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악의 꽃 1
히가키 켄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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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에서 번역되는 만화 중엔 가끔 이렇게 지독하게 성인 취향의 작품들이 있다. 이케가미 료이치를 위시로 한 하드보일드 느와르부터 그야말로 호색잡지 수준의 쓰레기 작품들까지. 그중 이 [미악의 꽃]은 조금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일단 섹스신이 거의 매회 빠지지 않고 등장하되 그것이 주를 이루지 않는다. 사실 독자 서비스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이 만화에서의 섹스는 주로 주인공 히로우 마사토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들을 지배해가는 도구로 나타난다. 이런 설정, 다분히 고리타분하고 말도 안 된다는 사실,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가하면 섹스 후에 야경을 바라보며 야망을 상상하는 사악한 웃음의 마사토의 꽃미남 얼굴 클로스업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이것은 독자를 묘하게 들뜨게 한다. 이케가미 료이치 작화의 만화(원작은 주로 다른 사람이 쓴다)를 읽으며 이른바 '남자의 로망'을 느껴본적 있는 사람들이라면 마사토의 말도 안 되는 야망 앞에서도 비슷하게 그 로망을 느끼게 된다. 사실 그 과정이 말도 안 된다는게 웃기지만 그 말도 안 됨을 말이 되게 하는게 이 작가의 힘이라 할 수 있다(이 문단의 논지는 지극히 反페미니즘적임을 인정한다).

한편 이 작품은 마사토의 야망의 동인이 그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며, 동시에 마사토로 인해 인생의 모든걸 잃게 된 형사 마사오미가 마사토에 대해 복수심을 불태우며 악의 화신으로 부활한다는 커다란 두 개의 복수라는 축을 가지고 있다. 이 구닥다리 설정이 한편 재미있는 것은 일단 선과 악이 도치되기 때문인데 마사토는 스스로 악의 축에 서있는고로 도덕적인 선악의 대립구도가 아닌 현실적인 혹은 정치 경제적인 선악의 대립구도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누가 뭐래도 마사토는 이 썩어버린 자본주의 속에서는 거대한 善일 뿐, 惡은 될래야 될 수가 없다. 작가는 이렇게 현시대에 대한 자기비판을 본작에 끼워놓음으로써 여타 쓰레기 만화와의 차별을 노정하는데 성공한다.

(이 문단은 스포일러 와닝) 마사토의 야망이 실현되어가면서, 무엇보다 18권에서 두 개의 악의 축이던 마사오미마저 마사토를 막지 못하면서 마사토의 야망은 전부 실현된듯 보이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이용했던 여자에게 배신당해(자신이 그렇게 수없이 해왔듯) 거리에서 비명횡사하고 만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에서 눈을 번쩍 뜨는 마사토의 얼굴로부터 독자는 깔끔한 엔딩에 감동하지도 후련해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히 책을 덮을 뿐이다. 이런게 성인물의 맛이라고 한다면 맛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작화수준도 아주 수준 이하도 아니고 터무니없이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최소한의 오리지널리티와 작품성은 있는 조금 독특한 작품이었다. 괜시리 위악에 사로잡혀있는 소년만화의 군상에 짜증난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끝으로 코믹스톰에 기가 막히는 명언이 실려있어 옮긴다. '불이 불을 끄지 못하듯 악은 악을 없애지 못한다' -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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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진 1 - 소장본
다카하시 츠토무 지음 / 세주문화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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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타깝고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19권의 3/4쯤 읽었을 때, 몇 페이지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 이이다가 입을 열고 말해주기를 미치도록 기대했지만,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피와 섹스와 죽음과 온갖 범죄들이 난무하지만 일상화된 일본 만화의 시각적 폭력 앞에 길들여져서인지 거기에 눈이 쏠리지는 않는다. 유머도 과장도 교훈도 아무 것도 없다. 참을 수 없으리만큼 건조하고 그 비정함과 어둠의 무게만이 읽는 이를 짖누르게 한다.

그리고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친절한' 만화들에 길들여진 독자들은 으레 전지전능한 작가가 무언가 말해주길 기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뢰진]에 그런 것들은 없다. 묻혀지고 잊혀지고 해결되지만 해결되지 않고... 현실은 이런 거다, 어디까지나.

또한 일상적인 '만화의 법칙'을 나도 모르게 기대하게 되지만 역시 그런 법칙도 깨진다. 파트너 여형사는 그저 파트너 여형사이다. 주위의 인물들이 죽지만 쿄야는 죄책감도 눈물도 분노도 느끼지 않는다. 쿄야를 좋아하는 여자가 등장하지만 그 여자가 총에 맞아 죽어도, 그 장기를 기증한 여자가 또 등장해 쿄야에 의해 두근거림을 느껴도, 쿄야는 여느 때와 같이 냉담하기만 하다.

19권에서 사실은 나 역시 기대했다. 조금이라도 아츠코를 생각해 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이이다 쿄야란 자식에 대해서 작가가 무엇인가 말해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없었다. [빅 오]의 로저 스미스처럼. 그에게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범죄자들을 죽이거나 체포하는 것만이 전부인 현재 말이다. 그것도 형사로서의 윤리나 아이덴티티가 없는 그저 '죽이거나 체포하는 것'만이 전부다. 그에게 있어 형사라는 직업은 단지 '호흡'이며 언젠가 호흡은 멈춘다. That's it.

물론 단점이 없는 작품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그 단점들을 지적하기 싫다. 한 가지만 분명히 말하자면 나는 일종의 영웅 심리에 이끌린 것은 아니다. 단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작가로부터 느낀 커다란 공허감에 난 끌려버렸고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2002. 9.19 by f.y. very much m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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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후지와라 카무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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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우연으로 빌려봤다. 작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끝까지 다 읽은 후에야 [견랑전설]의 작화를 했던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워낙 디스토피아적인 [인랑]의 암울함이 [견랑전설]에서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우울함으로 변해버린 이유를 알게 된 기분이다.

옴니버스 형식의 이 단편집은 각각의 에피소드가 아무 연관이 없는듯 보이지만 공통적인 주제는 작가가 말하듯이 '기억'에 대한 물음이다. 특히, 이제는 하나의 유행같이 되어버린 데자뷰 - 기시감(旣視感)이 환기시키는 신비스러운 정서는 작가의 나른한 작화에 섞여 더욱 신비하고 몽환적인 경험으로 다가온다. 대부분의 에피소드에 별다른 플롯마저 없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거의 모든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여성이며, 그 여성들의 섹스 이야기 역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작가는 섹스 속에서 경험한 몽환감, 첫경험이 불러일으키는 신비감, 섹스 후의 나른함(섹스 중의 격렬함이 아니라)을 무의식적으로 작품에 투영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나른함이 가져오는 수동적인 이미지가 자칫 전형적인 일본 만화식 수동적 여성상을 상기시킬 수 있고, 섹스 이야기는 남성 독자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라고 문제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기억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조금은 철학적인 질문들에서부터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해봤을 법한 데자뷰까지 이 작품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素들에 주목해야 하겠다. 오랜만에 접한 정말 좋은 작품이었다. 이런게 바로 단편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한 권 사서 소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2002. 8. 8 by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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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는 괴로워 1
스즈키 유미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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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인공 칸나는 뚱녀였으나 막대한 돈을 들인 전신성형 끝에 미녀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이른바 '뚱녀기질'은 성형수술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칸나균'이라고까지 불리우던 뚱녀 칸나,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리고 뚱녀기질이란 그토록 나쁜 것인가?

이 만화는 남자들이라면 생각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지만, 당사자인 여성들에게는 어쩌면 불쾌하고 기분나쁜 만화가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성형수술 찬양만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칸나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녀는 거액을 투자해 성형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외모 지상주의에 사로잡혔다는 비난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문제는, 이 사회가 결코 여성을 외모에 신경쓰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 스즈키 유미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만화를 통해 이 사회를 풍자하려 했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웃고 넘어가기에 바쁜 이 만화 속에서는 날카롭게 번쩍이는 뭔가가 보이지 않았다. 긍정적인 칸나를 그리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긍정적이라는 단어가 꼭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의미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한 가지 더, 처음에 지적했던대로, 자신이 뚱녀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책감을 느끼는 칸나는 그것이 사회에 의해 강요받은 감정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사회에 의해 '뚱녀는 나쁘다'라고 자신이 세뇌당한 것을 깨닫지조차 못하기에 '뚱녀도 좋을 수 있다'라며 사회에 맞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이 만화는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민감한 부분은 넘어가고 적당히 웃고 즐기는 만화로 전락해버린다. 비슷한 내용의 만화로 같은 작가의 [미녀는 못말려]라는 만화가 있고, 다른 작가의 [OL 비쥬얼족]이라는 만화도 있다.(그러나 이들 만화에서도 외모 지상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찾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은 사회 전체를 상대로 혼자 싸워야만 하는 시도일 것이므로.)

2001. 8. 6
by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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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1
윤인완 글, 양경일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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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작품이다. 정말 '우리나라에도 이런 만화가 있구나'라는 말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는 작품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를 탈피한 점, 우리나라 제주도의 민담과 전설에 착안한 소재들, 불교 및 인도 종교쪽으로부터 고증된 주문과 무기의 등장 등 <아일랜드>는 한마디로 놀라운 작품이었다.

그만큼 기대작이었던 만큼 아쉬움도 남는다. 겨우 7권에서 연재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일대결의 구도를 보였던 '또다른 고향' 에피소드를 끝으로 중단되었기 때문에 '잘 나가다가 왜 한일전으로 나가냐'라는 식의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아니면 차라리 앞부분의 다른 에피소드들을 없애고 '또다른 고향'만을 다룬 작품을 내놓는 쪽이 작품의 완결성에 있어서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양경일씨가 재충전을 한 후의 새로운 연재를 기다린다. 그리고 반의 숨겨진 과거 역시 무척이나 궁금하다.(7권에서 암시가 되긴 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타임시커즈>가 우리나라 SF 만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것처럼 <아일랜드>는 우리나라 퇴마 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만화도 정말 많이 발전했군. 기대된다 <아일랜드>!

2001. 6.2
by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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