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뷰
후지와라 카무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순전히 우연으로 빌려봤다. 작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끝까지 다 읽은 후에야 [견랑전설]의 작화를 했던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워낙 디스토피아적인 [인랑]의 암울함이 [견랑전설]에서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우울함으로 변해버린 이유를 알게 된 기분이다.

옴니버스 형식의 이 단편집은 각각의 에피소드가 아무 연관이 없는듯 보이지만 공통적인 주제는 작가가 말하듯이 '기억'에 대한 물음이다. 특히, 이제는 하나의 유행같이 되어버린 데자뷰 - 기시감(旣視感)이 환기시키는 신비스러운 정서는 작가의 나른한 작화에 섞여 더욱 신비하고 몽환적인 경험으로 다가온다. 대부분의 에피소드에 별다른 플롯마저 없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거의 모든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여성이며, 그 여성들의 섹스 이야기 역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작가는 섹스 속에서 경험한 몽환감, 첫경험이 불러일으키는 신비감, 섹스 후의 나른함(섹스 중의 격렬함이 아니라)을 무의식적으로 작품에 투영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나른함이 가져오는 수동적인 이미지가 자칫 전형적인 일본 만화식 수동적 여성상을 상기시킬 수 있고, 섹스 이야기는 남성 독자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라고 문제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기억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조금은 철학적인 질문들에서부터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해봤을 법한 데자뷰까지 이 작품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素들에 주목해야 하겠다. 오랜만에 접한 정말 좋은 작품이었다. 이런게 바로 단편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한 권 사서 소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2002. 8. 8 by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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