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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와 관련된 상당히 논리적이며 통찰력 있는 글 같아 옮겨 본다. 핵심음 중간 소제목인 '낙태로 내몰고 낙태를 금하다'라는 글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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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디플로마티크 19호(2010.4)  낙태를 줄이려거든 낙태를 허하라  

낙태는 여러 겹에 싸여 있는 미스터리이다. 한국은 낙태가 가장 많은 국가군에 속한다지만, 낙태가 불법인지라 그 전체 수와 동향은 베일에 싸여 있다. 전체 낙태 수는 많게는 연간 150만 건 혹은 60만 건, 적게는 35만 건 등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대다수 낙태는 모자보건법상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사유에 해당하지 않기에 형법상 범죄에 해당하지만, 형사상 기소되는 예는 매년(1980~2002) 10건 내외이며, 이 중 유죄판결을 받는 예는 드물다. 인식조사를 보아도 낙태가 불법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이다. 이렇게 법과 낙태 현실이 괴리되어 있는데도 입법부는 낙태 관련 법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낙태는 배우자가 있는 한국 여성이라면 전체의 절반 내지 적어도 3분의 1 정도가 ‘보편적으로’ 경험함에도, 한국에선 낙태를 옹호하고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는 담론이나 사회운동은 별로 없다. 낙태를 하거나 당하는 여성의 경험은 불법이기에 말해지지 않고 지지되지 않으며, 공적 사안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여성의 낙태 경험은 무서울 정도로 침묵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여성에게는 사실상 낙태의 자유가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낙태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한국의 만연한 낙태는 한국 여성의 신체적·성적 자기선택권의 발현인가. 한국에서 이 많은 낙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낙태와 ‘출산전체주의’ 국가  

 최근 ‘프로라이프의사회’는 한국의 높은 낙태율을 저출산의 맥락에서 제기해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들을 고소·고발하면서 엄정한 법의 집행을 요청하고, 생명의 숭고함을 주장하며, 가엾은 태아의 생명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들은 현재 모자보건법이 임신중절의 합법적 사유로 인정하는 강간으로 인한 임신마저, 그리고 합법적 사유로 인정치 않는 10대의 임신 역시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태도를 가진 것 같다. 21세기 한복판에서 남녀의 성교는 모두 출산으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출산전체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것인지 우려된다. 과연 낙태를 금지하고 엄격히 처벌하면 낙태가 줄어들까. 나아가, 낙태가 근절되고 출산이 늘어나는 것만이 바람직한 목표인가. 국민이, 특히 미혼 여성이 성교를 하지 않으면 낙태는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낙태 문제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생명론·출산론·성성(Sexuality)론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먼저, 여성의 낙태 결정을 단지 ‘생명권’에 반하는 ‘선택권’으로 관념하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널리 알려진 미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법정 의견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가는 의학·철학·신학 분야의 주제로서 이들 전문가가 합의에 도달할 수 없다면 법원은 이에 답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고 선언했다. 이런 물음에 누구도 간단히 답할 수 없음에도, 낙태에 대해서는 반생명적이라고 잘라 말하는 태도가 오히려 오만하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체외수정이 이루어지고, 인공적으로 다수의 수정란이 배양되며, 자궁에 이식되지 않은 채 동결 보존된 수정란이 존재하며, 다태아 임신 때 선택적 태아 감소술이 행해지는데, 이런 생명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


▲ <거리의 여성>, 2001-돌로레 마라  

 인간은 언제나 모체 안에서 잉태되고 형성되고, 태어나서도 취약한 존재로서 지속적인 보살핌을 받아야 사람 구실을 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그렇다면 자녀를 낳기로 한 여성과 남성의 선택, 아동을 양육해온 대다수 여성의 노고에 대해서 우리 사회와 국가는 ‘생명 존중성’을 인정해준 적이 있는가. 잉태보다 훨씬 더 길고 복잡하게 이루어지는 보살핌 속에서만 가능한, 과정(Becoming)으로서 생명이 자궁 안에서 수태되는 수정란으로서의 생명과 견줘 지나치게 도외시돼온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 국가와 시민, 더 나아가 서양과 동양이라는 비대칭적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잉태됨으로써 존재하는 생명뿐 아니라 끊임없이 재생됨으로써 존재하는 생명관이 요청된다.  

 더 나아가, 몸속 태아와 임부를 마치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는 지금의 선택권 대 생명권 구도가 허구적이다. 임신한 여성은 한 생명 안에 두 생명을 키우는 신비하고 생산적인 경험을 하는데, 이러한 ‘연결성’이 임신 종결 결정에서 완전히 부재하는 것일까. 말할 나위도 없이 임부는 자신과 아이의 장래를 예견하고, 양육 환경을 돌아보고, 불가피한 사유에 의해 임신 종결을 결정한다. 그렇게 ‘믿어준다면’ 이 역시 아이와 자신의 복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모성적 사유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낙태를 바라보는 ‘아이의 생명 대 임부의 생명’과 같은 이분법이야말로 아이와 어머니의 연속성에 대해 알지 못하는 ‘비모성적 사유’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낙태로 내몰고 낙태를 금하다  

 낙태한 임부를 비난할 뿐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이 사회는 임부의 임신 종결 결정과 그 이후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어렵다. 우리 형법의 낙태죄 보호법익은 태아의 생명을 주법익으로, 임부의 생명과 신체를 부차적 법익으로 한다. 낙태(즉, 출산 여부)에 걸린 여성의 이익과 낙태를 하지 않아서 당할 여성의 불이익을 그저 임부의 생명·신체라고 보는 법의 태도에서 볼 때, 여성의 법익에 대한 법리가 얼마나 미진한지, 모성과 아이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를 절감한다.  

 나는 한국 여성의 대다수 임신 종결 결정은 더 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감수하는 행위로 이해한다. 한국에서 청소녀, 미혼·이혼 여성 등 법적 배우자가 없는 여성은 출산하지 않도록 규율되고 있다. 이 여성이 출산했을 경우, 그 아이는 ‘사생아’(私生兒)로서 한 국가의 정상적 성원에서 배제된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게 사생아 지위를 주면서까지 그 어려운 출산과 양육의 길을 가려 할 것인가.  

 비혼 여성에게조차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여성은 ‘임신하지 말라’는 것이고 성관계를 하지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산부인과 의사들도 인정하듯이, 어떤 피임 방법도 100% 성공률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이든 원치 않은 임신은 근절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낙태 규제는 여성의 낙태와 출산 선택권의 규제 이전에 성생활의 규제이자 훈육이다. 낙태가 금지된 나라에서 비혼 여성은 성교 때마다 임신의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여성과 여성의 성을 가부장적 결혼에 종속시키는 것인가.  

 한국 여성의 낙태 선택권을 말하려면 그 전제로서 성적 자기결정권, 즉 성교 결정 자유와 권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낙태하는 것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여태아로 판명되어 낙태하는 것을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캐서린 매키넌의 말을 빌리자면, 무쇠 주먹에 씌워진 벨벳 장갑처럼 현실을 은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대다수 낙태의 현실은 선택권 대 생명권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곳에 있다.  

 게다가 자녀 양육이 거의 전적으로 ‘사적 가족’(친밀성 집단)에 맡겨진 상황에서 국가, 종교단체 혹은 의사회 등 어떤 제3자도 친밀성 집단에 아이 출산과 낙태에 대해 명령할 권한이 없다. 아이 낳을 것을 강요하는 공적 주체가 있다면,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제10조), 양성평등(헌법 제11조 제1항, 제36조), 사생활의 권리(제17조) 등에 반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 국가와 법의 낙태 금지는 단지 선택권의 제한일 뿐 아니라 신체통합권과 운명통제권, 시민권의 제한이다.  

 일각에서는 낙태 선택권에 편향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낙태한 여성도 불행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이다. 한국 여성에게 부족한 것은 낙태할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권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낙태 정책의 목적은 그저 낙태를 줄이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의 성과 재생산 자유, 즉 낳고 싶은 자는 잘 낳아 기를 수 있는 자유와 책임, 낳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을 의미하는 ‘재생산 권리’(Reproductive Rights)와 ‘재생산 정의’에 있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재생산’이란 인간의 재생산을 뜻하고, ‘재생산 권리’란 성교·임신·출산·양육에 이어지는 자유권과 사회권을 통합하는 인권의 틀이다. 국가 인구정책 관점에서 좌우되던 재생산 문제를 이제 시민인 여성과 남성이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권한을 돌려주어야 한다.  

 요청하는 바는, 첫째 불가피한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모자보건법의 큰 틀을 현재 인공임신중절의 정당화 사유 방식에서 기한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모자보건법 시행령에 비춰 24주까지는 낙태 가능 시기로 하고, 12주까지 낙태는 임부의 의사에 기초해 합법적 의사로 이루어졌다면 처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미성년의 임신과 사회·경제적 사유(빈곤, 기존 자녀 수 등)의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 외국 사례에서 볼 때, 낙태의 범죄화와 낙태 빈도 간에는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낙태가 줄어드는 것은 법률적 규제 때문이 아니라, 피임의 실천, 민주적 성관계, 자녀 양육의 호조건, 다양한 가족 형태 인정, 또 이것들을 위한 교육 등 여러 조건에서 가능하다.  

 둘째, 원치 않은 임신을 줄이는 것이 낙태 감소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다. 성교육과 피임교육의 현실화뿐 아니라, 성관계의 의미를 단지 남녀 간 성교가 아니라 임신과 출산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피임 실패를 예견할 때, 사후 피임약의 쉬운 보급도 요청된다.  

 셋째, 미혼·동거·동성애 관계 등도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고 지원하는 사회문화가 필요하다. 이들이 법률혼 가족에 비해 차별받지 않게 하는 제도와 문화가 요청된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낙태는 그리 미스터리적인 것만도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교육, 민주적 성관계, 피임 보급처럼 낙태를 줄이는 문화가 없기에, 낙태는 최종 혹은 유일의 여성의 자기방어 수단이 돼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낙태는 여성의 낙태 권리 실현을 나타내는 정도보다 한국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출산권의 제약을 나타내는 정도가 강하다고 해석된다. 요컨대, 한국 여성의 높은 낙태율은 남성 성 자유의 귀결인 셈이다.

 차별 없는 민주적 성관계를  

 원치 않은 임신에 따른 낙태는 대다수 불가피한 결정이며, 국가가 처벌하지 않더라도 임부에게 긴 육체적·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체험이다. 국가가 낙태를 범죄로 규정해놓는다면 낙태는 임부에게 깊은 죄의식을 남길 것이고, 그 체험은 침묵 아래 짓눌린 채, 태아는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불가피한 낙태를 허용하는 등 관련 법을 합리화해 태아와 그 어머니의 관계를 해명해주어야 한다.


글•양현아
한국젠더법학회 회장. 법사회학과 법여성학을 강의하고 있다. 사회학 박사로서 사회문화이론, 가족법, 일본 군위안부, 구술 증언, 재생산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관심과 사회변동은 지식과 이성뿐 아니라 정서와 미감에서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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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할 때 부터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단체가 세계의 그 수많은 자연 경관중에서 7가지를 선정할 수 있으며, 그 어려운 선정을 어떤식으로 하는지? 그런데 듣도보도 못한 단체가 듣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선정했다. 물론 전문가만이 '7대 자연 경관'을 '선정'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단순히 인터넷 투표와 전화로 일반 대중의 의견을 반영한 투표는 충분히 조작(?)이 가능한 문제 있는 선정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어의없는 방식으로 어의없이 선정된 결과에 우리끼리 비행기 태우고 좋아라하는 식의 반응은 너무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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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11. 14  전화건수로 정한 ‘묻지마 7대경관’…수백억 들여 ‘샴페인’ 

뉴세븐원더스, 제주 등 ‘세계7대 자연경관’ 잠정 선정
공무원만 1억통 이상 총력
아마존 등 함께 선정 돼
득표수 공개안해 신뢰 의문
‘론리 플래닛’ 창업자
“재단 이름 들어본 적 없다” 

 

» 왼쪽부터 제주도, 베트남 할롱베이, 남미의 이구아수 폭포. 뉴세븐원더스재단이 12일(한국시각)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이들 지역을 선정했으나, 1인 무제한 전화투표 허용, 투표 결과 비공개 등으로 선정 결과의 신뢰도, 재단의 공신력 등에 의문이 커지고 있다. 

제주도가 이른바 ‘세계 7대 자연경관’의 하나로 선정됐다. 그러나 선정 근거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아 공신력 등에 의구심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경제적 기대효과도 차분하게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뉴세븐원더스재단은 12일 새벽 4시7분(한국시각) 재단 누리집을 통해 제주도를 비롯한 7곳을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재단은 전화투표 결과나 순위 등을 공개하지 않은 채 이번 발표는 ‘잠정’ 결과이며, 내년 초 최종 선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투표운동에 앞장섰던 제주도는 발표 순간 제주도민 등 1천여명이 참가한 행사를 열어 선정 결과를 환영했으며, 내년에 선정 기념 상징물 설치 등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단 공신력·신뢰도 논란 뉴세븐원더스재단의 공신력과 신뢰도를 두고 논란이 오히려 커지고 있다. 이 재단은 투표 마감을 며칠 앞둔 지난 6일, 후보지 28곳 가운데 제주도 등 10곳이 상위 10위에 들었다고 누리집에 올렸다. 그러면서 “10위권 안에 들지 못한 후보지도 7대 경관에 뽑힐 수 있다”며 막판 경쟁을 부추기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상위 10곳 가운데 이스라엘 사해,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산호초 등 6곳이 탈락했다. 레바논의 제이타 석회동굴, 인도의 순다르반스, 이탈리아의 베수비오화산도 떨어졌다. 반면 10위권 밖에 있던 아마존 강, 이구아수 폭포, 테이블 산 등 3곳이 포함됐다. 재단은 이날 7곳을 발표하면서도 “잠정 결과와 최종 선정 사이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혀, 또 순위가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여지를 남겼다. 재단은 애초 득표수나 순위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해, 선정 결과를 두고도 의구심이 제기돼왔다. 선정되든 탈락하든 재단만이 알 뿐이고, 이의를 제기하려 해도 제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재단은 최근 ‘세계 7대 도시’ 선정 캠페인을 시작해 상업적 성격을 또 드러냈다는 말도 나온다. 재단은 유엔과는 관계가 없다. 일부 누리꾼들은 “정부조직과 온 나라가 외국의 한 민간단체의 상업적 이벤트에 국민 세금을 쓰는 것은 대국민 사기극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최근 제주를 방문한, 세계적 여행가인 ‘론리 플래닛’ 창업자 토니 휠러도 이 재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 공무원 동원 선정 결과에 대한 의구심은 1인당 무제한 중복 전화투표를 허용한 방식에서도 비롯됐다. 이 재단이 전화요금 등으로 매출을 올리는 사업체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 전화투표를 많이 할수록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선정된 데는 제주도 공무원들의 전화투표가 절대적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공무원들은 1인당 하루 200~500통까지 목표치를 정해 전화투표에 매달렸고, 부서별로 경쟁을 유도하기도 했다. 공무원들의 전화투표 건수는 1억건을 훨씬 넘었다. 전화요금만 200억원(1건당 198원)을 훌쩍 넘는다. 또 민간인들을 상대로 전화투표 기탁운동을 벌여 3000만표(50억원)를 모았다.

홍보비까지 합치면 캠페인에만 수백억원의 세금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내년 초 있을 공식 인증식 행사에도 꽤 예산을 쓸 수밖에 없다. 2009년 7월 제주도가 후보지 28곳에 포함된 뒤에도 제주관광공사를 빼고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지난해 7월 취임한 우근민 제주지사가 바짝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 지사는 제주도정의 최우선 핵심 과제로 여겨질 정도로 7대 자연경관 선정에 매달렸다. 초등학생들의 동전 모으기 캠페인까지 등장했다.

■ 짜맞추기식 기대효과 제주도는 7대 자연경관 선정 홍보 등의 효과로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제주도 관광객이 전년 대비 14.5%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네스코 3관왕 타이틀(생물권보전지역,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획득, 제주올레 열풍 등에 힘입어 관광객은 2009년 12.1%, 지난해 16.2%로 증가 추세에 있다.

제주도는 관광객 증가에 따른 기대효과(생산 유발효과 연간 627억~1조2840억여원, 부가가치 유발효과 연간 355억~7318억여원)를 내세우지만, 제주발전연구원의 이 연구 결과는 외국사례에 산술적으로 대입시킨 것일 뿐이다. 그래도 제주지역 관광업계는 “7대 자연경관 선정을 잘 활용하면 지역경제와 관광에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 한 트위터 이용자는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 경관에 선정돼서 득볼 사람들은 누구일까요?”라고 비꼬았다. 또다른 이용자는 “제주도는 세계 7대 자연경관이든 아니든 1년에 한번은 가고픈 아름다운 섬이다. 근데 세계에 내놓아야 할 자연경관을 파괴하면서 해군기지 짓겠다고 난리다”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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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11-17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꾸준히 매년마다 장식하던 대국민이 뽑은 10대 제품 뭐시기....이런식으로다가 다 돈으로 선정되는 조작관행이 떠오르는건 대한민국에 특히 제주도에 불충한건가요-_-;

햇빛눈물 2011-11-18 08:44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사람들 참 '최초', '최대', '10대' 뭐시기 하는 순위 매기는 거 엄청 좋아하는 듯 합니다. 이정도면 '국민성'이라고 해도 될 듯 합니다.
 

얼마전 읽으며 메모를 열심히 한 기사이다. 나와 관련이 많은 문제거리기에 관심이 많이 간다. 꼼꼼히 읽어보고 내 생각을 기사 내용 중간에 첨가한다. 메모하며 읽은 후의 느낌은 난 '회색분자'같다는 생각이다. ㅋㅋ  

ps : 사실 체벌은 소수의 교사가 다수의 대상 즉 학생들을 손쉽게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체벌이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의해 현재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내의 상황은 체벌을 용인해주던 때와 바뀐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답은 간단하다. 학급당 학생수가 15명 정도라면 체벌,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체벌하는 교사들은 처벌해도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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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9.17  간접체벌 허용해야 하나? 

지난 14일 교육과학기술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수업 중 영상통화를 한 학생에게 5초간 엎드려뻗쳐를 시켜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한 교사에 대해 징계 취소를 결정했다. 지난 3월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간접체벌을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한 데 따른 것이다. 이는 간접체벌을 포함한 일체 체벌을 금지시킨 경기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와 배치되는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개정된 시행령이 간접체벌을 허용하는 것인지에 대한 해석부터 엇갈린다. 찬반양론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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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대신 오리걸음, 빵 대신 과자?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와 서울시교육청의 체벌금지 이후 간접체벌 허용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지난 3월18일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31조 8항은 “학교의 장은 지도를 할 때 학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하되, 도구·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아니된다”고 정했다. 즉,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어디에서도 간접체벌을 허용한다는 의미의 구절은 없다. 그럼에도 “신체에 타격을 하지 않는 이른바 ‘기합’은 폭력이라고 할 수 없지 않으냐, 그마저 없다면 학교 내의 문제행동을 어떻게 제지할 것이냐” 등의 논리로 간접체벌이 부활할 기세다.

이것은 ‘체벌금지’의 의미를 잘못 읽은 것이다. 체벌금지는 체벌을 ‘사랑의 매’가 아니라 ‘폭력’으로 규정한 것이다. -(체벌=폭력으로 보는 관점도 체벌이 문제인 것 만큼 문제라고 생각한다. 때론 체벌이 폭력으로 변질된 경우도 있지만, 그건 폭력이지 체벌은 아니다.) 물리력이나 힘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형태는 교육이라고 볼 수 없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체벌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신체적 고통을 주느냐가 아니라, 학생들이 신체적 고통을 느껴 교사의 지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제적 상황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다. 마치 사법체계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확실히 체벌은 그 어떤 벌보다도 문제행동을 즉각적으로 수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행동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내면화한 것이 아니라 당장 신체적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 행동을 멈췄을 뿐이기 때문에 잘못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효과를 거두려면 체벌의 강도도 점점 세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간접체벌도 마찬가지이다. 수업 시간에 떠들어서 수업 분위기를 방해하는 학생의 경우 그 문제행동의 원인은 여러가지일 수 있다. 선행학습을 해서 수업에 흥미가 없을 수도 있고, 학습부진이 누적돼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정서적인 문제나 가정불화로 인해 공부에 집중할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문제행동을 만드는 원인과 구조에 대한 분석 없이 ‘문제행동’만을 문제삼을 경우 그 문제행동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간접체벌 역시 이러한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백번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문제 학생들의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과 구조에 대한 분석'을 얼마나 어느정도 수준에서 개개인 교사들이 그 수많은 학생들에 대해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교사이기때문에 학생들의 문제에 대해 교육적인 마인드로 접근을 해야하는 건 자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모든 문제에 대해 어떤 분석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한느 건 아니라고 본다.)

‘교육적 벌’은 문제행동의 원인과 구조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벌이라는 형태이지만 내용적으로 어떨 때는 학습부진을 보충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심리치료의 과정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제행동의 원인 제거나 문제 해결과 관계없는 모든 벌은 ‘교육적 벌’로서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간접체벌 찬성론자들은 체벌금지로 인한 ‘학교 붕괴’를 이야기하고 ‘교권 실추’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학교가 붕괴되고 교권이 실추되는 이유는 체벌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배움’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 공간에서 ‘배움’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했던 체벌이 오히려 문제를 은폐하고 해결할 시간을 놓치게 하여 아이들을 학교로부터 빼앗아갔던 것은 아닐까?

‘체벌금지’는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문제행동을 억지하여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문제행동이 일어나는 구조(극심한 입시경쟁과 사회 양극화, 학교 내 상담 및 복지 시스템의 부재)가 개선되도록 학생들과 소통해야 한다.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며 정치적 행동을 때론 해야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사 공무원의 정치적 행동도 제한적인 현실. 그리고 체벌이 교사들의 소통능력 부재로만 발생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경험으로 소통을 하려하다 발생하는 웃지 못 할 경우도 많다.)

간접체벌 논란은 여전히 체벌의 형태와 정도에 대한 논란을 반복할 뿐이다. 이것은 봉건제 철폐 요구를 “빵을 달라”는 말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민중들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신체적 고통을 대가로 강압적인 지시를 따르게 하여 그 순간 문제를 은폐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는 외침에 대해 ‘다른 형태의 고통이면 어떠니? 고통을 줄여주면 되겠니?’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학생인권으로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는 우리 교육은 어떤 역사를 쓰게 될 것인가?

조영선 서울 경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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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라는 작은 사회에도 질서가 필요

지난해 체벌 논란이 한창이던 때 많은 나라의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두 가지 이유로 놀란 바 있다. 첫째, 미국·영국·프랑스 방송에 이르기까지 인터뷰에 응하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나라의 체벌 찬반 논쟁이 나라 밖 ‘월드뉴스’가 되었다는 사실이었고, 둘째, 자세히 설명해도 간접체벌을 이해시키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특히 프랑스 기자들은 교사가 문제 행동 학생들을 신체나 도구를 이용해 체벌할 수 없으나, 수업을 방해하고 여타 학생의 수업권을 침해하는 학생을 교사가 즉각 제지하고 교육적인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하며, 프랑스도 그러한 권한을 교사에게 부여하고 있는데 왜 그마저 못하게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체벌 전면금지를 규정한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된 이후 교실 붕괴, 교권 추락 현상은 암담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주광덕 한나라당 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제출받은 1학기 학생징계대장을 기준으로 교권침해 현황을 살펴보면 총 1795건 중 교사에 대한 폭언·욕설이 1010건으로 가장 많고, 수업진행 방해 506건, 교사 성희롱 40건, 교사 폭행 30건 순이다. 또한 이상민 자유선진당 의원이 교과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일부 시·도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거나 논의를 시작한 지난해 총 523건의 교권침해 사례가 발생해 지난 5년간 발생한 총 1065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학교 상황이 이러한데 서울·경기 교육감과 일부에서는 이를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부 문제 행동 학생들이 수업을 방해하고 교칙을 어겨도 학교와 교사는 자신을 벌할 수 없다는 해방감과 그러한 학생들을 실효적으로 제지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는 교사들의 무력감이 함께 나타나는 데 근본 원인이 있다. 이제 학생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만을 내세워 ‘교육벌’을 마냥 부정할 것이 아니라, 신체와 도구를 이용한 직접체벌은 금지하되, 수업을 방해하고 교사의 정당한 지도를 거부하는 학생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교육벌을 내릴 권한을 교사에게 부여하는 것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된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학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교사들의 '무력감'이다. 연배가 있는 교사일수록 더욱 심하다. '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하면 할 수록 자신만 힘들 뿐이며 변하는 건 없다.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ㅇ 관점이 이렇다 '학생인권'과 교사의 '교육권'을 상호배치된다.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소수의 교사와 다수의 학생들이 함께 배우는 작은 사회라는 점에서 상과 벌을 통해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에게 시를 읽어주라’는 제안에 대해 교사들은 학교 현실을 외면한 낭만적 허구라고 냉소를 보낸 바 있다. 음주와 흡연이 의심되는 학생에게 측정기를 사용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에게 천을 덧대주라는 대안에는 파안대소하기까지 했다. 벌점을 주면 ‘교원평가점수 깎겠다’ 하고, 수업 중 떠들어 ‘조용히 하라’ 하면 ‘싫은데요’라고 하는 현실에서 교사는 제대로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 오죽하면 ‘교육감이 1주일, 아니 하루만 학교에서 수업해봐라’라는 교사들의 하소연이 나오겠는가? -(진짜로 이런 학생도 있다. 농담이 아니다. 진보, 보수가 문제가 아니다. 행정가들의 현실감각이 너무  떨어진다. 너무...그러니 '니가 와서 하루만 담임해봐'라는 넉두리를 늘어놓는 것이다.) 

경기도 어느 중학교 여교사로부터 “수업마다 대놓고 욕을 하는 학생이 있는 반에 들어가면서 ‘오늘은 아무런 일이 없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눈물의 편지를 받은 바 있다. 교육벌을 부정하는 일부 교육감들은 이러한 교실 실태가 단지 이 여교사에 국한된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솔직히 인정하고, 교사에게 최소한의 정당한 학생지도권과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간접체벌은 이미 상위 법령인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허용되었다는 점에서 하위 법령인 조례나 교육감 지침으로 이를 제한할 경우 ‘상위법 우선의 원칙’이라는 법치의 근간이 흔들리는 우마저 범하게 된다. 현장의 어려움을 모르쇠로 일관할수록 교실 붕괴, 교권 추락 현상은 점차 심화되고, 이렇듯 무너진 학교 질서를 점차 피부로 느끼는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왜 이 지경이 되도록 학교를 방치했는가?’라는 호된 질책이 교육벌을 허용치 않는 교육감에게 쏟아질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소중한 학생의 인권은 단지 맹목적 방치만으로 보호되지 않는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 교사가 교육적 훈계와 교육벌-(교육벌까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이것은 좀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훈계'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학생들은 자신의 잘못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에게 싫은 소리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부모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그런 소리를 듣지 않은 아이들이 교사가 한다고 듣겠나. 단순히 외형적으로 보이는 학생에 대한 말과 행동으로 학생의 인권을 판단하면 더 큰 학생들의 잠재력과 미래를 저당 잡힐 수 있다.) 통해 바로잡아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학생의 권리 보호일 것이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 연합회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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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구제역 때문에 난리도 아닌 듯하다. 연일 뉴스에서는 살처분되는 소들이 화면을 메우고 있다. 보기 민망하며 안타깝다. 더군다나, 숨이 붙어있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생매장 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을 매번 지켜봐야하는 매몰 인부들도 고통이 심하다 한다. 인간들의 고통이 살아 묻히는 소들에 비하겠냐마는. 이래저래 슬픈 일이다. 

매번 나도 궁금했던 사실이 왜 '살처분'해야 하는가였다. 물론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성 질병이라 그러는 것 같기는 하다만 그것밖에 해결책이 없을까라는 의문증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관련 기사 몇개를 스크랩한다. 그리고 구제역을 검색해보니 백과사전에 이렇게 나온다. 

hoof-and-mouth disease, aftosa라고도 함. 동물에 생기는 전염력이 높은 바이러스성 질병.
소·양·염소·돼지 등 거의 모든 우제류(偶蹄類)에 생길 수 있다. 아메리카 들소, 사슴, 영양, 순록, 라마, 낙타, 기린, 코끼리 등과 같은 야생 초식동물도 이 병에 걸릴 수 있으나, 말은 감염되지 않는다.
혀·잇몸·입술과 그밖에 피부가 얇은 유방이나 유두, 갈라진 발굽 사이, 발굽 위 관상대(冠狀帶 coronary band) 주위 등에 통증이 심한 물집이 생기는 것이 특징이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면역학적으로 7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각 종류가 침입하는 동물도 다르고 병증(病症)도 차이가 난다. 호흡기와 소화기를 통해서 전염되는데 처음 침입한 곳에 일차적으로 물집을 형성한다. 24~48시간 안에 혈액 속으로 침투하여 열이 나게 하는데 이 단계는 24~36시간 정도 지속되며, 이때 바이러스는 침이나 젖·소변·대변 등으로 배출된다. 그뒤 입술로 입맛을 다시는 듯한 독특한 행동을 하며 혀·잇몸·입술 등에 물집이 생긴다. 물집은 약 24시간 뒤에 터져서 껍질이 벗겨지며 매우 쓰라리고, 1~2주 정도 지나 아물 때까지 단단한 먹이를 먹을 수 없다. 물집이 발에 생기면 다리를 절뚝거리게 된다.

구제역에 의한 피해는 엄청나다. 보통 경미한 동물유행병의 치사율은 5% 정도이나 악성 구제역은 치사율이 50%이다. 살아남은 동물도 먹지 못해서 몸무게가 줄고 젖을 생산해내는 동물의 경우는 젖의 양도 엄청나게 줄어든다. 유산이 잘 되고 유방염이 흔히 생기며 2차 감염도 잘 된다.

구제역은 유럽·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등 여러 지역에서 항상 있는 풍토병이다. 바이러스는 공기·음식물·음식찌꺼기 속에서는 물론, 동물의 가죽·털·양털 등에서도 꽤 오랫동안 살아남기 때문에 이 질병을 막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주의해야 한다. 이 병이 돌면 그 지역을 검역한 후에 감염되었거나 의심스러운 동물은 모두 도살한 다음 태워 버려야 한다. 그밖에 오염된 물건은 깨끗이 소독하고, 감염되었던 농장이나 지역은 몇 달 동안 그대로 격리·방치한다.

효과적인 백신의 개발로 구제역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으나 아직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34년 마지막으로 구제역이 발생한 이후 66년 만인 2000년 봄에 경기도 파주와 충청남도 홍성 등지에서 발생해 돼지고기의 수출이 중단되는 등 축산농가에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 또한 우리나라와 함께 구제역 청정지역으로 분류되었던 일본에서도 같은 시기에 구제역이 발생했다. 아메리카 지역의 경우 엄격하게 검역하고 감염된 동물을 신속히 태워 버린 덕분에 1929년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뒤로는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이 병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 방법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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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 확산을 바라보며    우희종 /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구제역(口蹄疫)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연일 확산되는 추세와 더불어 매장되어 목숨을 잃어가는 많은 동물들의 참혹한 광경이 이제 일상적인 것인 듯 여겨질 정도다. 질병확산 방지라는 명목으로 방역당국에 의해 희생되는 동물의 수도 하루에 몇만 단위로 늘어나고 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당연히 여러 의문을 지니게 된다. 정리해보면 크게 둘이다. 과거에는 못 보던 이런 험한 모습이 어째서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과연 이런 식의 대량학살만이 유일한 선택인가?
 
사실 구제역 발생이 동물의 대량학살로 이어지는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구제역의 치사율이 성체(成體)에서 낮아도 어린 동물에게서는 높게 나타나고 전염력 또한 매우 강하다는 것 말고도, 질병에서 회복된 동물은 성장이나 사료 효율 등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질병 확산을 막는 안전지대 확보를 위해 일정 거리 내에 있는 대상 동물들을 살처분(殺處分)하는 것이다.

구제역 바이러스의 특징과 살처분의 실효성

그런데 구제역 바이러스는 특정 기후환경에서 공기를 타고 가깝게는 10km, 멀게는 60km까지 전파된다고 알려져 있다. 살처분 조치는 초기 발생상황에서 유효할지 몰라도 이미 도처로 확산된 마당에는 별로 유효한 방법이 되지 못한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자연계 외부상태에서 그다지 생존력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최근 급증하는 야생돼지를 감염시킬 수 있다. 야생동물에 의한 구제역 확산 가능성이 상존하는 셈이다. 따라서 가축의 대량 살처분 및 매몰만이 아니라 질병의 발생규모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대책이 준비되어 현장에 적용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살처분 방식만이 쓰이고 있어 안타깝다. 백신 접종을 포함해 질병 발생 규모에 따른 다양한 방역 및 방제 대책이 준비되지 못한 정부 탓에 심지어 동물을 산 채로 매몰하는 잔인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수많은 동물을 일시에 매몰하는 방식은 여러모로 걱정스럽다. 동물 생명권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논의는 차후로 한다 해도 우선 심각한 환경오염이 발생할 수 있다. 치료 불가능한 인수공통(人獸共通)전염병인 광우병에 대처하기 위해 약 200만마리 정도의 소를 도축해야 했던 영국에서 대다수의 사체를 소각 처분했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국내의 좁은 국토와 밀집된 생활환경을 고려한다면 동물 매몰이라는 방식은 방역 차원에서 질병 발생의 규모와 확대 정도에 따라 검토됐어야 한다.

전염병의 사회문화적 요인
 
잘 알려진 바대로 질병의 발생과 유행은 단순히 생물학적 이유뿐 아니라 사람이나 동물의 생활 및 사양(飼養) 방식과 더불어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요소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동일한 질병도 국가나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로 유행한다. 지구에 인류가 등장한 이래 특히 산업사회 이후 인구 증가와 식생활 변화는 매우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특히 개발국가의 동물성 단백질 소비 증가를 뒷받침하기 위해 가축사육이 산업화되고, 이를 단시간에 정착시키기 위해 인위적 사육환경이 도입되었다. 이는 긴 시간에 걸쳐 안정된 상태를 유지해온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 질병의 발생과 유행 형태가 과거와 달라진 것은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세계화와 그에 따른 나라 간 교통망의 발달로 유동인구의 수와 이동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확대되고 있고, 음식이나 사료 외에도 동물성 재료가 포함된 다양한 제품의 국제교역량이 그 규모를 파악하기 힘들 만큼 세계는 좁아졌다. 구제역을 비롯해 조류독감 등 여러 질병들이 요즘처럼 전사회적 관심을 끌 정도로 일상화된 데는 인간 위주의 시각에 더해 오직 생산성과 효율을 추구하는 산업구조 및 경제논리가 바닥에 깔려 있다.

이번 구제역 사태를 계기로 정부의 근시안적인 단순 방역대책도 지적해야겠지만, 생물권(biosphere)을 기반으로 하는 생태계에 무신경한 인간 위주의 시각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동물에게 좋은 환경이 인간에게도 좋은 환경'이라는 인식 전환이 있어야 한다. 언제 질병 창궐을 부를지 모르는 비윤리적 밀집형 공장식 사육에 대한 재검토, 생태지향적 산업구조로의 재편, 그리고 전염병에 대한 단계별 대응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위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의 결과

과거에는 볼 수 없던 참혹한 동물 대량학살의 모습이 매일 안방에까지 전해지는 현실은 그동안 자연과 단절된 인간의 생활방식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 시선이 얼마나 왜곡된 것이었는지 말해준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시각이 인간의 먹을거리의 과도한 위생상태로 이어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성 추구와 지나친 위생개념이 산업에 영향을 미치면서 이 현상이 더욱 인간 중심으로 진행되어 결과적으로 작은 외부요소의 개입으로도 막대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는 취약한 방향으로 스스로를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에게 익숙한 음식물의 HACCP(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이라는 개념도 마냥 환영할 것만은 아니다. 먹을거리를 안전하게 지키자는 취지에는 동감이지만 그런 체제가 확립될수록 우리는 자연과 동떨어져 고립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과거와 달리 작은 외부작용에 의해 급속히 무너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구제역 발생과 방역에 대한 언론의 보도행태도 아쉽다. 잘못된 대처나 문제점에 대한 생생한 보도는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생명존중과 생태적 삶의 모습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건강한 생명체를 대량 매몰하는 현장이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인수공통전염병처럼 모든 개인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현장을 반복 전달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무감각을 확산시켜야 할까. 당장 그 효과가 드러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런 것을 태연히 보고 듣게 되는 어린 미래세대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마음이 무거워진다.

2011.1.5 ⓒ 창비주간논평

 

2011.1.5  [한겨레 프리즘] 구제역 ‘팬데믹’에서 배운다

1918년 가을, 스페인독감은 일시에 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차대전 4년 동안 숨진 900만명보다 한달 남짓 동안의 독감 사망자가 5배 이상 많았다. 팬데믹(Pandemic, 전염병의 전지구적 대유행)의 대명사로 불리는 20세기 최대의 바이러스 참사였다. 스페인독감은 그해 8월 말 미국 보스턴의 한 해군 병사에게서 시작해 군용열차를 타고 미국 전역을 덮쳤고, 1차대전에 참전한 군함에 실려 유럽 전체로 전파됐다. 위생이 취약한 아시아 국가들의 희생이 가장 커, 인도에서만 1700만명이 죽었다. 시베리아 철도와 만주 하얼빈역을 거쳐 9월 말 식민지 조선 땅에도 바이러스가 유입됐다. 당시 <매일신보>는 1600만 인구 중 740만명이 독감에 걸렸고, 14만명이 숨진 것으로 보도했다. 그리스어인 팬데믹은 ‘모두’를 뜻하는 ‘pan’과 ‘사람’을 뜻하는 ‘demic’의 합성어. ‘모든 사람이 감염된’ 가장 최근의 팬데믹은 지난해의 신종플루였다.

‘가축 팬데믹’이 한반도를 뒤흔들고 있다. 남한의 동쪽과 북쪽은 발굽 두개 달린 동물만 걸리는 구제역으로 오염됐고, 닭·오리 농장이 밀집해 있는 남서지역은 조류인플루엔자(AI)의 공격을 받았다. 구제역으로 생매장당한 소·돼지가 지금까지 모두 77만8850마리. 3일 하루에만 10만마리가 땅에 묻히는 참상이 벌어졌다. 가축 보상비와 방역비를 합친 직접적인 구제역 관련 지출이 8000억원에 육박했고, 1조원을 넘어서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이다. 간접손실까지 고려한 가축 바이러스의 사회적 비용은 돈으로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구제역은 후진국병이라는데, G20에 속한 대한민국이 왜 이런 참사를 겪어야 하나? 나머지 G19의 선진국들은 다 멀쩡한데, 자연이 내린 재앙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결국 좁은 우리, 너무 많은 가축, 밀식사육, 항생제, 분뇨와 범벅된 축사 등등이 문제를 풀어가는 열쇳말이다. 한마리라도 더 많이 기르고, 병에 약한 환경을 방치하고, 방역에 무신경하고, 분뇨를 바다에 투기하는 대한민국 축산이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발상의 대전환 말고는 길이 없어 보인다. 가축 사육 총량을 줄이는 것이 시작이다. 집집마다 소를 기르고, 농가와 돼지 축사가 마을마다 공존해서는 팬데믹의 위험을 분산할 수가 없다. 환경에 주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도 소와 돼지·닭 사육을 줄여야 한다. 우리처럼 땅이 좁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일찌감치 가축의 머릿수를 제한하는 총량제를 시행하고 있다.

동물복지가 안전한 축산물의 필수요건인 세상이 됐다. 유럽연합은 2006년부터 돼지의 사육과 운송·도축·매몰처분의 최저 복지기준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산란계(달걀 낳는 닭)의 닭장 사육을 금지하고, 2013년부터는 모돈(새끼 낳는 돼지)을 좁은 쇠울타리에 가두는 것을 금지하기로 했다. 국내에서는 창녕 우포의 한 농가가 돼지 분뇨를 곧바로 축사에서 빼내는 시설을 구축해 큰 재미를 보고 있다. 건강해진 어미돼지의 출산율이 한해 15마리에서 23마리로 늘어나면서, 수익성까지 크게 높아진 것이다.

20세기 초의 스페인독감이 열차와 군함을 이용한 바이러스였다면, 사람과 상품 교역이 무한정 자유로운 21세기의 전염병은 ‘비행기 바이러스’다. 그만큼 막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당연히 가축 바이러스를 국가위험관리의 주요 대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 농부에 대한 신뢰의 힘은 이미 한우 사랑에서 확인됐다. 우리 땅에서 건강하게 생산한 고기라면 소비자들은 얼마든지 제값을 치를 것이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축산, 판을 확 바꾸자.  

ps : 동물생존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도 동물이 아닌 인간의 '수익성'차원에서 애기해야만 설득이 되고 말이 되는게 현실인가 보다. 하긴 아직 우리나라 수준에서 동물생존권, 생명권을 구제역이 유행하는 지금 애기했다가는 '돌' 맞기 쉽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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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캠브리지 대학 교수의 신간이 나왔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그들은 우리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선진국'들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프레시안에 연재된 정승일씨의 서평에 대해, 엄밀히 애기하면 서평에 나오는 특정 설명에 대한 반론이 연이어 실렸다. 사회디자인연구소라고 하는 곳의 김대호씨의 글인데, 상당히 길다. 요점은 정승일씨는 '복지'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반면, 김대호씨는 '복지'가 정당한 '상벌체계'를 약화시켜 건전한 국가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정승일씨의 노무현 비판도 나와 김대호씨의 반발을 산 것 같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파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편가르기는 나쁘지만 편의상 정승일씨는 '반노', 김대호씨는 '친노'인 듯하다. 

어제 일요일 오랜만에 노트북을 꺼내 아주 긴 이 두 글을 정리했는데, 아들이 자다 말고 날 습격(?)해 몽땅 날라가 버렸다. 그러면 안되는데 살짝 짜증이 나 아들한테 말도 안하고 째려(?) 봤더니 내 옆에서 밍기적밍기적 거린다. 자기도 뭔가 미안한 듯, 살짝 말도 걸면서...그래도 내가 말을 안하니 방바닥만 보고 밍기적 거리더라. ㅋㅋ 어찌나 귀여운지!! 날라가 글 생각을 하면 짜증이 나지만...  

장문의 김대호씨의 글은 나중에 정리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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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하고 싶다면, '노무현 시대정신'을 버려라! 

[프레시안 books]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2010-11-12 

<법철학>의 서문에서 "지혜(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아오른다"고 말한 철학자 헤겔. 그는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으로 유명한 대작 <정신현상학>의 집필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문을 써내려가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눈앞에 '시대정신(Zeitgeist)'이 어슬렁거리고 있다며 감격해한다.

그 순간 헤겔이 목격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깃발 아래 프러시아를 점령하여 수도 베를린의 (우리의 광화문에 해당되는) 중심가에 나타나 자신의 군대를 순시하던 나폴레옹의 말 탄 모습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이 시대의 나폴레옹은 과연 누구일까?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11~12일 서울에는 글로벌 경제 위기와 무역 전쟁, 환율 전쟁의 해법을 찾고자 각국 정상들이 모였다. TV에는 회담의 의장인 이명박 대통령의 분주한 모습과 함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모습이 비쳐졌다. 두 사람은 G20 회의에서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이라는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진영에 서 있다.

이번에 모인 120개 글로벌 기업의 CEO들 (여기에는 삼성의 이건희,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SK의 최태원 회장 등이 끼어 있다) 역시 서울 한복판에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시대정신으로 찬양한다. 작은 정부, 부자 감세와 복지 재정 축소(긴축 재정), 대형 할인점 규제와 같은 기업 규제 철폐, 공기업 민영화 등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지속을 바라는 이들의 목소리는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G20 회의와 거의 동시에 번역·출간된 장하준의 새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부키 펴냄)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자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는 "자유 시장이라는 허구"에서 시작해서 "금융 시장은 덜 효율적일수록 좋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주류 경제학자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이야기들을 용감하게 펼쳐나간다.

장하준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선 새로운 시대정신의 정치경제학 이야기보따리를 독자들 앞에 풍성하게 펼쳐 놓는다.

성장과 분배, 트리클다운과 펌프

  

전작인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순희 옮김, 부키 펴냄)에서 장하준은 주로 개발도상국들의 '성장' 이슈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도 이어진다.

장하준은 "자유 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없다",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는 주장을 통해 가난한 개발도상국도 한국이 1960~70년대에 취했던 적극적 정부 개입과 산업 정책(industrial policy)을 취함으로써 경제 개발과 경제 성장에 성공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3년 전에 나온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주로 개발도상국 독자를 겨냥한 것과는 달리 이번 책은 영국과 미국 등 선진국 독자를 위해 기획되었다. 이 책은 G20 회의를 주최할 정도로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한 한국 독자의 고민, 즉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선진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준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실제로 부자들을 위한 정책은 지난 30년의 세월 동안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는데 실패"했다며 비판한다. 또 그는 부자들에게 부를 몰아줌으로써 자유 시장 경제학이 기대한 것, 즉 '윗부분에서 창출된 보다 큰 부(보다 큰 파이)가 아래로 흘러내려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며들 것'이라는 이른바 '트리클다운(trickle down)의 원리'도 실제로는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선진국의 신자유주의 정책 패키지는 부유층 감세와 금융 자본주의화를 통해서 부자들에게 부를 집중시켜 줌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자들은 생산적 투자 확대보다는 금융 자산 투기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경제 성장 지체'와 '고용 없는 성장', '늘어나는 근로 빈곤층(working poor)' 현상을 발생시켰다.

트리클다운 이론에 대응하는 장하준의 이론은 펌프(pump)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부유층에 집중된 부가-중력(즉 '자유 시장' 원리)의 자연스런 작용에 의해-가난한 계급에게 한 방울 한 방울 흘러 떨어지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은 너무 느리고 부족하다. 따라서 아예 전기 펌프를 설치하여 부를 콸콸 아래로 이전시키는 것이 경제 성장의 혜택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기에 훨씬 더 쉽고 빠른 길이다. 그 펌프가 바로 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라는 펌프를 설치한 경제는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복지국가라는 큰 정부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자기가 일하는 기업과 산업이 시장 비효율성 문제로 인해 문을 닫는다 하더라도 정부로부터 실업수당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새 직장을 구하는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까지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까닭에 기업과 산업의 구조 조정에 크게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지국가는 기업과 산업의 효율적 구조 조정과 고부가 가치화를 보다 용이하게 하고, 그 결과 경제는 더욱 빨리 성장한다.

공정과 공평, 자유 시장과 국가 개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공정'과 '공평'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 준다. 장하준은 "잘 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라는 잘 알려진 사실을 지적하면서, 자유 시장 경제학은 이러한 상식적 팩트마저도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장하준은 이어 미국의 버스 운전사와 한국 또는 멕시코의 버스 운전사가 하는 일은 동일한데도 임금 격차가 수배 또는 10배나 난다는 사실이 과연 공정·공평한가라는 윤리적 문제도 제기한다. 물론 이러한 나라 간 임금 격차는 각국이 국경을 개방하여 노동 이민 시장을 완전 자유화하면 금세 사라진다.

자유 시장 경제학의 관점을 수미일관되게 적용한다면 미국의 버스 운전사가 멕시코의 버스 운전사보다 10배의 임금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미국은 멕시코로부터의 노동 이민을 무제한 허용하는 '자유 시장' 정책을 사용함으로써 정의(justice)와 공정(fairness)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전신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상품 및 서비스의 국제적 이동과 자본의 국제적 이동만을 자유화할 뿐 결코 노동 이민의 국제적 이동까지 자유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 시장 이론을 따르는 미국 정부의 멕시코 국경 통제는 날로 살벌해지고 있으며, 세계 어디서나 이 이론은 보수주의적 민족 차별과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한편으론 자유 시장 경제학의 논리적 자가당착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정과 공평에 관한 자유 시장적 접근의 한계를 보여준다. 만약 한국과 미국이 무제한적인 노동 이민 시장 자유화에 합의할 수만 있다면, 한미 FTA도 그렇게 공정·공평하지 못한 협상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사회디자인연구소 등 우리나라 진보·개혁 세력 일부에서 제기하는 '공정 사회' 관점의 복지국가 비판론에 대해서도 이야깃거리를 준다. 예컨대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는 복지국가보다는 정의와 공정·공평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공평이 1차 분배 구조인데 반해 복지국가는 2차 분배 구조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그리하여 사회디자인연구소는 1차 분배 구조의 불공정성을 해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에 오히려 1차 분배 구조에서의 시장 논리(즉 자유 시장)를 더욱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좌파' 정책을 구사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특권적 분배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노동 시장 유연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이 이 책에서 잘 지적하듯이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유럽의 복지국가에서도 자유 시장에서 형성되는 '청소부'와 '사장님' 간의 임금 격차는 한국과 미국만큼이나 크다. 즉, 김대호의 표현에 따르면 1차 분배 구조에 있어 북유럽은 미국 및 한국보다도 더 불공정한 사회이다.

그런데도 북유럽 나라들은 부자 증세와 복지 재정 지출을 통해 부를 위로부터 아래로 적극적으로 이전시키는 복지국가 펌프를 설치한 덕택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사회 정의와 공정· 공평을 달성하였다. 자유 시장에서 그 가격이 결정되는 1차 분배 구조상의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유 시장을 더 강화할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가 개입 특히 복지국가적 개입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따라서 문제는 정의·공정이 먼저냐 복지국가가 먼저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정의·공정을 달성하기 위해 자유 시장 정책을 쓸 것인가 아니면 국가 개입(특히 복지국가 정책)을 할 것인가이다.

기회 평등과 실질적 공정성

공정·공평의 문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기회의 평등이냐 결과의 평등이냐의 문제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기회의 평등'을 적극 옹호하며, 공평한 기회 제공은 공정 사회를 이루는 출발점이라고 이해한다. 그들은 가난한 집 아이도 교육받을 기회를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우 자립형 사립학교를 늘리더라도 가난한 아이들도 입학할 수 있는 특별전형 제도를 도입하면 기회 균등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장하준은 이 새 책에서 과연 기회를 공평하게 준다고 해서 사회가 '공정'해지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설령 가난한 집 아이들이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집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배불리 먹을 수 없다면, 그리고 집에 공부할 책도, 책상도 없다면, 그들은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무상 급식을 제공하여 이들이 굶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공립도서관을 통해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무상으로 책을 대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

나아가 가난한 집 부모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노동) 시장'('기회 균등'의 시장)이 아닌 복지국가적 개입에 의해 적절한 소득과 교육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는 한, 그들은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차라리 빨리 일자리를 찾아 돈벌어오라고 다그칠 것이다. 이렇듯 기회의 균등은 그 자체의 '형식적 공정성'에 불과한 바, 그것이 '실질적 공정성'으로 승화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의 균등'도 필요하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는 가난한 집 부모들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전제로 정부가 소득보조금을 제공하는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정책'의 대성공으로 사회에서의 '공정성'을 실질적으로 증진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서울 G20 회의의 '나폴레옹'은 바로 브라질 대통령 룰라였다고 할 수 있다.

'성찰적 진보'를 위한 정치경제학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달리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선진국에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리틀아메리카'(미국식 선진화)냐 아니면 '빅 스웨덴'(북유럽식 선진화)이냐의 두 가지 선진화 방향을 놓고 여전히 고심하는 우리나라 진보·개혁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장래의 진보·개혁 재집권을 구상하는 '성찰적 진보'임을 자부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는 진정으로 '신자유주의 좌파'의 시대였다. 그것은 두 대통령과 집권 정당만이 아니라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세대 즉 386(486) 세대 전체의 문제였다. 이 세대가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양상은 다양하다.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386 세대는 '굴뚝 산업'을 넘어설 '지식 기반 경제론'에 열광했다(지금도 이것은 여전하다). 그들은 굴뚝 산업을 대표하는 재벌계 대기업의 이건희와 정몽구 등 구태의연한 재벌 총수가 아니라 '지식 기반 경제'를 대표하는 새롭고 '멋진 자본주의'의 대표자인 빌 게이츠와 스티븐 잡스(그리고 우리의 안철수)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정보통신 기술(IT)과 인터넷을 통해 달성될 정보화 사회 또는 탈산업화 사회(다니엘 벨과 앨빈 토플러)에서는 '상호 소통적 민주주의'와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피터 드러커의 탈자본주의 사회)가 실현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진보·개혁 진영에서 나타난 IT와 인터넷에 대한 이러한 열광과 기대는 우리나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미국의 경우 빌 클린턴 대통령과 로버트 라이시 노동부 장관이 그러했고, 영국의 경우 토니 블레어와 앤소니 기든스의 신노동당이 그러했다. 당시 미국 민주당과 영국 신노동당이 내건 '제3의 길' 노선은 부자 증세 및 복지 국가 지출 등 전통적인 진보적 정책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무관심했고, IT 및 인터넷에 대해서는-미국 민주당과 빌 클린턴을 열렬히 후원한 빌 게이츠 및 앨빈 토플러와 더불어-열광적으로 찬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IT 및 인터넷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서도 영국, 미국, 한국의 '신진보주의(제3의 길)' 세력들은 실리콘벨리의 벤처 왕국과 벤처 캐피탈 천국을 뒷받침한 미국의 월스트리트와 영국 런던이 주도하는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영국 보수당과 미국 공화당이 1980년대부터 추진해온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의 정책과 이론을 이들은 '신진보'의 이름으로 대폭 수용한 것이다.

서구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초반 이래 386 세대 전체에서 IT와 인터넷, 탈산업화, 세계화와 개방에 대한 열광적인 방향 전환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각종 정책들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지식 기반 경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는 도발적 주장을 통해 이 세대의 통념을 무너뜨려 버린다.

나아가 장하준은 영국 신노동당과 미국 민주당이 '제3의 길' 노선의 일환으로 주장해온 '사회투자국가' 이론도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즉 영국의 신노동당과 미국의 민주당은 경제 성장과 연계되지 않는 노인 및 어린이를 위한 사회복지 예산은 줄이면서(복지국가 축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투자국가'라는 미명 하에 대학 교육 등 학교 교육은 대폭 강화하는 노선을 추구했다(우리나라의 경우 유시민이 그러하다).

이에 대해 장하준은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회투자국가 이론의 비현실성을 비판한다. 특히 그는 대학 진학률이 매우 낮은 스위스의 생산성이 대학 진학률이 매우 높은 미국·한국 등보다 훨씬 높다는 '스위스 패러독스'라는 테제를 통해, 직업 및 경제 활동과 긴밀하게 결합되지 않은 일반 교육의 무조건적 확대만으로는 나라와 국민을 부유하게 만들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밖에도 장하준은 우리나라에서도 진보·개혁 NGO들이 많은 관심과 열성을 가지고 전개해온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날리고 있다. 정부 보조금이 없다면 성공적인 모델로 알려진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 역시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한다는 지적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마지막으로 장하준은 "금융 시장은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는 역설적 테제에서, 서유럽의 금융 허브로 발돋움하여 융성하던 아이슬란드의 경제가 어떻게 글로벌 금융 위기의 와중에서 사상누각처럼 붕괴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기획되어 이명박 정부가 여전히 추진하고 있는 '동북아 금융 허브' 정책이, 우리 경제와 국민 개개인을 불안정한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얼마나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지를 지적한다.

장하준이 이 책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동북아 금융 허브 전략 역시 '지식 기반 경제(신경제)' 담론과 '제3의 길' 담론이 없었다면 정책적으로 추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정신과 진보·개혁 집권 플랜

2004년 3월 유례없는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의 업무가 정지되자 광화문 거리는 수십 만 명의 시위대로 넘실댔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청와대 안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읽고 있던 책은 바로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 권오규(노무현 정부에서 그 후 재정경제부 장관까지 지냈고 한미 FTA도 밀어붙인)가 추천한 영국 보수당 마거릿 대처의 일대기였다.

물론 대통령의 개인적 독서 취미까지 일일이 뭐라고 할 수는 없으며, 당시 노무현은 김훈의 <칼의 노래>도 읽었다고 한다. 문제는 당시의 수십 만 진보·개혁 세력 앞에서,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대통령이 마거릿 대처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 청와대의 386 참모진의 모습이었다. 2년 뒤 감세 정책과 함께 한미 FTA를 밀어붙이면서 "신자유주의 좌파면 어떠냐?"라고 반문한 노무현의 행동은 한 개인의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386 세대 전체의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장하준 역시 전형적인 대한민국 386 세대이다. 군부 독재와 경제적 후진이 여전하던 1980년대 초반의 한 개발도상국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이다. 그가 쓴 책들에는 그 나라와 그 시대의 고민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의 책들은 식민지 역사와 전쟁의 참화, 그리고 가난한 1950년대와 60년대에 태어나 경제 개발과 정치적 독재가 한참이던 1970년대와 80년대에 학교를 다니면서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한 한 젊은이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나아가 그의 이번 새 책은 이제는 개발도상국 딱지를 떼고 선진국을 향해 도약하는 우리나라의 여러 고민고리들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선사하고 있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감세냐 증세냐, 제3의 길이냐 복지국가냐 등등의 고민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장하준 교수는 우리나라 386 세대의 잘못된 지향성과 허상들(미국 민주당과 영국 신노동당도 함께 공유하고 있는)에 대해 적극적으로 애정 어린 비판을 가한다. 나아가 향후 한국을 비롯한 영국의 진보·개혁 세력(영국의 신노동당)이 재집권을 구상한다면 어떠한 경제 사상적 기초 위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영국의 <가디언>이 새로 선출된 신노동당 당수에게 장하준과 점심을 하라고 권유한 것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하준의 책은 민주주의를 꿈꾸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던 이 나라의 386 세대의 필독서이다. 더 정의롭고 더 공정한 세상을 꿈꾸는 모든 젊은이들과 장년층들 역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넘어설 새로운 시대정신은 G20 회의가 열린 이 나라의 길거리마다 이 책의 독자들과 함께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노무현은 알았다…장하준·정승일의 착각 또는 헛발질 

[프레시안 books] 진보의 길을 말하려면, 현실에 발을 딛어라!   2010-11-19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경제학)의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이다. 국내외에서 이 책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이 이 책의 논리를 정면 비판하는 서평을 보냈다.

김대호 소장의 글은 '프레시안 books' 15호(11월 12일자)에 실린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대한 호의적인 서평(집권하고 싶다면, '노무현 시대정신'을 버려라!)에 대한 반론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진보·개혁 진영의 길 찾기의 취지에서 이 책을 둘러싼 논쟁을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

이 글은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이 쓴 "집권하고 싶다면, '노무현 시대정신'을 버려라!"에 대한 답 글이다.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대한 서평이 아니라, 정승일·장하준의 오래된 착각과 궤변에 대한 촌평이다. 이들의 주요 주장을 제대로 비평하려면 책 한 권 분량의 지면이 필요한데, 이번 글은 정승일의 서평에 나오는 두 사람의 공통된 착각과 궤변에 국한해서 비평하려고 한다.

공정과 공평이라는 안경 
 
먼저 나는 정승일·장하준과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한국 사회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게 해주는 안경 하나를 제시할까 한다. 그것은 사회적 상벌 체계 혹은 공평이라는 안경이다. 좋은 개념은 사회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게 해주는 안경 역할을 한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신자유주의와 양극화라는 개념은 진보의 통찰력을 많이 떨어뜨리는 '불량 안경'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사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통합을 담보하는 사회 운영의 원리가 곧 '정의'다. 이 핵심은 유한한 자원을 둘러싼 인간과 인간 간의 경쟁과 협력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경쟁(게임) 규칙이다. 단순화 하면 정의는 승자도 패자도 억울함 없이 그 결과에 승복하는 '사회적 상벌(incentive-penalty)' 체계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르게 서야 사회가 가진 자원, 에너지가 적재적소로 흘러가서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정의(합리적 경쟁 규칙)의 양대 지주는 공정과 공평이다. 영어에서는 이를 거의 구분하지 않고 다 "fairness"로 표현한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이를 명백히 구분할 뿐 아니라, 중국 공산당과 일본 민주당은 최상위의 정치적 가치로 취급한다. 한국은 미국, 영국의 영향 때문인지 공정과 공평이라는 개념이 좀 모호하다.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의 통상적 용법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공정은 '경쟁 기회·조건·출발선의 평등'과 '반칙 없음'과 '결과에 대한 승복'을 의미한다.

한편, 공평은 '결과의 합리적인 불평등', '합리적인 평가 보상 체계=상벌 체계'를 의미한다. 차별할 이유가 없을 때는 평등이 곧 공평이기에, 일상에서는 공평과 평등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언어 습관에 근거하여 공정은 경쟁의 입구, 즉 출발선(starting line) 관리 원칙으로, 공평은 경쟁의 출구(finish line) 관리 원칙으로 단순화 하면 어떨까 한다. 물론 공정은 경쟁 과정의 반칙 없음과 결과에 대한 승복도 포함한다. 이명박이 8·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라고 한 것은 나름대로 한국인의 언어 습관을 잘 감안한 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명박은 왜 평등한 기회라고 하지 않고 공평한 기회라고 했을까? 평등과 공평을 혼동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 뒷걸음치다 쥐 잡았는지 모르지만, 공평한 기회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이는 한국의 '기회(지역) 균형 선발 제도'나 미국의 '적극적 기회 보장 제도=소수 집단 우대 제도(affirmative action)'. 영국의 '아동 발달 계좌(Child Development Account)'에서 보이듯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 불우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약자 보호=강자 차별) 의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격차의 수준과 사회적 최소한의 문제

한편, 합리적인 평가 보상 체계=상벌 체계로 등치 되는 공평은 승자·강자의 이익 수준과 패자·약자에 대한 배려 수준을 정하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공평은 흔히 '고위험 고수익, 저위험 저수익'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의미를 파고들면 많이 기여한 존재는 많이 먹고, 전혀 기여하지 못한 존재는 굶어 죽으라는 비정한 자원 배분 원칙이 아니다. 이는 지속 가능한 사회 발전을 위한 자원 배분 원칙이기에 경쟁 결과 나타나는 격차(차별이나 특권)의 수준과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을 정하는 원칙이다.

상식적으로 기계적 평등이나 승자와 패자 간의 너무 적은 격차는 사회적 상벌 체계를 무력화하여 가치(부)의 총량을 늘리지 못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패자·약자에게조차도 불행한 사회를 만든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사회주의 몰락으로 또 1970년대 영국이 앓은 복지병으로 증명되었다.

반면에 사회적 최소한이 너무 낮은, 승자독식·과식의 매몰찬 상벌 체계는 인간의 본능의 하나인 도덕 감정(측은지심, 동정심)에 위배되기도 하지만, 전쟁과 다를 바 없는 격렬한 투쟁과 재기불능의 나락에 빠진 패자의 승복 거부를 초래하여 승자가 누릴 이익과 혜택을 무색하게 만든다.

사실 모든 경쟁의 출구는 또 다른 경쟁의 입구이기에 승자의 독식·과식은 출발선의 평등을 훼손하고, 결과적으로 패자로 하여금 억울함에 치를 떨게 하여 승복 거부 사태를 초래한다. 결과적으로 경쟁(경제 활동) 참여자의 저변을 좁혀 사회적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 한국과 미국의 경제 사회 발전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평성을 구현하는 것이 어렵고 중요한 것이다.

不患貧 患不均

중국 공산당은 공평의 원류로 공자 계씨(季氏)편의 통찰을 들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후와 사대부는 토지가)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함(불공평)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안정되지 않은 것을 걱정한다.'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모자람(寡)이나 가난(貧)보다 불공평(不均)과 불안(不安)을 먼저 걱정한다는 것은 일찍이 상과 벌의 중요성을 강조한 법가(한비자)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경상남도 도지사 김두관의 오래된 좌우명이기도 한 "不患貧 患不均(가난이 아니라 불공평을 걱정한다)"사상은 2000년 이상 사상적 상극으로 알려진 유가와 법가가 일치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자신들의 핵심 가치를 성장과 복지로 설정하는데서 보듯이, 아직도 모자람(寡)과 가난(貧)을 핵심 화두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답답한 일이다.

어쨌든 승자와 패자 간 격차의 수준과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 한마디로 사회적 상벌 체계는 나라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다르고, 정치 세력의 역관계에 따라 다르다. 또한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서도 다르다. 예컨대 주변 나라들이 빼어난 인재나 기업에 대해 아낌없이 보상한다면, 이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할 수 없이 보상을 좀 더 해줘야 한다. 그래서 한 때는 국가들 간에 법인세 인하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북유럽 국가에서 유지되는 사회적 상벌 체계(고율의 세금, 보편적 복지, 작은 사회적 격차=높은 평등도)가 영국, 미국, 한국, 중국의 발전을 담보하라는 법은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공정과 공평 이전의 문제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정과 공평 이전의 기본 문제가 몇 개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합의된 규칙을 경쟁 참여자들이 준수(승복)하는 것이다. 이는 주권자(국민)나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반칙 혹은 범법을 처벌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 강자들이 법 위에 군림하면서 숱한 반칙을 저질러왔기에-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미명하에 삼청교육대와 정치활동규제법을 만든 전두환이 대표적이다-선진국에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 반칙과 특권 철폐, 권력자나 강자의 전횡을 견제하는 "진짜 법치주의"와 3권 분립, 비대하고 자의적인 검찰 권력 견제하기 등이 강조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기본 문제는 경쟁의 출구와 입구를 연결하는 경쟁 방식이나 경쟁 장(場)의 문제이다. 이는 곧 유한한 자원과 가치를 배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공직자 선출·임용제도(고시, 공시, 선거)와 입시제도 개혁이 큰 정치·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해 있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경쟁 방식의 문제는 선진국에서는 그리 큰 정치·사회적 이슈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합법적 제도적 불의의 온상으로, 성장과 통합의 발목을 잡고 있는 중차대한 모순이다. 이 문제를 건너뛰고 공평한 기회나 적극적 기회 보장을 얘기할 수 없고, 복지도 얘기할 수 없다.

경쟁 방식의 문제는 경쟁의 출구에서의 불합리한 격차(불평등), 곧 불공평 문제로 귀결된다. 경쟁 방식을 바꿔서 경쟁자를 배제하든, 부정 출발을 하든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실력이나 사회적 기여에 비해 훨씬 많은 권리, 이익을 회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경쟁 방식이 중요한 것은 주된 경쟁 방식=자원 배분 방식이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인지, 정치가 키를 쥐고 있는 국가인지, 아니면 시장, 국가, 역사·문화, 집단 간의 역관계 등이 얽히고설킨 어떤 것인지에 따라서 지나친 격차(일명 양극화)에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장이 만든 격차

예컨대, 오피스 밀집 지역의 점심시간에 손님이 줄서는 식당과 손님이 없어서 파리 날리는 식당의 격차는 패자들조차 감히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격차다.

물론 이 정도로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은 한국에서 그리 많지 않겠지만, 어쨌든 자유로운 선택권이 작동하여 만들어낸 수많은 격차(교회 간 양극화, 인터넷 유통이 만들어낸 양극화 등)와 그에 대한 대처 방식은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 일본, 한국 등 문명국들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정한 사회 안전망 제공, 후유증 적은 산업 구조 조정과 적절한 변화 감속·완충(규제) 장치, 금융 지원, 경영 노하우(컨설팅) 지원 등이 그 정책 기조일 것이다. 물론 한국은 시장이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기에 특별히 독·과점 방지, 공정 거래, 소비자 보호 관련된 정책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세계화, 지식정보화, 자유화의 흐름이 거세진 1990년대 이후에는 주된 자원 배분 방식이 자유로운 소비자 선택권이 작동하는 시장인 경우는 신자유주의-양극화 시비가 나올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등지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정치·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개념으로 종종 사용되지만) 미국, 일본, 중국의 정치권이나 지식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시비나 양극화 시비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왜 일까?

추측컨대 양극화라는 개념이 격차의 크기만 주목할 뿐 격차의 다양한 성격을 묻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신자유주의 시비를 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시장 근본주의)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신자유주의 개념을 확대해 버리면 세계화, 지식정보화 시대의 현대 자본주의 그 자체라서, 한국, 중국, 브라질의 경제·사회 정책도 몽땅 신자유주의로 뭉뚱그려져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국가가 만든 격차

그런데 한국 사회는 시장이 아닌, 국가의 규제(법, 제도)나 재정에 의해 배분되는 자원의 비중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너무나 크다. 토지 주택 관련 거대한 규모의 불로 소득이 대표적이다. 이는 국가가 쥐고 있는 소유권·담보권 제도, 토지 이용 규제 등에 의해 생성되고 분배된다.

단적으로 1960~80년대 서울 강남과 수도권 신도시를 개발할 때 대부분의 토지를 국·공유지로 확보했더라면(이 때는 충분히 가능했다), 1980년대부터 공공 임대·전세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했다면, 노무현 정부 초기부터 담보권을 제한하는 LTV(주택 담보 인정 비율) 규제나 DTI(총부채 상환 비율) 규제 등을 도입했더라면, '기업 도시'나 '혁신도시' 지정을 더 신중하게 했더라면 부동산으로 인한 비효율과 절망과 고통은 지금의 10분의 1 수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는 부동산 관련 각종 규제는 한국 관료를 비롯한 노블레스의 근로 소득 약탈, 불로 소득 수취 공작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에 압도적으로 책임이 있는 불합리한 격차는 이 뿐 아니다. 한국의 청소년 인재-이는 수백조 원의 금융 자산 이상으로 중요한 자원이다-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몇 개의 '士'자 직업의 이면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면허증의 숫자 규제와 지나친 독점권 보장(변호사법, 의료법 등)이 버티고 있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자랑하는 한국 공공 부문(공무원, 공기업)의 매력과 공공 부문-민간 부문의 격차도 마찬가지다. 행여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격차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로 인해) 민간 부문이 세계화, 자유화된 시장의 파도에 휩쓸려서라거나, 민간 부문이 못나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논박할 가치조차 없는 한심한 소리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각종 복지 혜택을 무더기로 제공하여, 복지 재정 수준에 어울리지 않게 복지병을 만들어내는 기초생활보장제도(혹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자와 차상위 계층의 불합리한 격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의 산물이다. 한편, 식당 아줌마와 건설 노가다(일용 잡부)로 상징되는 하층 근로자의 처우가 15~20년 동안 거의 답보 상태인 것은 중국(조선족)과 동남아시아의 단순 근로자의 대량 수입(방치)과 이들의 노동권에 대한 과소 보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피아 전설이 떠도는 이유

세간에 관료와 기업과 이익집단이 결탁한 마피아-재정경제부, 국토해양부(도로), 교육부, 보건복지부, 국세청, 검찰 등-에 대한 전설이 떠도는 것은 관료가 쥐고 있는 유·무형의 규제권(토지 이용 규제권, 처벌권 포함)과 재정 할당권이 지역, 산업, 기업, 개인의 명운을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정치 갈등이 격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주식회사 한국의 신화를 만든 발전국가의 유산이자, 분단과 냉전의 유산이다. 1997년을 전후하여 확 풀어버린 것은 산업, 무역, 금융 관련 규제일 뿐이다. 노동 관련 규제는 풀었다고 할 것까지 없다. 정리 해고제는 거의 수사 이상이 아니었으니까! 관련 노동법 때문에 정리 해고 사태가 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분명한 것은 관료로 하여금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유·무형의 권능을 순순히 놓게 할 만큼 한국 정치가 유능하지도 않았고, 관료가 스스로 자신의 권능을 내 놓을 정도로 공공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관료나 국가에 대한 관심이 민영화, 규제 완화, 감세, 복지 축소 여부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항시 선진국의 문제의식과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식민지 지식인(이념정책의 오퍼상)의 오랜 관성 아니면, 대·공기업 조직 노동의 사상·이념적 영향력 때문이 아닐까?

나는 한국 정부를 두고 GDP 대비 정부 재정 규모나 인구 대비 공무원 숫자를 기준으로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를 따지는 것은 저울로 달 것을 자로 측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접근이라는 얘기다. 복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한국 정부는 시장과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크고 강한 정부였다. 거칠게 말하면 공공성과는 담쌓은 일종의 마피아들이 장악한 정부였다. 적어도 거기에 크게 휘둘리는 정부였다.

지금은 재벌 대기업과 이익집단이 정부를 쌈 싸먹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피아라고 표현하니 매우 사악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이들의 도덕성과 공공성은 모든 것에 앞서서 재선을 생각하는 정치인이나, 검찰 공화국을 꿈꾸는 정의의 사도(?) 검찰이나,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인과 노동조합 간부 정도는 된다고 보아야 한다. 처지와 조건에 따라 우리만큼 선하고, 우리만큼 악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치밀하고 정교한 견제 감시 장치가 없기에 평범한 관료가 마피아의 일원으로 된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정부 시절에 관료의 행태를 바꾸려고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검찰의 현주소는 그 실패의 기념비다.

앞에서 길게 국가에 압도적 책임이 있거나 주요한 책임이 있는 모순을 이야기 한 것은 오로지 시장화, 민영화, 규제 완화, 복지, 세금에 관심이 집중된 반신자유주의 프레임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시장, 국가, 사회가 합작한 격차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한국의 고질적인 모순도 오직 하나의 요인에서만 발원하는 것이 아니다.

전임 교수와 시간 강사의 부당하고도 극심한 처우 격차를 생각해 보라. 한국의 시간 강사는 전임에 비해 실력이나 노력이 많이 부족해서 처우가 낮은 것은 아니다. 대학의 가혹한 이윤추구 탓도, 대학 간 과도한 경쟁 탓도 아니다. 오히려 대학의 서열 구조로 인해 대학 간 경쟁이 구조적으로 어려워서 문제다. 하여간 신자유주의의 산물은 아니다. 국가가 사용자라면(몽땅 국립대학이라면) 공기업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듯이 재정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돈 낼 사람이 학위의 효용을 의심하는 학생과 학부모인 한 그렇게 해결할 수도 없다. 복지로 시간 강사 문제를 완화 할 수는 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가 아닐까?

그 외에도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극심한 격차, 대기업·공기업 생산직의 급격한 노령화(노동시장의 수준에 비해 너무 높은 고용 임금 수준), 수도권 집중과 지방의 총체적 피폐화 등도 기본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와 힘 있으면 전후좌우 보지 않고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몰염치하게 추구하는 뿌리 깊은 문화, 관행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 낸 것들이다. 이 문제들은 복지로 고통을 약간은 완화할 수는 있겠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선진국에서 보기 힘든 현상

사실 좋은 학과 및 학벌을 따기 위한 사교육 열풍, 해외 유학 열풍, 고시·공시 열풍, 과도한 스펙 쌓기, 시간 강사 문제, 최악의 자살률과 저출산 고령화, 낮은 고용률과 너무 낮은 청년 고용률, 좀체 줄지 않는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 문제 등은 선진국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의 개방화, 자율화, 민영화, 규제 완화 수준이 유달리 높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복지 수준이 낮아서 악화되는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핵심 원인이 아니다.

핵심 원인은 선망하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생산력 수준에 비해 선망하는 일자리와 그 생활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 다수의 일자리가 사회 통념에 비해 너무 열악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지국가를 시대정신인양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몽땅 1997년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 상륙한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고작 대안으로 내 놓은 것이 획기적인 복지 확대이다. 당연히 복지가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과장한다.

이들의 실천적인 귀결은 1987년 이후 진보 동네의 부동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노동권 옹호, 자본권 억압"이다. 당연히 노동이 아닌 자영업자와 공식 실업자와 사실상 실업자와 청년층에 대한 대책이 없다. 자본이 노동을 매우 무서워하고, 고용을 엄청난 부담으로 느끼는 한 고용 확대는 쉽지 않기에,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도 사실상 없다. 복지국가론에서 오직 유효한 것은 세금을 통한 공공 부문 확대와 보건-의료-복지 스펙을 강화하여 사회 서비스 일자리를 확대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권 강화, 자본권 억압"을 중심에 놓는 한 청년 세대와 미래 세대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의 인권은 온데간데없다. 물론 복지는 이 문제를 약간은 완화하는 측면은 있다. 그런데 보수는 이 정도 수준의 대책도 없다. 그래서 비극인 것이다.

벽을 등지고 얻어맞는 주먹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의 비상 등으로 인해 강력한 구조 조정 압력은 어느 나라나 동일한데 한국 사회가 유달리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벽을 등지고 얻어맞는 주먹의 충격이 큰 것처럼, 한쪽이 꽉 막혀있는 상태에서-경쟁, 유연화, 구조 조정 등 시장 원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영역이 많다-주로 힘없는 존재들만 거친 글로벌 시장의 파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한국은 공공 부문, 자격증 부문, 대기업 조직 노동 등 힘 있는 쪽은 너무 과잉 보호되고, 힘없는 쪽은 너무 과소 보호되고 있다. 전자 쪽으로는 시장 원리가 너무 통하지 않고 후자 쪽으로는 규제 완충 장치 없이 시장 원리가 너무 거침없이 통한다.

그래서 국부적으로 노동권의 과보호가 나타나고, 국부적으로 자본권의 과보호가 나타난다. 국부적으로는 복지 과잉병이 전반적으로는 복지 과소병이 나타난다. 그 결과 한국의 제대로 된(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직업, 직장의 처우는 우리의 생산력 수준이나 경제 구조에 비해 너무 높고 안정적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그 반대다.

이는 한국 자본의 노동과 고용 확대에 대한 무서움 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나는 선진국 중에 2만 달러대에 한국만큼 자본이 노동을 무서워 한 나라가 또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노동이 백기 투항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해서도 안 된다.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의 이중 왜곡으로 인한 패악은 우리의 소득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낮은 복지 수준과 지나친 장시간 노동과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토지 주택 관련 제도 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기 마련이다. 이는 이익집단에 밀리고 마피아 집단에 휘둘리는 공공(정치, 행정, 사법, 언론, 대학, 종교, 시민단체)이 있다.

나는 복지국가를 시대정신인양 강조하는 사람들이 GDP 대비 복지 재정 수준과 공무원 숫자와 국민건강보험 보장률 등을 수없이 강조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경제·사회적 인프라에 해당하는 상벌(평가 보상) 체계, 경쟁 방식, 정치 행태, 1인당 GDP 대비 부문, 직업, 직능별 처우 수준, 노조와 이익집단의 행태, 의료 공급 기관의 성격(한국처럼 민간 의료 공급기관의 비중이 높은 나라는 별로 없다), 사회 투명성 등은 모르는지 애써 외면하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얘기하지 않는다.

왜 1차 분배 구조가 문제인가, 왜 정의가 먼저인가?

원래 승자와 패자의 이익 수준을 정하는 주된 장(場)이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이라면, 국가의 조세, 재정, 복지 정책을 통하여 승자와 패자의 격차와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된다. 출발선의 평등을 의미하는 적극적(공평한) 기회 보장 정책으로 말한다면 '적극성(공평성)'의 수준을 때론 전진, 때론 후진시키면 된다. 사회적 최소한 수준도 때론 상향, 때론 하향시키면 된다.

이는 한국, 영국, 미국, 스웨덴 등 모든 문명국 정치 세력들의 공통 과제이다. 물론 진보와 보수 정치 세력 간에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선이 달라 정권 교체가 일어난다. 요컨대 선진국은 세금과 복지라는 2차 분배 구조를 통해서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을 높이고, 출발선의 평등 정책만 실현하면, 글로벌화된 시장의 폭력을 완충하고, 경제·사회적 활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은 그 정도로는 약과다.

왜냐하면 한국은 전쟁과 분단(휴전)으로 인해 원래 국가가 비대하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만큼 그리 공공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 아래서는 수출 기업(재벌 대기업), 전문 지식인, 공공 부문 등에 대한 특권, 특혜(지대) 할당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원래 성공한 변칙, 편법은 오래 가는 법이다.

한편, 토지, 주택 관련 제도는 관련 규제를 쥐고 있거나 개발 정보가 빠른 존재들의 불로소득 흡입 장치였다. 요컨대 한국은 시장 자체도 그리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지만, 설사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국가의 손아귀에, 그것도 그리 공공적이지도 않는 국가의 손아귀에 너무 많은 것이 쥐어져 있어왔던 것이다.

한편, 1987년 이후 등장한 노동운동, 민중운동은 '단결하면 힘 생기고 투쟁하면 쟁취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이 사는 곳에서 시장 원리(소비자 선택권)를 몰아내고, 오로지 더 많은 경제적 잉여를 끌어오려고 해왔다. 사회적 기여, 부담, 의무와 권리, 이익, 혜택의 균형이나 건강한 가치생산 생태계를 만드는 쪽으로 노력한 것이 아니라, 보수 지배층이 그랬듯이 더 많은 불로소득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오른쪽으로도 확 굽어지고 왼쪽으로도 꽤 굽어진 이중 왜곡 사회가 되어 버렸다. 우파적 가치(과잉 시장=과소 보호/규제)의 과잉과 좌파적 가치(과소 시장=과잉 보호/규제)의 과잉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면 진정한 우파적 가치의 과소와 진정한 좌파적 가치의 과소가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국은 세금과 복지라는 2차 분배 구조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 많다. 1차 분배 구조의 하나인 시장의 정상화(독과점과 불공정 거래 해소와 소비자 보호 등)도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지만, 설령 그것을 푼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가 명백하다. 한국은 선진국이 오래 전에 끝낸 정치, 행정, 사법, 언론의 민주화 문제와 선진국이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과잉 시장(과소 보호)과 과소 시장(과잉 보호)의 상호 의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힘 있는 존재들의 양반화, 귀족화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나는 진보 동네에서 '잘 작동하는 시장'의 의미와 효과를 그 누구 못지않게 강조하는 사람이지만, 실은 한국에서 시장 원리가 구조적으로 통할 수 없는 분야가 너무나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가장 강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공평은 국가와 시장과 사회의 핵심적인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해결하는 핵심 개념이다. 모든 불의는 결국 사회적 상벌 체계의 왜곡으로, 억울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평의 눈으로 보면 이명박과 제3의 길이 강조하는 공평한 기회의 의미와 한계가 보인다. 복지국가론자들이 강조하는 너무 낮은 사회적 최소한의 문제도 보인다. 노무현 정부의 좌절과 2007~8년의 진보 참패의 원인도 다 보인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의 수많은 불공정과 불공평 중에서 주로 지역 간 균형 발전 문제와 조·중·동과 재벌의 반칙을 주로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민생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수많은 합법적 제도적 불의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가난에 대해서도, 불공평(不均)에 대해서도 미온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오래된 통찰

지금 민주노동당은 슬그머니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대표 상품처럼 팔고는 있지만, 오랫동안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백안시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복지국가 이전에 자주국가(미국에 덜 빼앗기는 국가) 내지 통일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닌가?

이 생각은 분명히 틀린 생각이지만 한국 사회는 복지 이전에 뭔가 중차대한 모순이 있다는 통찰 하나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통찰이 1980년대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나의 통찰은 민주노동당의 아주 오래된 흐릿한 통찰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공평국가를 부르짖는 것은 한국 사회는 전쟁, 분단과 발전국가의 유산으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민주주의, 공화주의, 시장 경제의 외상값(화전민과 도적 행태)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제3의 길'과 정승일, 장하준의 착각

이제 이명박, 정승일, 장하준, '제3의 길'의 주장의 의의와 한계를 살펴보자.

이명박은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라고 하였다. 노무현이 강조한 반칙, 특권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ABR(Anything But Roh)'이 정체성이니까 봐 주자. 하지만 경쟁 방식의 문제와 경쟁 결과의 합리적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이를 건너뛰고 바로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비약한 것은 그냥 봐 줄 수 없는 맹점이다.

한편, '제3의 길'은 경쟁의 입구 관리 정책, 즉 기회, 조건, 출발선의 평등 정책(공평한 기회 보장=적극적 기회 보장)을 특별히 중시하였다. 이것의 핵심은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회의 재분배'에 주력하는 것으로,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해 노동자들 내부의 지식(숙련) 격차를 줄이고(연대 지식 정책), 고용 가능성을 높여 일을 통한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한계도 명백하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경쟁 방식의 문제도 심각하고, 경쟁 결과의 합리적 불평등 문제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출발선의 평등(적극적 기회 보장)을 이루더라도 승자독식·과식이 문제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승자도 아닌 사람의 독식·과식도 심각한 문제다. 부동산 불로소득, 부모 잘 만난 사람, 공공 부문, 국가의 규제(자격증) 부문, 대공기업 조직노동의 처우는 승자의 과다 이익으로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승일, 장하준도 '제3의 길'의 공평한 기회 보장 정책을 비판했다.

"설령 가난한 집 아이들이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집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배불리 먹을 수 없다면, 그리고 집에 공부할 책도, 책상도 없다면, 그들은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학교에서 무상 급식을 제공하여 이들이 굶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공립도서관을 통해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무상으로 책을 대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비판 역시 복지를 강화해서 '적극적 기회 보장'을 내실화하자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내 얘기는 그렇게 적극적 기회 보장을 내실화 한다 하더라도, 한국 청소년 중에서 가장 우수한 아이들 대부분이 공무원이 되려고 하고, 국가의 규제 산업이자 내수 산업 영역으로 집중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글로벌 경쟁이 일어나는 부문, 민간 부문으로 우수한 아이들이 훨씬 많이 달려가도록 사회적 상벌 체계를 짜야 한다는 얘기다.

정승일은 "복지국가라는 큰 정부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자기가 일하는 기업과 산업이 시장 비효율성 문제로 인해 문을 닫는다 하더라도 정부로부터 실업수당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새 직장을 구하는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까지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까닭에 기업과 산업의 구조 조정에 크게 저항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요컨대 한국도 사회 안전망이 튼실하면 2009년의 쌍용자동차 사태나 2001년의 대우자동차 사태가 터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거나 감추고 있다. 북유럽은 부문(공공-민간), 산업, 직업, 직능 별 고용 임금 격차가 매우 작다. 대충 그 나라 1인당 GDP의 0.8~1.5배 수준에서 오락가락한다. 한국 같으면 승자, 강자가 억울해 할 정도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교육 지표나 보건 의료 데이터(Health Data)를 통해서도, 직접 가 본 사람들의 목격담을 통해서 확인된다.

단적으로 북유럽의 교사들의 임금, 공무원들의 임금, 사회 서비스 노동자들의 임금, 전임 교수와 시간 강사의 임금 등을 보면 안다. 북유럽은 격차가 전반적으로 적긴 하지만,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처우가 관철되고 있다. 처우가 성과, 직무와 연동 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소득이 높은 사람도 있긴 있겠지만, 높은 세금과 튼실한 복지를 통해서 재분배 기능이 잘 작동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과장이다.

북유럽 같은 상벌 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본질적으로 지대(rent)를 추구하는 사교육 열풍, 고시·공시 열풍이 있을 리 없다. 또 복지 부담자와 복지 수혜자가 거의 일치하게 되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좀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낸 만큼 돌려받는다. 따라서 세금에 대한 저항도 적다. 공공 부문이 특권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기에 규모 확대도 쉽고 축소도 쉽다. 노동시간까지 짧으니 고용률도 매우 높다. 은퇴자나 실업자에게 1인당 GDP의 0.7배 수준의 연금이나 실업 수당을 장기간 지급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당연히 구조 조정에 대한 저항도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은 제대로 된 직업 직장의 평균적 처우는 GDP의 2.5~5배다. 생산력 수준을 감안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처우(직무 직능급)? 그런 개념 없다. 수익 많이 올리고 교섭력 있으면 얼마든지 올리는 것이 상식과 관행으로 되어 있다. 이는 사실 전 세계 노동계급 운동의 전통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직장이 속출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곳으로 들어가기 위한 살인적 경쟁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저(loser)'가 된다. 루저 의식을 가지면 결혼도 출산도 미루게 되어 있다.

한국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경제 산업 구조에다 세계 경제 지각 변동의 진원지인 중국에 인접한 관계로 엄청난 구조 조정 압력은 피할 수 없는데, 구조 조정을 무슨 악인양 결사 저지하려 하고 시장 임금 수준보다 월등한 처우를 누리려고 한다면, 그 곳의 고용 확대는 지극히 어렵다. 급속한 고령화는 필연이다. 나는 국민연금이나 실업보험을 어떻게 설계하든 1인당 GDP의 1.5~2배를 장기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1인당 GDP의 2.5~3배를 받았던-이는 현대기아자동차 노동자들에 비해 좀 낮은 것이다-쌍용차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구조 조정에 대한 극렬한 저항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잘 나가는 부문의 생산도, 부유층의 소비도 다 세계화되어 있는 현실을 되돌릴 수 없다면 '트리클다운 효과'(trickle down effect)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세금을 통한 소득 재분배(복지국가 펌프 작동)는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그 전에 사회적 상벌 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지가 획기적으로 강화되면 한국 사회의 수많은 고질병들이 거의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은 사기라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서 불공정과 불공평이 만연해 있는 한, 그리고 그 격차가 지극히 불공평한 한, 특히 세금을 주도적으로 사용할 공공 부문이 무슨 양반처럼 인식되는 한 증세 자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격차를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즉 사회적 기여와 부담에 따라 공평하게(정의롭게) 만들고, 더 나아가 그 격차를 가능한 줄이고, 출발선의 평등을 이루는 것을 중심에 놓고 모든 조세, 재정, 사회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상, 경제·산업 구조상 우리가 북유럽처럼 격차가 적은 사회로 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한국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맞는 경쟁 방식(자원 분배 방식)과 사회적 상벌 체계는 많은 것을 투명하게 하고(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채 시비나 신의 직장 시비는 주요한 정보가 국회와 언론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직업 및 직능이 선진국에서는 1인당 GDP 대비 어느 정도의 처우를 누리는지를 따져보면 된다. 사실 공정과 공평은 본질적으로 계량을 하는 것이기에 투명하지 않고, 평가 잣대가 없고, 평가 계량 시스템이 부실하면 절대로 작동할 수 없는 가치다. 일본 민주당이 자신들의 핵심 가치로 투명, 공정, 공평한 사회를 표방한 것은 분명히 일리가 있다.

폼만 좋은 헛스윙

이 외에도 정승일·장하준의 얘기는 너무 많은 허점이 있다. 기회가 닿으면 세세하게 비판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아무리 타격 폼이 힘차고 멋있어도 공을 맞추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이론의 양대 조건인 이론적 정합성과 현실적 정합성 중에서 현실적 정합성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종이 낭비요, 독자들에게 시간 낭비라는 것이다.

정승일·장하준은 정치인들이 정치적 수사로 떠벌이는 자유 무역론과 세계화 예찬론과 시장 중시론(신자유주의)이라는 가설(모델)에 대해서 해박한 역사 지식과 경제학 지식을 동원하여 멋지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고민은 그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장하준이 멋있게 두들겨 팬 가설들은 보수의 가설도, 중도의 가설도, 진보 우파의 가설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두 분은 멋진 헛스윙을 했을 뿐이다. 멋진 헛발질을 했을 뿐이다. 이론적 정합성은 있어도 현실적 정합성은 없기 때문이다. 정승일, 장하준은 한국 사회의 이념 정책적 고민의 현주소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양극화, 신자유주의는 불량 안경

나는 신자유주의가 만악의 근원이라면, 아니 핵심적인 모순만 되어도 정말 좋겠다. 보편적 복지가 만병통치약은 아닐 지라도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 몇 개라도 해결해 준다면 정말 좋겠다. 박정희식 중상주의 정책을 좀 더 도덕적이고 민주적이고 유능한 제2의 박정희를 모셔서 펼칠 수 있도록 세계 경제 무역 환경이 허용하면 정말 좋겠다. 정말 마음 편하겠다. 하지만 현실을 뜯어보면 고개를 설레설레 젓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한국 대학의 문제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 대학의 서열 구조는 악명이 높다. 이는 그 이면에 대학(학과, 학벌)을 통해서 생산되는 특권, 특혜가 크고, 배제, 차별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고질 중의 고질이기에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한편 대학 교수 요원에 관한 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심각하다. 교수 노동권의 과보호(이른바 중고품 시장의 미형성)와 생산력 수준 대비 너무 높은 처우의 문제도 심각하다.

대학 지배 구조(재단)의 불투명성과 전횡으로 인해 평가 보상 체계에 대한 신뢰 확보도 어렵다. 무엇보다도 인구 구조로 보나 한계에 이른 대학 진학률로 보나 수업료를 낼 학생 숫자가 태부족하다. 대학 수학 능력이 의미가 없는 학생들이 3~4년간의 시간과 수천만 원의 돈을 허비하고 있지만 다 함구하고 있다.

그런데 대학의 문제는 과잉 생산된 교회 및 목회자 지망생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예술대학과 그 졸업생 문제이기도 하고, 이공계 문제이기도 하고, 좋은 일자리를 찾아 헤메는 청년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이 1960년대 이후 고속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좋은 기회(일자리)를 양산하던 낙관적 전망이, (1987년과 1997년을 계기로 완전히 국면이 바뀐 상황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생긴 문제이다.

그런데 이 심각한 문제들 중에서 복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양극화라는 모호한 개념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세상을 단순 명쾌하게 보게 해서 속은 편할지 모르지만 진보의 통찰력을 몹시 떨어뜨리는 불량 안경임이 분명하다.

19세기 조선의 개화 노선

1987년 6월 항쟁, 7~8월 투쟁, 직선제로 상징되는 1987년의 정신과 관성을 혁신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1990년 전후해서는 주사파와 사노맹으로 상징되는 극좌파 운동이 있었다. 곧이어 한국노동당과 민중당으로 상징되는 합법 정치 운동이 있었다. 가장 최근의 진보 혁신 시도는 노무현 정부와 노무현의 유연한 진보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혹자는 뉴라이트 운동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보수 혁신 운동과 진보에 무차별 빨간 물감 뿌리기 행동-네가 청년 시절에 한 짓을 내가 알고 있으니 공개적으로 반성, 전향하라-을 결합한 것이었다. 매우 고약한 행동이자 서글픈 운동이었다. 어쨌든 노무현은 정부를 책임지고 운영하면서 진보의 짙은 그늘을 보고, 거칠지만 과감한 진보 혁신 시도를 하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유연한 진보론이 그 기념비가 아닐까 한다. 물론 노무현은 좌절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노무현이 좌절한 지점에서 진보가 지적으로 훨씬 후퇴해버렸다는데 있다. 노무현의 경험, 통찰을 거의 흡수하지 못했고, 오류와 한계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노무현의 정신 내지 사회 정책의 총 노선은 '제3의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칙, 특권 해소,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이라는 가치를 중시한데서 보듯이 한국 사회의 기형성을 적어도 그 좌측의 비판자들보다는 훨씬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남아있는 민주주의, 공화주의, 시장 경제의 외상값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특히 다양한 층위의 不均(불공평)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담대한 진보론은 단순화하면 노무현 정부가 너무 소심해서(사회투자국가론이나 수용하고), 복지 재정을 폭발적으로 늘리지 못해서, 양극화에 대한 반발로 민심의 이반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나는 단견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를 대표 상품으로 하는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사회적 약자와 빈자의 그늘은 그런대로 보지만, 진보가 만든 그늘은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단적으로 이들은 복지 부족으로 인한 고통은 잘 보지만, 不均(불균)으로 인한 고통, 즉 힘 있는 자들과 노블레스들이 자신들의 기여와 부담에 비해, 또 우리의 경제 산업 구조에 비해 너무 높고 안정적인 처우를 누림으로써 생겨나는 고통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공정한 경제도 언급하지만 문제 제기의 빈도, 강도는 복지와 비교할 수가 없다. 혁신적 경제는 복지의 부산물 정도일 뿐이다.

이렇듯 진보 동네에서 나오는 그 어떤 복지국가 담론을 뜯어 봐도 1987년의 짙은 그늘을 문제 삼는 담론을 찾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때려잡고, 비정규직 엄격히 제한하고, 최저 임금 확 높이고, 복지 펌프를 잘 가동해도 (청년들의 로망인) 공무원 수준의 직업 직장 수백만 개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복지로라도 고통과 절망을 좀 완화하겠다니 갸륵한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보수는 복지병이나 떠들고 삽질이나 하고 있으니…. 하지만 청년 세대와 일천 수백만 3비(비정규직, 비임금 근로자, 비경제 활동 인구에 숨어있는 실업자)층 입장에서 복지국가론은 미봉책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국지적으로는 보수 가치와 진보 가치가 과잉이지만, 전반적으로 진정한 보수 가치와 진보 가치가 과소한, 한마디로 사회의 상벌 체계라는 척추 자체가 좌로 우로 구부러진 기형 사회라는 내 주장은 1987년적 패러다임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뉴라이트의 그림자와 노무현의 그림자와 생태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분단 건국의 그늘, 산업화의 그늘 뿐 아니라 민주화의 그늘, 노동권 강화의 그늘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짙게 드리워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직까지 진보의 주력군은 1987년 거리에서 공장에서 농촌에서 이룩한 신화가 자부심으로, 또는 부채감으로 남은 사람들이기에, 감히 1987년의 신화와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나의 진보 혁신론이 얼마나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기회가 없는 청년 세대와 거대한 비기득권층을 생각하면, 또 압축적으로 성장한 만큼 압축적으로 조로하는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보수도 진보도 공공(정치, 행정, 사법, 언론, 종교 등)도 왜곡시켜 온 사회적 상벌 체계의 정상화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내 주장은 19세기 중반의 조선으로 치면 일종의 개화 노선이 아닐까 한다. 양반의 부당한 특권 철폐, 상공업 장려, 중상주의, 국방력 강화, 사농공상-남존여비 사상 등 전근대적 제도, 사상, 문화 개혁 노선과 닮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지국가론으로 대표되는 여타 진보 혁신 노선은 본질적으로 양반의 부당한 특권 철폐, 사농공상 등 전근대적 제도를 혁파하자는데는 미온적인 노선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주류적 당파로부터 주먹이 날아오지만, 한국을 살리는 길이자, 진보 재집권의 길은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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