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새끼를 발견한 백조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급히 다가왔다. 맑은 물 위에 비친 모습은 못생기고 볼품없는 진회색의 오리가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백조가 아닌가? 백조들이 그를 에워싸고 부리로 목을 어루만지며 환영했다.

 

누구든 구박만 받던 미운 오리새끼가 아름다운 백조로 성장한 뒤, 두 날개 펴고 달려온 백조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는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 결말에 감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오늘날 우리가 부정적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닫힌 사회’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적잖이 실망할지 모른다.

 

사실 이 동화는 현대 사회철학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인 ‘열린 사회’의 역설과 함께 ‘다름’을 수용하지 못하는 닫힌 사회의 모델을 보여 주고 있다. 우연히 오리알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 백조는 그의 ‘다른’ 모습 때문에 구박받고 무시당한다. 더구나 다르다는 이유로 추한 꼴로 보인다. 미운 오리새끼가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무리에서 떨어져 방랑 생활을 한다. 세월은 흘러 겨울이 가고 새봄이 온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름다운 백조가 되고 백조 무리로부터 환영받는다. 백조들의 사회가 그에게 문을 연 것이다. 그렇다면 백조들의 사회는 열린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미운 오리새끼가 성숙한 백조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되찾았을 때 그를 받아 준 곳도 사실은 백조들의 닫힌 사회였다. 백조로서 그의 정체는 백조들 사이에서는 즉각적으로 동일화될 수 있었다. 백조들은 그를 ‘백조들의 닫힌 사회’의 일원으로서 받아 준 것이다. 그를 향한 열림은 닫힌 사회를 구성하는 한 방식일 뿐이다. 그것은 오리들의 닫힌 사회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어느 날 자기들과 동일화될 수 없는 ‘미운 백조새끼’를 갖게 된다면 그를 철저히 배척할 사회이다.

 

 

 

 

 

 

 

 

 

 

 

 

 

 

 

 

 

열린 사회 이론은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열린 사회의 적들을 추적하는 철학 이론이 놓치는 것이 있다. 열린 사회의 적들은 경계하면서도 닫힌 사회의 친구들은 망각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얼른 보아 ‘열린 사회의 적’과 ‘닫힌 사회의 친구’는 동의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열린 사회의 적들은 눈에 띄지만 닫힌 사회의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 사회이론 전개나 문학적 비유에서도 후자는 간과되거나 숨어 있다. 더 나아가 열린 사회의 친구들로까지 나타나 보인다.

 

그러나 오리들과 마찬가지로 백조들도 닫힌 사회의 친구들인 것이다. 다만 미운 오리새끼를 박대하는 오리 가족과 달리 아름다운 백조를 환영하는 백조들은 순간적으로 열린 사회의 친구들처럼 보였을 뿐이다. 우리는 오늘날 열림을 추구한다. 그러나 열림의 추구가 닫힘의 가식과 기만일 경우 또한 적지 않다. 현실에서 열림과 닫힘은 상호 역설로 작용하며 각각 그 본질을 은폐하기도 쉽다.

 

안데르센은 이 작품을 1843년에 썼다. 그는 자기 작품이 하류계급의 닫힌 사회를 비난하면서 상류계급의 닫힌 사회는 옹호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을것이다. 그 시대 자신도 그런 닫힌 사회를 향한 출세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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