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와 관련된 상당히 논리적이며 통찰력 있는 글 같아 옮겨 본다. 핵심음 중간 소제목인 '낙태로 내몰고 낙태를 금하다'라는 글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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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플로마티크 19호(2010.4)  낙태를 줄이려거든 낙태를 허하라  

낙태는 여러 겹에 싸여 있는 미스터리이다. 한국은 낙태가 가장 많은 국가군에 속한다지만, 낙태가 불법인지라 그 전체 수와 동향은 베일에 싸여 있다. 전체 낙태 수는 많게는 연간 150만 건 혹은 60만 건, 적게는 35만 건 등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대다수 낙태는 모자보건법상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사유에 해당하지 않기에 형법상 범죄에 해당하지만, 형사상 기소되는 예는 매년(1980~2002) 10건 내외이며, 이 중 유죄판결을 받는 예는 드물다. 인식조사를 보아도 낙태가 불법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이다. 이렇게 법과 낙태 현실이 괴리되어 있는데도 입법부는 낙태 관련 법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낙태는 배우자가 있는 한국 여성이라면 전체의 절반 내지 적어도 3분의 1 정도가 ‘보편적으로’ 경험함에도, 한국에선 낙태를 옹호하고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는 담론이나 사회운동은 별로 없다. 낙태를 하거나 당하는 여성의 경험은 불법이기에 말해지지 않고 지지되지 않으며, 공적 사안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여성의 낙태 경험은 무서울 정도로 침묵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여성에게는 사실상 낙태의 자유가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낙태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한국의 만연한 낙태는 한국 여성의 신체적·성적 자기선택권의 발현인가. 한국에서 이 많은 낙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낙태와 ‘출산전체주의’ 국가  

 최근 ‘프로라이프의사회’는 한국의 높은 낙태율을 저출산의 맥락에서 제기해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들을 고소·고발하면서 엄정한 법의 집행을 요청하고, 생명의 숭고함을 주장하며, 가엾은 태아의 생명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들은 현재 모자보건법이 임신중절의 합법적 사유로 인정하는 강간으로 인한 임신마저, 그리고 합법적 사유로 인정치 않는 10대의 임신 역시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태도를 가진 것 같다. 21세기 한복판에서 남녀의 성교는 모두 출산으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출산전체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것인지 우려된다. 과연 낙태를 금지하고 엄격히 처벌하면 낙태가 줄어들까. 나아가, 낙태가 근절되고 출산이 늘어나는 것만이 바람직한 목표인가. 국민이, 특히 미혼 여성이 성교를 하지 않으면 낙태는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낙태 문제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생명론·출산론·성성(Sexuality)론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먼저, 여성의 낙태 결정을 단지 ‘생명권’에 반하는 ‘선택권’으로 관념하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널리 알려진 미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법정 의견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가는 의학·철학·신학 분야의 주제로서 이들 전문가가 합의에 도달할 수 없다면 법원은 이에 답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고 선언했다. 이런 물음에 누구도 간단히 답할 수 없음에도, 낙태에 대해서는 반생명적이라고 잘라 말하는 태도가 오히려 오만하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체외수정이 이루어지고, 인공적으로 다수의 수정란이 배양되며, 자궁에 이식되지 않은 채 동결 보존된 수정란이 존재하며, 다태아 임신 때 선택적 태아 감소술이 행해지는데, 이런 생명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


▲ <거리의 여성>, 2001-돌로레 마라  

 인간은 언제나 모체 안에서 잉태되고 형성되고, 태어나서도 취약한 존재로서 지속적인 보살핌을 받아야 사람 구실을 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그렇다면 자녀를 낳기로 한 여성과 남성의 선택, 아동을 양육해온 대다수 여성의 노고에 대해서 우리 사회와 국가는 ‘생명 존중성’을 인정해준 적이 있는가. 잉태보다 훨씬 더 길고 복잡하게 이루어지는 보살핌 속에서만 가능한, 과정(Becoming)으로서 생명이 자궁 안에서 수태되는 수정란으로서의 생명과 견줘 지나치게 도외시돼온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 국가와 시민, 더 나아가 서양과 동양이라는 비대칭적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잉태됨으로써 존재하는 생명뿐 아니라 끊임없이 재생됨으로써 존재하는 생명관이 요청된다.  

 더 나아가, 몸속 태아와 임부를 마치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는 지금의 선택권 대 생명권 구도가 허구적이다. 임신한 여성은 한 생명 안에 두 생명을 키우는 신비하고 생산적인 경험을 하는데, 이러한 ‘연결성’이 임신 종결 결정에서 완전히 부재하는 것일까. 말할 나위도 없이 임부는 자신과 아이의 장래를 예견하고, 양육 환경을 돌아보고, 불가피한 사유에 의해 임신 종결을 결정한다. 그렇게 ‘믿어준다면’ 이 역시 아이와 자신의 복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모성적 사유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낙태를 바라보는 ‘아이의 생명 대 임부의 생명’과 같은 이분법이야말로 아이와 어머니의 연속성에 대해 알지 못하는 ‘비모성적 사유’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낙태로 내몰고 낙태를 금하다  

 낙태한 임부를 비난할 뿐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이 사회는 임부의 임신 종결 결정과 그 이후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어렵다. 우리 형법의 낙태죄 보호법익은 태아의 생명을 주법익으로, 임부의 생명과 신체를 부차적 법익으로 한다. 낙태(즉, 출산 여부)에 걸린 여성의 이익과 낙태를 하지 않아서 당할 여성의 불이익을 그저 임부의 생명·신체라고 보는 법의 태도에서 볼 때, 여성의 법익에 대한 법리가 얼마나 미진한지, 모성과 아이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를 절감한다.  

 나는 한국 여성의 대다수 임신 종결 결정은 더 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감수하는 행위로 이해한다. 한국에서 청소녀, 미혼·이혼 여성 등 법적 배우자가 없는 여성은 출산하지 않도록 규율되고 있다. 이 여성이 출산했을 경우, 그 아이는 ‘사생아’(私生兒)로서 한 국가의 정상적 성원에서 배제된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게 사생아 지위를 주면서까지 그 어려운 출산과 양육의 길을 가려 할 것인가.  

 비혼 여성에게조차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여성은 ‘임신하지 말라’는 것이고 성관계를 하지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산부인과 의사들도 인정하듯이, 어떤 피임 방법도 100% 성공률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이든 원치 않은 임신은 근절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낙태 규제는 여성의 낙태와 출산 선택권의 규제 이전에 성생활의 규제이자 훈육이다. 낙태가 금지된 나라에서 비혼 여성은 성교 때마다 임신의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여성과 여성의 성을 가부장적 결혼에 종속시키는 것인가.  

 한국 여성의 낙태 선택권을 말하려면 그 전제로서 성적 자기결정권, 즉 성교 결정 자유와 권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낙태하는 것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여태아로 판명되어 낙태하는 것을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캐서린 매키넌의 말을 빌리자면, 무쇠 주먹에 씌워진 벨벳 장갑처럼 현실을 은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대다수 낙태의 현실은 선택권 대 생명권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곳에 있다.  

 게다가 자녀 양육이 거의 전적으로 ‘사적 가족’(친밀성 집단)에 맡겨진 상황에서 국가, 종교단체 혹은 의사회 등 어떤 제3자도 친밀성 집단에 아이 출산과 낙태에 대해 명령할 권한이 없다. 아이 낳을 것을 강요하는 공적 주체가 있다면,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제10조), 양성평등(헌법 제11조 제1항, 제36조), 사생활의 권리(제17조) 등에 반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 국가와 법의 낙태 금지는 단지 선택권의 제한일 뿐 아니라 신체통합권과 운명통제권, 시민권의 제한이다.  

 일각에서는 낙태 선택권에 편향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낙태한 여성도 불행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이다. 한국 여성에게 부족한 것은 낙태할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권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낙태 정책의 목적은 그저 낙태를 줄이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의 성과 재생산 자유, 즉 낳고 싶은 자는 잘 낳아 기를 수 있는 자유와 책임, 낳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을 의미하는 ‘재생산 권리’(Reproductive Rights)와 ‘재생산 정의’에 있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재생산’이란 인간의 재생산을 뜻하고, ‘재생산 권리’란 성교·임신·출산·양육에 이어지는 자유권과 사회권을 통합하는 인권의 틀이다. 국가 인구정책 관점에서 좌우되던 재생산 문제를 이제 시민인 여성과 남성이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권한을 돌려주어야 한다.  

 요청하는 바는, 첫째 불가피한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모자보건법의 큰 틀을 현재 인공임신중절의 정당화 사유 방식에서 기한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모자보건법 시행령에 비춰 24주까지는 낙태 가능 시기로 하고, 12주까지 낙태는 임부의 의사에 기초해 합법적 의사로 이루어졌다면 처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미성년의 임신과 사회·경제적 사유(빈곤, 기존 자녀 수 등)의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 외국 사례에서 볼 때, 낙태의 범죄화와 낙태 빈도 간에는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낙태가 줄어드는 것은 법률적 규제 때문이 아니라, 피임의 실천, 민주적 성관계, 자녀 양육의 호조건, 다양한 가족 형태 인정, 또 이것들을 위한 교육 등 여러 조건에서 가능하다.  

 둘째, 원치 않은 임신을 줄이는 것이 낙태 감소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다. 성교육과 피임교육의 현실화뿐 아니라, 성관계의 의미를 단지 남녀 간 성교가 아니라 임신과 출산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피임 실패를 예견할 때, 사후 피임약의 쉬운 보급도 요청된다.  

 셋째, 미혼·동거·동성애 관계 등도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고 지원하는 사회문화가 필요하다. 이들이 법률혼 가족에 비해 차별받지 않게 하는 제도와 문화가 요청된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낙태는 그리 미스터리적인 것만도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교육, 민주적 성관계, 피임 보급처럼 낙태를 줄이는 문화가 없기에, 낙태는 최종 혹은 유일의 여성의 자기방어 수단이 돼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낙태는 여성의 낙태 권리 실현을 나타내는 정도보다 한국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출산권의 제약을 나타내는 정도가 강하다고 해석된다. 요컨대, 한국 여성의 높은 낙태율은 남성 성 자유의 귀결인 셈이다.

 차별 없는 민주적 성관계를  

 원치 않은 임신에 따른 낙태는 대다수 불가피한 결정이며, 국가가 처벌하지 않더라도 임부에게 긴 육체적·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체험이다. 국가가 낙태를 범죄로 규정해놓는다면 낙태는 임부에게 깊은 죄의식을 남길 것이고, 그 체험은 침묵 아래 짓눌린 채, 태아는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불가피한 낙태를 허용하는 등 관련 법을 합리화해 태아와 그 어머니의 관계를 해명해주어야 한다.


글•양현아
한국젠더법학회 회장. 법사회학과 법여성학을 강의하고 있다. 사회학 박사로서 사회문화이론, 가족법, 일본 군위안부, 구술 증언, 재생산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관심과 사회변동은 지식과 이성뿐 아니라 정서와 미감에서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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