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는 지리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나름의 완곡어 운동을 했다고 생각한다.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 앵글로 아메리카-북아메리카, 니그로-흑인.아프리카계 미국인, 부족-종족 등등 개중에는 나의 무지와 잘못된 생각, 신념에 의한 것일 수 있으나 대부분은 나의 생각이 맞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하지만 아래의 글을 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아닐수도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구나하는 하나의 큰 '깨우침'을 얻었다. 말하나 용어 하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나는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지만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 의도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더욱더 어려워 진다. 고종석씨의 책을 더 많이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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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기억, 고종석
오사카(하편), “나는 조센진입니다.”(p.30-32)
재일동포가 자신을 일컬을 때 쓰는 한국인이라는 말과 조선인이라는 말은 대칭적이지 않다. 자신을 한국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소속감을 그 말로써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그 말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소속감을 자동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 말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소속감을 드러낼 수도 있겠으나, 다수는 그 말을 사용함으로써 분단되기 이전의 조선에 대한 소속감, 또는 남북 두 국가에 대한 동시적 소속감을 드러낸다. 그때의 조선은 한국을 포함한 조선인 것이다. 몇 해 전에 보았던 MBC 100분토론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무슨 일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손석희 씨의 100분토론이 서울 여의도가 아니라 일본 오사카의 한국인 거주지역에 스튜디오를 마련해 재일 문제를 토론한 적이 있다. 늘 합리적 의견으로 고마운 깨달음을 베푸는 릿쿄대학의 이종원 교수 말고는 패널 가운데 내가 이름으로나마 아는 이가 없었던 터라, 그들의 면면이 하나하나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는 ‘조선인’도 있었고 ‘한국인’도 있었다.
그 패널 가운데 한 사람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스란히 옮겨놓을 수는 없으나, 취지는 이랬다. “나는 대한민국 국적을 지녔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한국인으로 지칭하지 않고 꼭 조선인으로 지칭한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우리를 차별하기 시작했을 때 ‘조선인’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했기 때문이다. 그 차별을 부당하게 여기고 이를 고치기 위해 싸우는 사람으로, 나는 ‘조선인/이라는 이름을 버릴 수 없었다. 차별의 시작이 조선인에 대한 것이었던 만큼, 차별의 시정도 (’한국인‘이 아니라)조선인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 패널은 차별의 집중적 대상인 조선인에 벗어나 한국인으로 달아나고 싶지가 않았다. 부정적 뉘앙스가 한국인이라는 말보다 조선인이라는 말에 훨씬 짙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부정적 뉘앙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그로 하여금 조선인이라는 말을 버리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 한쪽이 써늘했다. 그때부터 나는, 적어도 일본 사람들 앞에서는, 의식적으로 간코쿠진(한국인)이 아니라 조센진(조선인)이 되었다.
그 패널의 말은, 흔히 ‘정치적 올바름’이라 부르는 완곡어 운동이 부분적으로만 정당하다는 사실을 새삼 드러낸다. ‘흑인’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 부른다 해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자동적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차별은, 그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 사용 너머에서, 계급관계의 실질적 변화가 이워져야만 없어진다. 어떤 흑인 운동가들에게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 자체가 역겨울 것이다. 백인들을 ‘유럽계 미국인’이라 부르지 않는데, 왜 흑인들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 불러야 하는가? 흑인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차별은 흑인이라는 이름으로 철폐 돼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