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된 불평등 - 첨단 기술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분석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가
버지니아 유뱅크스 지음, 김영선 옮김, 홍기빈 / 북트리거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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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논의이고 어쩌면 결론에 다다른 논의가 과학과 기술은 모든이에게 중립적이고 평등한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사실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편견없는 인공지능이 모든 사실(?)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검토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기대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법파동이 터지거나 어떤 사건의 경중에 따른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질 때마다 판사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 기대치는 상당한 듯 하다.

 

이 책은 빈곤의 구체를 위한 자동화된 알고리즘에 따른 행정적 처리가 사실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세가지 자동화된 시스템이 있는데 인디에나 주의 '빈곤가정일시지원 푸드스탬프, 메디케이드의 적격정 판단과정'을 자동화 하는 시스템과 LA의 '노숙인 통합 등록 시스템'엘러게니 카운티의 '가정선별도구'시스템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선의 적합한 도움을 주고자 적용한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한하거나 삭제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 광범위한 개인 정보의 수집과 비공개된 알고리즘에 따른 운영으로 인하여 사실상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것. 이러한 상항은 근대에 잉여노동력을 통제하고 수탈하는 역할을 수행했던'구빈원'과 같은 역할을 이 시스템이 수행하고 있으며 이를 '디지털 구빈원'이라 명명한다.  

 

우리나라도 4차 기술혁명을 외치며, 마치 4차 기술혁명이 도래하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올 것처럼 사회 각계의 지도자들이나 정부는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도입하고 시험했던 시스템들은 조만간 우리사회에서도 구현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미국보다 더 잘 구현될 것으로 보인다. 차별과 편견으로 가득차 있는 자동화된 시스템이 이 사회에 구현된다면 그것은 또다른 헬조선의 한 축을 구성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동화된 시스템이 가난을 심화시키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존 사회의 인식에서 가난은 구조적이라기 보다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미국식 성공모델에서는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즉 개인의 나태와 게으름이 가난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지 다른 이유는 부차적이다. 따라서 가난한 개인이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자 사회적 부적격자임을 나타내는 증표이다. 이러다보니 시스템은 개인의 성과에 대한 가혹할 정도로 평가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시스템은 여러가지 이유로 가난에 처한 사람들이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가난을 경멸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작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구글인지 아미존인지 회사에서 AI로 면접을 보고 신입사원을 선발했더니 선발자 전부가 남자로 구성되었다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회사에서 성과를 이루는 직원의 특성들을 종합하여 AI에 입력한 후 면접을 진행하니 그 동안의 남성문화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반영되었을 것이고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해졌을 것이다. 그 결과는 신입사원 전체가 남성으로 구성되어 버리는 것.

 

재판에서 판사의 판결기능도 AI가 충분히 반영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도 일종의 오해일 것이다. 우리나라 법원은 성범죄에 매우 관대한 경향이 있다. 과거의 판례를 AI에 반영하여 판결을 내리도록 알고리즘을 구성할터인데 그 경향성은 향후 판결에도 심각하게 반영될 것이다. 이번에 터지 텔레그램 성착취 영상 사건을 현재의 사법적 판결에 기반하여 인공지능이 판결한다면 분노한 시민들이 원하는 처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성인지 능력이 부족한 판사에게 사건이 배당되자 반발하던 시민들의 청원에 의해 재판부가 변경되는 일련의 과정은 사람들에게는 인공지능과 다른 판단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람이 판단하는 과정의 일정영역은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본다.

 

인공지능은 판만만이 아닌 예측까지도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예측은 과거를 기반으로 하기에 과거의 편견이 자료가 되어 이루어지는 예측도 그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흑인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 듯이 인공지능 역시 그럴 확율이 높다.

 

기술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가? 이 문제는 어떤 사회의 기술인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그 사회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며 사람들간의 유대가 긴밀하고 차이를 포용하는 능력이 많을 수록 그 사회에 적용되는기술들은 평등해 질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기술은 그 사회를 반영하여 가난한 자에게 소수자에게 더 엄혹하고 잔인해질 것이다. 그래서 위정자들이 기술발전만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지고 좋아질 것이라며 선동하는 것을 보면 두려워진다. 사회의 평등을 되돌아 보지 않으며 그저 자본의 이익을 위해 과장하는 것은 아닌지... 기술도 역시 시민이 통제하지 않으면 언제 시민을 묶을 쇠사슬로 변할지 모른다는 것. 그럼에도 정보기술에 대한 찬양은 계속되고  빅데이터 산업발전이란 미영하에 우리의 개인 신상은 끊이없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 현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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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 남성문화에 대한 고백, 페미니즘을 향한 연대
박정훈 지음 / 내인생의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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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리뷰나 페이퍼를 작성하지 않고 지냈다. 게으름이 첫번째이고 책을 읽어도 뭔가 내 생각을 정리하기 힘든 것도 있고... 정리가 안되니 더더욱 글을 쓰는 행위는 도저히 수행 하기 어려운 행위로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동안 비어있는 서재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댓글이 달리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뭐 진중한 리뷰도 아니고 거창한 페이퍼도 아닌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라는 책의 200자 평인데, 200자 평의 내용은 이 책은 페미니즘에 대해 일도 모르는 엉터리다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을 옹호하는 사람들 (혹은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책에 대한 비난에 분노 조절이 안되는 분들이 꽤 많았으니 말이다. (내 페이퍼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댓글이 달렸다)

 

사회적 위치로 보면 중년의 이성애자 남성이자 비장애인이고 토종 한국인인 나는 사실 페미니즘에 대해 뭐라고 언급하기도 어려운 위치이다. 일부 남성들이 페미니즘 이론서 좀 읽은 것으로 여성들보다 더 큰 소리로 페미니즘에 대해 가르치려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기도 해서 더더욱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사실 페미니즘에 대해 말 할 수 있는 내공도 없다.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벌어지는 차별 중에 가장 역사적으로 오래되고 고쳐지지 않는 (이 말에 분노할 사람 많겠다. 그런데 이게 팩트다) 성적 차별의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이러한 문제는 신자유주의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점점 더 첨예하게 대두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부족한 사고로나마 예견되는 것은  여성주의적 관점이야 말로 앞으로의 사회를 평등하게 전진시키기 위해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관점이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결국 도태되지 않으려는 남성들에게 꼭 필요한 관점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남성이고 이성애자이고 비장애인이며 토종 한국인이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도 저자는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사회생활을 했고 이 점에서 나름 다른 남자들에 비하여 스스로 깨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많은 여성들의 경험을 알게되면서 그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상황인지 알게 된다. 저자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면서 이 사회를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주의적으로 바라보며 쓴 글들을 모아서 펴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글 마다 자기 반성과 성찰이 안들어갈 수 없다. 나에게 험한 댓글을 다셨던 분들이 이 책을 보면 저자는 마치 적국의 넘어간 스파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ㅎㅎ

 

페미니즘으로 명명되는 수 많은 이론들이 백가쟁명식으로 떠도는 시대다. 솔직히 그 많은 논점과 논쟁들을 따라가기도 벅차고 그 차이점들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힘들다. 최근 숙대 트랜스젠더 입학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 진영이 나뉘어 논쟁을 했던 일에서 드러나듯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화두와 젠더 이분법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대한 논의들, 그리고 여성을 단일한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기에는 민족, 인종, 계급, 기타 상이한 조건에 따라 단일 정체성으로 묶기가 너무 힘들어서 교차성을 주장하는 이론들까지... 따라가다 보면 숨이 가쁜게 사실이다. 더구나 이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고 아무런 불편없이 살아가는 남성들 입장에서는 굳이 자신의 권력을 빼앗아가는 이론을 치열하게 공부할 이득이 없는데다 논의마저 복잡한 페미니즘을 머리싸고 공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현재의 사회구조가 정말 문제가 많고 무언가 고쳐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겸허가게 뒤돌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여성주의적 시각이 가지고 있는 경계성과 진보성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알아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여성해방은 남성억압과 동의어도 아니다.(잘 알아보지도 않고 억울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여성해방은 인간해방과 동의어다. 성적 격차와 차별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고 인간차별의 문제이다. 기울어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지금껏 여성들이 어떠한 처지에서 싸우고 있는지 알아 본다면 페니니즘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새로운 전망을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도 그런 의미에서 책을 썼으리라.

 

예전엔 몰라도 지금은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서 벌어진 디지털 성폭행과 성착취 사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길 원한다. 디지털 성폭행 영상을 제작한 사람만 문제일까? 이 영상을 돈까지 지불해가면 참여하고 공유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참혹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렇게 여성을 대상화하고 물건취급하는 일에 26만명이라는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는 현실에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서 '한남'이라고 칭한다고 삐죽거리거나 화만 내면 모든 일이 해결이 될까? 나는 여성들이 말하는 '한남'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잠재적 가해자로 낙인 찍으며 남성혐오를 들먹이기 전에 왜곡된 성폭력 문화를 지속하고 있는 남자들을 제재하는 남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페미니즘은 남성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앞으로 나서서 여성의 경험을 전유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성이 앞장서서 싸우면 방해하지 말고 옆에서 조용히 어깨걸고 나가자는 말이다.

 

이 책의 장점은 텔레그램n번장 사건과 같은 극단적인 사례(그러나 얼마나 흔하게 일어나는 사례인가)뿐만 아니라 일상이 미세한 상황에서 관철되는 가부장적 남성주의가 얼마나 많은 여성들에게 좌절감을 주는지 반성하는 남성의 목소리다. 그 반성이 쌓이고 축적되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 중심 가붕장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이루어지면  남성들이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히지 않아도 좋다. 최소한 내민 손을 잡아주는 사람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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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3-23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머큐리님 오랜만의 좋은 리뷰 반갑습니다
잘 읽었어요. 공감!!

머큐리 2020-03-24 18:29   좋아요 0 | URL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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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헌법재판소 권한대행이 임기를 마쳤다. 존재감이 좀 부족했다고 느껴지던 헌법재판소가 일약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데 커다란 공로가 있는 분이고, 여성이다. 8인의 헌재 재판관 중 유일한 여성인 이정미 재판관, 우리나라 최소의 여성대통령이었던 박근혜 전대통령.

 

두 사람이 여성이라는 점이 현재 우리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위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둘 다 여성이기에 남성이라면 받지 않아도 될 여러가지 관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공인이며, 공인이기에 여성성에 대한 논의에 불씨를 당긴 사람이기도 하다.

 

정치인 박근혜, 자칭 대한민국과 결혼한 대통령.

여성이기에 여성성에 기반한 상생과 협력, 통합의 리더십을 강조하면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그러나 실제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점. 아이를 낳은 경험이 없다는 점 등 이 사회에서 인정하는 여성성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여성혐오에 시달리기도 한 경력이 있다. 박근혜의 가치관이나 행동이 여성주의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증명하는 테제는 여성험오에 기반한 여성성에 대한 인식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은 여성성에 기반한 정치를 하지 못하는걸까?

 

통치행위의 문제가 발생하자, 이제 그 변호를 여성의 나약함이나 여성에 대한 예의로 가리려고 했다. 공적인 업무에 대한 문제제기가 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치부하여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려는 행태는 여성주의를 지배자들이 어떻게 전유하고 사유하는지 날것으로 드러낸다. 이러려고 여성대통령이 탄생했나하는 자괴감이 든다. 여기에 덧붙여 이래서 여자를 대통령으로 삼으로 안된다는 여성혐오도 판을 친다. 문제는 이러한 언설과 행위가 혐오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정미 재판관이 탄핵결정을 하던 날. 급하게 나오느라 헤어롤을 머리에 끼고 출근하는 사진이 화제다. 이것이 일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이라고 치켜세우고, 그동안 일 못하는 여성대통령에 대한 대안으로 비교되기까지 한다. 이정미 재판관의 개인사를 잘 모르고 그 가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일반 여성이 아무리 바쁘다고 출근하면서 헤어롤을 끼고 출근했을때 어떤 시선을 보낼까? 아마도 열에 아홉은 정말 정열적으로 일하는 여성으로 치부하기 보다는 자기관리 못하는 칠칠치 못한 여성으로 여길 확율이 더 크다. 여기에 이정미 재판관에 대한 환호에 어떤 불편함이 있다.

 

여성이 사회에서 좀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무언가 공적인 일을 하려고 해도 일에 전념하게 만들어 주는 아내가 집안에 있는 남성에 비해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애들까지 돌봐야 한다면 그 여성의 일은 거의 전쟁이나 마찬가지일테다. 때문에 일터에서의 경쟁력이 남성들에게 뒤질 수 밖에 없다. 어려서부터 남성과 똑같이 교육받고 남성보다 더 많은 스펙을 가지고도 남성에 비해 번번히 유리천정의 벽을 느껴야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아내부족이 크다는 것이 이책의 주장이다. 여성에게도 자신의 일에 전념하도록 가정을 보좌하고 운영하는 아내를 보장하라!!

 

이 책은 단순하게 아내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심층적으로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에 대한 가치 문제, 사회에서 행하는 노동과 가정노동의 차별을 통한 여성성에 대한 착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성이라는 단어 속에는 얼마나 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있는가?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이 궁극적으로 여성성이 행해야 할 노동인가? 아니면 남성 역시 할 수 았는 노동인데 여성에게 미루고 있는 노동인가? 생래적인 본성은 없다. 인간이 사회화를 거치면서 어떤 노동에 가치를 두고 어떻게 실천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모든 남성들과 똑같이 여성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 다만, 남성은 아내역할을 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고 사회는 아내는 여성에게 할당된 자리라고 강요하는 것 뿐이다. 남성이 지배적인 성으로서 이 사회에 자리매김되기 까지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아내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남성을 아내의 자리로 돌려보내라고 얘기하는게 아니다. 아내의 자리는 남성이고 여성이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남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남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사회적 시스템과 사회적 의식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시스템인데... 요즘 육아휴가 사용의 문제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문제가 핵심으로 대두된다. 단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사회의 노동의 문제이자 의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책의 논의에 따르면 최근 유력대선후보들의 공약은 유치원 수준이다. 정희진선생이 육아를 국가가 책임져야 하다는 책을 비판한 칼럼을 한겨레에 실은 적이 있다. 가사와 육아의 문제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는 총론에서 이의가 없지만 각론으로 들어가서 다시 여성의 일로 몰아가면 그것은 기만일 뿐이다. 남성들이 가정으로 회군해야 한다. 그 전에 회군의 명분을 주어라. 근로시간 단축과 가사와 육아노동의 가치화를 이루어야 한다. 누가 명분을 줄 것인가? 그야 권력을 가진 남성이 주어야 한다. 여성의 문제가 왜 남성으로 부터 나오는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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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트라우마 -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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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다운 외모와 다소 멋쩍어하는 듯한 미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주위를 살피는 태도와 침착하고 과묵함. 왠지 무게가 있어 보이는 모습"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해방 정국에서 서울 주재 소련영사의 아내였던 샤브시나가 기록한 박헌영의 첫인상이라 한다.

 

남에서는 빨갱이의 수괴로 북에서는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남과 북이 모두 지우고자 했던 비운의 혁명가가 있다. 이 책은 남과 북 모두 역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그 와중에 희생당한 사람. 일제 강점기 내내 굽히지 않고 민족해방에 헌신했던 철저한 공산주의자이자 조선공산당 최고 지도자인 박헌영에 대한 이야기 이다.

 

요즘 젊은이(?)중에 박헌영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까?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저자 손석춘은 북한의 젊은이들도 박헌영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긴 미제의 스파이로 몰려 총살당한 반동 반혁명분자에 대해 체제가 어떤 정보를 주었을까마는.. 남과 북에서 외면당한 한 혁명가를 추모함은 비틀어진 역사를 바로잡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박헌영뿐이랴... 박헌영과 오랜 동지적 관계를 가진 김삼룡, 지리산 산사람들의 총사령관 이현상...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에서 박헌영의 아들로 태어나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던 원경스님까지... 역사의 물줄기를 이토록 험난하게 넘겨야 했던 사람들이 있음을 보며, 격동의 현대사를 견딘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새삼스런 감회가 일어났다.

 

미군정하헤서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채 북으로 넘어갔지만 김일성의 견제를 받으며 지내다 한국전쟁 후 미제국주의의 스파이로 몰려 총살당한 비운의 혁명가이지만 아직도 남쪽의 일부 사람들은 박헌영의 스파이설을 믿고 있다고 한다. 뭐 북의 말을 믿는 것은 자유지만 제발 역사 공부 좀 했으면 하는 분들이 좀 있다. 그러고 처음으로 박헌영 간첩설을 제기하신 분이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김영환씨라고... 이분 북에 밀입국까지 하신 주사파지만 현재는 북한에 대한 가장 강한 반대활동을 벌이고 계신 분이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증언하시는 분...

 

샤브시나의 인상과 달리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되었을때 자신의 대변을 먹으며 정신병환자 행세로 출감하여 다시 독립운동을 했던 강철같은 혁명가이자 해방 후 가장 유력한 대중정당인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던 인물이 이렇듯 역사 속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이제 빨갱이란 표식으로  지워졌던 수많은 이 땅의 혁명가를 복권시켜야 하지 않을까?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투명하게 평가되는 날이 어서 왔으면 하는데...

 

얼마전 통합진보당의 해산결정을 보며..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는 원경스님의 기억에 의존하여 새로 밝혀지는 여러 사실들도 있다. 물론 정식으로 역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부분들도 많이 있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보천보 전투'에서의 김일성을 부정하고, 북으로 가면 처형 당할 것을 알고 남에 남아서 싸우다 전사했지만 시신 확인이 안되었다는 이현상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다만 사실 확인이 안된다는 점이 아쉽다.

 

또 하나 서슬퍼런 박정희 치하에서 박갑동씨가 '중앙일보'에 '내가 아는 박헌영'이란 글을 6개월이나 연재했다고 한다. 이는 박정희가 직접 부탁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해방정국에서 박헌영선생(박정희가 선생이라 칭했다고)의 '8월 테제'를 아주 감명깊게 봤다고 그게 박정희 인생의 세계관이 되었다고 한 증언도 흥미롭다. 전형적인 2단계 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했던 '8월테제'에서 군사쿠데타의 원형을 보았던것은 아니었을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박정희는 한때 남로당 당원이었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책이다. 질곡의 역사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분노와 함께 슬픔을 느낀다.

아버지의 박헌영의 복권에 대해 저자가 묻자 원경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마디만 더 말씀드린다면, 아버지(박헌영)의 복권은, 우리 손(석춘)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급한게 아니라고 봅니다. 대신, 남로당 전체, 이름 없이 산화된 그 사람들의 명예를 정말이지 바로 찾아야 합니다. 물론, 박헌영 선생이 복권되면 그것도 덩달아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아요. 일단 아버지는 아무리 금기시하고 억압해도 언젠가는 이름 석 자가 나오고, 100년 뒤든 언제가 됐든 학자들 입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광복 운동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남로당이 되려고 그렇게 청춘을 불살랐던 것은 아니거든요. 남의 힘에 의해서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고 보니까 모든 게 뒤틀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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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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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던 듯 하다. 시대는 변하고 있지만 박노자는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박노자의 글을 찾아 읽는 건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하는 내 자신에 대한 의심에서 일 수도 있겠다. 

박노자의 글은 어쩌면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과 폭력은 체제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그 본성(?)상 어찌할 수 없는 체제이다. 사람들을 경쟁시키고 폭력을 통해 배제하고 비인간화시켜야 작동이 되는 체제이니 이 체제를 어서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여기서도 박노자의 대답은 한결같다. 사회주의의 실현을 통해서...단순하게 자본주의를 인간화 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혁명인 것일까?

실제로 제체를 뒤엎어버리는 방법은 혁명 밖에 없는 듯하다. 그런데 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혁명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하다. 

아니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시대는 혁명이란 말 자체가 어불성설인 시대가 아닌가? 

혁명을 하자고? 미친 놈 소리를 듣거나 낭만적인 이상주의자 딱지가 붙기 딱 좋은 상황일테다. 

혁명따위는 집어치우고 니 앞이나 잘 처신하라고 쏘아 붙일 터다. 역시 자본주의다. 개인의 경쟁력이 최고의 지상과제인 이 시대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박노자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그저 탄식만 할 뿐....


그러데 왜 박노자의 글을 읽는가? 끊임없이 변주하는 듯 하면서도 동일함을 유지하느 그의 글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혁명에 대한 다짐을 하려고? 설마... 난 자보주의를 싫어하고 무한경쟁을 도모하는 이 사회를 증오하면서도 감히 혁명이란 말을 꺼내지 못하겠다. 그렇게 순치되어 온 것이다. 이런 나를 깨닫게 만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 박노자다. 그는 등에 처럼 사람등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왜 이 숨막히는 체제를 가만히 놔두고 소소한 일에 분노하느냐고...그런데 정말 숨막히는 체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박노자에게 지금의 한국사회는 80년대의 혁명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순치된 사회다. 더 이상 타인과 사회에 대한 관심은 잃어버리고 각자도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경쟁에 올인하는 사히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민중의 고통과 희생을 도외시하는 사히다. 그럼에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사회다. 더불어 우파적 민족주의와 좌파적 민족주의가 발전에 경도되어 경합을 하는 사회다. 진정한 좌파는 쥐꼬리만큼 남아서 발버둥치는 사회다. 그럼에도 아직 희망이 있는 사회다. 어디에? 이렇게 험하게 굴러가는 사회에, 그리고 이 사회에서 발버둥쳐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본다. 그런데 그 희망의 근거는 항상 우리를 좌절케 만든 근거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온 긍정적 단어는 '연대'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다. 

사회주의에 관한 한 양가적 감정이 들어있다. 이미 백일몽처럼 스러진 현실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라 할 수도 없지만, 그 나름대로 성취되었던 긍정적인 요소들까지 버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스탈린 식 사회주의를 배격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 정치적으로 부자유스럽던 체제가 보호하는 가치 즉 노동자들의 존업성, 계획경제를 통한 완전고용, 직장에서의 평등과 부와 권력의 세습이 없었던 점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옹호를 하고 있다. 이건 좀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정치적 자유가 제한된 속에서 이런 긍정적인 가치에 대해 얼마나 평가해야 할지 감은 오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하는 연대의 가치에 대해서는 뭐 별다른 비판을 하지 못하겠다. 연대가 너무 안되서 문제이니.... 특히 시민사회와 노동계급의 연대는 항시 고민의 중심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계급의 정의가 있다고는 하나 임금을 받고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임에도 자신을 노동자로 규정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 게급은 사회적 위치에 대한 객관적 조건과 더불어 이른바 계급의식이라는 주관적 깨달음이 통합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듯하다. 다만 현재의 언론을 통해서는 계급적 자각을 이루기 힘들다는 점은 말해봐야 잔소리다. 


진부한 듯 새롭다고 해야 하나? 이 체제를 살아가면서 꼭 질문해야 할 문제에 대해 이른바 총정리를 해 두었다고 하자. 다만, 이 시대가 모멸의 시대이자 이제 비굴의 시대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나타나는 이 혐오스런 감정들이 과잉되는 시대. 단순하게 살아남기를 넘어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박노자에게 답을 구하지 말라. 다만, 박노자가 말하는 이 사회에 대해 공감했다면, 자신이 무엇이라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박노자가 안내했으면, 다음은 독자 몫이다. 그리고 박노자는 이런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충분하게 자신의 역할을 한 것 아닐까? 


투박한 듯 날이 서 있는 변하지 않는 견결한 사회주의자를 난 사랑한다. 나와 의견이 같지 않은 부분도 많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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