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지식총서 예술-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현 세트 - 전5권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살림지식총서
권용준 외 지음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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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 (김문경, 살림지식총서 417)

 

 

 

 Scene #1 같지만, 다른 곡의 해석

 

클래식 애호가들은 흔히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고 말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평가받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을 예로 들겠다.

 

같은 곡으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지휘하는 이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게 되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들의 지휘 장면을 시간으로 재면 같은 부분을 연주하는 데 번스타인은 25초, 카라얀은 21초가 걸린다고 한다. 즉 템포가 다르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번스타인이 느릴 때는 느리게 빠를 때는 더 빠르게 하는 스타일이라면 카라얀은 전반적으로 빠르고 박력 있다고 볼 수 있다. 긴 교향곡 전체를 비교해서 듣는다면 이런 차이는 더 명확해질 것이다.

 

곡에 대한 해석은 물론 지휘자마다 표정도 손짓도 다양하다. 이처럼 직접 콘서트장에 클래식 음악 연주를 듣는다면 음반을 통해서 느낄 수 없는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을 만끽할 수 있다. 그들의 뛰어난 지휘가 없다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고 심장을 울리게 만드는 연주가 되지 못했으리라.

 

 

 

 Scene #2 개성이 뚜렷한 지휘자들

 

음악가들 중에서도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 위대한 음악가를 부를 때 마에스트로나 비르투오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악기 연주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테크닉과 실력을 가진 연주자를 비르투오조(Virtuoso, 명인 名人)라고 부르고, 특별히 지휘자일 경우에 그 사람을 가리켜 마에스트로(Maestro)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클래식 음악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유명 지휘자 20명의 예술혼과 일생을 간략하게 조명하고 정리한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에는 그야말로 지휘봉 하나로 청중, 아니 전 세계인의 귀와 마음을 압도했던 명지휘자들이 등장한다.

 

흔히 지휘자라고 하면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먼저 떠올릴 것이다. 기인의 풍모가 느껴질 정도로 고집불통인데다가 남들 앞에서 독설을 마다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기 나오는 몇 몇 지휘자들은 상당히 억울함을 느낄 수 있겠다.

 

그래도 독선적이면서도 자신의 음악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완벽형’ 혹은 ‘독재자형'인 강마에의 스타일과 가까운 지휘자라면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일 것이다. 이탈리아판 강마에라고 보면 된다.

 

토스카니니가 추구한 음악세계는 완벽한 음(音) 자체였다. 그는 음의 멜로디와 세밀한 흐름까지 완벽하게 암기할 정도로 오로지 음악에 충실했다. 연주자 개인의 감정에 따른 군더더기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음과 템포와 리듬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거부했다. 오직 작곡가의 의도에만 충실했다. 이로써 그의 지휘는 음악을 객관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 같은 지휘를 고집하는 그를 ‘독재자’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는 리허설 때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꺾거나 악보를 찢는 등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지휘봉이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 손수건이나 윗옷을 찢기도 했다. 틀린 음이나 어설픈 음을 발견하면 ‘노! 노!’(No! No!)라고 불같이 호령을 토해냈고, 단원들은 그런 그를 ‘토스카노노’라고 불렀다. 그의 ‘No!' 성격은 진짜 독재자도 포기할 정도로 완고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의 찬가 연주를 거부하여 그는 무솔리니의 눈 밖에 나서 미국으로 망명했으니 실은 무솔리니가 고집을 굽혔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진실에 어떻든지 간에 아무리 권력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독재자도 지휘봉 하나로 음악을 호령하는 고집스러운 독재자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어쩌면 강마에를 뛰어넘을 정도로 독설을 입에 달고 사는 지휘자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세르지우 첼리비다케이다. 그의 독설을 겨냥하는 상대는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 등장하는 명지휘자들이다. 그의 독설 집중 포격을 맞은 지휘자의 이름을 열거하면 혀를 내두른다. 토스카니니, 카를 뵘, 번스타인 심지어 ‘음악의 황제’ 카라얀까지도. 첼리비다케는 카라얀을 ‘유능한 비즈니스맨 아니면 귀가 먹은 인간’이라고 언급했다.

 

토스카니니, 첼리비다케와 반대로 브루노 발터는 유순한 성격의 지휘자라고 보면 된다.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의 명성에 약간 가려진 면이 있지만, 그래도 당대의 여느 지휘자들보다 인간적이고 겸손했으며 이러한 그의 인품이 언제나 음악에 잘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적 해석은 상당히 온순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든다.

 

푸르트벵글러는 탁월한 지휘 능력에 지금도 클래식 마니아 사이에 회자될 정도로 훌륭한 녹음의 명반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협력자’라는 낙인 때문에 명성마저도 흠 잡히고 마는 불행한 지휘자다. 그는 나치의 ‘제3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나치 친위대 공연이나 히틀러의 생일 축연을 지휘한 경력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범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음악 활동이 나치 선전의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사실을 알았기에 각종 핑계를 대면서 나치와의 관계에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무죄 판결을 받아 베를린필 상임 지휘자로 복귀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그의 지휘 자세는 독특하다. 그의 지휘를 바라본 소프라노 가수는 ‘눈에 보이는 음악의 물결’이라고 표현했지만, 연주할 때 그의 손짓을 주목해야 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지휘자였다. 지휘 자세가 어색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격정적인 동작은 흡사 경련에 가깝다. 그래서 단원들은 어디서 음을 내야 할지 난감할 정도였다고 한다.

 

 

 

 Scene #3 과거의 지휘자들이 그리운 이유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는 지휘자의 유명한 일화를 통해 그들의 예술성을 접근하고 있어서 지휘자의 세계를 알고 싶은 독자를 위한 흥미로운 클래식 음악 입문서로 적당하다. 그리고 20인의 지휘자별 디스코그래피 중에 들을만한 명반 CD와 연주 현황 녹음 영상과 일부 음반의 미흡한 부분까지 정리하고 있다. 생존해 있는 현역 지휘자들이 좀 더 추가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여기에 소개된 지휘자들은 꼭 기억해 두면 좋은 마에스트로들이다.

 

가끔 우리는 과거의 명장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 지금도 카라얀의 흔적을 그리워하고, 그의 명반과 연주 실황 영상을 감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거 명성을 날리던 옛 지휘자들을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꼭 옛날 지휘자라서 그런 걸까. 예술의 본령은 개성인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토스카니니, 카라얀, 번스타인 같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개성이 뚜렷한 지휘자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지휘자의 개성이 사라질수록 그 음악의 개성도 사라진다. 그저 ‘지휘’라는 행위만 남아있을 뿐이다.

 

지휘자를 바라보고 선호하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진짜 위대한 지휘자는 곡을 철저히 분석하고 오케스트라를 혹독하게 훈련시킬 정도로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일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가 강마에의 모습을 그렇게도 열광했던 것일까. 과연 먼 훗날에 토스카니니나 첼리비다케처럼 강마에 같은 명지휘자가 등장하게 될까.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강마메와 지휘자의 관계는 잘못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런 괴팍한 모습이 지휘자 본인에게는 오로지 완벽한 음악으로 빚어내기 위해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자신만의 역량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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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예술 살림지식총서 382
전완경 지음 / 살림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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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아라베스크, 이슬람 미술의 정수     

 

길을 걷다 보면 보도블록을 새로 교체하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모래와 블록을 까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유심히 보았다면 블록의 모양이 모두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똑같은 모양의 블록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면 금방 길거리가 새단장을 한다. 건물의 바닥이나 화장실 안쪽 벽 등도 보도블록과 같이 타일 조각들이 규칙적이면서 빈틈없이, 서로 겹치지 않게 붙어 있다.

 

이처럼 주변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벽이나 바닥 등 평면을 빈틈없이,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규칙적인 배열을 이루는 도형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빈틈없고 겹치지 않게 평면을 덮는 것’을 수학에서는 테셀레이션(Tesselation)이라 한다. 테셀레이션은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 퀼트, 옷, 깔개, 가구의 타일, 건축물 등 세계 각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왼쪽) 알함브라 궁전의 아라베스크 문양 / (오른쪽) M.C. 에셔  「해방」  1955년

 

 

테셀레이션으로 가장 유명한 곳으로 단연 알함브라 궁전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의 마루, 벽, 천장에 테셀레이션되어 있는 반복적인 문양들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테셀레이션 작품을 남긴 M.C. 에셔에게는 작품의 원천이자 일생을 바친 테마이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가보지 못한 곳. 알함브라 궁전은 1238년 이슬람 나르스 왕조에 의해 세워져서 1492년 이사벨라 여왕의 스페인 왕국에 함락될 때까지 250여 년간 황금기의 왕실 영화와 권력을 보여 준다. 22명의 왕들은 치세하는 동안 궁전을 부분적으로 완성해 갔는데 내부에 들어가면 스페인에서의 무어 건축양식 절정기에 조성된 섬세한 이슬람 미술의 기품이 돋보이는 조각과 아기자기한 정원문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한 꽃과 식물의 문양이 추상적으로 어우러진 아라베스크(Arabesque)는 디자인의 원조이며 이슬람 미술의 정수다.

 

아라베스크는 양식화된 식물 모티브와 줄기 등을 뜻하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어 아라베스코(arabesco)에서 유래했다. 아라베스크 무늬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중해적 유산이다. 이슬람 예술가들은 자연을 양식화해 표현했다. 무한한 창조력을 가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것은 그 자체의 끊임없는 흐름을 가지며 아라베스크가 이러한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슬람은 코란의 강력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미학적으로 통일된 예술적 문명이다. 이슬람은 신만이 영원하고, 다른 모든 것은 바뀔 수 있으며 덧없고 일시적이고 우연하다고 믿는다. 전능한 신 알라의 창조적 행위 없이는 세상에 어떠한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창조 이외에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은 없다. 모방할 수 없는 신의 작업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려는 시도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모든 창조물 위에 서 있는, 이름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무엇과도 닮지 않은 그러한 초월적이고 무한한 신 앞에서 인간의 자리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으며 예술에서의 표현 또한 지극히 한정적이다.

 

인물과 동물 문양을 금지한 이슬람 미술에서는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표현이 발달했다. 이러한 미학적 감각은 아라베스크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라베스크는 자연에서 가져왔지만 너무나 단순화시켜서 그것이 무엇인지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장식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현실적 무늬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신의 무한한 완전성에 비해 일시적이고 변하는 삶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장식 무늬의 무형적인 성격은 이슬람 건축에 쓰이는 재료인 치장 벽토, 벽돌, 타일, 마른 진흙과 잘 어울린다. 이로써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드는데, 이런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느낌이 든다.

 

 

 

 Scene #2  종교가 빚어낸 화려한 이슬람 예술    

 

이슬람 미술의 역사는 식물의 형상을 기하학적 형상으로 변화시킨 역사다. 기하학적, 수학적 사색을 문양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이슬람의 미학적 가치에 적용해 비율과 형태를 확실히 했다. 무엇을 표현하느냐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더 신경을 쓰는 이슬람 문화에서 서체는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려졌다. 글은 신의 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서체를 사용한다. 아랍어와 문자를 예술로 승화시킨 이슬람 서체는 코란의 보급과 함께 급속도로 확산됐고, 서체는 이슬람 미술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서체에 조예가 깊었으며, 코란의 필사 작업에 참여한 서예가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

 

무슬림도 기독교인만큼이나 자신의 종교에 헌신적이었지만 그들이 이룬 미술은 기독교 교회가 후원자 노릇을 하며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서양미술과는 분명 다르다. 서양미술의 주된 형식은 회화와 조각이었다.

 

이 둘은 예배에 필요한 종교적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슬람 미술에는 거창한 그림이나 조각이 거의 없다. 대신 서양 미술에서 부차적이고 장식적인 것, 예를 들어 책이나 직물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책에는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이 삽화로 들어갔다. 직물은 종이, 그림이 폭 넓게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예술적 감각을 전파하는 편리한 수단으로 사용됐다.

 

이슬람 미술은 이슬람 세계의 변화도 반영한다. 이슬람 건축의 전통은 모스크가 출발점이다. 모스크는 무하마드가 무슬림 공동체의 중심이자 기도실로 지었다는 집에서 유래한다. 모스크에는 예루살렘의 바위 돔, 이스파한의 마스지디 샤 등이 있고 궁전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문헌에 존재하나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 세빌의 알-카자르 궁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슬람 건축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아그라에 위치한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5대 황제인 샤자한이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세운 무덤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한 이야기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기울어질 만큼 공사하는 데 들어간 비용이 어마어마하고 많은 사람이 공사 도중에 숨을 거둔 아픈 사연도 담고 있다. 공사에는 매일 2만 명이 넘는 일꾼들이 동원되었고, 마침내 22년 만에 무덤이 완성되었다. 네 귀퉁이에는 '미나레트'라고 불리는 40m 높이의 탑이 세워져 있는데 신기하게도 각각 약 7도 정도 바깥으로 기울어져 있다. 탑을 일부러 기울이게 만든 이유는 강가의 약한 지반 때문에 건물이 내려앉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Scene #3  공존의 문화가 깃든 이슬람 예술   

 

아직까지도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듯하다. 중동 건설 붐과 석유자원, ‘세계의 화약고’로 대변되는 정세불안 등 경제·정치적 측면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9·11테러’ 이후로 이슬람 세계를 조명하는 책들이 나오긴 했지만 종교나 사회, 국제정치 분야 등으로 한정됐다.

 

그러나 널리 분포된 이슬람 미술은 이슬람교의 포용성으로 인해 조화와 균형을 기본으로 하되 토착민족의 전통과 융화되어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 냈으며 기독교 문화와도 교호하며 공존하였다. 그래서 이슬람 문명이 거대한 문명의 용광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 예술』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오는 귀한 책이다. 제목과 달리 미술 분야뿐 아니라 이슬람의 예술 전반, 나아가 건축, 음악까지도 두루 소개된다. 아라베스크 무늬로 대표되는 기하학적 장식문양부터, 종교와 예술이 어우러진 웅장한 모스크 건축, 이슬람 예술의 독창성을 대변하는 서예, 유럽 중세 음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 등이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예술을 발전시켰고, 동서양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 이슬람 세계의 또 다른 면이 잘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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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 예술-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현 세트 - 전5권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살림지식총서
권용준 외 지음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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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 이슬람 예술 (전완경 저, 살림지식총서 382)

 

 

 

 Scene #1  아라베스크, 이슬람 미술의 정수     

 

길을 걷다 보면 보도블록을 새로 교체하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모래와 블록을 까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유심히 보았다면 블록의 모양이 모두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똑같은 모양의 블록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면 금방 길거리가 새단장을 한다. 건물의 바닥이나 화장실 안쪽 벽 등도 보도블록과 같이 타일 조각들이 규칙적이면서 빈틈없이, 서로 겹치지 않게 붙어 있다.

 

이처럼 주변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벽이나 바닥 등 평면을 빈틈없이,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규칙적인 배열을 이루는 도형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빈틈없고 겹치지 않게 평면을 덮는 것’을 수학에서는 테셀레이션(Tesselation)이라 한다. 테셀레이션은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 퀼트, 옷, 깔개, 가구의 타일, 건축물 등 세계 각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왼쪽) 알함브라 궁전의 아라베스크 문양 / (오른쪽) M.C. 에셔  「해방」  1955년

 

 

테셀레이션으로 가장 유명한 곳으로 단연 알함브라 궁전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의 마루, 벽, 천장에 테셀레이션되어 있는 반복적인 문양들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테셀레이션 작품을 남긴 M.C. 에셔에게는 작품의 원천이자 일생을 바친 테마이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가보지 못한 곳. 알함브라 궁전은 1238년 이슬람 나르스 왕조에 의해 세워져서 1492년 이사벨라 여왕의 스페인 왕국에 함락될 때까지 250여 년간 황금기의 왕실 영화와 권력을 보여 준다. 22명의 왕들은 치세하는 동안 궁전을 부분적으로 완성해 갔는데 내부에 들어가면 스페인에서의 무어 건축양식 절정기에 조성된 섬세한 이슬람 미술의 기품이 돋보이는 조각과 아기자기한 정원문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한 꽃과 식물의 문양이 추상적으로 어우러진 아라베스크(Arabesque)는 디자인의 원조이며 이슬람 미술의 정수다.

 

아라베스크는 양식화된 식물 모티브와 줄기 등을 뜻하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어 아라베스코(arabesco)에서 유래했다. 아라베스크 무늬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중해적 유산이다. 이슬람 예술가들은 자연을 양식화해 표현했다. 무한한 창조력을 가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것은 그 자체의 끊임없는 흐름을 가지며 아라베스크가 이러한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슬람은 코란의 강력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미학적으로 통일된 예술적 문명이다. 이슬람은 신만이 영원하고, 다른 모든 것은 바뀔 수 있으며 덧없고 일시적이고 우연하다고 믿는다. 전능한 신 알라의 창조적 행위 없이는 세상에 어떠한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창조 이외에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은 없다. 모방할 수 없는 신의 작업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려는 시도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모든 창조물 위에 서 있는, 이름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무엇과도 닮지 않은 그러한 초월적이고 무한한 신 앞에서 인간의 자리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으며 예술에서의 표현 또한 지극히 한정적이다.

 

인물과 동물 문양을 금지한 이슬람 미술에서는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표현이 발달했다. 이러한 미학적 감각은 아라베스크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라베스크는 자연에서 가져왔지만 너무나 단순화시켜서 그것이 무엇인지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장식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현실적 무늬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신의 무한한 완전성에 비해 일시적이고 변하는 삶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장식 무늬의 무형적인 성격은 이슬람 건축에 쓰이는 재료인 치장 벽토, 벽돌, 타일, 마른 진흙과 잘 어울린다. 이로써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드는데, 이런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느낌이 든다.

 

 

 

 Scene #2  종교가 빚어낸 화려한 이슬람 예술    

 

이슬람 미술의 역사는 식물의 형상을 기하학적 형상으로 변화시킨 역사다. 기하학적, 수학적 사색을 문양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이슬람의 미학적 가치에 적용해 비율과 형태를 확실히 했다. 무엇을 표현하느냐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더 신경을 쓰는 이슬람 문화에서 서체는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려졌다. 글은 신의 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서체를 사용한다. 아랍어와 문자를 예술로 승화시킨 이슬람 서체는 코란의 보급과 함께 급속도로 확산됐고, 서체는 이슬람 미술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서체에 조예가 깊었으며, 코란의 필사 작업에 참여한 서예가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

 

무슬림도 기독교인만큼이나 자신의 종교에 헌신적이었지만 그들이 이룬 미술은 기독교 교회가 후원자 노릇을 하며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서양미술과는 분명 다르다. 서양미술의 주된 형식은 회화와 조각이었다.

 

이 둘은 예배에 필요한 종교적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슬람 미술에는 거창한 그림이나 조각이 거의 없다. 대신 서양 미술에서 부차적이고 장식적인 것, 예를 들어 책이나 직물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책에는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이 삽화로 들어갔다. 직물은 종이, 그림이 폭 넓게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예술적 감각을 전파하는 편리한 수단으로 사용됐다.

 

이슬람 미술은 이슬람 세계의 변화도 반영한다. 이슬람 건축의 전통은 모스크가 출발점이다. 모스크는 무하마드가 무슬림 공동체의 중심이자 기도실로 지었다는 집에서 유래한다. 모스크에는 예루살렘의 바위 돔, 이스파한의 마스지디 샤 등이 있고 궁전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문헌에 존재하나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 세빌의 알-카자르 궁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슬람 건축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아그라에 위치한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5대 황제인 샤자한이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세운 무덤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한 이야기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기울어질 만큼 공사하는 데 들어간 비용이 어마어마하고 많은 사람이 공사 도중에 숨을 거둔 아픈 사연도 담고 있다. 공사에는 매일 2만 명이 넘는 일꾼들이 동원되었고, 마침내 22년 만에 무덤이 완성되었다. 네 귀퉁이에는 '미나레트'라고 불리는 40m 높이의 탑이 세워져 있는데 신기하게도 각각 약 7도 정도 바깥으로 기울어져 있다. 탑을 일부러 기울이게 만든 이유는 강가의 약한 지반 때문에 건물이 내려앉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Scene #3  공존의 문화가 깃든 이슬람 예술   

 

아직까지도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듯하다. 중동 건설 붐과 석유자원, ‘세계의 화약고’로 대변되는 정세불안 등 경제·정치적 측면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9·11테러’ 이후로 이슬람 세계를 조명하는 책들이 나오긴 했지만 종교나 사회, 국제정치 분야 등으로 한정됐다.

 

그러나 널리 분포된 이슬람 미술은 이슬람교의 포용성으로 인해 조화와 균형을 기본으로 하되 토착민족의 전통과 융화되어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 냈으며 기독교 문화와도 교호하며 공존하였다. 그래서 이슬람 문명이 거대한 문명의 용광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 예술』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오는 귀한 책이다. 제목과 달리 미술 분야뿐 아니라 이슬람의 예술 전반, 나아가 건축, 음악까지도 두루 소개된다. 아라베스크 무늬로 대표되는 기하학적 장식문양부터, 종교와 예술이 어우러진 웅장한 모스크 건축, 이슬람 예술의 독창성을 대변하는 서예, 유럽 중세 음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 등이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예술을 발전시켰고, 동서양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 이슬람 세계의 또 다른 면이 잘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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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로 보는 서양미술 살림지식총서 176
권용준 지음 / 살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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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우리는 왜 그림을 보는 것인가 

 

어떤 그림을 명화라고 하자. 그런데 왜 우리는 이 그림을 보는 것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세계적인 명화라는 데 이견을 표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어떤 기준으로 명화가 됐으며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보고 싶도록 만드는 그 매력이 무엇인지 설명하라면 명쾌하게 답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미술 교과서는 모든 것을 얘기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그림을 보면서 한번쯤 궁금하게 여길 법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도 찾을 수 없다. 미술의 역사적 흐름과 장르를 설명하는 데는 과잉 친절을 베풀지만 그것이 나타나게 된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미술을 어렵게 느꼈던 걸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미술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 사이에선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전설처럼 내려왔다. 마치 대학 교재처럼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의 제목과 판형 그리고 분량은 독자의 기를 죽인다. 그러나 어쩌랴. 일생에 한 번은 읽거나 최소한 집에 두고 가끔 제목이라도 감상해야 할 책이거늘.

 

이 책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 모든 미술을 소개하는 책의 원형이자 뿌리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영감을 받았을 것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서양미술에 입문하는 초보자에게는 곰브리치의 책은 잠을 오게 만드는 유용한 베개가 되고 만다. 저자의 서문 이상을 읽어나가 것이 쉽지만 않다.

 

그러한 독자를 위해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살림지식총서세트 176번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이다. 서양미술을 이해하는데 꼭 알아두어야 할 기본적인 내용이 이 얇은 책 속에 들어있다. 서양 미술과 그 역사 그리고 그 조류를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만약 미술을 위해서 한 권의 책밖에 읽을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런 가치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서양미술사 책에서 볼 수 있는 연대기적 서술 양식을 지양한다. 저자는 그림 속에 숨겨진 테마, 그동안 그림을 보면서 발견해내지 못한 상징적 의미를 중심으로 서양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Scene #2  서양미술을 움직인 다섯가지 테마

 

여기서 저자가 소개하는 서양미술의 테마는 크게 다섯 가지다. ‘인간의 발견과 절대미(美)’, ‘신(神)’, ‘죽음’, ‘향락’, ‘감성’이다. 좀 더 쉽게, 즉 서양미술사의 연대기적 개념으로 이 다섯 가지 테마를 풀이하자면 고대 그리스 미술과 르네상스 미술, 중세, 바니타스(Vanitas) 미술, 로코코 미술, 낭만주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각의 미술사조를 대표하는 명화도 소개하고 있어서 서양미술의 주요 테마를 쉽게 이해하도록 구성했다. 

 

첫째는 인간의 발견과 절대미. 회화의 기원설은 여러 가지 내용이 있다. 수천 년 전부터 이 문제를 두고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서로 자기들이 먼저라고 아옹다옹해댔다. 로마의 학자인 플리니우스는 그 유명한 그림자 모사설을 주장한다. 도공의 과년한 딸이 코린트의 한 청년을 사랑했는데 그가 전쟁에 나가게 돼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그가 저세상 사람이 되더라도 영원히 추억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애타는 갈구가 통했던 것일까. 그녀에게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지막 만남의 날 청년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벽에 비친 그의 그림자를 목탄으로 그렸다. 플리니우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녀의 추억하고자 하는 욕망,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항거하고자 하는 욕망이 회화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고 봤다.

 

 

 

라스코 동굴 벽화

 

 

그러나 서양인들이 수천 년 동안 철석같이 믿었던 ‘회화는 그림자의 윤곽을 그린 데서 탄생했다’는 설은 20세기에 들어와 폐기 처분의 운명을 맞는다. ‘그림자 모사설’의 종말을 가속화한 것은 원시 동굴 벽화의 발견이었다. 알타미라, 라스코 동굴의 벽에 그려진 수많은 야생동물은 코린트 도공의 솜씨를 무색하게 했다. 그 생생한 묘사를 낳은 저변에는 많은 사냥물을 포획하고자 하는 원시인들의 욕망과 종족 번성의 기원이 담겨 있다. 이제 곰브리치의 책을 비롯한 대부분의 미술 입문서는 그림의 기원을 더 이상 그림자 모사설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자를 따라 그림을 그리는 대신 자연을 모방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미메시스(Mimesis)’라는 어원이 등장했다. 플라톤이 현실을 모방한 미술은 가치가 없는 허구라고 비판했지만 미술의 진보는 멈출 수 없었다.

 

그리스 미술은 종교과 결부되어 주문에 따라 신과 영웅의 상들을 창조하였는데 종교상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순수한 인간적인 것에다 뿌리를 내리고 자발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했다. 그 창작의 산물이 인체비례법과 조각의 제1원리인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이다. 콘트라포스토는 무게 중심을 실어 땅바닥에 내디딘 다리와 그 반대편의 발걸음을 옮기는 다리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 잡으려 하면서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자세를 말한다. 우리가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메면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같은 쪽 어깨를 위로 들어 올리고 반대편 어깨는 아래로 낮추듯이 말이다. 콘트라포스토는 움직이는 신체가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균형의 미학이다. (그리스 미술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독자라면 살림지식총서 114번 『그리스 미술 이야기』를 참고하면 된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4~1486년

 

 

그리스인들에게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이성으로 발휘하고 느낄 수 있는 선(善)의 관념이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리스 미술은 다분히 인간중심적이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미적 이상은 14~16세기 르네상스에 다시 활짝 꽃을 피게 된다. 이 중심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등장한다. 르네상스의 미술 역시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신화의 장면을 묘사하면서도 인간적으로 해석했다. 르네상스는 한동안 잊혔던 인간을 미술에서 재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기 중간에 위치한 미술은 어땠을까? 누군가는 서양사 또는 서양미술의 역사를 중세 이전과 이후를 나누기도 한다. 중세 이전은 마지막으로 화려한 창작의 열매를 맺었던 헬레니즘 문화의 로마 제국을, 중세 이후를 르네상스로 보고 있다. 중세는 ‘암흑시대’라는 긍정적이지 못한 수식어가 따라올 정도로 중세 이전의 고대 그리스 미술과 헬레니즘 미술과는 확연한 차이의 특징이 있다.

 

 

 

 

치마부에  「옥좌 위의 성모」 13세기경

 

 

그리스 미술이 인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인간중심적이라면 중세 미술은 인간의 관념 그리고 신성(神性)을 묘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중세는 신 중심 사회다. 로마 제국 멸망을 시점으로 서양문화는 헤브라이즘(Hebraism)의 종교 문화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중세 미술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하느님의 말씀, 즉 성서의 내용이나 교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년 / 비스듬한 위치에서 바라본 두개골의 모습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이러한 관념적인 경향은 16세기에 다시 발현된다. 르네상스 때까지만 해도 예술가들은 인간의 이성을 찬사하는데 아끼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 앞에서 부질없는 인간의 존재, 그 허무함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때 등장해서 유행했던 미술이 바로 바니타스(Vanitas) 미술이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의미의 바니타스는 인간의 허영심과 세속적인 욕망을 경계한다. 바니타스 미술에 등장하는 오브제는 죽음 또는 유한성을 의미한다. 해골, 불이 꺼진 촛불, 멈출 수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모래시계, 시든 꽃, 금방 건들면 터지고 마는 비눗방울. 바니타스 그림은 회화적으로 죽음이라는 관념을 상기시켜 준다.

 

 

 

 

프리고나르  「그네」  1766년

 

 

어둡고 엄숙한 바니타스 미술의 시대가 지나가고 18세기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은 귀족 문화가 성립된다. 귀족들만의 풍요와 향락이 느껴지는 로코코(Rococo) 시대가 등장한다. 르네상스의 단정하고 우아한 고전양식에 비하여 장식이 지나치게 화려할 정도로 감각적이다. 그래서 세련된 아름다움은 귀족들의 눈을 즐겁게 만들 정도로 사치스러운 느낌이 난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년

 

 

로코코 이후에 르네상스처럼 고귀한 인간의 속성을 표현하려는 신고전주의 미술이 등장했으나 그 유행의 틈 사이에 앵그르를 필두로 하여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려는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꽃이 피었다. 예술가들은 삶 속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들(사랑, 환희, 죽음, 고통 등)에서 영웅주의의 광기와 절망에 이르기까지 인간 본성의 여러 측면들을 그려냈다.

 

 

 

  Scene #3  그림을 눈으로 보는 것도 힘든데 머리로 보고 읽으라고?

 

모든 미술 작품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고, 미술가는 작품을 통해 시대가 부여하는 목적의식을 표현한다. 서양미술을 발전하게 만든 테마에는 당시 예술가들의 목적의식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제 미술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그림을 눈으로 보는 것도 힘든데 이제 와서 머리로 보고 읽으라고? 관념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어렵게 느껴지는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으로만 봐서는 불가능하다. 눈으로 보는 미술은 시각적인 만족을 채워줄 뿐이다. 머리로 읽는 미술은 우리가 그림 앞에서 머뭇거리게 만든 지적 호기심을 풀 수 있도록 한다. 사실 오늘날의 현대미술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대가 변할수록 미술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니 기본 지식이 없다면 예술가의 회화적 목적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식들이 모여서 움직이는 한 시대의 흐름마저도 조망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미술은 그렇게 변하고 있다.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은 선사시대부터 20세기 현대미술까지 서양미술의 역사를 개관한 것이 아니다. 문고본의 한정된 분량상 헬레니즘 미술과 신고전주의 미술을 표피적으로 언급하고 (서양미술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인상주의 미술과 관련된 테마를 설명하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그럼에도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방대한 서양미술의 기본 테마를 쉽게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책임에 틀림없다. 이제 막 서양미술사를 입문한 독자라면 이 책으로 간단하게 워밍업으로 굳어진 머리를 유연하게 만든 상태에서 곰브리치의 미술사라는 커다란 산봉우리에 오르면 좋을 것이다. 무턱대고 서양미술사의 산봉우리에 오르다가 중간에 지쳐 졸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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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 예술-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현 세트 - 전5권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살림지식총서
권용준 외 지음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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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 (권용준 저, 살림지식총서 176)

 

 

 

 Scene #1  우리는 왜 그림을 보는 것인가 

 

어떤 그림을 명화라고 하자. 그런데 왜 우리는 이 그림을 보는 것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세계적인 명화라는 데 이견을 표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어떤 기준으로 명화가 됐으며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보고 싶도록 만드는 그 매력이 무엇인지 설명하라면 명쾌하게 답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미술 교과서는 모든 것을 얘기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그림을 보면서 한번쯤 궁금하게 여길 법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도 찾을 수 없다. 미술의 역사적 흐름과 장르를 설명하는 데는 과잉 친절을 베풀지만 그것이 나타나게 된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미술을 어렵게 느꼈던 걸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미술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 사이에선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전설처럼 내려왔다. 마치 대학 교재처럼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의 제목과 판형 그리고 분량은 독자의 기를 죽인다. 그러나 어쩌랴. 일생에 한 번은 읽거나 최소한 집에 두고 가끔 제목이라도 감상해야 할 책이거늘.

 

이 책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 모든 미술을 소개하는 책의 원형이자 뿌리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영감을 받았을 것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서양미술에 입문하는 초보자에게는 곰브리치의 책은 잠을 오게 만드는 유용한 베개가 되고 만다. 저자의 서문 이상을 읽어나가 것이 쉽지만 않다.

 

그러한 독자를 위해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살림지식총서세트 176번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이다. 서양미술을 이해하는데 꼭 알아두어야 할 기본적인 내용이 이 얇은 책 속에 들어있다. 서양 미술과 그 역사 그리고 그 조류를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만약 미술을 위해서 한 권의 책밖에 읽을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런 가치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서양미술사 책에서 볼 수 있는 연대기적 서술 양식을 지양한다. 저자는 그림 속에 숨겨진 테마, 그동안 그림을 보면서 발견해내지 못한 상징적 의미를 중심으로 서양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Scene #2  서양미술을 움직인 다섯가지 테마

 

여기서 저자가 소개하는 서양미술의 테마는 크게 다섯 가지다. ‘인간의 발견과 절대미(美)’, ‘신(神)’, ‘죽음’, ‘향락’, ‘감성’이다. 좀 더 쉽게, 즉 서양미술사의 연대기적 개념으로 이 다섯 가지 테마를 풀이하자면 고대 그리스 미술과 르네상스 미술, 중세, 바니타스(Vanitas) 미술, 로코코 미술, 낭만주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각의 미술사조를 대표하는 명화도 소개하고 있어서 서양미술의 주요 테마를 쉽게 이해하도록 구성했다. 

 

첫째는 인간의 발견과 절대미. 회화의 기원설은 여러 가지 내용이 있다. 수천 년 전부터 이 문제를 두고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서로 자기들이 먼저라고 아옹다옹해댔다. 로마의 학자인 플리니우스는 그 유명한 그림자 모사설을 주장한다. 도공의 과년한 딸이 코린트의 한 청년을 사랑했는데 그가 전쟁에 나가게 돼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그가 저세상 사람이 되더라도 영원히 추억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애타는 갈구가 통했던 것일까. 그녀에게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지막 만남의 날 청년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벽에 비친 그의 그림자를 목탄으로 그렸다. 플리니우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녀의 추억하고자 하는 욕망,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항거하고자 하는 욕망이 회화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고 봤다.

 

 

라스코 동굴 벽화

 

 

그러나 서양인들이 수천 년 동안 철석같이 믿었던 ‘회화는 그림자의 윤곽을 그린 데서 탄생했다’는 설은 20세기에 들어와 폐기 처분의 운명을 맞는다. ‘그림자 모사설’의 종말을 가속화한 것은 원시 동굴 벽화의 발견이었다. 알타미라, 라스코 동굴의 벽에 그려진 수많은 야생동물은 코린트 도공의 솜씨를 무색하게 했다. 그 생생한 묘사를 낳은 저변에는 많은 사냥물을 포획하고자 하는 원시인들의 욕망과 종족 번성의 기원이 담겨 있다. 이제 곰브리치의 책을 비롯한 대부분의 미술 입문서는 그림의 기원을 더 이상 그림자 모사설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자를 따라 그림을 그리는 대신 자연을 모방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미메시스(Mimesis)’라는 어원이 등장했다. 플라톤이 현실을 모방한 미술은 가치가 없는 허구라고 비판했지만 미술의 진보는 멈출 수 없었다.

 

그리스 미술은 종교과 결부되어 주문에 따라 신과 영웅의 상들을 창조하였는데 종교상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순수한 인간적인 것에다 뿌리를 내리고 자발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했다. 그 창작의 산물이 인체비례법과 조각의 제1원리인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이다. 콘트라포스토는 무게 중심을 실어 땅바닥에 내디딘 다리와 그 반대편의 발걸음을 옮기는 다리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 잡으려 하면서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자세를 말한다. 우리가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메면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같은 쪽 어깨를 위로 들어 올리고 반대편 어깨는 아래로 낮추듯이 말이다. 콘트라포스토는 움직이는 신체가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균형의 미학이다. (그리스 미술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독자라면 살림지식총서 114번 『그리스 미술 이야기』를 참고하면 된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4~1486년

 

 

그리스인들에게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이성으로 발휘하고 느낄 수 있는 선(善)의 관념이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리스 미술은 다분히 인간중심적이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미적 이상은 14~16세기 르네상스에 다시 활짝 꽃을 피게 된다. 이 중심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등장한다. 르네상스의 미술 역시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신화의 장면을 묘사하면서도 인간적으로 해석했다. 르네상스는 한동안 잊혔던 인간을 미술에서 재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기 중간에 위치한 미술은 어땠을까? 누군가는 서양사 또는 서양미술의 역사를 중세 이전과 이후를 나누기도 한다. 중세 이전은 마지막으로 화려한 창작의 열매를 맺었던 헬레니즘 문화의 로마 제국을, 중세 이후를 르네상스로 보고 있다. 중세는 ‘암흑시대’라는 긍정적이지 못한 수식어가 따라올 정도로 중세 이전의 고대 그리스 미술과 헬레니즘 미술과는 확연한 차이의 특징이 있다.

 

 

 

 

치마부에  「옥좌 위의 성모」 13세기경

 

 

그리스 미술이 인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인간중심적이라면 중세 미술은 인간의 관념 그리고 신성(神性)을 묘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중세는 신 중심 사회다. 로마 제국 멸망을 시점으로 서양문화는 헤브라이즘(Hebraism)의 종교 문화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중세 미술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하느님의 말씀, 즉 성서의 내용이나 교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년 / 비스듬한 위치에서 바라본 두개골의 모습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이러한 관념적인 경향은 16세기에 다시 발현된다. 르네상스 때까지만 해도 예술가들은 인간의 이성을 찬사하는데 아끼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 앞에서 부질없는 인간의 존재, 그 허무함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때 등장해서 유행했던 미술이 바로 바니타스(Vanitas) 미술이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의미의 바니타스는 인간의 허영심과 세속적인 욕망을 경계한다. 바니타스 미술에 등장하는 오브제는 죽음 또는 유한성을 의미한다. 해골, 불이 꺼진 촛불, 멈출 수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모래시계, 시든 꽃, 금방 건들면 터지고 마는 비눗방울. 바니타스 그림은 회화적으로 죽음이라는 관념을 상기시켜 준다.

 

 

 

 

프리고나르  「그네」  1766년

 

 

어둡고 엄숙한 바니타스 미술의 시대가 지나가고 18세기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은 귀족 문화가 성립된다. 귀족들만의 풍요와 향락이 느껴지는 로코코(Rococo) 시대가 등장한다. 르네상스의 단정하고 우아한 고전양식에 비하여 장식이 지나치게 화려할 정도로 감각적이다. 그래서 세련된 아름다움은 귀족들의 눈을 즐겁게 만들 정도로 사치스러운 느낌이 난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년

 

 

로코코 이후에 르네상스처럼 고귀한 인간의 속성을 표현하려는 신고전주의 미술이 등장했으나 그 유행의 틈 사이에 앵그르를 필두로 하여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려는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꽃이 피었다. 예술가들은 삶 속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들(사랑, 환희, 죽음, 고통 등)에서 영웅주의의 광기와 절망에 이르기까지 인간 본성의 여러 측면들을 그려냈다.

 

 

 

 Scene #3  그림을 눈으로 보는 것도 힘든데 머리로 보고 읽으라고?

 

모든 미술 작품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고, 미술가는 작품을 통해 시대가 부여하는 목적의식을 표현한다. 서양미술을 발전하게 만든 테마에는 당시 예술가들의 목적의식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제 미술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그림을 눈으로 보는 것도 힘든데 이제 와서 머리로 보고 읽으라고? 관념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어렵게 느껴지는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으로만 봐서는 불가능하다. 눈으로 보는 미술은 시각적인 만족을 채워줄 뿐이다. 머리로 읽는 미술은 우리가 그림 앞에서 머뭇거리게 만든 지적 호기심을 풀 수 있도록 한다. 사실 오늘날의 현대미술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대가 변할수록 미술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니 기본 지식이 없다면 예술가의 회화적 목적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식들이 모여서 움직이는 한 시대의 흐름마저도 조망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미술은 그렇게 변하고 있다.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은 선사시대부터 20세기 현대미술까지 서양미술의 역사를 개관한 것이 아니다. 문고본의 한정된 분량상 헬레니즘 미술과 신고전주의 미술을 표피적으로 언급하고 (서양미술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인상주의 미술과 관련된 테마를 설명하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그럼에도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방대한 서양미술의 기본 테마를 쉽게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책임에 틀림없다. 이제 막 서양미술사를 입문한 독자라면 이 책으로 간단하게 워밍업으로 굳어진 머리를 유연하게 만든 상태에서 곰브리치의 미술사라는 커다란 산봉우리에 오르면 좋을 것이다. 무턱대고 서양미술사의 산봉우리에 오르다가 중간에 지쳐 졸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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