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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시선 288
김성규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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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한 곡에 꽂혀 앨범을 사듯, 시집을 살 때도 어딘가의 누군가가 웹에 올린 시 한 편을 보고 시집 한 권을 사곤 한다. 다만 책을 사고 나서 읽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대부분의) 경우, 내 마음에 들어왔던 시가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애저녁에 잊히고, 샀던 이유와 상관없이 새롭게 시집 전체를 읽게 된다. 김성규의 시집도 그랬다. 황현산이 해설을 썼다는 점도 살 결정을 하는 데 일조했으리라 추측해본다.

이렇게 산 이유를 잊은 시집은 목차를 훑고 표제작을 먼저 읽기도 한다. 하지만 시 제목이 책 제목으로 쓰이지 않는 일도 잦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역시 동명의 작품은 목차에 없다. 이 문장은 {불길한 새}(32~33쪽)의 마지막 연이다. 이 시는 ‘눈이 내리고 나는 부두에 서 있었다’로 시작한다. 마지막 연 앞 연은 ‘해송 몇그루가 무너지는 하늘 쪽으로 팔다리를 허우적였다 / 그때마다 놀란 새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이다. ‘너’는 저편에서 이쪽 부두를 향해 지친 날개로 바다를 건너오는 ‘검은 새’를 가리킨다. 새 뒤로 혹은 위로 ‘하늘 한 귀퉁이가’ 무너지고 있다. 시인은 왜 이 새가 잘못 날아왔다고 말했을까? 하늘은 왜 무너질까. 이 표현은 익숙한 비유인가, 아닌가. 새가 바다를 건넌다는 행위도 혹시 무엇인가 익히 알려진 상징은 아닌가. 의문이 이어지고,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불행’의 시각화로 읽을 수도 있지만, 함의를 규명하기 이전에 심상만으로 강렬한 시다.

접어둔 시로 먼저 {빛나는 땅 2}(78~79쪽)가 있다. 화자는 ‘북을 치는 광대들과 두건을 두른 사내들’을 좇아 ‘통곡이 그치지 않’는 마을에 이른다. ‘아이들의 시체가 뒤엉켜 강물에 버려’지고 ‘사람들의 앓는 소리가 우물에서 메아리’치는 마을이다. 화자는 ‘몇알의 약을 입 안에 털어넣고 새벽녘 마을을 빠져’나온 후에야, 자신이 있던 곳이 ‘빛나는 땅’임을 알게 된다. 마을은, 복마전이나 디스토피아로 읽기엔 묘사가 모호하지만(이 역시 내가 놓치는 상징성 때문일 수도 있다) ‘빛나는 땅’이라는 희망찬 지명과 대비를 이루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몇몇 수록작에서 힌트를 찾아 연결한다면, 마을은 ‘억압적 권력’(이 어구는 황현산의 해설에서 가져왔다)이 현현한 물리적 공간으로 읽을 수 있다. 묘사가 모호하다고 쓰긴 했지만 사실 마을을 서술하는 2연의 분량이 제일 길고, 여기에서 오는 대비가 읽을 당시에 내 마음에 조금은 자국을 남겼던 듯싶다.

접어둔 다른 시는 {꽃밭에는 꽃들이}(100~101쪽)다. 친근한 제목에 이어 ‘누나의 집은 늘 맥주병을 둘러 꽃밭을 만들고 채송화, 맨드라미며 알 수 없는 이름의 꽃이 피곤 했다’ 같은 문장이 나온다. 아마도 한동안 찾지 않았을 이 누나의 집을 다시 찾은 화자는, 매형에게 위로를 듣고 마루에서 담배를 피운다. 이 목가 속에서 왜? 불안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조카니 과자니 하는 단어들 뒤에 아예 숨어 있다. 이 작품은 황현산이 간략하면서도 충분하게 해설해놓았다.

끝으로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22~23쪽)가 있다. 김성규의 등단작(2004년)인 이 시는 직접적으로 쓰여 굳이 부연할 게 없다. 독산동을 신림동이나 봉천동으로 바꾸고 세 가족을 한 가족으로 쓴다면 좀 더 요즘 시대에 맞는 이야기가 될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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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 문학과지성 시인선 444
이준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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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 출신이라 그런지 시 같은 운문의 형식적 특성에 관심이 많다. 구사하는 어휘 자체가 범상치 않은 이제니라든가, 낯선 이미지를 랜덤해 보이게 나열하는 가운데 기묘한 정서의 층위를 쌓아나가는 작가들(시인은 아니지만 이 모범 사례는 정영문이다)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터다.

짧은 글은 응축성이 생명이므로 복잡한 문장구조가 들어설 곳이 없다. 여기에서 ‘컴퓨터가 랜덤한 어휘를 조합하여 생성한 시’라는 가능성을 고려하게 된다. 실은 정말 옛날부터 있던 시도이고, 최근에는 머신 러닝이나 딥 러닝의 부상으로 더욱 현실적인 얘기가 되었다.

이준규의 시를 읽으며 이러한 ‘조합 가능성’의 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에서 대부분의 작품은 문장구조가 지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이따금 등장하는 대구(對句) 역시 확률을 도입해서 프로그래밍 가능해 보인다. {황조롱이}가 한 예다. 수식어나 목적어를 뺀 이 시의 전문은 이렇다. ‘여자가 갔다. 그는 쫓아갔다. 그가 말했고 그녀가 말했다. 페페가 있었고 사사가 있었다. 경대가 있었고 분무기가 있었다. 나는 씻었다. 황조롱이도 있었다.’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구도 하나 있는데 뺐다.) 여기서 사용된 명사는 여자, 그, 페페, 사사, 경대, 분무기, 황조롱이가 전부다. 동사는 모두 과거형으로 갔다, 말했다, 있었다(이수명이 지적하듯 이 시집에는 ‘있었다’가 정말 많이 나온다), 씻었다가 끝. 요컨대 얘네들을 적당히 조합하고 특정한 정서로 유도해나감으로써 시를 쓸 수 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멍}도 비슷하다. ‘커피가 있었다. 비극은 없었다. 보이는 건 등대였나.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너는 있었다. 상관이 없었다. 이미지는 없었고 그것이었다. 그뿐이었다. 커피는 있었다. 그러나 비극은 없었다. 흐렸다. 나는 기다린다.’ (이 작품에는 접속사도 하나 있는데 빼지 않았다.) 이 시의 경우 어미(語尾)의 문제가 대두되고, 다른 시들로 확대하면 이러한 예외적인 요소가 많아지긴 하나, 예외는 예외라는 이름의 규칙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규칙과 알고리즘으로 기본적인 뼈대를 생성하고 후처리 시 인간적인 감성과 불규칙성을 덧입히면 뭔가 이런 시를 쓸 수도 있을 것만 같다.

… 바보 같은 얘기다. 그런 프로그램을 짜고 수동으로 후처리를 가하는 노력을 기울일 바에야 대충 졸문을 쓴 다음 비인간적으로 보이게 가공해나가는 게 효율적인 작법일 터다. 하지만 또 창작이라는 게 효율을 추구하는 활동은 아니니까…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모순의 모순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형식에 관한 이야기만 한 것은,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딱히 그의 문장에서 정서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한 탓도 있다. 이건 문장구조나 시어의 문제는 아니다. 단순히 정서적 코드가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이 옅은 감정의 농도가 애초에 시인이 의도한 바일 수도 있다(시인 본인은 ‘슬픔만을 남기고 싶었다’라고 썼지만 말이다). 나는 미원 넣은 음식을 찬양하는 쪽이고, 이 시집에서는 미원 비슷한 맛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사족이지만, 이준규 역시 2016년 말 문인들의 성추문 폭로에 연루되었다. 물론 그래서 까겠다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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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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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어디 사는 몇 살인지도 모를 누군가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들을 읽고 시집을 모으기 시작한 게 2005년이었다. 허수경은 당시 나를 사로잡은 시인 목록 1번에 있었고, 시 1번은 물론 {봄날은 간다}였다. 그럼에도 내 맘대로 만든 이미지가 깨지는 게 두려워 [혼자 가는 먼 집] 외에 다른 시집을 사지는 않았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그랬다.

이 시리즈가 처음 나왔을 때 대대적인 책 광고에 매일 노출되면서도, 살까 말까 못내 고민만 했다. 요즘에도 판형 등 제작 사양으로 장난치는 출판사가 많은데, 특별판과 일반판이라니 뭔가 거부감이 들었던 거다. 그러다 결국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고, 당시는 마침 금감원 등이 압력을 넣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알라딘에서 액티브엑스 없이도 결제가 가능했던 때라서 기쁘게 오페라(크롬으로 바뀌기 전 오페라)에서 결제했던 기억도 난다.

물론 나는 특별판 따위 장난에 속지 않으므로(라고 쓰고 책 사는 데 돈 쓰는 게 아까운 속물이라서,라고 읽는다)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일반판을 샀다. 사실 일반판조차도 보기 드문 사철 반양장 형태로, 내구성이 좀 걱정되긴 해도 ‘책 펼쳐짐의 질감’ 자체가 다르다. 서체도 어딘가 복고적이다(특히 볼드 서체의 저 과감한 획 굵기란).

분명히 [혼자 가는 먼 집], 정확히는 내 1번 {봄날은 간다}의 간결함에 비하면 문장의 길이는 길어졌다. 이미지가 깨지긴 깨진 셈인데, 뭐랄까 허용 범위 안이다(이제니의 [아마도 아프리카]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사이에서 내가 느낀 배신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경탄스러운 문장이 존재한다. 어떤 건 거의 지구인이 구사하는 언어가 아니다. 허수경은 사실 외계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류! / 사랑해 / 울지 마!”(109쪽) 어휴, 그것도 이렇게 인본주의적인 외계인이라니.

특히 좋았던 건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입술}, {그림자의 섬}, 위에 인용한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등이다. 시 전체의 심상 혹은 정서를 따라가기는 어려워도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그럴싸한 것들도 있었다. {아름다운 나날}, {폭풍여관, 혹은 전투 전야}, 표제작 등.

다른 이야기. 표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126~127쪽) 여기서 뭔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나.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정말 유명한 동시에 또 오해받는 말이지만)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이 야만이라고 말했다. 2014년 이후 한국에 살며 어떤 시를 읽든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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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의 바깥 창비시선 335
이혜미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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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는 죽음의 색이다. 죽음이란 말은 너무 낭만적일 수 있다. 보라는 치아노제, 울혈, 시반, 부패의 색이다. 나는 [보라의 바깥]이란 시집에서 죽음이나 부패 같은 것에 대한 적나라한 심상을 기대했다. 그저 주관적인, 아무 근거 없는 예상이었다.

[보라의 바깥]에서 보라가 직접적으로 죽음과 연결되는 장면은 없었다. 보라색이라는 색깔조차 {퍼플 버블}을 제외하면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허윤진의 해설을 읽기 전까지 내가 이 책에서 주로 본 색은 파란색({피어리 아라베스크} 등 다수), 붉은색({초경}, {각인}), 그리고 초록색({측백 그늘}, {링반데룽})이었다. 허윤진은 시인을 어류와의 사랑을 꿈꾸는 인간(혹은 조류)으로 놓고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내 인상과는 달라 놀랐고, 또 고등학교 시절 문학 선생님이 교과서에 실린 시를 설명할 때처럼 시어와 상징이 딱딱 맞아떨어지게 해설을 썼다는 점에서 또 놀랐다.

표제작인 {보라의 바깥} 역시 ‘색’이 아니라 ‘빛’을 이야기한다. 다만 ‘보라의 바깥’을 ‘자외선(紫外線)’에 빗댄 표현이라고 (일차원적으로) 해석할 만한 힌트는 보인다. “나는 도망친다 / 빛으로부터.”(3연)라든가 “빛의 주검”(6연) 같은 표현. 시인은 시인답게 보라색에 사람들이 씌운 통념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죽음과 부패는 물론이고, 허윤진의 어류 대 조류 구도에서 유도할 수 있는 파란색과 빨간색의 ‘중간’에 있는 색깔로서의 보라의 이중성에 대한 이미지마저도.

전체적으로 이혜미의 이 시집은 내 기대와는 지향점이 달랐지만, 사실 꽤나 읽을 만했다. 책장을 넘기다 시선을 멈추고 감탄 혹은 생각에 잠기게 되는 구절이 곳곳에 있었다. {푸른 꼬리의 소년}에는 한국의 포스트록 밴드(로로스) 노래 제목이 나와 미소를 지었다. “너는 해초마냥 나를 휘감았네 내 머리카락도 천 개의 손이 되어 너와 얽혀들었지”로 시작하는 {측백 그늘}은 첫 연부터 말 그대로 읽는 이를 빨아들이고, 왠지 허수경스러운 마지막 연도 너무나 그럴싸했다. {문득 말하기를 멈추고}에는 이지적이면서도 세련된 문장들이 적절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 {침몰하는 저녁}, {초경}, {어느 새}는 어떤 의미로든 독서를 멈추게 하는 공통된 모티프를 공유한다.

{링반데룽}은 이 시집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닐지 몰라도, 내 뇌리에 가장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현실적인 이미지가 아니다)를 그리게 했다. 마침표 없는 한 문장 한 문장이 한 프레임 한 프레임으로 이어져 동영상이 되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이 동영상에 담긴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명백하게 같아 보이지는 않음에도, 제목을 보면 응당 무한히 반복되어야 할 것만 같았고, 나는 이를 재귀호출로 명징하게 쓰지 않은 데 조금은 불만을 느꼈다. 무척이나 좋아서 느껴지는 아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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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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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루마니아인이므로 치오란으로 표기해야 하나 시오랑으로 굳어졌다)도 5년 전 알게 된 작가다. 정확히는 이 책 말고 [내 생일날의 고독](에디터, 1994)을 통해서였다. 자세히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로쟈 님의 글에 따르면 그 책은 1981년에도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이 글 참고. http://blog.aladin.co.kr/mramor/6736402

당시 조사한 바로는 작가의 첫 작품인 [절망의 맨끝에서]가 더 복간 가치가 높다고 봤는데, 실제로 1994년과 1997년, 그리고 마침내 2013년에 이렇게 정식 출간되었다([내 생일날의 고독]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도 나온 적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2009년 헤르타 뮐러가 노벨상을 타며 문필가 및 대중 사이에서 시오랑을 비롯해 루마니아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반짝 높아지기도 했다.

이방인이자 낙오자로서 자살을 삶에 대한 보험으로 삼고 일도 결혼도 안 하고 84세까지 허무주의 잠언만 쓰다 간 작가. 이런 사람이 1934년에 쓴 첫 작품이 거의 80년 만에 나와서 기쁜가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앞의 글에서 로쟈가 지적하듯, 거의 1초 만에 표지와 제목에 불만이 터져 나온다. 수년 전 시대(라고 쓰고 시장이라고 읽는다)를 풍미했던, 위로나 힐링의 심리학을 내세운 얄팍한 책들과 판박이다.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의도였겠지만, 이건 그냥 역효과다. 표지에 꽃 넣은 소설치고 제대로 된 걸 못 봤다. 동서문화사의 [앨저넌에게 꽃을]과 마찬가지로 이건 폭력이고 만행이다. 텍스트 내용과 무관한 일차원적인 발상 아닌가. [꽃들에게 희망을]조차 표지에서 부각하는 건 꽃이 아니라 나비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표지에 장미가 있다고 상상해보라. WTF!?

외향보다 더 중요한 건, 80년을 기다렸는데도 중역본이라는 점이다. 1997년 판과 같은 프랑스어 번역자가 번역했지만, 이 책은 그가 프랑스로 망명하기 전에 루마니어로 쓴 작품이다. 위키백과, 또는 멀리 갈 것 없이 [독설의 팡세](문학동네, 2004) 책 소개를 봐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가 프랑스어로 쓴 첫 책은 1949년에야 나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운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아포리즘을 중역으로 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긴 시간 끝에 정식으로 출간되는 책이라면 더욱더. 판권 문제가 복잡했으리라 추측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길게 외적인 얘기만 늘어놨다. 텍스트만 놓고 보면 어떨까. 시오랑은 헤르타 뮐러 등 여러 작가와 마찬가지로 차우셰스쿠 정권을 피해 루마니아를 떠났다. 차우셰스쿠는 "민중들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독재정치를 하였다."(위키백과) 뭔가 데자뷔가 느껴지지만... 시오랑이 택한 니힐리즘 아포리즘이, 오늘날 이곳 헬조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어떤 의미를 전할 수 있을까? 5년이 흐른 지금은 이것조차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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