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11 (금) 서울시향 말러 교향곡 7번 성시연 부지휘자

역시나 공연 후기 페이퍼를 느즈막히 작성한다.(이번주 금요일에는 9번 교향곡이 잡혀있다) 요즘 ‘말’들이 많다. 정명훈 서울시향 음악감독의 연봉이 20억이 넘으며 너무 과하다고 말이다. 사실 연봉은 2억이 조금 넘는다. 문제는 그 이외의 부수 비용과 그 지출내역이 문제다. 제대로 회계처리가 되지 않은 듯 하다. 

그런데 이 논쟁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하다. 왜 소수의 사람들만이 듣는 클래식 음악에 그것도 우리 음악도 아닌 서양음악에 이렇게 많은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가, 그 돈 있으면 ‘국악’에나 투자해야 한다. 이런 식의 비판은 정말 아닌 듯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 서울시장을 지지한다. 그리고 정명훈 지휘자의 정치적인 색깔을 싫어한다. 그렇지만 정명훈 지휘자의 음악은 좋아한다. 그리고 그의 취임 이후 서울시향의 발전은 일정 부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디 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한다.

그러면 이제 공연 애기를 해보자. 벌써 1년이 지났다. 작년 8월 26일 말러 교향곡 2번의 감동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그 전에도 말러의 교향곡을 좋아했지만, 그 날의 공연 이후 더한 애착과 ‘실연(實演)’ 감상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오늘은 교향곡 10번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명훈 지휘자가 아닌 성시연 부지휘자가 지휘봉을 잡았다. 제임스 드프리스트의 교향곡 10번 공연(사실 이 날 공연도 다른 어떤 공연보다 상당히 완성도 높은 공연이었다고 생각한다)때는 객석의 빈자리가 꽤 보여서 이번 공연에서도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걱정했던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날 첫곡은 Wagner의 Lohengrin 1막 전주곡이다. 예습은 DG에서 1971년 녹음한 Rafael Kubelik 지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의 연주를 들었다. 아직 오페라를 듣고 있지는 않아 느낌은 사실 별로다. 오페라 전주곡 정도 듣는 정도이니, 하여튼 이 음반은 로엔그린 음반중 손에 꼽히는 명반이라고 불리우는데 음질은 그렇게 좋지는 않는 듯 하다.  



서울시향의 로엔그린 1막 전주곡의 러닝타임은 8분 30초 정도였다. 다른 연주와 대동소이한 수준이였다. 도입부에 천천히 이어지는 1바이올린과 2바이올린의 묘한 멜로디 라인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음반으로 들을 때는 그렇게 따로 구분해서 듣지는 않는 편이지만 공연장에서 보게 되면 눈에 보이는 연주자들의 움직임과 소리를 자연스럽게 구분해서 듣게 된다. 그러면서 악기에 대해서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하여튼 도입부 주요 멜로디 라인의 선율 처리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담백하면서도 유려하다. 그리고 호른의 소리도 상당히 깨끗하다. 이런적 처음이다. 살짝 아쉬운 점은 후반부 클라이맥스 부분에서의 심벌즈의 소리가 너무 소심하게 처리된 듯 하다.

드디어 말러 교향곡 7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운 곡이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이들이 이 곡을 어려워 하는 것 같다. 우선 예습은 크게 두 앨범으로 들었다. SONY에서 1965년 녹음한 Leonard Bernstein과 New York Philharmonic의 앨범, 그리고 Hanssler에서 1993년 녹음한 Michael Gielen과 SWR Sinfonieorchester Baden-Baden und Freiburg의 앨범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운 곡인 이 곡의 나름의 매력을 느끼게 해준 이는 ‘길렌’ 옹이다. Hanssler에서 나오고 있는 그의 앨범들의 경우 가격도 비싸고 구하기도 그렇게 쉽지 않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다행히 음원으로는 좀 가지고 있다.) 처음으로 그를 알게 된 것은 헌책방(신촌에 있는 ‘숨어있는책’)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을 때이다. 그때 들은 곡은 브루크너 교향곡 3번이었다. 내가 처음 브루크너 교향곡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교향곡 3번 부터였다. 헌책방에서 이리저리 책을 고르며 귀에 들어오는 길렌 옹의 브루크너 사운드를 들으며 기분 좋게 책들 사이를 헤매던 기억이 난다. 책을 구매한 이후에 친절하신 사장님께 음반을 빌려 들어보게 되었다.  



나 같은 경우 아직 애기가 어려 집에서 여유 있게 오디오에 CD를 넣고 감상을 하지는 못하고 거리를 헤매며 헤드폰(AKG K-450 3년 정도 전에 샀는데, 크기도 적당하고 소리도 괜찮은 듯 하다. 다른 놈 하나를 사고 싶은데 혹 좋은 헤드폰 아시는 분?)을 통해 듣거나 운전(이번에 새로 산 차가 Bose 스피커가 달려 있어 나름 들을만 하다)을 하며 듣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길렌의 말러 7번의 경우 1악장 도입부터 내 귀에 ‘쏙’ 들어왔다. 음질도 상당히 맘에 들었다. 멜로디의 변화가 크고 소리의 폭이 큰 이 곡의 경우 잘 못하면 귀가 상당히 피로할 듯 한데, 79분이나 되는 이 곡을 상당히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Gustav Mahler Sinfonie No.1 4mov Sinfonieorchester des Südwestfunks
Dirigiert von Michael Gielen Freiburg, 2002 

그러면 서울시향 성시연 부지휘자의 말러 7번은 어떨까? 1악장. 러닝타임은 21분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다들 기대하고 있을 도입부의 테너호른(실제로는 처음 봤다. 연주자가 악기를 잡는 방법이 좀 특이하다) 솔로. 연주자도 외국인으로 전용 연주자를 따로 기용한 듯 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처음부터 어긋난다. 도입부의 “빰빠~빰빰~~”하는 부분부터 이상하다 싶더니 중간부분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음이탈이 발생했다. 번스타인의 1965년 앨범처럼 당당하게 쭈욱 뻗어나오길 기대했는데 너무 과한 기대였나? 그리고 워낙 튀는 부분이라 조금의 음이탈도 귀에 쏘옥 들어올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아쉬웠다. 그 이후 보니 연주자의 얼굴도 멀리 있는(난 항상 2층 A블록 맨 오른쪽 통로 부분에 앉는다) 나에게 보일 정도로 티나게 좀 붉어진 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약간 자신감이 상실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호른 파트는 상당히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서울시향의 공연 후기를 쓰며 항상 언급하는 부분이 호른 파트의 약점이었는데, 오늘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1부의 로엔그린 1막 전주곡에서도 느낀점이지만, 오늘 호른 파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보였다. 호른 부수석인 미샤 에마노프스키(Michal Emanovsky)의 오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나머지 한명 전 6번 공연때 보였던 인물인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1악장의 발전부 초기 부분의 바이올린 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들리더니 끝부분 하프의 아름다운 소리에 이어지는 바이올린 솔로는 왠지 전체 음악과 어울리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확연히. 'solo'라고 하면 왠지 "나야 어때 멋있지.."해야 할 것 같은데, 이때는 "제 뭐야 별것도 아니네..."하는 듯한 인상이라고 할까?  

사실 1악장 중 최고(?)는 후반부였다. 언제나 만족감을 주는 팀파니 수석 아드리앙 페뤼숑(Adrien Perruchon)도 후반부에서 실수를 한 듯 보였다. 치면 안되는 부분에서 한 번 친 듯 보였다. 이것은 다분히 내 느낌이다. 미묘한 연주자의 표정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후반부에서는 완전히 모든 악기들이 따로 노는 듯 했다. 비유하자면 지휘자 4명이서 연주를 하는 듯 했다. 연주자들이 집중도가 확연히 떨어지는 듯 보였다. 당연히 잔실수도 많이 들렸다. 그런데 당시 공연장에서 듣기에도 이 곡은 지휘자건 연주자건 상당히 까다로운 듯 한건 사실이다.

2악장 ‘Nachtmusik I’이다. 러닝타임은 15분 약간 넘은 듯 했다. 다른 곡들도 찾아보면 14분에서 17분 정도로 연주되고 있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긴 시간은 EMI에서 1968년 녹음한 클렘페러와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음반으로 22분이다. 2악장 또한 음산한 호른 솔로 파트가 시작을 알린다. 그에 이은 클라리넷. 정말 ‘베리 굿’이다. 서울시향의 목관 특히 클라리넷 파트는 지금까지 워낙 좋았기 때문에 으레 그러려니 한다.(ㅋㅋ) 그러나 전체적으로 패시지(passage)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딘지 자꾸 귀에 거슬린다. 단순히 원래 곡의 특징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상당히 많은 부분이었다. 2악장을 들으며 드는 생각은 확실히 어려운 곡이라는 생각이다. 조금만 집중이 흐트려지면 ‘삼천포’로 가기 딱 쉬울 듯 하다.

3악장 Scherzo이다. 런닝타임은 10분 정도이다. 아르떼 TV를 통해 몇 번 본 성시연 지휘자의 모습도 그랬지만(물론 머리스타일은 조금 바뀌었다) 지휘 동작을 보면 나에게는 좀 부담스럽다. 좀 ‘과도’하다는 느낌이다. ‘감정의 쓰나미’? 하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검은색 연미복의 안감이 보였다. 그런데 검은색과 너무 대비되는 분홍색이었다. 내 스타일이 뭘 보면 여러 가지 다양한 면을 보는 스타일이라 이런 것 까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쓰고 보니 내 자신이 좀 웃기긴 하다.

연주 내내 느끼는 거지만, 이번 연주에서는 유독 지휘자가 첼로 파트를 보지 않았다. 지휘자 왼쪽부터 1바이올린, 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파트로 구성되었는데, 연주 내내 첼로쪽은 보지를 않는게 아닌가? 왜 그런지 지금도 궁금하다. 참고로 이날 첼로 수석은 이정란 부수석이 맡았다. 완전히 상황이 첼로 파트가 지휘자에게 ‘따’ 당하는 느낌이었다.(심지어는 4악장 첼로 솔로 파트에서 조차 눈길을 주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가 예민했던 걸까? 그리고 재미있던 사건은 연주를 들으면 정명훈 지휘자처럼 암보로 지휘하는 사람도 있고 간단한 총보를 보고 지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날 성시연 지휘자는 조그만 총보 두고 지휘를 했는데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렸다. 왠지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나에게는 크게 느껴진다. 지휘자가 그렇게 크게 소리날 만큼 총보를 넘기는게 무슨 의미였을까? 긴장을 했다. 아니면 뭔가 연주에서 틀리거나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 신경질적이었다? 하여튼 별 생각을 다하는 듯하다!!

다시 Nachtmusik II이다. 4악장의 러닝타임은 14분 정도이다. 4악장의 백미는 1바이올린 맨 뒤편에 있던 기타와 만돌린이었다. 음반으로만 들을 때는 절대 알 수 없는 이 악기들의 매력 말이다. ‘띵띵띵띵...’하는 소리가 아주 묘하게 들렸다. 타악기 주자들은 편히 쉬고 있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 말이다. 그런데 불연 듯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지휘자들의 왼손과 오른손 지휘봉의 움직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물론 지휘법과 관련된 책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것까지 손대기는 힘들 것 같다. 하여튼 궁금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지휘봉을 드는 지휘자들도 있을까?  

  

 

Gustav Mahler, Symphony No. 7 Mov. 5, "Rondo-Finale: Tempo I (Allegro ordinario)"
Conducted by Leonard Bernstein, Wiener Philharmoniker  

대망의 5악장이다. 러닝타임은 17분 30초 정도로 평이한 수준이었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성공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5악장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는 5악장이 어색하기도 하련만 시작을 알리는 페뤼숑의 팀파니 타격은 정말 발군의 실력이었다.(아마도 4악장에서 쉬면서 힘을 많이 비축한 듯 하다. ㅋㅋ) 또한 발전부에 나오는 팀파니 솔로 부분은 거의 드러머의 현란한 움직임과 다르지 않았다.(그러고 보니 팀파니의 북도 5개였다.) 왼손, 오른손 반대로 움직이며 타격하는 모습은 전성기 젊은 시절의 메탈리카 드러머 라스 울리히(Lars Ulrich)를 보는 듯 했다.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아도르노는 5악장에 대해 “화려한 외부와 궁핍한 내부 사이의 불균형”이라 비판했고, 음악학자 데릭 쿡 역시 이 악장을 실패작으로 애기 했다고 한다. 물론 전문적이 식견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의 ‘복잡’한 의견일 것이다. 범인들이 보기에는 그냥 ‘밤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음악에 난대 없이 튀어나오는 ‘팡파르’이지 않을까 한다. 물론 ‘난대없다’는 건 역시나 전문적 식견 없는 나 개인의 생각일 뿐이다.

이제 3일만 있으면 말러의 9번 교향곡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있으면 대망의 8번 ‘천인 교향곡’도 들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아쉽기도 하다. 다음에 꼭 다른 악단이든 서울시향이든 말러 치클루스를 진행 했으면 한다. 하지만 다행히 내년 서울시향 시즌 티켓을 전체 패키지로 싸게 구매해서 정명훈 지휘의 1월 13일 볼로도스와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부터 12월 28일 대망의 베토벤 교향곡 9번까지 표를 벌써 예매해 두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공연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벌써 기대된다. 
  

ps : 내년 시즌 프로그램은 보면 객원지휘자들의 면모가 상당히 매력적인건 사실이지만, 정명훈 음악감독의 프로그램이 상대적으로 너무 적다. 이 정도면 사실 상임 지휘자라고 애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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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1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1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낙태와 관련된 상당히 논리적이며 통찰력 있는 글 같아 옮겨 본다. 핵심음 중간 소제목인 '낙태로 내몰고 낙태를 금하다'라는 글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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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플로마티크 19호(2010.4)  낙태를 줄이려거든 낙태를 허하라  

낙태는 여러 겹에 싸여 있는 미스터리이다. 한국은 낙태가 가장 많은 국가군에 속한다지만, 낙태가 불법인지라 그 전체 수와 동향은 베일에 싸여 있다. 전체 낙태 수는 많게는 연간 150만 건 혹은 60만 건, 적게는 35만 건 등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대다수 낙태는 모자보건법상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사유에 해당하지 않기에 형법상 범죄에 해당하지만, 형사상 기소되는 예는 매년(1980~2002) 10건 내외이며, 이 중 유죄판결을 받는 예는 드물다. 인식조사를 보아도 낙태가 불법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이다. 이렇게 법과 낙태 현실이 괴리되어 있는데도 입법부는 낙태 관련 법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낙태는 배우자가 있는 한국 여성이라면 전체의 절반 내지 적어도 3분의 1 정도가 ‘보편적으로’ 경험함에도, 한국에선 낙태를 옹호하고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는 담론이나 사회운동은 별로 없다. 낙태를 하거나 당하는 여성의 경험은 불법이기에 말해지지 않고 지지되지 않으며, 공적 사안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여성의 낙태 경험은 무서울 정도로 침묵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여성에게는 사실상 낙태의 자유가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낙태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한국의 만연한 낙태는 한국 여성의 신체적·성적 자기선택권의 발현인가. 한국에서 이 많은 낙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낙태와 ‘출산전체주의’ 국가  

 최근 ‘프로라이프의사회’는 한국의 높은 낙태율을 저출산의 맥락에서 제기해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들을 고소·고발하면서 엄정한 법의 집행을 요청하고, 생명의 숭고함을 주장하며, 가엾은 태아의 생명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들은 현재 모자보건법이 임신중절의 합법적 사유로 인정하는 강간으로 인한 임신마저, 그리고 합법적 사유로 인정치 않는 10대의 임신 역시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태도를 가진 것 같다. 21세기 한복판에서 남녀의 성교는 모두 출산으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출산전체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것인지 우려된다. 과연 낙태를 금지하고 엄격히 처벌하면 낙태가 줄어들까. 나아가, 낙태가 근절되고 출산이 늘어나는 것만이 바람직한 목표인가. 국민이, 특히 미혼 여성이 성교를 하지 않으면 낙태는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낙태 문제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생명론·출산론·성성(Sexuality)론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먼저, 여성의 낙태 결정을 단지 ‘생명권’에 반하는 ‘선택권’으로 관념하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널리 알려진 미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법정 의견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가는 의학·철학·신학 분야의 주제로서 이들 전문가가 합의에 도달할 수 없다면 법원은 이에 답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고 선언했다. 이런 물음에 누구도 간단히 답할 수 없음에도, 낙태에 대해서는 반생명적이라고 잘라 말하는 태도가 오히려 오만하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체외수정이 이루어지고, 인공적으로 다수의 수정란이 배양되며, 자궁에 이식되지 않은 채 동결 보존된 수정란이 존재하며, 다태아 임신 때 선택적 태아 감소술이 행해지는데, 이런 생명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


▲ <거리의 여성>, 2001-돌로레 마라  

 인간은 언제나 모체 안에서 잉태되고 형성되고, 태어나서도 취약한 존재로서 지속적인 보살핌을 받아야 사람 구실을 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그렇다면 자녀를 낳기로 한 여성과 남성의 선택, 아동을 양육해온 대다수 여성의 노고에 대해서 우리 사회와 국가는 ‘생명 존중성’을 인정해준 적이 있는가. 잉태보다 훨씬 더 길고 복잡하게 이루어지는 보살핌 속에서만 가능한, 과정(Becoming)으로서 생명이 자궁 안에서 수태되는 수정란으로서의 생명과 견줘 지나치게 도외시돼온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 국가와 시민, 더 나아가 서양과 동양이라는 비대칭적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잉태됨으로써 존재하는 생명뿐 아니라 끊임없이 재생됨으로써 존재하는 생명관이 요청된다.  

 더 나아가, 몸속 태아와 임부를 마치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는 지금의 선택권 대 생명권 구도가 허구적이다. 임신한 여성은 한 생명 안에 두 생명을 키우는 신비하고 생산적인 경험을 하는데, 이러한 ‘연결성’이 임신 종결 결정에서 완전히 부재하는 것일까. 말할 나위도 없이 임부는 자신과 아이의 장래를 예견하고, 양육 환경을 돌아보고, 불가피한 사유에 의해 임신 종결을 결정한다. 그렇게 ‘믿어준다면’ 이 역시 아이와 자신의 복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모성적 사유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낙태를 바라보는 ‘아이의 생명 대 임부의 생명’과 같은 이분법이야말로 아이와 어머니의 연속성에 대해 알지 못하는 ‘비모성적 사유’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낙태로 내몰고 낙태를 금하다  

 낙태한 임부를 비난할 뿐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이 사회는 임부의 임신 종결 결정과 그 이후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어렵다. 우리 형법의 낙태죄 보호법익은 태아의 생명을 주법익으로, 임부의 생명과 신체를 부차적 법익으로 한다. 낙태(즉, 출산 여부)에 걸린 여성의 이익과 낙태를 하지 않아서 당할 여성의 불이익을 그저 임부의 생명·신체라고 보는 법의 태도에서 볼 때, 여성의 법익에 대한 법리가 얼마나 미진한지, 모성과 아이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를 절감한다.  

 나는 한국 여성의 대다수 임신 종결 결정은 더 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감수하는 행위로 이해한다. 한국에서 청소녀, 미혼·이혼 여성 등 법적 배우자가 없는 여성은 출산하지 않도록 규율되고 있다. 이 여성이 출산했을 경우, 그 아이는 ‘사생아’(私生兒)로서 한 국가의 정상적 성원에서 배제된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게 사생아 지위를 주면서까지 그 어려운 출산과 양육의 길을 가려 할 것인가.  

 비혼 여성에게조차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여성은 ‘임신하지 말라’는 것이고 성관계를 하지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산부인과 의사들도 인정하듯이, 어떤 피임 방법도 100% 성공률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이든 원치 않은 임신은 근절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낙태 규제는 여성의 낙태와 출산 선택권의 규제 이전에 성생활의 규제이자 훈육이다. 낙태가 금지된 나라에서 비혼 여성은 성교 때마다 임신의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여성과 여성의 성을 가부장적 결혼에 종속시키는 것인가.  

 한국 여성의 낙태 선택권을 말하려면 그 전제로서 성적 자기결정권, 즉 성교 결정 자유와 권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낙태하는 것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여태아로 판명되어 낙태하는 것을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캐서린 매키넌의 말을 빌리자면, 무쇠 주먹에 씌워진 벨벳 장갑처럼 현실을 은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대다수 낙태의 현실은 선택권 대 생명권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곳에 있다.  

 게다가 자녀 양육이 거의 전적으로 ‘사적 가족’(친밀성 집단)에 맡겨진 상황에서 국가, 종교단체 혹은 의사회 등 어떤 제3자도 친밀성 집단에 아이 출산과 낙태에 대해 명령할 권한이 없다. 아이 낳을 것을 강요하는 공적 주체가 있다면,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제10조), 양성평등(헌법 제11조 제1항, 제36조), 사생활의 권리(제17조) 등에 반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 국가와 법의 낙태 금지는 단지 선택권의 제한일 뿐 아니라 신체통합권과 운명통제권, 시민권의 제한이다.  

 일각에서는 낙태 선택권에 편향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낙태한 여성도 불행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이다. 한국 여성에게 부족한 것은 낙태할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권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낙태 정책의 목적은 그저 낙태를 줄이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의 성과 재생산 자유, 즉 낳고 싶은 자는 잘 낳아 기를 수 있는 자유와 책임, 낳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을 의미하는 ‘재생산 권리’(Reproductive Rights)와 ‘재생산 정의’에 있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재생산’이란 인간의 재생산을 뜻하고, ‘재생산 권리’란 성교·임신·출산·양육에 이어지는 자유권과 사회권을 통합하는 인권의 틀이다. 국가 인구정책 관점에서 좌우되던 재생산 문제를 이제 시민인 여성과 남성이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권한을 돌려주어야 한다.  

 요청하는 바는, 첫째 불가피한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모자보건법의 큰 틀을 현재 인공임신중절의 정당화 사유 방식에서 기한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모자보건법 시행령에 비춰 24주까지는 낙태 가능 시기로 하고, 12주까지 낙태는 임부의 의사에 기초해 합법적 의사로 이루어졌다면 처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미성년의 임신과 사회·경제적 사유(빈곤, 기존 자녀 수 등)의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 외국 사례에서 볼 때, 낙태의 범죄화와 낙태 빈도 간에는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낙태가 줄어드는 것은 법률적 규제 때문이 아니라, 피임의 실천, 민주적 성관계, 자녀 양육의 호조건, 다양한 가족 형태 인정, 또 이것들을 위한 교육 등 여러 조건에서 가능하다.  

 둘째, 원치 않은 임신을 줄이는 것이 낙태 감소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다. 성교육과 피임교육의 현실화뿐 아니라, 성관계의 의미를 단지 남녀 간 성교가 아니라 임신과 출산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피임 실패를 예견할 때, 사후 피임약의 쉬운 보급도 요청된다.  

 셋째, 미혼·동거·동성애 관계 등도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고 지원하는 사회문화가 필요하다. 이들이 법률혼 가족에 비해 차별받지 않게 하는 제도와 문화가 요청된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낙태는 그리 미스터리적인 것만도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교육, 민주적 성관계, 피임 보급처럼 낙태를 줄이는 문화가 없기에, 낙태는 최종 혹은 유일의 여성의 자기방어 수단이 돼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낙태는 여성의 낙태 권리 실현을 나타내는 정도보다 한국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출산권의 제약을 나타내는 정도가 강하다고 해석된다. 요컨대, 한국 여성의 높은 낙태율은 남성 성 자유의 귀결인 셈이다.

 차별 없는 민주적 성관계를  

 원치 않은 임신에 따른 낙태는 대다수 불가피한 결정이며, 국가가 처벌하지 않더라도 임부에게 긴 육체적·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체험이다. 국가가 낙태를 범죄로 규정해놓는다면 낙태는 임부에게 깊은 죄의식을 남길 것이고, 그 체험은 침묵 아래 짓눌린 채, 태아는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불가피한 낙태를 허용하는 등 관련 법을 합리화해 태아와 그 어머니의 관계를 해명해주어야 한다.


글•양현아
한국젠더법학회 회장. 법사회학과 법여성학을 강의하고 있다. 사회학 박사로서 사회문화이론, 가족법, 일본 군위안부, 구술 증언, 재생산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관심과 사회변동은 지식과 이성뿐 아니라 정서와 미감에서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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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일을 하다 인터넷 공간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문득 내 싸이에 들어가 예전 글들을 보게되었다. 자연스럽게 과거의 사람들과 일들이 남아있었다. 그러다 2006년 9월의 어느 밤에 적은 글이 하나 있어 다시 한번 그 때를 추억하며 옮겨 본다. 다시 읽어보니 그래도 그 해 그 일 이후 나란 인간은 조금은 성숙해진듯 하여 나름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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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함...집에 오는 길

 

매번 오는 길이다. 매일 보는 것들 매일 지나가는 길...하지만

가끔 그 길을 걷을 때 문득 우울해진다. 사소한 풍경 사소한 글들

다분히 사소한 것들로 인해 나는 우울해 진다. 우울해진 나는, 나의

우울하고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소주를 마신다. 조금이나마

이런 나의 우울하고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하지만 단지 내

마음을 달랠뿐이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듯이...본질적으로

나의 우울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럴땐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아프고 아파서 내 머리 속을 지우개로 지우고 싶다. 그럴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ㅋㅋㅋ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고민이 많고 힘들지만 이런 나의 괴로움이 나의 마음의

살을 찌운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듯이 내 마음도 인격도 성장하겠

...시간이 지난다고 누구나 다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전거를 탈때 힘든 고갯길을 만나면 난 생각한다. "힘들어도

조금만 오를면 내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줄 내리막길이 있겠지"

그런 기대를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내리막길이 있다. 지금 난

어디에 있나? 아마도 아주 심한 언덕길을 오르고 오르고 있을

것이다. 땀을 흘리고 다리와 허리는 아파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하지만 나는 내리지 않는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있기 때문에...

I can do it !  몇번씩 되뇌어 본다....I can do it !  I can do 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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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7-26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빛눈물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것 같아요.^^
예전 글을 다시 읽으면 감회가 새롭지요? 저도 아주 가끔 제 알라딘 서재 글을 읽었었는데
저는 좀 창피하더라고요,^^;;
언제 시간이 나면 맞춤법이라도 좀 고쳐야지 하는데 그럴 시간은커녕 다시 읽지도 않아요, 요즘은.^^;;
I can do it !은 요즘의 제게도 필요한 메시지네요.^^
내일부터 올림픽이 시작되는 게 너무 기대되는 밤입니다.
좋은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요즘 블로그에 글 올리는게 뜸했는데. 그래도 가끔식 짧은 글을 쓰려 노력해야 겠다. 어제는 일찍 퇴근을 한 후 방배동 예술의 전당에 있는 국립예술자료원에 가 자료를 대출하고 집에 일찍 들어갔다.

 

아내와 규진이, 나 이렇게 우리 세식구가 앉아 저녁밥을 먹었다.

양파, 고추, 된장찌개, 고등어구이, 물김치...

 

어찌나 맛나는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었다. 밥 먹은후 과일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아파트 주변을 돌고 자주가는 산책길로 발길을 돌렸다. 날씨가 선선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차가 없는 곳이라 아이들도 신나게 뛰어다닌다. 규진이도 "아빠 갔이 뛰어요"한다. 뒤에서 뛰어가는 규진이를 보고 있으니, 그 쬐그만 놈이 어떻게 저렇게 컸지 하는 생각이 든다.

 

산책을 하고 셋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난 앞에서 걸어가고 규진이와 아내는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아내가 웃는다. 뒤를 돌아보니 ㅋㅋ

 

내려가다 다리가 간지러워 손을 난간에 기댄 후 다리를 긁적긁적 거렸는데, 뒤에서 규진이가 내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게 아닌가!!!

 

어찌나 귀여운지!! 그리고 한편으로 아이에게 나란 존재가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걷는 걸음거리, 말투, 행동 모두 규진이에게는 삶의 척도 또는 모방의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규진이는 아내의 행동을 따라하지는 않지만 내가 하는 이런 사소한(?) 행동들은 꼭 따라한다. 조심해야 겠다.

 

다시 교육과 관련된 책들을 들추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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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7-0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나 <숲 유치원> 같은 책도 함께 읽어 보셔요~ 즐겁게 살아가며 나누는 이야기를 잘 느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햇빛눈물 2012-07-06 10: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방금전에 소개해주신 <잃어버린...> 주문을 했습니다. 정말로 제가 딱 지금 보고 싶었던 책이네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학교에서 겪은 일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간단하게 적어본다.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의미있는 되새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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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운동장 한 켠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학생들이 보였습니다. 아침 조회를 하고 산책을 하려는 저에게 그 학생들은 순간 절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냥 지나칠까, 가볼까? 가면 분명히 뭔가 사건이 터질 것 같은데...
살짝 고민을 하다, 그래도 가보자 하는 마음에 가보았습니다. 역시나, 운동장과 3호관 사이 수풀 사이에서 1학년 2명이 내려오더군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그리고 근처에 있던 2학년 3명에게 인사를 하더군요. 저는 1학년 학생과 2학년 세명을 불렀습니다. 1학년 한 명은 순간 도망을 가고 나머지 한 명만 이 저에게 잡혔죠. 그 놈은 제가 아주 잘 아는(?) 사이라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2학년 학생들이었습니다. 제가 오라고 하니, 대뜸 한다는 말이, "왜요, 저 담배 안 피웠어요..." 그래서 제가 "야, 내가 언제 담배 피웠냐고 물었냐, 나한테 오라고 했지!"

 

그 다음부터 그 놈과 저의 혈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살짝 건드리니, 경찰에 신고한다. 그래서 저는, 신고해라. 그리고 그 놈이 옆에 있는 친구한테 왈 "야 어디에 신고해야 하냐?" 친절한 친구 왈 "교육청에 하면 되" 옆에서 지켜보는 저의 생각은 아주 복잡해졌습니다. 이런 학생들에게 도대체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능숙해졌는지, 화의 감정을 누르고 조곤조곤 따지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놈은 저에게 반말까지 하며, 저의 속을 긁더니 제가 살짝 강한 행동을 하자, "때리시려구요, 때려보세요..."하더군요. 순간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잘 참았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놈이 강적인게, 수업 시간(8시 10분 정도였습니다)이 좀 지나니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며 저한테 "확인증 써줄거죠, 빨리 써줘요"하더군요. 그것도 저에게 요청이 아닌 거의 지 동생한테 강제하듯이 말이죠. 이 정도되면 저는 거의 요즘 말로 표현하면 '멘붕' 상태에 빠졌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침 10분간의 산책 시간이 사라지며 아주 기분이 '뭐'같아 지더군요. 그런데 제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저의 기분을 배설하려 하는 것 보다. 그 어떤 조금의 깨달음을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때문입니다. 오늘 한겨레신문을 읽으니 혜민스님의 아주 가벼운(?) 칼럼이 있더군요. 제목이 '단비'였습니다. 제목이 아주 심플하면서도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그 중에서 저에게 깨달음을 준 문구는 이렇습니다.

 

"잠을 청하기 전에 도량을 잠시 돈다. 어느덧 비가 멎고 하얀 구름 사이로 달님이 살짝 얼굴을 드러내신다. 은은한 달빛 덕분에 산봉우리를 하얀 구름이 고고히 휘감고 지나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보인다. 도량을 몇바퀴 돈 뒤 잠을 청하기 위해 내 처소로 발길을 돌린다. 엊저녁과는 달리 발밑 촉촉해진 땅이 느껴진다. 그 순간 퍼뜩 작은 깨달음이 하나 있었다. 오늘과 같은 단비는 사실 비 자체가 달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비를 받아들이는 땅이 비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단비로 느껴진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말이다. 즉 똑같은 비가 와도 받아들이는 토양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단비로 느껴질 수도 있고, 홍수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제가 학생들에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사실 좋게 생각하면 조금의 사명의식과 학생들을 생각하는 교육적인 의식에서 출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혜민스님의 위 글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당연히 저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그런 의도를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마음 받아들이는 자의 태도도 중요하구나 하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했던 모든 'Action'은 사실 저의 '일방통행'

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거나나 사랑하는 마음, 부모자식간의 관계에도 듣고 말하는, 행동하고 바라보는 자 서로의 상호소통의 상태가 중요한데, 하물며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는 더 할텐데, 이점을 지금까지 저는 망각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덧, 개인적으로 곽노현 교육감님에게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고, 학생인권조례도 찬성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어쩔수 없이 학교 현장에서 느끼는 점은 이 조례로 인해 가장 변한 점은 학생들을 생활지도 할때 학생들이 교사에게 "저 신고할거예요"라는 협박아닌 말씀들을 아주 많이 한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 들을 때마다 기분이 아주 착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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