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밀라 영국인이 사랑한 단편선 2
조셉 토마스 셰리던 르 파뉴 지음, 최윤영 옮김 / 초록달(오브)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뱀파이어(vampire) 하면 야회복과 검은 망토를 걸친 남성을 떠올리기 쉽다. 이 익숙한 남성 뱀파이어의 모습은 브람 스토커(Bram Stoker)《드라큘라(Dracula)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탄생하였다. 남성 뱀파이어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미국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Hollywood)다. 1931년에 개봉한 영화 <드라큘라>에서 뒤로 빗어 넘긴 머리와 긴 송곳니, 검은 망토의 남성 뱀파이어 이미지가 등장했다.

 

사실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나오기 전에 이미 여성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괴테(Goethe)의 시 『코린트의 신부』고티에(Gautier)의 단편소설 『죽은 연인』이다. 두 작품에서 보여준 여성 뱀파이어는 남성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나 그를 유혹하여 피를 빠는 언데드(undead: 살아있는 시체)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 뱀파이어 중 가장 유명한 존재는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 레 파누(Le Fanu)가 창조한 ‘카르밀라(Carmilla)다. 『카르밀라』는 1872년에 발표된 작품집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In a Glass Darkly)에 포함된 중편소설이다.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는 레 파누가 죽기 일 년 전에 나온 작품이다. 이 작품에 『카르밀라』를 포함한 총 다섯 편의 중 · 단편이 수록되었는데, 한동안 잊힌 작가를 재평가하게 만든 ‘스완 송(Swan Song: 최후의 걸작)이다. 5편의 이야기는 마틴 헤세리우스 박사(Dr. Martin Hesselius)가 기록한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다룬다.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에 수록된 다섯 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 『그린 티(Green Tea)

2. 『친구들(The Familiar)

3. 『하보틀 재판관(Mr. Justice Harbottle)[주1]

4. 『드래건 볼란트의 방(The Room in the Dragon[주2] Volant)

5. 『카르밀라』

 

 

2016년에 초록달 출판사의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만들어진 《카르밀라》는 『카르밀라』와 『그린 티』를 번역한 것이다. 『그린 티』는 예전에 ‘녹차’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었으나(《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 그 이야기가 수록된 책이 절판되는 바람에 한동안 보기 힘든 작품이었다.

 

『카르밀라』는 18~19세기 유럽에 유행한 고딕 소설(Gothic novel)의 기본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 이 이야기 속의 화자(‘이야기 밖의 화자’는 이름과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로라가 경험한 불가사의한 사건을 기록한 헤세리우스 박사의 연구 자료를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이자 주인공인 로라(Laura)가 사는 곳은 외진 지역에 있는 으리으리한 성(schloss)이다. 이 성의 형태를 묘사한 번역문에서는 ‘으리으리한 저택(11쪽)이라고 되어 있는데, 슐로스는 ‘성(城)을 뜻하는 독일어다.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고성이 고딕 소설의 단골 배경인 만큼 ‘저택’보다는 ‘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로라 가족이 사는 성은 오스트리아의 남부 지방인 스티리아(Styria)에 있다. 성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윈 로라는 거의 성 안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 아무래도 인적이 드문 곳에 성이 있다 보니 성을 왕래하는 또래 친구들이 적을 수밖에 없다.

 

로라는 어린 시절에 악몽을 겪은 적이 있다. 밤이 되면 어떤 여인이 로라의 방에 찾아와 로라의 목에 상처를 냈다. 너무나도 생생했던 일이라 로라는 자신의 목에 상처를 낸 미지의 존재가 실제로 목격했다고 주장하지만, 가사 도우미는 그녀의 말을 꿈으로 생각할 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악몽 같은 날을 겪은 지 12년이 지난 후에 로라는 우연히 사륜마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목격한다. 그 마차에 중년 부인과 소녀가 타고 있었는데, 부인은 로라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딸을 당분간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부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로라의 아버지 덕분에 소녀는 로라의 성에 거주하게 되는데, 그 소녀가 바로 카르밀라다.

 

로라는 카르밀라의 외모가 12년 전 자신의 목에 상처를 낸 여인과 닮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러자 카르밀라도 12년 전에 꾼 꿈에서 로라와 비슷한 여인을 봤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신비한 공통점을 매개로 친하게 지내게 된다. 하지만 카르밀라는 로라의 유일한 또래 친구이지만, 자신의 과거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카르밀라는 로라와 단 둘이 있을 때마다 마치 사랑스러운 애인을 대하는 것처럼 로라에게 다가가 친밀감을 드러낸다. 이때 카르밀라는 로라를 ‘내 사랑(Dearest: ‘간절한’, ‘여보’라는 뜻이 있다)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카르밀라는 당황하는 내 모습에 흡족해하며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고, 뜨거운 입술로 내 뺨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부으며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내 거야, 내 것이 되어야만 해. 너와 나는 영원히 하나야(You are mine, you shall be mine, you and I are one for ever).

 

(『카르밀라』 중에서, 54쪽)

 

 

 

두 여성의 에로틱한 관계는 레즈비언(lesbian)의 애정 관계와 유사하다. 그래서 카르밀라를 ‘여성 뱀파이어’가 아닌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볼 수 있다.[주3] 레 파누가 로라와 카르밀라의 관계를 에로틱하게 묘사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카르밀라』는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중반기에 나온 소설이다. 그 시대에 산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은 도덕적 중심에 우뚝 서려는 인간상을 지향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인간상은 속물적이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으로 결백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이다. 중산층과 귀족계층의 도덕적인 영국 신사들은 도덕적 인간상이 되고자 노력했고, 여성은 도덕적 인간상의 축에 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자답지 못한 행동’, 즉 ‘여성스러움’은 남성성을 강조한 도덕적 인간상의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다. 특히 동성애는 도덕적 타락의 극치로 여겼다.

 

당시 인기 절정에 올랐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면서(와일드의 동성 연인의 아버지가 와일드의 동성애를 공개했다) 한순간에 몰락해버린 사건은 동성애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부정적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동성애자 탄압 사례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보수적인 영국 독자들은 로라의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관계를 도덕적 공동체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 징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소설에 묘사된 동성애에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녀들의 동성애 관계를 무서워하면서도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해서 보게 된다. 독자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카르밀라를 ‘도덕성이 오염된(타락한) 괴물’로 규정하면서도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다. 이야기 곳곳에 나오는 에로틱한 묘사는 남성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 레 파누가 종이 위에 설치한 장치이다. 로라와 카르밀라는 서로를 향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녀들의 사랑을 치료받아야 할 ‘병든 열정’으로 치부했다.

 

『그린 티』는 지나치게 학문 연구에 몰두한 인간의 내면이 섬뜩한 미지의 힘에 점점 압도당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제닝스(Jennings) 신부는 글을 쓰다가 정신이 지치면 녹차를 자주 마셨다. 녹차에 중독된 이후로 신부는 원숭이를 닮은 악마를 자주 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제닝스 앞에 나타나는 악마가 보이지 않는다. 악마는 신부의 눈앞에 계속 나타나고, 그 악마가 점점 나타날수록 신부는 괴로움을 호소한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독자들은 『카르밀라』보다 『그린 티』를 더 무서워했을 것이다. 『그린 티』가 영국 독자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하는 이유는 차(茶)를 즐겨 마시는 영국인의 평범한 일상이 무서운 사건이 되고, 그 불가사의한 사건을 분석할 수 있는 이성조차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린 티』에 신부가 마시는 녹차는 현실 세계에 있으면서도 현실 세계에서 마실 수 없는 녹차이다. 레 파누는 이 녹차 하나로 사람들이 익숙하게 생각하던 현실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독자는 녹차를 즐겨 마실 수 있는 일상이 사라진 세상을 대면할 때 긴장감과 섬뜩함을 느낀다. 『그린 티』는 레 파누가 남긴 소설 중에 걸작으로 손꼽힐 만하다.

 

 

 

 

 

[주1] 『하보틀 재판관』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글을 참고할 것.

[GBLA #3: 레 파누] (2019년 8월 20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1044572

 

 

[주2] ‘Dragon’은 상상의 동물인 용(龍)과 ‘거친 여자’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소설 제목에 있는 ‘Dragon’은 후자의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주3] 필자가 말하는 ‘여성 뱀파이어’와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의미는 다르다. 그러니까 레즈비언 뱀파이어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뱀파이어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의 레즈비언 여성주의 이론을 근거를 가지고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따로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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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8-2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즈비언 뱀파이어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뱀파이어라는 말씀은 레즈비언이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정체성 차원이 아니라 생물학적 차원에서도요??

주3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얼른 따로 글로 풀어주시기를 기다려봅니다....

cyrus 2019-08-22 15:37   좋아요 0 | URL
모니크 위티그는 보부아르가 말한 유명한 명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다”를 재해석하면서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여성은 이성애 여성이 아니라 레즈비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위티그는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합니다.

위티그가 거부하는 ‘여성’이란 이성애 중심 사회에 있는 생물학적 여성을 뜻해요. 위티그는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방식이 이성애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해석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위티그는 여성 내부의 이성애 중심주의가 레즈비언의 존재 자체를 거부한다고 지적했고, 레즈비언이야말로 남성 중심적 권력과 이성애 중심주의 모두를 거부할 수 있는 주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온 명제가 바로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입니다. 위티그가 강조하는 레즈비언은 남녀 성별 범주를 넘어서는 독립적인 주체입니다.

카르밀라를 ‘여성 뱀파이어’라고 보는 해석이 많았는데요, 저는 이 해석이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여성 뱀파이어’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뱀파이어라는 정체성을 부각하거든요. 결국 여성 뱀파이어는 남성을 유혹하는 이성애적 존재가 돼 버려요. 그렇지만 카르밀라는 이성애적 존재가 아니죠. 그래서 저는 위티그의 이론을 가지고 와서 카르밀라를 ‘이성애 중심 사회를 전복하는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레즈비언을 특별한 주체로 내세우는 위티그의 주장도 비판받고 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위티그가 레즈비언을 이상화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상, 제가 쓰려는 글을 요약해봤습니다. ^^

syo 2019-08-22 16:0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개념이 품고 있는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그 개념을 거부하고, 그 거부를 선언하는 언술로 ˝레즈비언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는 거죠??

그럼 다음 글에서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 알 수 있겠군요. 화이팅 ㅎㅎㅎㅎ

cyrus 2019-08-22 16:2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에 위티그의 이론을 설명한 내용이 나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