는 문학이다>, 김성동의 <만다라>, 채광석 서한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이런 책들을 읽고는 밑줄 그었던 구절들을 공책에 옮겨 적곤 했습니다. 그렇게 옮겨 적은 글이나 편지나 글을 써 놓은 공책이 다섯 권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다섯 권의 공책과 숨어서 듣던 아홉 개의 클래식 테이프와 칫솔 한 개를 들고 제대를 했습니다.

제대를 하고 집에 와 보니 도시빈민으로 떠돌던 아버지는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청주 시내 외곽에 육십만 원짜리 농가를 전세로 얻어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농약통을 짊어지고 일어서며 취직 때문에 걱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는 산문집이라도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골방에 틀어박혀 슈만의 <피아노 A단조>,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 요한 슈트라우스의 <빈 숲속>을 게으르게 옮겨 다니며 원고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밤이면 견딜 수 없는 공허함, 허전함에 휩싸여 폭음을 하거나 흐린 하늘과 밤공기와 강은교의 <허총가>와 죽음의 냄새와 그리고 멸망과 부활 그 두 개의 유혹 사이를 헤매며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돼지를 키우느라 이집 저집 음식점 잔반통에 남은 찌꺼기를 걷어 자전거에 싣고 오는 동안, 멘델스존의 교향악만 듣고 있어야 글 한 줄이 쓰여진다고 하니 ‘문학은 도대체 얼마나 더 뻔뻔스러워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신경림 시인의 <산읍일지>와 같은 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눈 오는 밤에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 /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빼앗아/ 연탄을 사고 술을 마시고/ 숙직실에 모여 섰다를 하고/ 불운했던 그 시인을 생각한다/ 다리를 저는 그의 딸을/ 생각한다 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만 들을 것인가/ 눈 오는 밤에 가난한 우리의/ 친구들이 미치고 다시/ 미쳐서 죽을 때/ 철로 위를 굴러가는 기찻소리만/ 들을 것인가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라고 묻는 이 물음은 낭만주의적인 태도, 개인주의를 완전히 벗지 못한 문학 습관, 거기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몸짓이 문학창작의 주요 토양이던 날들의 삶의 모습 그 자체를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글이 안 써질 때마다 고독의 지구력이 부족한 때문이니 어쩌니 하고 떠들던 것도 삶에 대한 자신감 부족에서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문학적 오기, 이런 것도 끝내 갑 속에 든 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생전 해 본 일이 없던 농사일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며 살을 베고, 다리를 휘청거리며 볏가마니를 허리에 얹었습니다. 감자를 캐고 참깨를 털고 외양간을 치우고 인분 리어카를 끌고 마을 한복판을 지나 밭으로 갔습니다. 소똥을 치고 오줌을 퍼 나르다가 손에 똥을 묻히면서 ‘멸망하라 멸망하라 공허한 내 시여’ 하고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들일을 다니며 가을 한 철 보냈다
뒷주머니에 찔러 주던 백 원짜리
환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
니코틴 색으로 손에 배는 고적한 피로
콩과 깨를 거두고 무 두 접 뽑아 묶어
얼지 않을 땅에 묻고 땀을 닦으며 일어서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의 노역
베고 또 베어 버려도 벌판은 남아 있고
지난날의 쓸쓸함도 거기 어디 남아 있고
등에 얹은 볏가마니는
지고 가야 할 나이보다 무거웠다
먼지를 털며 올려다보는 새털구름 밑으로
하늘은 배고픔처럼 어두워오는데
시간은 나를 앞질러 갈 만큼 간 걸 알겠다
돌아오는 거리에서 마른 구역질을 하고
공연히 주먹을 쥐었다 펴곤 했다
내일은 소장수 백씨네 아랫텃논
마당질을 끝내러 가야 한다
호박잎을 걷어낸 양철지붕 위에서
바람이 떼를 지어 붉은 녹을 걷어차며
종점 빈터로 몰려가는 늦가을 저녁

- 졸시 <들일> 전문

문학적 진실이 삶의 진실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시로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해 삶도 시도 어설픈 채 겉돌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를 썼지만 그래서 발표하지 못한 채 처박아 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캐비닛에 들어 있는 원고더미들을 꺼내 마당에다 옮겨 쌓았습니다. 대학 때부터 머릴 싸매고 대들었다는 원고의 초고더미들을 쌓아놓고 거기에다 불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지나가다 그걸 보시고는 놀라며 왜 그걸 그냥 태워 내버리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원고지에 붙은 불을 끄더니 뒤란으로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을 못하고 멍하니 어머니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어머니는 뒷마당 화덕 밑에다 그것들을 넣으시는 겁니다. 화덕에다 그날 저녁에 먹을 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죽 끓일 불쏘시개를 하시는 겁니다. 죽 한 솥을 다 끓이신 어머니는 “거 봐라 죽 한 솥 다 끓일 수 있는데 왜 아깝게 그냥 태워 내버리니” 하시는 거였습니다. 가장 절망스럽게 보낸 날들의 흔적, 가장 몸부림치며 보낸 문학청년기의 얼룩들도 죽 한 솥 끓여 먹고 나니 흔적이 없었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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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전라도 배낭여행을 하며 망월동 5.18 묘역을 가보았다. 마음이 자연스럽게 숙연해졌다. 그리고 전시관에 있는 그날의 참상을 알려주는 사진들을 보며 눈물이 나왔다. 그 사진속의 잔인한 화면때문이 아닌, 그 사람들의 아픔과 억울함 그리고 그 사건의 원흉이 아직도 멀쩡히 떵떵거리며 살고있다는 불의 때문에. 조정환씨는 최근에 광주민주항쟁의 코뮤니즘적 성격에 대해 광주 민중이 광주를 해방도시로 창조했다는 내용의 <공통도시>를 출간했다. 읽을 책이 많기에 다음에 시간되면 읽어보고 싶다. 나에게 광주는 아무런 연결선.점이 없지만 그런 나에게도 광주는 하나의 슬픔으로 다가온다. 도종환씨의 그 아픔, 상흔을 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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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3  아까시꽃 핀 80년 5월 사격명령을 받았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⑩
 
  

» 아까시꽃 핀 80년 5월 사격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림 이철수

여수-순천 간 17번 국도에서
난 소총 실탄을 거꾸로 끼우고
총알이 나가지 않게 했습니다
시민이 적인가?
광주라는 갈림길에서
내 인생은 그 이전과 이후로
갈렸습니다  

쫓겨 간 학교에서 석 달을 근무하고 난 오월 하순,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군에 가려고 했었는데 하필 아버지가 담석증을 앓으셔서 군 입대를 연기해야 했습니다. 집안의 경제적인 문제를 일정 부분 책임져야 해서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대학원 진학을 사유로 군 입대를 연기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스물여섯 살이었고, 아까시 꽃이 하얗게 핀 오월이었습니다.

떠나오면서 아이들에게 “아까시 꽃이 피어 있는 동안은 선생님을 생각하다 그 꽃이 지거든 나를 잊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논산훈련소 연병장 가에는 아까시나무가 많았습니다. 훈련을 받다 잠시 쉬는 동안 황토에 누워 아까시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아까시 꽃잎이 눈발처럼 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저 꽃이 지거든 나를 잊으라고 말하고 왔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없이 군홧발에 차일 때도, 서른여섯 종류의 기합에 시달릴 때도, 장대비에 젖은 채 구보를 하며 눈물고개를 돌아올 때도, 각개전투 훈련장에서 철조망 밑을 기어갈 때도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티 없이 환한 얼굴로 웃던 여학생들의 얼굴과 천진난만하던 남학생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황토와 자갈밭에 몸을 던지며 훈련을 이겨냈습니다.

한번은 저녁을 먹고 식판을 씻으러 갔다가 우리 소대원의 식판을 훔쳐 달아나는 이웃 소대 훈련병 때문에 식판 하나 잃어버렸다고 소대 전체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군홧발에 차이고 내무반 침상에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자리가 이층 내무반 창가였는데, 그 와중에도 눈동자를 약간 옆으로 돌리니 이층까지 올라온 침엽수가 바람에 한가하게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조주 선사의 선문답이 떠올랐습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이니라.”

눈 깜짝 할 사이에 훔쳐 가고, 빼앗기고, 치고 박고, 도망치고, 폭력과 욕설과 명령과 통제의 언어가 난무하는 아수라의 한복판에서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익명의 존재로 사육당하는 나 자신과 훈련소 귀퉁이에 한 그루 나무로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이 비교되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자유로운 허정무위(虛靜無爲)의 상태에 이르러 있는 것, 도란 바로 그런 상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마음을 평상심으로 갖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논산훈련소 전후반기 교육을 끝낼 때까지는 그런 생각으로 잘 견디고 지내왔는데 여천으로 자대 배치를 받고 중대본부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중에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보다 조금 늦게 중대본부에 온 어린 상급자 한 사람이 “야, 담배 한 대 주라”고 한 말을 참지 못하고 그만 욕설이 오고가고 몸싸움을 하는 바람에 부대원 전체가 완전군장으로 연병장과 산기슭을 돌면서 하루 종일 기합을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잘 참아왔는데, 더 참았어야 했는데 제 실수, 제 잘못이었습니다. 완전군장에 오리걸음으로 능선을 오르내리던 상급자들은 내 곁을 스칠 때마다 낮은 소리로 쌍욕을 하거나 겁박의 말을 해댔습니다. 

본부 인사계를 하겠느냐는 제의도 완곡하게 거절하고 산악초소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더 빡빡 기는 곳으로 나를 하방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거기서 졸병 없는 취사병 노릇을 9개월이 될 때까지 하였습니다. 그해 시월, 아침에 휴가를 나갔던 고참이 급히 되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잘 때도 군화를 벗지 않고 누워 대기해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죽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취사병이었습니다. 얼어서 갈라터진 손, 때를 제대로 닦지 못해 검고 가늘게 갈라진 손으로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봄 사월이 되어서야 첫 휴가를 갈 수 있었습니다. 휴가를 나와서 대학에 간 제자들을 만났다가 바깥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 그리고 학내시위, 시내진출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귀대를 하고 나서도 오월은 뒤숭숭했습니다. 하루는 근무를 서고 있는데 무전기로 급한 전언통신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9733, 9335, 7535, 7549, 9547… 이런 네 자리 숫자로 된 암호들이었는데 다 받아 적은 뒤 암호해독판을 가져다 전통문을 풀어보니 제목은 ‘사격명령’이었습니다. 1. 먼저 쏘지 말 것. 2. 신체 하부 쪽을 쏠 것. 등등이 차례차례 풀어져 나왔습니다. 부대에 있는 모든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대대본부에 집결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이동했습니다. 트럭이 부족해서인지 민간차량을 징발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고향이 광주인 군인 둘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습니다.


“너 정말 총 쏠 거니?”

“그러게…”

고향사람들을 향해 어떻게 총을 쏘아야 하느냐는 말이었습니다.

고향이 광주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쏘아야 하는가? 그게 군복을 입은 우리들이 할 일인가? 저들이 적인가? 저 역시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상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배치받아 내린 곳은 광주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여수-순천 간 십칠 번 국도의 어느 고갯길이었습니다. 여수 한국화약에 있는 무기와 탄약을 가지러 오는 차량을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광주 전남 지역의 예비군 무기고가 열리고 칼빈총으로 무장한 시민군 차량이 내려오는데 그걸 차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삼중으로 설치한 바리케이드 앞에 M16A1 소총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오월인데도 밤에는 무척 추웠습니다. ‘총을 쏘아야 할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저는 소총의 탄창버튼을 눌러 탄창을 분리해냈습니다. 그리고 자동으로 발사하게 되어 있는 탄창 맨 위 실탄을 손으로 눌러 빼내어 거꾸로 끼워 넣었습니다. 맨 위에 있는 탄알을 거꾸로 장착해 놓으면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탄창을 밀어 넣었습니다. 탄창이 밀려들어가며 ‘철커덕’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철커덕’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잘못되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은 생각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상태로 오월의 밤을 견디었습니다. 며칠 뒤 군복 윗주머니에 있는 군용수첩에다 시 한 편을 썼습니다. 
 
» 아까시꽃 핀 80년 5월 사격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림 이철수 
 

사격명령이 떨어지던 날
탄창 속의 M16A1 신형 탄알처럼
징발된 민간차량에 가지런히 탑승되어
비포장도로를 달려갔다.
정갈한 저녁 바람은 예년처럼
보리수염을 쓸어가고
개인호를 파고 들어앉은 우리 앞에
인도지나의 풍문으로 듣던 안개가
호남평야를 기어오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몰래 탄창 제일번 실탄을
거꾸로 장전하는 짧은 순간
가장 깊은 밤의 이슬이
어깨를 밀고 들어왔다.
그 밤 터무니없는 죽음의 가도에서
고려중기의 젊은 농군을 만나고
亡伊(망이)와 亡所伊(망소이)를 만나고
정중부의 다듬어진 칼과 보현원의 차디찬
화강암에 이마를 부딪고 쓰러진
그 흔한 죽음의 기록도 없는 한 야사의
문신들을 만났다.
십칠번 국도 위에서 역사를 우롱하던 바람은
한 찰나도 빼놓지 않고 피묻은
뻐꾹새 울음을 귓가에 실어오고
부대끼는 밤구름을 능선 위에 옮겨왔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도
이제 나의 개인화기는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역사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역사여
구름 그림자에 눌리운 이 깜깜한 오월의 국도 위에서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인지
당신도 헤아리고 있는가.

- 졸시 <삼대 8. 사격명령> 전문  

그렇게 요행히 그 오월을 넘겼지만 제가 군복을 입고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저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 부끄러움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참담함이 지금까지 저를 밀고 왔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광주 장면을 볼 때도 펑펑 울었고, <화려한 휴가>를 볼 때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광주항쟁 30년이 되는 올해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마련한 조촐한 자리에서 광주항쟁에 관한 판소리를 듣다가도 울었습니다. 광주라는 갈림길에서 제 인생은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로 갈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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