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산에서 번역되는 만화 중엔 가끔 이렇게 지독하게 성인 취향의 작품들이 있다. 이케가미 료이치를 위시로 한 하드보일드 느와르부터 그야말로 호색잡지 수준의 쓰레기 작품들까지. 그중 이 [미악의 꽃]은 조금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일단 섹스신이 거의 매회 빠지지 않고 등장하되 그것이 주를 이루지 않는다. 사실 독자 서비스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이 만화에서의 섹스는 주로 주인공 히로우 마사토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들을 지배해가는 도구로 나타난다. 이런 설정, 다분히 고리타분하고 말도 안 된다는 사실, 두 말할 나위가 없다.그런가하면 섹스 후에 야경을 바라보며 야망을 상상하는 사악한 웃음의 마사토의 꽃미남 얼굴 클로스업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이것은 독자를 묘하게 들뜨게 한다. 이케가미 료이치 작화의 만화(원작은 주로 다른 사람이 쓴다)를 읽으며 이른바 '남자의 로망'을 느껴본적 있는 사람들이라면 마사토의 말도 안 되는 야망 앞에서도 비슷하게 그 로망을 느끼게 된다. 사실 그 과정이 말도 안 된다는게 웃기지만 그 말도 안 됨을 말이 되게 하는게 이 작가의 힘이라 할 수 있다(이 문단의 논지는 지극히 反페미니즘적임을 인정한다).한편 이 작품은 마사토의 야망의 동인이 그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며, 동시에 마사토로 인해 인생의 모든걸 잃게 된 형사 마사오미가 마사토에 대해 복수심을 불태우며 악의 화신으로 부활한다는 커다란 두 개의 복수라는 축을 가지고 있다. 이 구닥다리 설정이 한편 재미있는 것은 일단 선과 악이 도치되기 때문인데 마사토는 스스로 악의 축에 서있는고로 도덕적인 선악의 대립구도가 아닌 현실적인 혹은 정치 경제적인 선악의 대립구도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누가 뭐래도 마사토는 이 썩어버린 자본주의 속에서는 거대한 善일 뿐, 惡은 될래야 될 수가 없다. 작가는 이렇게 현시대에 대한 자기비판을 본작에 끼워놓음으로써 여타 쓰레기 만화와의 차별을 노정하는데 성공한다.(이 문단은 스포일러 와닝) 마사토의 야망이 실현되어가면서, 무엇보다 18권에서 두 개의 악의 축이던 마사오미마저 마사토를 막지 못하면서 마사토의 야망은 전부 실현된듯 보이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이용했던 여자에게 배신당해(자신이 그렇게 수없이 해왔듯) 거리에서 비명횡사하고 만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에서 눈을 번쩍 뜨는 마사토의 얼굴로부터 독자는 깔끔한 엔딩에 감동하지도 후련해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히 책을 덮을 뿐이다. 이런게 성인물의 맛이라고 한다면 맛일 것이다.전체적으로 작화수준도 아주 수준 이하도 아니고 터무니없이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최소한의 오리지널리티와 작품성은 있는 조금 독특한 작품이었다. 괜시리 위악에 사로잡혀있는 소년만화의 군상에 짜증난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끝으로 코믹스톰에 기가 막히는 명언이 실려있어 옮긴다. '불이 불을 끄지 못하듯 악은 악을 없애지 못한다' - 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