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 그리고 강하다
슈테판 볼만 지음, 김세나 옮김 / 이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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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1년에 하버드대학의 경제잡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가 ‘Mommy track’이란 이론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여성 직원을 채용할 경우 비용이 많이 들어 회사로서는 손해이므로 여성 직장인은 남성과 비교하면 이류에 속한다는 내용이다. 여성 직원은 임신 분만의 기간뿐 아니라 아기가 두 살쯤 되기까지는 양육의 일차적인 역할을 맡기 때문에 일에 능률이 나지 않아 결국 회사로서는 월급을 주는 만큼 생산력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엄마로서의 역할’ 때문에 직장인으로서는 이류를 면치 못한다는 이론이다.

 

잡지에 이 이론이 발표되자 미국 여성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워킹 맘들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서는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쉽고 하찮은 일만 맡는다. Mommy track은 직장에서 오직 일과 성공만을 위해 남성이 추구하는 ‘Fast track’과 비교돼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선택이 아닌 강요라는 것이 이들 워킹 맘들의 주장이다.

 

우리나라 여성인력 활용의 문제점을 논의할 때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이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즉 ‘여성은 약하다’, ‘여성은 보조적인 일에 어울린다’, ‘여성은 치열하지 못하다’ 등 성별 역할에 대한 편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고 그만큼 고치기도 힘들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크게 확대되고 있지만,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견고한 분야에선 여전히 여성의 사회 참여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슈테판 볼만의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그리고 강하다』에 나오는 22명의 여성은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만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기를 거부했다. 한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또 그것이 결국 우리 의식 전반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문화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남성 지배사회 속에서 그 시대의 인습과 통념에 거침없이 맞섰던 ‘생각하는 여자들’의 당당한 행적을 담았다.

 

 

 

 

 

“인터뷰란 싸움이다. 남녀의 육체적 관계와 같은 것이다. 상대를 발가벗기고 자신도 발가벗은 채 서로가 숨기는 것 없이 인격 전부를 걸고 맞서는 싸움이어야 한다.” (오리아나 팔라치, 27쪽 / 사진출처: 이봄 출판사 공식 블로그) 

 

 

오리아나 팔라치는 세계적인 권력자들과의 도전적인 인터뷰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여기자다. 그녀는 인터뷰 도중 상대방에게 대들기도 하고 난폭한 행위를 유발하기도 한다. 아라파트, 호메이니, 헨리 키신저, 덩샤오핑 등 20세기 권력자들의 속내를 공격적인 인터뷰를 통해 끄집어냈던 그녀는 베트남전쟁과 중동전쟁에서도 활약한 종군기자였다.

 

그녀는 인터뷰를 섹스에 비유했다. “내가 벗지 않는 한 상대방도 벗길 수 없다”는 것이다. 뜨겁고 치열한(?) 용어인 섹스를 인터뷰에 비유했다는 것은 단지 듣기 좋은 수사가 아니다. 그만큼 팔라치가 인터뷰 상대에 몰입했다는 뜻이다. 만나는 상대마다 섹스를 하듯, 상대를 완전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집착에 가까운 열망, 상대를 알려면 나부터 벗어던져야 한다는 전략적인, 그러나 전적으로 타당한 생각을 드러낸 말이다.

 

이처럼 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생각하는 여자들’은 위험을 감수한다. 아웅 산 수 치는 15년 간 가택연금을 당했고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안나 폴릿콥스카야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여성 최초로 인도 총리에 오른 인디라 간디는 4번째 총리직 연임에 성공할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1988년 자신의 경호원에게 암살됐다.

 

 

 

 

 

“나는 언제나 내 생각에 충실히 따를 뿐이다. 나는 절대로 사람들이 원하는 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루 살로메, 164쪽)

 

 

루 살로메는 니체, 릴케, 프로이트 같은 지성인을 잠 못 이루게 할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호사가들로부터 유럽 제일의 팜 파탈로 알려졌고, 자유분방한 성격에 자의식이 강한 탓에 남성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책은 위대한 여성들을 드높이는 찬양으로 그치지 않는다. 특히 여성 정치인들과 관련해서는 약자들의 고통에 침묵하거나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우위에 두는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갈파한 보부아르의 말처럼 외부에서 비롯된 편견을 깨고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생각하는 여자들은 일찍이 자신만의 사상과 행동을 만들었다. 사막과 다름없는 환경에서 앞선 시대의식, 고귀한 인간 정신만큼은 조금도 시들지 않고 황무지에 끊임없이 길을 만들어 여성의 정당한 권리 확립이라는 고귀한 꽃을 피웠다. 그것은 차별을 극복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용감한 여성들이 길 밖에서 흘린 피와 땀의 결과였다.

 

여성도 인간임을 자각하고 평등과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사회에 살기 위해 끊임없이 길 밖에서 길 안으로의 투쟁을 이어왔던 그녀들에 의해 조금씩 길이 열렸다. 아직도 여성과 남성이 나란히 달리기엔 터무니없이 어긋나 있거나 한쪽이 너무 낮은 길, 하지만 가둘 수 없는 바람처럼 자유를 위해 안온함을 버린 그녀들의 투쟁으로 길은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Woman thinking track’이다.

 

22명의 생각하는 여자들을 만나는 동안, 아직도 깨뜨리지 못한 인습의 벽에 갇혀 자신의 삶을 포기한 여성 독자가 있다면 내면의 열정으로 새롭게 자기 앞의 생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불태우기를 바란다. 생각하는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여성들이여,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항해를 꿈꾸는가? 책 속의 여성들이 만든 길 위에 서 보라. ‘Woman thinking track’을 따라가라.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대사처럼 ‘생각하는 여자가 되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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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간 - 분석심리학자가 말하는 미래 인간의 모든 것
이나미 지음 / 시공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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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다음 인간'은 미래를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스 신화의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카산드라.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느 날 태양과 예언의 신 아폴론의 구애를 받는다. 그녀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아폴론으로부터 예지력을 전해 받는다. 그러나 그녀가 예지력을 받은 뒤에도 오리발을 내밀자, 화가 난 아폴론은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도록 저주를 내린다.


이후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고 그리스 군이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를 가져왔을 때, 카산드라는 “목마를 성안에 들여 놓으면 트로이가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녀의 예언대로 트로이는 결국 멸망했다. 카산드라는 “주목받지 못하는 비관적 예언자”라는 뜻으로 종종 쓰인다.


융 심리학을 주로 연구하는 심리학자 이나미의 『다음 인간』은 카산드라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한 비관적 미래 예측”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기술의 발전을 감당하지 못해 정신적으로 종속당해 욕망이 사라지고, 관계, 윤리, 가치관이 무녀 져버리는 미래의 인간상을 한 편의 가상 시나리오로 써내려갔다. 그 가상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다음 인간’, 바로 우리다. 그런데 책 속에 그려진 미래 속 우리 모습은 너무 어둡기만 하다.


우리는 사람보다 기계와 더 가까이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져 무감동과 타성에 젖는다. 이에 사이코패스가 등장하고, 관계는 해체되고 감정이 부족한 세대가 출현한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의존하면서 자란 A 세대(Apathy, 무감동)는 감정이 부족하다.


미래의 가족은 결혼으로 성립되어 혈연관계로 맺어지는 전통적인 유형이 아니라 계약 형태로 만들어진다. 집단과의 관계를 회피하고 자신만의 인생을 위해 행복을 찾으려는 성향이 강할수록 젊은이들은 결혼 대신 1인 가족으로 산다. 자녀를 갖고 싶으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다. 돈만 있으면 가짜 자녀라도 구입해서 같이 살 수 있다. 지금까지 소개한 이야기들은 상상력이 가득한 SF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욕망. 인간, 관계가 사라져버린 미래 세상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Scene #2  기술의 미래가 아닌 인간의 미래를 바라보다


인간은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꾸준히 환경에 적응하며 발전해 왔다. 그리고 발전된 인간의 능력, 특히 두뇌의 기능을 활용해 새로운 기술을 하나하나씩 개발하고, 축적 및 통합해 발전시키는 등 현재의 많은 기술적인 발전을 이뤄 놓고 있다. 이렇게 발전된 기술의 결과물들은 높은 수준의 성능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이제는 변한 세계를 따라오지 못하거나 종속되는 인간이 겪는 가치의 위기와 새로운 차원의 소외가 발생한다. 


체코 출신의 커뮤니케이션 쳘학자 빌렘 플루셔는 인간은 새로운 세계 속에 방향을 잡기 위해 ‘기구(器具)’를 이용하지만, 바로 이 ‘기구’에 의해 오히려 인간이 지배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가치판단과 일상의 삶 전체가 우리를 프로그램화하는 기구들에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구’로 가장 대표할 수 있고,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SNS이다. 한 손으로 쉽게 조작 가능한 SNS라는 기구는 우리를 관계지향성 인간이 아닌 폐쇄적 인간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심리학이라는 망원경으로 기술의 미래가 아닌 인간의 미래를 내다봤다. 사실 그녀의 가상 시나리오대로 사회를 결속시킬 수 있는 공동체적 가치와 관계의 의미가 점점 균열되는 조짐이 보인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결혼, 취직, 육아 담당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독신 생활을 원한다. SNS과 같은 가상공간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데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또 다른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다보니 이전 현실 세상에서 전혀 나올 수 없는 신종 범죄가 등장한다. ‘일베’(일간베스트)처럼 특정 집단이나 상대방을 향한 인신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상대방의 SNS에 몰래 해킹하여 개인 정보를 빼낸다. 심지어 가상공간과 현실 세계를 혼동하게 되어, 범죄행위를 해도 이를 단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의 일종으로 착각하는 리셋 증후군에 걸린 사람이 늘어난다. 이들은 자신의 범죄행위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가상공간이 신종 사이코패스를 양산하고 있다.

 

 

 

 Scene #3  미래 예측서인 듯 미래 예측서 아닌 미래 예측서 같은 책  
 

심리학자가 바라보는 미래 모습은 기술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예측이 아닌 그 변화에 의해 영향 받는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다. 일단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좋다. 정신과 의사의 가상 시나리오가 과연 언제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정확하게 예측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급속한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하는 인간의 심리를 각인시켜준 것만 해도 우리는 심리학자의 예측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의 가상 시나리오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미흡한 내용으로 비춰질 수 있다. 특히 미래학 전문가 입장에서는. 저자는 서문에서 기술 환경 변화에 주목하는 미래 예측이 상상력이 결여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미래학자들은 미래를 예측하는데 있어서 무조건 기술 변화에만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기술 변화가 우리에게 미치는 삶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다룬 심리적 측면에서의 미래 예측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저자는 자신이 아는 분야인 심리학을 강조하면서 『다음 인간』을 기존의 미래 예측서와 차별화를 두려고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서는 기술의 변화에 관한 전제조건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가상 시나리오는 미래학자도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하면 쓸 수 있는 내용에 불과하다. 이렇듯 심리학자가 현재의 미래 예측 방식을 문제 삼으면서 미래를 논한 서술 방식은 미래학 전문가 입장에서는 상당히 눈에 거슬릴 수도 있다.


그리고 책에서 소개한 일부 가상 시나리오 중에는 과유불급(過猶不及)에 가까운 내용도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상상력의 정도가 너무 치우친 나머지, 좀 더 심도 있게 분석하지 못해 미흡한 부분도 있었다. 특히 계약 가족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73쪽) 저자는 계약 가족이 더 많아지면 가족 내 폭력이 줄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여기서 이 내용에 대해서 완전 동의할 수 없다. 과연 계약 가족의 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오히려 한 핏줄에서 태어난 가족이 아니기에 가족 내 폭력의 위험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이를 악용한 특수 범죄가 일어난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돈독하게 정(情)을 나누는 관계의 의미가 사라지는 가상 시나리오의 전반적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옥에 티다.   


이 책에서 모든 가상 시나리오가 전체적으로 비관적인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미래 변화를 의해 형성될 수 있는 낙관적인 전망도 펼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여론에 관한 예측이다. 저자는 메이저 신문사들은 합병되고 개인 팟캐스트 방송이 늘어나면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진영 논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109쪽) 다양한 의견의 목소리가 나오는 언론 생태계가 구축될 거라는 전망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현실에 동떨어진 이상적인 내용에 가깝다. 수천 개의 개인 팟캐스트 방송 덕분에 우리는 거기서 소개되는 정보를 골라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정보가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언론 생태계가 구축되더라도 과연 신뢰성 높은 정보를 소개하는 콘텐츠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저자가 예측하는 이상적인 언론 생태계가 되기 위해서는 콘텐츠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언론은 대중을 호도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올바르게 전달하려는 역할을, 대중은 다양한 목소리 중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균형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Scene #4  미래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연약한 마음 지키기


애초부터 저자가 기술이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만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면 깊이 있는 분석으로 이루어진 미래 예측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제의 범위가 국제정세와 관련된 내용으로 확장되는 바람에 저자의 전공이자 이 책의 강점으로 언급될 수 있는 심리학의 색깔이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서문에 융의 텔레올로지 이론과 적극적 상상 기법으로 미래에 대한 상상에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할 뿐, 자세한 설명이 부족했다. 저자는 ‘심리학 망원경’으로 인간의 미래를 너무 들여다보다가 그만 자신이 애용하는 망원경에 대한 설명을 놓치고 말았다. 융 심리학에 생소한 독자 입장에서는 아쉽게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다. 심리학적 시각으로 부연 설명이 첨가되었으면 설득력 있는 내용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심리학과 미래학의 만남은 신선한 조합이었다.『다음 인간』은 과거와 현실에 갇힌 채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와 시선을 미래로 향하도록 분석하는 기회를 강조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할 때 우리 주변에 작동되는 기술의 변화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변화되는 현재의 자신을 지켜볼 것을 촉구한다. 비록 미래학자처럼 내일 어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것인지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더 급속하게 변화될 미래의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마음이 건강하게 지킬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한다면 미래를 보는 통찰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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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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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뉴스 손바닥 안의 손오공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부처와 내기를 한다. 부처는 난공을 피우다 걸린 손오공에게 “  손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구름을 타고 수만리를 날아간 손오공은 구름 위 다섯 기둥에 ‘손오공 다녀감’이라고 쓴 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부처의 다섯 손가락이었다. 여기서 ‘부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뉴스 손바닥 안의 손오공’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켜고 인터넷 포털과 SNS에 올라오는 새로운 소식을 검색한다. 친구와 진지한 대화를 할 때도 중요한 업무회의 시간에도 틈만 나면 뉴스를 검색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습관이다. ‘손안에 세상을 펼쳤다’며 흡족해하지만 실은 뉴스에 의해 가공, 편집된 손안의 세상에 갇힌 것이다. 뉴스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뉴스와 가까이하자니 그 물량 공세 앞에 자칫 헤매기 쉽고, 떨어져 있자니 시대에 뒤처지지 않나 불안하다.

 

잠시라도 찾지 않으면 미친 듯이 초조해지는 뉴스에 대한 탐닉.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뉴스에 탐닉하는 이유를 불안과 공포를 꼽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면 뒤처질 것 같은 공포와 불안, 동시에 엄청난 재난이나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괜찮다’는 상대적 안도감을 얻기 위해 뉴스에 몰입한다.

 

이 공포와 불안 아래에서는 ‘감시와 통제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감시와 통제의 논리’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곳이 뉴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근대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통해 국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해 왔다.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인 판옵티콘은 규율사회의 특징인 감시와 통제의 원리가 잘 드러나고 있다. 간수는 중앙의 높은 곳에서 언제나 죄수를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규율을 내면화한다.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비롯되는 감시와 통제는 감옥뿐 아니라 병원, 군대 등 사회 전체로 확산되면서 규율사회를 낳는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이러한 판옵티콘의 구조가 바로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서도 그대로 구현되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근대사회의 판옵티콘에서 보여준 시선이 정보로 대체된다. 정보를 독점한 국가권력이나 기업이 대중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감시와 통제의 방법이 좀 더 비가시적이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제는 권력을 감시해야 할 신문은 신앙이 누리던 권력과 지위를 차지해 대중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Scene #2  뉴스티콘(Newsticon)의 시대

 

우리는 단순히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뉴스티콘(Newsticon)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의해 감시받는다. 뉴스티콘에서 뉴스는 피감시자가 된 대중을 볼 수 있지만, 대중은 뉴스 감시자를 볼 수 없다. 뉴스는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낸 내용을 보여줌으로써 여기에 겁먹고 동요하는 대중을 더욱 자극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선의 비대칭성’은 대중들로 하여금 뉴스 탐닉을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뉴스는 일상을 통제한다. 아침뉴스로 일어나는 시간을 확인한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전해주는 종합뉴스가 우리를 기다린다. 뉴스가 시작되는 정각 시간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에 리모컨 컨트롤을 쥔다. 뉴스는 계시를 주고, 선악을 구분하며, 타인의 고통을 알라고 타이른다. 이 모든 의식을 거부한다면 ‘뉴스의 이단’이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뉴스를 보지 않는 이단자는 시사 상식에 부족한 자로 낙인찍힌다. 뉴스를 보느냐 안 보느냐에 따른 기준은 상대방의 지적 수준을 판단한다. 즉, 뉴스를 보는 생활은 교육과정의 연장성이 되기도 한다.

 

 

 

 

 

 

사진출처: 중앙일보의 기획 기사 '정치 수능' (2014년 7월 23일)

 

“우리는 태어나서 고작 18년 남짓 교실에 갇혀 보호받을 뿐, 나머지 l8년은 사실상 어떤 제도권 교육기관보다도 더 커다란 영향력을 무한정 행사하는 뉴스라는 독립체의 감독 아래에서 보낸다. 일단 공식적인 교육과정이 끝나면 뉴스가 선생님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18쪽)

 

 

이렇듯, 오늘날의 뉴스는 투명한 감시자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관을 창조하고 감정을 통제한다. 뉴스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그리고 어떤 변화가 가능한지를 알려주며 그러면서 정치적ㆍ사회적 현실에 대한 대중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대중은 뉴스를 통해 국가와 사회의 현실에 대해 판단하며, 그에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좌절한다. 바로 이것이 뉴스가 지닌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뉴스 그 자체에 무지하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라는 보통의 말처럼 우리를 ‘감정 교육’시키려는 뉴스의 이면을 모른다. 언론은 특정한 뉴스들을 폭탄처럼 쏟아냄으로써 오히려 무관심을 선도한다. 정치뉴스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정치 뉴스를 보며 분노하고, 분노하다 결국 허탈해진다. 정치뉴스는 여야 정치인들이 왜 싸우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여야의 공방만 비춘다. 어쩌다 저런 비리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잡혀가는 정치인의 모습만 비춘다. 결국 우리에게 정치에 대한 냉소만 생기게 한다.

 

민주 정치의 진정한 적은 흔히 보도 통제와 검열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검열보다 무서운 것은 냉소다. 독재자라면 통제 대신 닥치는 대로 언론이 뉴스를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끊임없이 쇄도하는 뉴스 기사와 이미지는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긴다.

 

 

 

 

 

앤디 워홀  「실버 카 크래쉬」  1963년

 

“재난 뉴스는 불행한 사건을 다루는 뉴스 중에서도 주목도가 높고 대중적인 또 하나의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재난 뉴스’ 중에서, 230쪽)

 

 

정치 뉴스에 시큰둥할수록 셀러브러티에 관한 다양한 소식에 집착한다. 인기 연예인의 사생활과 연애 소식 등은 대중적 뉴스감이 되어 각종 포털 사이트 뉴스란에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요즘 재난 뉴스의 내용은 상당히 자극적이다. 세월호 침몰 이후 지상파 종편 뉴스채널 등은 재난 쇼를 하듯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경쟁을 벌였다.

 

 


 Scene #3  뉴스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 없다  

 

세상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 자극적인 범죄 기사에 저절로 눈이 가고, 유명연예인의 열애 소식이나 폭행사건에 악의적인 댓글을 다는 대중은 답답한 삶의 도피처로 뉴스티콘을 삼고 있다. 뉴스티콘에 갇힌 대중은 자신들의 감정을 통제하는 뉴스를 어떻게 올바르게 보는지 잘 모른다. 뉴스티콘에서 탈출하여 제대로 된 뉴스를 봐야 한다. 뉴스와 대중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입장에서 머리를 맞대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좋은 뉴스는 세계와 나, 타자와 나의 만남을 이끄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것은 생생한 인간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우리는 그동안 뉴스에 탐닉하는 바람에 정말 인간적인 뉴스를 외면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뉴스를 많이 접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뉴스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읽는 것’이다.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도는 정보의 조각이 모아 만들어진 뉴스에서 감춰져있는 세상의 의미를 끄집어 내야한다. 우리는 세상에 모든 뉴스를 일일이 다 확인할 수 없다. 가끔 스마트폰에 진동으로 울리면서 나오는 뉴스 속보를 멀리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뉴스로부터 철저하게 도망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보통은 한 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정치체의 신경중추인 뉴스 본부로 탱크를 몰고 습격하라고 말한다. 사회뿐만 아니라 대중의 감각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만들어낸 불량하고 나쁜 뉴스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정말 나쁜 뉴스가 너무나도 많다. 이런 나쁜 뉴스로부터 통제당하면서 생긴 세상에 관한 무관심, 분노로 쌓인 정신적 우울증을 치유하고기 위해서 우리의 신경중추를 자극해온 뉴스티콘을 향해 탱크를 몰아 무너뜨려야 한다. 뉴스티콘을 지배하는 뉴스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 없다. 뉴스티콘을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견지해야 할 진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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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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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에도 인간처럼 수명이 있을까? 4년 전에 컴퓨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한동안 인터넷을 접속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고장 난 컴퓨터는 내가 고등학생 때 구입한 것이라서 거의 4년째 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컴퓨터의 성능은 점점 떨어지고, 인터넷 접속 속도도 예전만큼 빠르지 않았다. A/S를 통해 컴퓨터를 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컴퓨터를 수리를 담당하는 사람은 아무리 고쳐 써도 오래 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컴퓨터 본체를 교체할 것을 권했다. 컴퓨터 본체는 오래 사용되고 나면 기계 내부에서 열이 발생하는데 컴퓨터 성능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인간도 일을 하면 쉬는 시간이 있어야하듯이 컴퓨터를 장시간 사용하면 잠시 전원을 꺼서 본체에 달아오른 열을 식혀줘야 한다. 컴퓨터 한 번 켜면 기본 5시간 이상을 썼으니 컴퓨터 본체가 지칠 만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동안 컴퓨터가 5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고장 나는 경우가 많았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인터넷 서핑에 문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들였을 뿐인데 컴퓨터의 수명은 왜 짧은 것일까? 컴퓨터 한 번 고장 나면 일단 가족으로부터 원망의 눈초리를 받아야 한다. 집에서 내가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친구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을 비교한다면 나는 훨씬 적은 편에 속한다고 확신한다. 도대체 이상하게 내 컴퓨터만 수명이 짧은 걸까. 한편으로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리 담당자에게 컴퓨터 본체의 수명을 어느 정도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컴퓨터를 장시간 켜지 않고, 잠깐 전원을 꺼두는 방식으로 사용하면 본체의 수명이 보통 5년이라고 했다. 하루에 컴퓨터를 5시간동안 켜는 것이나 그 이상 시간을 켜나 장시간동안 전원이 켜져 있으면 컴퓨터 본체의 사용 수명은 줄어들게 된다.

 

결국 새 컴퓨터로 장만했고, 어느덧 4년째 사용하고 있다. 이제는 오래 사용했다 싶으면 컴퓨터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컴퓨터를 노예처럼 부려 먹고, 절대로 쉬지 못하게 만드는 이 못된 습성을 고치지 못해서 지금의 컴퓨터 역시 상태가 영 시원찮다. 정작 고쳐야 할 사람은 노쇠한 컴퓨터의 상태를 알면서도 험하게 다루고 있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은 5년 이상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나마 오래 사용한 가전제품이라면 냉장고를 10년 넘어서 사용한 것이 고작이다. 텔레비전, 스마트폰, 컴퓨터는 하루 자고 나면 새로운 성능이 추가되고 멋진 디자인으로 출시되어서 고장이 나면 새로운 것으로 교체한다. 특히 스마트폰은 통화 상태가 불량이거나 인터넷 접속 속도가 느려졌다 싶을 때 마침 최신 스마트폰이 등장하여 우리를 유혹한다. 위약금 약정 기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돈을 지불해서 최신 스마트폰을 사고 만다.

 

<홈 퍼니싱스 데일리>라는 잡지가 가장 쉽게 고장이 나는 가전제품을 조사해서 목록으로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소개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최근에 실시한 조사는 아닌 것은 분명하다. 가전제품이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화 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1. 세탁기
2. 냉장고
3. 빨래 건조기
4. 텔레비전
5. 건조 겸용 세탁기
6. 레인지와 오븐
7. 에어컨
8. 냉동고

 

 

인류의 수명이 원래 50세 이하였다가 시대가 좋아지고, 의학기술이 발달되면서 수명이 점점 늘어졌다. 마찬가지로 이 8가지 가전제품도 초기에 보급되던 것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나고, 쉽게 고장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수명도 길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구매한 제품을 10년 이상 쓸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고장이 나서 바꿀 때가 되면 지금의 제품보다 성능이 좋은 제품들이 출시되기 때문이다. 제품을 오래 사용하면 새 제품으로 교체하는데 드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지만, 아무리 제품을 조심히 사용한다한들 제품의 수명을 연장할 수 없다.

 

만약에 제품의 수명이 많아진다면 제품을 만든 기업이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다. 기업은 제품을 생산하여 끊임없이 수익을 내야한다. 상품을 많이 팔아야 이득을 얻는다. 제품이 오래가는 건전지처럼 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려는 구매자의 수요가 줄어들게 된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제품이 나오더라도 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교체할 필요가 없다. 구매자의 지갑을 열게 만들이 위해서 기업은 신상을 알리는 광고를 만든다. 광고가 대중의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홍보 수단이다. 

 

탈성장 이론가인 세르주 라투슈는 가전제품이 쉽게 고장이 나게 만드는 주범을 제품을 사용하는 우리 구매자가 아닌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라고 말한다. 기업들이 상품을 설계할 때부터 일부러 수명을 줄이거나 결함을 집어넣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품의 교체 주기를 앞당겨 소비자들은 끝없이 상품을 다시 구매하게 된다.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해서 새 제품을 구입하게 하려고 일부러 상품의 수명을 단축하는 것을 '계획적 진부화'라고 한다.

 

이미 ‘계획적 진부화’는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보편적인 경향이 되었다. 물신만능주의 는 우리로 하여금 상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일회용품, 식료품의 유통기한, 수명이 2~3년에 불과한 스마트폰은 대표적인 계획적 진부화의 산물이다. 우리는새 물건을 사고 '득템'했다며 즐거워하지만, 이는 끊임없이 이전 물건의 가치를 소멸시키고 새 물건을 사도록 하는 낭비사회의 일면일 뿐이다. 새 물건도 언젠가는 낡고 성능이 저하된 물건이 된다. 우리는 또 '신상'에 관심을 가지고 고쳐서 사용하기보다는 무엇을 살지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집결한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의 가장 좋은 자리에 올라앉은 '상품'을 우러르며 소비자는 살아있음을 만끽한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이러한 소비왕국의 탄생을 놓고 "소비가 사람들을 한 무리로 느끼게 만든다"고 말했다. 재화를 계속 생산해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숙명이다. 마치 자본주의의 태엽을 감아주기 위해 사력을 다하듯 이 땅의 소비자들은 밤낮으로 상품 소비에 나선다.

 

하지만 소비를 부추기는 계획적 진부화는 자원 낭비와 쓰레기 범람이라는 중대한 생태적 문제를 야기한다. 무제한적으로 부추겨진 소비는 오염과 쓰레기를 낳고, 지구 생태계를 파괴시킨다. 새로운 차원의 인간 존엄성 훼손도 발생했다. 인간과 자연이 뒷전으로 물러난 채 물질이 주체의 자리에 올라선 낭비사회를 경계하는 라투슈의 생각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을 연상시킨다. 자본주의의 무제한적인 생산 욕구와 새로운 상품을 갈구하는 소비자의 소비 욕구가 맞물려, 모든 상품은 사실 버려지기 위해 생산되고 있다.
 
성장 중독에 빠진 낭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라투슈의 대안은 ‘탈성장’이다. 제품을 지속적으로 사용할수록 고치거나 재활용으로 대체해 성장 없는 번영과 검소한 풍요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성장’이라고 해서 이미 길들여진 성장의 편리함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생태 발자국 줄이기, 환경을 파괴하는 상품을 멀리하고 기술적 금욕을 실천하는 대안은 이미 탈성장론자들에 의해 언급된 내용이라서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계획적 진부화’가 고착된 이 진부한 세상을 개선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소비 패턴이 계획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 위에 있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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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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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선 그 모든 불의들을 그저 남의 일로 여기며 적당히 자신만의 안락한 성채를 쌓는 이들이 있을 터다. 알면서도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테다. 반대로 그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이들도 있다. 분노는 자기 요구의 실현을 부정 및 저지하는 것에 대한 저항 결과 생기는 정서이다. 자신보다 강자라 하더라도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하면 두려움은 크게 줄어 분노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 같은 집단적 분노는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부조리나 불평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에 분노로 표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 같은 악한 자들을 보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해가 지날수록 정상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크게 한 건씩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과거에 세상을 향한 분노는 아무나 터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분노를 삭이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는 유교적 사고가 만연해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분노하라’고 외치는 것이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분노하면 ‘너나 잘하라’는 까칠한 답변을 듣기 마련이다. 분발 없는 분노란 그저 불온에 지나지 않는 시정잡배의 것이라 교육받았다.

 

‘너나 잘하라’는 말에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 같다. 세상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사회와 국가는 사람이 만든 제도이지, 한없이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회 문제들을 해결해 세상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들리지 않고 읽히는 분노란 자기 위안이나 만족 이외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책은 분량이 짧아 단박에 읽을 수 있지만 저자가 던지는 화두는 묵직하다. 분노는 소중한 일이며 분노의 힘은 참여의 기회를 가져온다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의를 보고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오늘날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다. 스테판 에셀은 레지스탕스로 나치에 맞서 싸우며 청춘을 보냈다. 그는 하릴없이 스마트폰 화면에만 시선이 향하는 요즘 젊은이에게 과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불의의 사회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분노하라고 외친다. 이기적이고 거대하고 오만방자해진 금권, 극빈층과 부유층,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 등을 세상을 위협하는 불의로 언급하고 있다.

 

그가 분노하라고 외치는 프랑스 사회의 병폐들은 우리 사회의 병폐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여전히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 후퇴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 도덕적 해이를 넘어 불법과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관료제의 병폐가 그것이다. 또한 권력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일부 언론 등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이슈들에 대한 분노가 전국 도처에서 들끓고 있다. 그의 호소가 먼 땅에 사는 한국 사회의 가슴을 데우는 것을 보면 그것이 더 이상 프랑스만의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해 어떻게 분노할 지 가장 중요한 화두를 적절한 시기에 던져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지 3년째 되는 지금 이 순간도 에셀의 메시지는 유효하다. 분노가 필요할 시점이다.

 

현 정권과 유착된 일부 보수 언론이나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하는 방송에서는 우리 사회의 분노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좌파 세력의 선동질이라고 비난하고 평가 절하한다. 그들은 분노가 사회의 잠재된 폭력성을 유발시키지 않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기존 질서의 수호자들이나 그 질서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분노를 표출하는 대중에 대해 증오하고 적개심을 품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폭력을 부추기는 책이 아니다. 책 제목이 ‘분노하라’이지 ‘폭력하라’가 아니다. 분노는 주위의 환경이나 사람들에 대한 단순하고 원시적인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비폭력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그것을 바꿔나가는 변혁의 자세이다. 에셀이 말하는 분노란 저항을 품은 분노, 생산적인 분노, 창조적인 분노이다. 따라서 불의에 저항하는 분노란 불의의 대상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는 체제다. 권력에 대해 ‘아니요’라고 분명히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권력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참여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할이자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다. 평화롭게 저항하는 분노는 불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정당을 지지하고, 적극적인 투표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사회적 문제는 불쑥 우리 곁에 나타나고, 또 대중은 그 문제의 개선을 요구한다. 사회문제를 개선하는 데는 지식인층도 중요하지만 젊은이들로부터 나타나야 한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가 좀 더 나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자신에게 당면한 개인 문제에만 집착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은 ‘나 혼자로 되겠어?’, ‘일단 나 하나 잘 살고 보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장래 걱정하느라 대학생들은 안정적인 대기업이나 공무원시험에 집중하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보궐선거에 나가는 지역구 후보에 누가 나가고, 그들이 내건 공약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국회에서 싸우기만 하는 국회의원들의 무능함을 이유로 정치에 냉소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속박되어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사회는 서로 간의 경쟁을 부추긴다. 경쟁을 이렇게 강요하고 부추긴 세상 속에는 눈을 돌려야 할 곳이 얼마든지 많다. 인권과 생태, 환경, 빈부 격차 문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의 문제 등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 새로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생태, 환경 문제에 귀 기울이는 일 역시 많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사회의 가치를 확인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첫걸음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한순간의 성난 외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비판과 함께 체계화된 절차를 거쳐 우리 생활을 침식하는 불의를 끝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은 목적지향적이어야 한다.

 

분노는 개인의 안위를 떠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경우로 나아가야 한다. 즉, 자기를 위한, 자기 안에 갇힌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분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에 맞서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냉소적인 자세로 내 것만 챙기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참여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노라고 할 수 없다. 고통스럽게 인내하면서 무관심한 척 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화내며 끼어들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한다. 그래봐야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학습돼 점점 무관심의 늪에 빠져 죽어간다. 그 사이 세상은 악한 자들이 쥐고 흔든다. 결국 그 부조리의 칼은 우리의 삶을 향할 것이고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현실을 보면 분노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고 분노할 마음조차 억압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놓아버리면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정의가 영영 사라질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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