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
박상륭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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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은 프루스트처럼 언제나 숙제처럼 남아 있는 이름이다. 불혹도 됐거니와(에헴) 최근 보르헤스를 다시 읽으며 왠지 이제는 박상륭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겨, 잘은 모르지만 단편집이 그래도 좀 만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먼지를 털고 책을 꺼내 들었다. 예전에도 중단편집이라는 이유로 [평심]을 읽으려 들었다 포기했던 사실을 또 잊었던 것이다. 

결론.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나는 평생 박상륭의 소설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당장 어휘부터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일단은… 명사에 한정하고, 그것도 일반명사에 국한해보자. 괄호 안은 내가 찾아서 넣은 거고 그냥 병기는 작가가 친절하게 표시해준 병기다. 고콜이불(표준어는 고콜불), 손말명이(손말명), 고샅, 인내(人내), 종내기, 요궐尿橛, 상내(네이버 국어사전 풀이를 보면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20159700 표준국어대사전이 출처라고 하나 이상하게도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보면 등재되어 있지 않다), 여수(餘壽, 사실 확신이 없다). 여기까지가 첫 수록작 첫 페이지부터 다섯 페이지 사이에 나오는 일반명사 중 내가 생전 처음 들어 사전이나 구글을 뒤져야 했던 애들이다. 

작가의 만연체는 적응이 되면 그럭저럭 문맥으로 유추하며 따라갈 수는 있지만, 이렇게 일반명사부터 막혀버리니 흐름이 이어지지가 않는다. 거기에 굳이 일반명사라고 한정한 건, 더 큰 문제가 종교(주로 불교) 용어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표기. 갈마가 카르마의 음역이라는 걸 처음 안 건 내가 무식한 거라고 치자(이런 건 Karma, Skt.라고 표시도 해주신다). 그런데 아승기는 또 아상키야asamkya라고 쓴다. 보리달마는 보디다르마도 아니라 보디달마(Bodhidharma)라고 쓴다. 툴파처럼 비교적 생소한 단어는 그냥 뚤파(역시 친절하게 Tulpa, Tbtn.)라고 쓴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는 나도 어떤 표기가 맞는지 표기 기준을 도통 알 수 없으나 이 책에서는 아예 『CHHANDOGYÃ UPANISHAD』라고 노출된다(135쪽). 일단 H가 두 개인 건 분명한 오류고, 『THE GNOSTIC SCRIPTURE』(105쪽)처럼 전체를 대문자로 쓴 예가 있긴 하나 『바르도 퇴돌』(54쪽)의 병기나 『The Red Fairy Book』(152쪽)처럼 제대로 쓴 예가 있는 걸 보면 그냥 편집자가 한 일이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음, 아니다, 이건 그냥 직업적인 '신경 쓰임' 정도로 치고 넘어가자. 

그래, 표기는 진짜 문제가 아니다. 보르헤스의 경우 이런 명사 하나하나의 함의를 몰라도 서사를 읽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편이다. 서사가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아예 가짜 고유명사를 들기도 하고, 보통 대유나 알레고리를 위한 장치 정도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박상륭은 이런 개념을 다 안다고 가정하고 그것들을 토대로 논증을 만들어나간다. '세포분열'에 빗댄 '갈마분열'(79쪽) 같은 새로운 개념이라든가. 사실, 그의 사유를 집대성한 게 [칠조어론]이고 그 이후의 소설집들은 논증이 거기부터 출발한다고 하니, 내가 책을 잘못 고르기도 한 셈이다. 그렇다고 [칠조어론]에 도전하겠다는 소리는 아니고… 최소한 [티벳 사자의 서]라도 마스터하지 않는 한 그의 어떤 작품도 조금도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두 번째로 박상륭을 포기한다. 예상 밖의 효과가 하나 있긴 했다. 박상륭을 읽은 직후에는 다른 어떤 글을 읽어도 너무나 쉽게 읽힌다. 이 기세를 몰아 정지돈을 읽었고 다음은, 흠, 키냐르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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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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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꽂혀 먼지만 쌓여가던 또 한 권의 책을 들고 커피숍을 찾았다. 책을 펼치고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내가 싫어했던 [다잉 인사이드]를 쓴 작가의 책임을 알게 됐다. 로버트 실버버그는 추앙받는 SF 작가일지는 몰라도 [다잉 인사이드]에서 접한 그의 장광설은 오늘날 나 같은 독자가 읽기엔 너무나 고리타분했다.


이 책 역시 ‘작가의 말’에서부터 고루함이 밀려왔다. 거기다 작품의 플롯을 다 밝히는 걸로도 부족해 본인 입으로 플롯은 별거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작가의 겸손함이라고 좋게 생각하고 읽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남자 대학생 넷이 ‘영생’의 전설을 찾아 동부에서 서부로 자동차로 여행을 떠나 별일 없이 ‘두개골 사원’에 도착해서는 종교에 동화되는 게 전부다. 총 376쪽인데, 앞에서 한 50쪽 읽은 다음 뒤에서부터 100쪽 정도만 읽어도 무방하다. 나머지는 전부 [다잉 인사이드]에서 이미 접했던 당대 미국의 반문화 정서가 담긴 잡설(듀나처럼 좋게 말하자면 사변)에 불과하다.


영생을 준다는 사원에 도착한 이후가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텐데, 작가는 의도적으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수사들과 육체노동, 명상, 체조, 섹스로 시간을 보내며 주인공들은 종교(랄까 뭐랄까)와 동화된다. 영생은 진짜인가? 이렇게 건강하게 평생 사는 게 바로 영생은 아닌가? 이렇게 살며 정신을 마개조하면 언젠가 육체적 죽음조차 초월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예 믿지 않는 티모시를 제외하면 주인공들조차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각에 빠져든다. 이게 퍽이나 의미 있는 철학적 질문인지 아닌지는, 상상에 맡긴다. 뉴에이지나 오리엔탈리즘에 경도했던 당대 많은 미국인(혹은 미국 평론가)에게는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 화두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그나마 인상이 깊었던 건 다른 부분이다. 사원에 도착한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수사들은 주인공들끼리 자신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고백하라고 명령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라는 거다. 네드는 삼각관계였던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괴롭히다 두 사람 모두 자살하게 방조했음을 고백한다(죄책감은 별로 느끼지 않는다). 상류층 티모시는 여동생을 강간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보수 기독교도 올리버는 유년시절 동성과 유사 성행위를 한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유망한 젊은 학자 일라이의 놀라운 학문적 성취는 사실 표절의 결과물이었다.


내 가장 어두운 비밀은 뭘까. 어둠을 입 밖으로 내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어둠은 사라질까? 이 책에서는 그 고백 의식 거의 직후 ‘예정된 파국’(역설이다)이 일어나고 소설은 열린 채 끝난다. 현실에서는, 십중팔구 어둠은 죄에서 온 것일 테고, 죄란 십중팔구 피해자를 전제한다(소설에서는 올리버만이 예외다). 피해자에게 닿지 않는 고백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만족 혹은 자기 연민일 뿐. 이런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게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 같다만.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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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호러 1
로버트 블록 외 지음 / 서울창작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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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빌려 읽고 충격받았던, 그러나 크면서 잊고 말았던 책을, 대학에 와서 좋아하는 선배에게 다시 받게 되었다. 무슨 베헤리트도 아니고… 이렇게 야밤에 상상이 끝없이 뻗어간다. 이 책은 내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 꽂혀 있던 [네크로노미콘]이요, 희곡 {노란 옷의 왕}이다.


당시 가장 충격적인 작품은 역시 첫 수록작 {흉폭한 입}이었다. {지옥으로 가는 열차}와 {90억 가지 신의 이름}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특히 후자는 게놈 프로젝트 혹은 오늘날 딥러닝까지, 컴퓨팅 파워의 발달만으로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을 목격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어떤가. SETI 프로젝트는 또 어떤가. 연산력의 비약적인 상승은 뭇 인간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다. 물론, 지옥 문을 열어젖힌 [이벤트 호라이즌]처럼 상상 밖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더 꼽자면 {블러드차일드}도 있다. 비교적 최근에 정발판([블러드차일드], 비채, 2016)을 읽은 적이 있는데 솔직히 이게 [토탈호러]에도 수록되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다른 수록작들에 비하면 소재의 자극성이나 SF에서 으레 기대하는 상상력의 확장 같은 면에서 인상은 약한 게 사실이다. 끝으로 {신천지의 악몽}의 설정은 킹왕짱 바퀴벌레 외계인과 비장하게 싸우는 [테라포마스]를 떠올리게 한다(아, 웃기면 안 되는데 웃기다).


{흉폭한 입}으로 돌아가자. 텍스트의 ‘정교한’ 그로테스크함을 영상화해보면 [택시더미아]의 자기 몸을 박제하는 시퀀스가 머릿속에서 기어 올라온다. 자신을 먹는다는 점에서는 [인 마이 스킨]도 떠오른다(무수한 보디 호러의 목록과 함께). 그리고 이런 것보다 더 아래 층위에서 이 작품이 내게 던지는 건 이거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인간의 집념은 자신의 생존에 우선한다. 생물로서 가장 우선인 생존조차 뒷전인데 다른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집념이 대의명분이라면 오히려 좀 고루하지만, 사랑이라면 어떨까. [마인탐정 네우로] 11권에서 사별한 연인을 디지털로 재현하기 위해 전 세계 컴퓨터를 장악하려는 하루카와 교수라든가(“미화하지도 않고, 퇴색시키지도 않고, 단 1비트도 다르지 않은 널 만들겠어.”), [모렐의 발명]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영구기관이자 광역 홀로그램 녹화기요 상영기, 실로 인간의 영혼까지 기록하는 기계’를 만든 모렐, 그리고 다시 그 영상 속의 여자에게 매료된 나머지 육신을 버리고 영상의 일부가 되기로 하는 화자라든가.


나는 [S.T.A.L.K.E.R.]의 소원기계도, 로버트 노직의 경험기계까지도 모조리 여기에 끌어들일 수 있다.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하는 기계가 존재한다면, 당장 뇌에 플러그를 꽂지 왜 현실을 하루 더 살아야 하는가.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런 게 존재하기만 한다면, 누가 파란 약을 삼키지 않겠는가. 왜 자신을 파괴하지 않겠는가.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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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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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광고에 이끌려 산 [바람의 그림자]로 사폰의 팬이 되었고(‘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니 이 얼마나 멋진 설정인가) 이후 한동안 그의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물론 세상에 영원히 멋진 것은 없고, 이 책 [마리나]가 나왔을 때쯤에는 책 소개나 작가 자신이 ‘청소년을 위해 쓰는 마지막 작품’이라고 칭한다는 사실부터 뭔가 매너리즘의 기운이 만연했다. 그래도 속는 셈 치고 팬심으로 읽어나갔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읽은 다음에는 이제 사폰 그만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시절에 형성되어 일생을 쫓아다니는 많은 것 중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만큼 끈질긴 게 또 있을까. 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의 의미부터 불명확하고, 10대 중반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게 가능한지, 가능하다고 가정해도 어딘가(결혼?)로 귀결될 수 있기나 한 건지 의문투성이긴 하다.


그러니까, 유년시절의 첫사랑이란 정의상 이루어질 수 없는 무엇인가로 봐도 될 것 같다는 거다. 20세기까지의 기준으로는 이사+전학 콤보가 단골 원인일 테고, 여기서 끝나지 않고, 시간이 흘러 재회해서 결실을 이룬다든가 하는 운명 같은 사랑을 많은 대중 예술이 단골 소재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대상이 죽었다면 재회고 뭐고 불가능하다. 물리적으로. 성인도 사별을 극복하지 못하는데, 유년에 겪은 사별은 얼마나 일생을 따라다니겠는가. 그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다른 누구보다도 평생 애틋하고 아련하게 회고할 권리가 있다. 그런 아픈 첫사랑 사연에, 사폰 특유의 고딕 미스터리 모험담을 합쳐놓은 게 [마리나]다.


화자 열다섯 살배기 오스카르의 동갑인 마리나에 대한 첫사랑은 안 그래도 이루어지는 게 불가능할 터인데, 마리나는 병약한 데다가, 둘은 검은 옷의 여인(!)이라든가, 매드 사이언티스트(!) 콜베니크 같은 빌런을 좇으며 큰 위험에 휘말리기까지 한다. 어두운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오는 읽는 재미와 서스펜스는 탁월하다. 이런 건 검증된 사폰이니까.


하지만 이러한 미스터리 서사의 작위성을 덜고 첫사랑의 아련함을 더 부각하는 것이 작가 자신의 의도와 더 부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는 게 문제다.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수식이 과연 그의 작품에 어울리는가 하는 문제도 있지만, 이건 논외로 치자. 항상 엄청난 미스터리와 모험에 연루되는 사폰 소설의 10대 주인공들. 이게 내가 그의 작품들에서 느끼는 매너리즘의 원인이 되고, 나아가 작가가 실제 겪었을(혹은 겪었다고 가정할 법한) 가슴 아픈 첫사랑 일화에 작가 자신이 품고 있을 진정성마저, 안타깝게도, 다소간 의구심의 대상으로 만든다. ‘고딕풍 연애담’도 한두 번이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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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 열림원 이삭줍기 13
실비나 오캄포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림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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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좋아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대상이 적잖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입을 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실비나 오캄포의 이 소설집은 20대 후반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몇 권의 책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한 소설은 {연인 속의 연인}이다. 이마를 맞대고 누워 잠들기 전까지 번갈아 이야기를 만들어 속삭이는 커플. 정확히 그런 내용은 아니지만 이미지를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이게 낭만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낭만일 수 있을까. 다른 수록작들도 그렇지만 단편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그녀에게 꿈 얘기를 해줄 필요가 없었다.’ 압축적인 한 문장(이자 한 문단)으로 플롯을 한 방에 정리해버리는 작가의 대범함을 보라.


{연인 속의 연인}만큼이나 낭만적인 또 다른 작품은 {케이프}다. 분량은 아주 약간 더 길다. 해변 관광지라는 배경이 왠지 모를 아련함을 더해주는 가운데, 우리(화자)는 케이프와 페도라를 만나고, 페도라와 헤어졌다가 페도라와 다시 만나게 된다.


윤회. {케이프}를 끝까지 읽고 충격을 느끼는 이유는 [아이 오리진스]의 엔딩과 정확히 똑같다. [아이 오리진스]의 엔딩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라디오헤드의 {Motion Picture Soundtrack}은, 정말 이 노래 하나를 틀려고 장편영화를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적절했고, 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돋곤 한다.


페도라라는 괴짜 같은 인물 자체도 오늘날 독자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윤회를 증명하기 위한 기분 좋은 자살. 그런 걸 실행할 사람이 과연 현대사회에 있을까? 페도라의 정신적 취약함은 작중에 극히 간접적으로 묘사되며, 거기서 현대의학의 관점으로 정신질환의 양상을 찾는 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누구도 페도라 같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내게는 두 단편이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 소설이다 보니 다른 수록작들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 않다. 두 작품 외에는 카나리아라는 매개로 사랑의 복수를 하고 속죄하는 과정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속죄}도 인상적인 수록작이었다. 책의 마지막 작품 {충동적으로 꿈꾸는 아이}는 {연인 속의 연인}에서 다룬 꿈, {마구쉬}에서 다룬 점쟁이를 모두 소재로 다루지만, 다른 몇몇 엽편과 마찬가지로 극적인 플롯은 없다. 한편 {담배 연기로 만든 반지}은 뭔가 황순원 {소나기}의 실비나 오캄포 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읽어보면 안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묶은 책은 아니나 문학사회학 혹은 외재비평의 방식으로 보면 지배 질서를 전복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다. 이건 역자 해설을 참고.


국내에 소개된 실비나의 다른 작품으로는 [탱고](문학과지성사, 1999)에 수록된 {울리세스}가 있다(알라딘 상품페이지에는 ‘올리세스’로 잘못 등록되어 있다). 전집이 번역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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