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키 빌랄의 니코폴
엥키 빌랄 지음 / 현실문화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수 세기 동안 세뇌된 감정(혹은 그 무언가)이라 할지라도
사랑이란, 그래도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감정이 아닐까 하고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하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정의내릴 수도 없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혹자는 호르몬의 장난이라고, 생물학적인 기작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애매모호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어째서일까.

[니코폴]은 사랑만을 주제로 다루는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이 26000원짜리 '만화책'을 사게 된 이유는 단 한 가지
현문코믹스 홈피에서 우연히 보게 된 저 위의 한 컷 때문이다.

후회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 한 컷이 들어있는 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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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부
윤인완.양경일.윤승기 지음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울었다. 진짜 서럽게 울었다. 만화방에서 말이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또 울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가을]의 이야기는... 2페이지 전면 검은 배경에 등장한 그의 음반은... 지금 생각해도 몸에 소름이 돋는다. 살 거다. 주문은 어제 했다. 울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읽으련다.

덧:
사람이 뭔가에 빠지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니 본인의 이 무지막지하게 설득력없고 주관적인 리뷰(이게 리뷰냐-_-)에 혹해서 충동구매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덧2:
샀다. 또 울었다. 하지만 [가을]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는 이유를, 주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발견했다. [가을]의 '코드'는 특정 시대에 특정 문화를 교류한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부분이지만 어쨌든, 적어도 그 시대를 살았던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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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곰 2015-11-1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무지막지하게 설득력없고 주관적인 리뷰에 낚여서, 저는 절판된 이 책을 굳이 중고를 뒤져서 구매했던 것입니다...(아직 읽진 않음, 네)

faai 2015-11-23 00:13   좋아요 0 | URL
파닥파닥~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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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공감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사실 이 정도로 우울한 책인 줄 알았다면, 무턱대고 사지는 않았을런지도 모르겠다. 통닭과 둘리에 대한 이야기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선택]을 좀더 추천하고 싶다. 나름대로 나 역시 그때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으하하). 이 책을 통해 최규석 씨의 이름을 알게 된 이후, 우연히 신문 등에서 이 분의 만화를 보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 분의 만화 구상력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메시지 없이 상업주의에 물들어가는 국내 만화계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최규석 씨와 이 작품집은 소중한 귀감이 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불합리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이 비루한 현실을 외면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직시할 수 있는 그의 눈 그리고 그의 펜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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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baal 2015-08-21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픈 오마주. 님의 글을 통해 더욱 읽고 싶어 지네요
 
들개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89년 5월
평점 :
절판


*89년 초판으로 나온 [들개]를 읽고 난 후 느낀 소감입니다.

 

 [들개]의 후기에서 이외수 씨는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려 혹은 이론적으로 분석하려 들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웃기는 건 그 후기 바로 앞에 문학평론가 두 '분'의 비평이 실려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한자어가 난무하는 매우 '분석적인' 비평이 말이다. 그 비평들의 논지는 충분히 수긍할만한 찬사이다. 일관되게 순수성(그리고 반문명적인 메시지)을 추구해온 이외수 씨의 노고는 분명 한국 문학사에 있어 의의 있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의 유려한 문체는 그에게 대중적인 인기뿐만 아니라 '글을 잘 쓰는' 작가로서의 명성도 가져다주었다.(하루키의 댄디즘을 모방하는데 급급했던 90년대 한국 문학계를 생각해보자. 다른 건 둘째치고 일단 '글을 잘 쓰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우리 작가들에게 있어선, 대단한 찬사이다.)

 다 인정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나름의 비판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들개]에 대해서 작가 자신이 허락하듯 욕설로 도배를 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욕이나 줄창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formal하게 글을 쓰고 앉아있는 것은, 먼저 위에서 언급한 그 고상한 비평들이 찬사로 가득차있다는데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그 비평가 양반들이 응당 읽어냈어야 할 것을 읽지 못한데 대해 '그들이 알아들을만하게' 비난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길게 말해 무엇하랴. 사실 그 비평들조차 책의 초판이 나온 89년에 쓰여졌을테니 말이다. 그렇다, 사실인즉슨 89년에 쓰여진 이 [들개]라는 소설은 2004년을 살아가고 있는 적어도 '나'라는 한 사람의 독자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으리만큼 고리타분한 소설인 것이다.

 먼저, 15년 전의 소설에 대해 촌스럽다고 욕하는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외적인 이야기부터 하자. 그래, 15년의 갭이 가져오는 이 작품의 전반적인 유치함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아니, 노력중이다.) 개인적으로 유미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tilt를 가지고 있는 나이지만, 그 주제를 풀어내는 내러티브에 있어서 느껴지는 유치함 내지 naive함 역시도 세대차이라고 생각하고 못 본 척하고 말자. 그의 유려하다는 문체도, 위트 있는 문장들도, linear한 플롯이 몰고 오는 지루함을 커버하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도, 국문학도도 아닌 나의 읽기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자.

 자, 그럼 내적인 이야기를 하자. 한마디로 요약해서, 이외수는 소설지망생인 여주인공(이하 그녀)에 대해 매우 불순한 사상을 투사하고 있다. 그녀는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그 속에서 오직 문학만을 자신의 길로 결심하고는 대학도 때려치고 창작에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 돈이 없는 그녀는 노숙자(라기보다는 불법점유자)로 살면서 애지중지하는 책도 팔고, 별 수 없이 몸도 판다.(그녀 자신의 생각 - 사실은 이외수의 생각 - 과는 달리 그녀의 행위는 분명히 성매매이다.) 여기까지는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치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그녀의 생활상 및 정신상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 문제는 여기부터다. - 그녀는 불감증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즉 돈 한 푼 없고 불법점유자인 주제에 예술은 하고 싶어하는 한 화가(이하 그)를 만나게 된다. 처음엔 그녀는 물론 그에게 끌리지 않는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러나 곧 그의 작품에 끌리게 되고, 결국에는 그라는 인간(좋은 말로는 예술가의 영혼)에게 매료되어,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된다. 몸도, 마음도, 돈도, 음식도 등등등. 그러던 그녀는 우연히 바다를 보게 되더니만, 모종의 각성을 하게 된다.(이외수 씨의 반문명 내지 자연에의 경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때마침 그는 필생을 바쳐 그리고 있던 그림을 완성하기 직전에 이르고, 오랜만에 그녀의 몸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sex를 통해 그녀는 '육체의 쾌락'에 눈을 뜨게 되고, 그는 그림을 완성하고는 죽는다.

 [들개]를 읽지 않은 사람이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면 대부분은 욕부터 나오는게 당연하리라 여겨진다. 그러니 이 소설을 직접 끝까지 읽은 내 기분은 대체 어떻겠냔 말이다. 유미주의를 그녀의 육체적 각성과 교묘하게 꿰어맞춘 이 소설의 말미는 내게 극도의 거부감을 가져왔다. 요컨대 남자 화가의 정욕이 '예술을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여자 소설가 지망생의 몸에 제멋대로 투사되는 모습이, 그야말로 역겨웠다. 이외수는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려서(그것도 하필 '예술'이라는 이름 말이다!) 여성을 유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의미에서 유미주의의 테제를 '남용'하고 있다. 이 남용이라는 단어는 유미주의의 어의와 모순되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유미주의의 어의적 의미에 탐착하자면, 의식주의 욕구로부터는 초연하되 성욕은 주체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화가를 어떻게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이것은 당연히 지극히 개인적이며 근거도 없는 입장이지만, 나는 sex에 제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혐오한다. 대개 그런 제의의 주체는 남성이요, 대상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외수 자신이 그 들개 같은 화가와 자기 자신을 암암리에 동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사실 그다지 좋아해본 적도 없긴 하지만, 나는 이외수가 매우 싫어져버렸다.(2004.7.23.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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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4-10-08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정말 멋진 리뷰입니다. 저처럼 말을 하려고 하면서도 표현력이 부족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독자들을 위한 리뷰같습니다. 저도 이외수씨의 '훈장'을 읽고 이 글과 비슷한 불만을 느꼈습니다. 추천합니다.

몸냥 2024-01-1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에 입각한 주관적 불편감
 
좁은문 범우 사르비아 총서 625
앙드레 지드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긴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유리같은 감수성을 가진 제롬 - 그리고 지드를 떠올릴 수
있었고, 그가 향유할 수 있었던 프랑스의 전원 풍경을 동경했다. 그러나 책을 덮은 후에
내 가슴을 꽉 채운 것은 알리사와 제롬의 슬픈 사랑 이야기였다. 그것은 순수한 슬픔의
정화가 아니었다.

책을 읽어가면 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내러티브가 잘못된 영화를 볼 때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지드는 어리숙한 작가가 아니다. 그는 일부러 알리사라는 인물을
설정한 것이었다. 그녀는 고귀하지만 자폐적이고, 사랑 앞에서 헌신적이지만 잔인하다.
그런 그녀와 사랑에 빠진 소심한 소년 제롬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독자는 숨막힘을
느끼게 된다.

지드의 좌파 성향을 고려해서 알리사를 안티테제로 설정하면 이 숨막힘은 쉽게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다. 과연 지드는 세속을 떠난 정신적
사랑을 부정하는 주제를 택한 것일까? 나는 지드가 해답을 내리지 않았다고 본다. 해답은
우리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그 사실 자체가 숨막힘에 숨막힘을 더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괴로움을 피할 수 없는 딜레마 앞에, 지드는 우리를 앉혀놓고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지드는 계량주의적인 타협안조차 비추어주지 않는다. 제롬은 한없이 무력할 뿐이다.
나라면... 내가 제롬이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제롬에게 알리사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부조리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 자신은 이데아를 추구하기에 이 또한
아이러니컬하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알리사의 말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결국 독자의 가슴만이 탈 뿐이다.

이 작품을 유년시절에 읽었다면 지금 내 삶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지드의 문학과 재능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패배적이라
해도 세속적 사랑을 계속하겠다. 지독한 숨막힘은 문학 속에서만으로 끝내고 싶으니까.


2002. 1. 6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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