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가 필요해 2012] 라는 드라마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감정이 제일 중요하다. 평상시에는 누구나 다 그렇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비상시'라는 것이 있다. 친구가 '비상시'에 있다면 그때만큼은 내 감정을 조금 접고 친구 감정을 먼저 생각해주는게 낫지 않겠느냐, 하는.


몇 번이고 보다가 집어치우려고 했지만, 이 대사가 무척 좋아서 이 드라마를 꾹 참고 계속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대사는 3부에 나온다. 정유미는 원래 내가 좋아하는 배우이지만 다른 배우들은 관심없거나 비호감인 배우들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남자들이 드라마에서 반짝 빛이 나는거다. 한 명은 '젊고 몸 좋고 밝은' 버전의 임태경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봐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참고 참다 3부의 중간쯤을 보고 포기했다. 도무지 여자들의 캐릭터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맙소사.


그들이 내세우는 성격들이 현실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알겠고, 그들이 드러내려는 캐릭터 역시 충분히 현실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연기'를 한다. 그 인물들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드라마를 보노라면 그들이 너무 '꾸며져' 있고 가공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거다. 도무지 몰입할 수가 없다. 전형적인 칙릿 소설이 그대로 드라마화 되어진 느낌. 나는 아이팟에 8편까지 받아두고 금요일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일요일 밤 3편의 중간까지 보고 아이팟에서 아웃 시키기로 했다. 남들은 재밌다는데 나는 왜이럴까. 나는 왜 드라마를 잘 보지 못할까? 


















이 책은 꽤 놀라웠다. 우선 작가가 '남자사람'이라는게 놀라웠다. 나는 당연히 여자사람 작가일 줄로만 알았다. 게다가 영화를 보면서는 시종일관 웃었던터라, 이 책 역시고 낄낄대고 웃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영화보다 조용한 분위기이며 덜 유쾌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덜 유쾌하다는 게 나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일전에 한 친구는 나에게 애인이 생겼으면 좋겠다면서(또다른 친구는 결혼을 빨리 하라면서) 이런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순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인이 생겨야, 혹은 결혼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대체 어느 별에서 나온 명제일까. 아니, 그러니까, 그것이 참된 명제일까? 내가 결혼하지 않아서 지금 불행하다고 했던가? 혹은 내가 불행해 보이는가? 결혼한 그들은 지금 행복하단 말인가? 정말?



결혼식에 참석했던 가족과 친구 들은 이른바 '1차 사회적 압력 집단'을 형성했다. 아이의 탄생을 기대하며 압력을 가하는. 다른 이들의 삶에 열을 올릴 정도로 자신들의 삶이 지루한 것일까? 늘 그런 법이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강요받으며 살아간다. 나탈리와 프랑수아는 주변 사람들을 위한 연속극이 되고 싶지 않았다. (pp.30-31)



꼭 그랬다. 결혼을 한 사람들이 타인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아이낳기를 강요했다. 그들이 정말 행복해서 타인의 행복이 더 커지길 그랬다는 생각은 사실 그다지 들질 않는다. 그들은 타인이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걸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타인의 행복은 자신의 기준에 맞추는게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하는 사람을 우연히 맞닥뜨리기 위해 그 사람의 집 앞에서 몇 시간을 서성이거나 혹은 사무실이나 회사 복도에서 특별한 일 없이 왔다갔다 했던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그 사람을 만나면 마치 우연인 듯 인사를 하는거지. 이 책의 마르퀴스가 그랬다. 그의 마음속에 들어온 여자 나탈리를 우연인듯 마주치기 위하여 그는 맞닥뜨렸을 경우 할 말을 준비하고 계속 그녀의 사무실 앞 복도를 왔다갔다한다. 



그의 전략은 훌륭했다. 계속해서 복도를 서성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어딘가 향하는 것처럼 걷기란 어려운 일이다. 정확한 행동으로 집중하고 있는 듯 보여야 했다. 가장 힘든 일은 짐짓 서두르는 척 움직이는 것이었다. 오후 끝 무렵이 되자 그는 지쳐버렸고, 바로 그때 클로에와 마주쳤다. 클로에가 그에게 물었다.

"괜찮아? 좀 이상해 보여 ‥‥‥"

"응, 괜찮아. 다리 근육 좀 푸느라고. 그러면 생각이 잘 돌아가거든." (pp.103-104)



나탈리대신 마주치게 된 동료 클로에가 그에게 오, 그런데, 흑흑, 이런 말을 한다.


"난 108호 때문에 골치가 아파. 나탈리 팀장님하고 상의 좀 해보려고 했는데, 오늘 안 계시네."

"그래? 팀장님이 ‥‥‥안 계셔?"

"응‥‥‥지방 출장 가신 것 같아. 난 그만 가볼게. 골칫거리를 해결해봐야지."

마르퀴스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오늘 왔다 갔다 한 거리를 합한다면 그 역시 너끈히 지방에 갈 수 있었다. (p.104)



아, 어쩌란 말인가. 대체 그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지방 출장에가서 마주칠 수 없는 그녀와 마주치기 위해 그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거리를 걷고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낸거란 말인가. 정말이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공감이 되어버리고.. 흑흑.



영화속에서도 나는 마르퀴스의 유머감각에 몇 번이고 웃음을 터뜨렸는데, 책 속에서도 그보다 덜하긴 하지만 마르퀴스에게 유머 감각은 있다.


"보아하니 뭘 먹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수프가 좀 있어."

"아, 그래요? 무슨 수프인데요?" 마르퀴스가 물었다.

"금요일 수프야. 뭐라 설명을 해야 하나. 마침 금요일이고, 그래서 금요일 수프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수프겠군요." 마르퀴스가 대답했다. (p.265)



금요일의 수프라고 대답해주는 나탈리의 할머니도, 넥타이를 매지 않은 수프라 대답하는 마르퀴스도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잘 어울리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러니 할머니도 손녀의 남자친구에게 좀 점수를 주게 되지 않을까. 물론 할머니는 나탈리에게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할머니들은 잘 아는걸까? 나도 할머니가 되면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기게 될까? 그때쯤이면 지금보다 확실히 더 현명해지는걸까?



책의 제목인 『시작은 키스』는 꽤 잘못된 번역제목인 듯 느껴진다. 이렇게 손발 오글거리는 제목이라니. 부끄럽기 짝이없다. 



어쨌든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금요일에는 어찌어찌하다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도니 버거] 강남점에 가서 햄버거와 닭봉과 맥주를 시켰다. 맙소사. 거기에서 먹은 닭봉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맛없는 닭봉이었다. 6개입을 주문했는데 친구와 둘이 간신히 세 개를 먹었다. 그나마 내가 억지로 두 개를 먹고 친구는 하나를 먹다가 도무지 못먹겠다고 그마저도 남겼다. 나는 꼴도 보기 싫다고 그 위에 냅킨을 덮어놨다. 진짜 끔찍한 맛이었다. 그동안 먹은 닭봉들에게 고마울 지경이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김치찌개 냄새가 부엌에 가득했다. 나는 절로 신음소리를 냈다. 엄마는 왜그러냐고 물으셨고 나는 김치찌개 향이 무척 좋다고 말했다. 엄마 왜이러지? 왜 유독 좋지? 오랜만이라 그런가, 아니면 날이 추워 그런가? 엄마는 오랜만이라 그런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아침을 먹는데 진짜 완전 눈물나게 맛있는거다. 아침 저녁으로 정말이지 김치찌개의 향과 맛이 궁극에 달하는 날씨다. 나는 결국 국그릇에 남은 찌개를 들이마시고 출근했다. 만족스런 아침식사였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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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2-10-08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깐, '로맨스가 필요해2012'는 닭봉이였고, '시작은 키스'은 김치찌게였구나...
흑흑 미안해. ㅠ_ㅠ

다락방 2012-10-08 10:01   좋아요 0 | URL
아니, 레와님이 왜 미안해!! ㅎㅎ

그 드라마 본 다른 사람들도 다 재미있다고 하던데 못보는 내가 뭔가 까다로운거겠지. ㅎㅎ 나쁘진 않았는데 뭔가 자꾸 튕겨나가는 느낌이었어요. 몰입 불가의 드라마.
[시작은 키스]도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어요. 김치찌게 까지는 아니야. ㅎㅎㅎ

moonnight 2012-10-0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킨이 맛없기는 쉽잖은데 ㅠ_ㅠ 저도 일전에 집에서 후라이드치킨 시켰는데 덜 익은 게 와서 기가막혔던 적 있어요. 그나저나, 김치찌개 너무 맛있겠다. 배고파요. 흑흑. ㅠ_ㅠ

다락방 2012-10-08 13:39   좋아요 0 | URL
지금쯤은 식사 하셨을까요, 문나잇님?
저는 점심에 돼지목살김치찜을 먹었는데 완전 맛있어서 지금 나른해요. ㅎㅎㅎㅎ 문나잇님도 맛있는 점심 드셨기를 바랄게요.

치킨은 웬만해선 기본은 하는것 같은데 도니버거의 닭봉은 깜짝놀랄만한 맛이었어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나더라구요. 친구는 이거 들고가서 반품하자고 그러더라구요. ㅎㅎㅎㅎㅎ 그런데..내가 두개나 먹었잖아;; 이러면서 좀 난감해하고.. 하핫. 암튼 지상에서 가장 맛없는 닭봉 -_-

비로그인 2012-10-08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정말 D.F.와 맞지 않았어요ㅜㅜ 프랑스의 우디앨런?흥!이었으니....

화제가 되는 드라마들을 호기심에서 한 번 보게 된다해도 지겨움, 답답함, 왜 저딴식으로 만들지? 시간아까워,등등의 생각이 들어 십분 이상 시청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이젠 아무리 화제가 된다한들 일부러 드라마를 찾아 보지는 않게 되었네요,ㅋ 드라마는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대중음식점의 식단 같다고나 할까요,ㅎ 누군가에겐 허기를 채워주고, 위로를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내 입맛엔 맞지 않는, 일부러 찾아가고 싶지는 않은,

다락방 2012-10-08 13:42   좋아요 0 | URL
아른님이 쓰신 리뷰 봤어요. 별 하나가 있길래 누군가 봤더니 아른님이더라구요! ㅎㅎ 저는 나름 괜찮았어요. 음..제가 기대한 것과는 좀 달랐지만 말예요. 제가 생각하는 섬세함은 이런 섬세함이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간혹 공감되는 부분들이 있어서 괜찮더라구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아른님.

네, 저도 제가 드라마를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알기 때문에 화제가 되든 안되든 안보는데요, 이 드라마는 친구가 재미있다고 파일을 준거라서요, 그걸 다운 받은 제 노력 때문에라도 억지로 보려고 한건데 역시나 삐끗 어긋나네요. 맞아요.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저도 싫어하는 건 아닌데, 이건 너무 조미료맛이 나서 불쾌한 그런 기분이에요. 집중이 안되고 저 역시 아른님 말씀처럼 시간이 무척 아까워요. 차라리 잠을 자겠다, 이 시간에 책을 읽겠다, 이런 생각이 절로 들지 뭡니까! 영..저랑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_-

개인주의 2012-10-08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자집사이드메뉴로 나온 닭봉이 냄새가 나서 슬펐어요..ㅜㅜ;

다락방 2012-10-09 08:58   좋아요 0 | URL
닭봉이 맛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어요. ㅜㅜ

dreamout 2012-10-08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닭봉이 뭔지 몰라서 검색해 봤어요. ㅋ

다락방 2012-10-09 08:59   좋아요 0 | URL
쉽게 만나실 수 있는 음식입니다. 버거킹에도 팔고 KFC, 롯데리아도 다 팔걸요? 도니 버거에선 드시지 마세요. -_-

blanca 2012-10-09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닭봉이라는 줄 알고 ㅋㅋ 침 흘리려고 했는데. 김찌찌개 저 너무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가족들이 다 싫어해서 혼자 먹으려고 끓여야 해요--;; 아, 또 먹고 싶어요. 아, 아침부터 김찌찌개를 끓여주시는 엄마라니, 너무 부러워요. '젊고 밝고 몸 좋은' 임태경 버전에서 빵 터졌어요 ㅋㅋ

다락방 2012-10-09 12:48   좋아요 0 | URL
김치찌개를 싫어할 수도 있군요!! 상상이 잘 안되네요. 전 엄청 좋아하는데요. 소주랑 마셔도 진짜 대박이잖아요!! (뭐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자는 젊고 밝고 활력이 넘치는게 진리죠!! ㅎㅎㅎㅎㅎ

치니 2012-10-09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나도 시작은키스 책 읽을래요! 전 영화도 사실, 유쾌한 부분보다 슬프고 어두운 부분에 더 이끌렸드랬어요. 아마도 제가 예술작품에서 제일 좋아하는 코드가 '어둡고 슬픈데, 유머가 적재적소에 들어가서 눈물 머금고 웃게 한다' 인 듯. 이 영화가 그랬어서 참 좋았어요.
도니 버거는 혹시, 형돈이가 하는 거?

다락방 2012-10-09 14:16   좋아요 0 | URL
영화를 먼저 봐서 그런지 책에서 설명하는 장소들이 막 잘 그려지더라구요. 전 책도 나름 괜찮았어요. 영화도 무척 좋았지만. ㅎㅎ

도니버거는 네, 형돈이가 하는거. 수제버거라는데 햄버거집 들어가자마자 정육점 온 것처럼 고기 냄새 쩔어서 확 짜증나거든요. 그런데 심지어 닭봉은 맛없기까지 해요. -_-
그런데 생맥주도 팔고 바깥에서 마실 수도 있어서 종종 2차로 갈 것 같긴해요. 닭봉 안시키고 감자칩 시키면 되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9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피아노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그것을 가지고 이사해 본 사람들만이 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첫 부분에서 이런 문장을 만난다.

 

아무리 절실해도 함부로 독스를 손볼 순 없었다. 그가 나무 아래에 밤색 토러스를 세워놓고 나를 감시한다 해도, 다른 좋은 방법이 떠오를 때까진 아무일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해결책이라곤 하늘에서 피아노가 뚝 떨어져 그를 깔아뭉개는 정도였다. 불행하게도 그런 행운을 기다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p.42)

 

 

하늘에서 피아노가 떨어지다니, 대단히 참신하지 않은가!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나는 피아노가 얼마나 무거운지 안다. 그러니 그 피아노 아래에 깔린다면 말 그대로 '깔아뭉개질 수 밖에'없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독스에 대한 증오심, 그를 없애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바라는 부질 없는 기도가 그대로 느껴져서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

 

 

덱스터는 살인 본능을 가진 남자다. 스스로는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자신이 정상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그는 규칙을 정한다. 자신의 살인 본능을 평소에는 억누르고 정상적인 인간처럼 살되, 연쇄살인범에 대해서는 자신의 본능대로 할 것. 그래서 그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달밤에 응징한다. 특히나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그는 용서할 수 없다. 그는 가차없이 그들 앞에 나타나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다.

 

 

나는 이런 그를 응원할 수 밖에 없다. 내 안 어딘가에서도 역시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면서도 이런 그를 응원할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이 드라마로 나왔을 때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아닐까. 그러나 전편을 읽고도 느꼈던 것처럼 이토록 흥미진진한 소재가 책으로는 그다지 훌륭하게 쓰여져 있질 못하다. 전 편에서는 무조건 '본능적으로' 살인범이 어디서 죄를 저지르는지를 알아내곤 하는게 영 찜찜했는데, 이번 편에서는 그가 아무리 저주하는 상대였다한들, 그가 아무리 그의 위로 피아노가 떨어지길 바랐던 상대라 한들, 엄청난 살인범에게 잡혀간 독스를 구하러 가지 않는 그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는 독스에게 '너가 인질이 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지 않았던가.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던 건, 어느틈엔가는 덱스터가 독스를 향해 달려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덱스터는 보통 사람들처럼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지만, 나는 독스를 그대로 둔 덱스터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질 않았다.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책의 등장인물들이 당연히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책의 '내용상'으로 책을 싫어하게 되는 일은 뭔가 부조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덱스터에게 이별을 고했다.

 

 

안녕, 덱스터. 당신하고는 이제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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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2-10-0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께 절교선언을 듣다니!!! 덱스터 큰일 났네요. ㅋㅋ

다락방 2012-10-08 13:4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덱스터도 좋아할지도 몰라요. ㅋㅋㅋㅋㅋ
 
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본문은 345페이지에서 끝나는데 나는 192페이지까지 읽다가 포기했음을 미리 밝힌다.

 

 

이 책은 아니 에르노의 일기다. 그녀는 소련 외교관인 S 를 만나는동안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를 만나면서 그녀가 경험하게 되는 욕망과 집착과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들. 아니 에르노는 역시나 자신의 감정을 밝히는데 거침이 없다. 그녀는 그녀의 다른책에서 그랬던것처럼 이 책에서도 더할나위없이 솔직하다. 불편할만큼.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별난 감정을 가져서 불편한게 아니다. 나는 그녀가 쓰는 감정이 내가 갖게 되는 감정과 지나치게 같아서 불편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녀는 거침이 없어, 하고 읽어가다가 그만, 포기하고 만다. 이토록 솔직한 글들을 '더는' 읽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에 대한 기억들이 '허구'가 아니어서 더 불편하다. 그녀가 기록한 것들에 '그 남자의 아내'에 대한 묘사가 있는것이 나를 못견디게 만든다. 내가 하지 않아도 좋을 걱정들이 자꾸 생긴다. 맙소사. 적어도 S 와 S 주변의 사람들이라면 이 글을 읽고 자신의 얘기인지 혹은 누구의 얘기인지 알 수 있을텐데. 이 책을 읽는 S 의 아내는 어떤 기분을 느껴야할까. 나는 아니 에르노가 느낀 감정에 내 감정을 덧씌워 읽으려다가도 자꾸만 튕겨져 나오고 만다. 이토록 솔직한 책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걸까. 나는 겨우 절반을 가까스로 읽어내고 이 책을 읽기를 포기했다.

 

 

오래전 나의 연인은 내게 '지나치게 솔직한게 좋은건 아니야' 라고 했다. 아니, '솔직한게 꼭 좋은것만은 아냐' 라고 했던가. 아니 에르노는 나를 불편하게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닌데 나는 불편한 것처럼, 나 역시 의도하지 않았는데 나의 솔직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상황들에 가끔 놓이게 된다. 어쩌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더, 나와 같은 아니 에르노의 감정들을 읽어내기 버거운건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이 책을 읽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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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07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를 포기한 다락방님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은 그런 경험이 있어서 책 읽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거든요.

다락방 2012-10-08 09:53   좋아요 0 | URL
책을 포기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죠. 이번처럼 힘들어서일 수도 있고 대체적으로는 재미 없어서 포기하곤 하죠. 저는 재미없다는 이유로 책을 포기할 때가 여러번 있었어요. ㅎㅎ

blanca 2012-10-08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지독하게 솔직하죠. 때로 민망할 정도로요. 혼자 읽고 있는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고. 저도 주변 인물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런 류의 책을 처음 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하여 담담하게 읊조리던 아니 에르노와 연결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끝가지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해요. 눈물나는 결말이랍니다.

다락방 2012-10-08 09:53   좋아요 0 | URL
윽, 블랑카님. 이 솔직한 누군가의 일기를 이만큼 읽은것도 많이 읽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단순한 열정] 이나 [집착] 정도의 분량이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탐닉]은 정말이지 너무 길더라구요. 그런데 눈물나는 결말이라니..궁금해지잖아요!! 흐음..다시..시도해볼까요? 휴..

프레이야 2012-10-0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도 회자하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않아서 더 호기심 나요. 이 책은 전에 불랑카님 리뷰인가로도 담아두긴 한 책인데 다락방님이 그만 뒀다는 그 이유가 더 끌리게 만드네요. 역시 불편할까요ㅠ

다락방 2012-10-08 12:04   좋아요 0 | URL
소설이었다면, 허구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더 잘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레이야님. 실제의 이야기, 실존 인물이라는 게 자꾸만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아서 내내 불편하더라구요. 아니 에르노의 글은 죄다 이렇게 솔직하거든요. 그나마 [집착]과 [단순한 열정]은 분량이 얇아서 읽어내기에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는데, 이 [탐닉]은 그것들의 두 배 분량이에요. 누군가의 지독하게 솔직한 일기를 그만큼 읽어내기가 제게는 쉽지가 않더라구요. 그런데 블랑카님의 댓글을 보니 마저 읽어보는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프레이야님도 한 번 읽어보세요. 아니 에르노의 글을 프레이야님은 결코 싫어하시지 않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녀의 내면을 아주 잘 캐치하실 것 같아요.

moonnight 2012-10-0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을 때 참 괴로웠던 기억이 나네요.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 안 남. 단지 괴로웠던 것만 -_-;;;

다락방 2012-10-08 13:44   좋아요 0 | URL
끝까지 읽어야하나 지금 또다시 망설이고 있어요. 너무 솔직한 글이 분량이 많으니까 참 지독한 기분이..orz
 
첫사랑
페르 닐손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내가 언제나 어른인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서 내 사랑이 언제나 더 현명해지는 건 아니었던거다.

 

여기, '그'가 있다. 미국에 있는 한 달 동안 스웨덴에 있는 그녀에게 열두 통의 편지를 보낸 그. 그녀가 그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던 그.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자신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그녀의 집에서 바지의 단추를 잠그며 나타나는 다른 남자를 보고, 그리고 그녀가 그의 침대에서 함께 누웠던 일을 '실수'라고 말했던 일을 떠올리며, 그는 이제 파란 알약 한 통을 준비해놓는다. 그는 자신의 비극적인 사랑을 견뎌낼 수 없었으니까.

 

 

단순히 첫사랑이어서 이 사랑이 비극이었을까? 첫사랑이어서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한쪽은 사랑이라 말하고 한쪽은 영원히 오래오래 알고 지내고 싶은 친구이길 원한다면 이건 어떤 식으로 결론지어져야 할까. 그는 알약통을 눈 앞에 두고, 그녀와의 추억을 하나씩 지워가면서 그리고 전화기를 바라본다.

 

 

분명 나도 사랑의 비극에 있어서 가해자가 된 적이 있다. 내가 아팠던 만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한 적이 있다. 그 모든 비극들속에 내가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 만큼 누군가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비극들이 있기 전, 거기에는 햇살 찬란한 기억들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나. 우리는 우리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상대를 용서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 비극 역시도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지고 말것이다. 사랑을 잊고 상대조차도 잊혀지는 순간들. 그건 십 대여도 삼십대여도 마찬가지. '햇빛 가득한 어떤 기억'(p.188) 이 그를 녹여준다. 그는 알약통을 눈 앞에서 치운다. 사노라면 다시 눈 앞에 알약통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통을 다시 치우게 되는 기억들을 불러낼 수 있다. 햇빛 가득한 일들은 다시 찾아와서 켜켜이 기억으로 쌓일테니까.

 

 

 

그의 몸속에 있는 커다랗고 무거운 덩어리는 콘크리트로 된 것이 아니었다.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햇빛 찬란한 기억이 덩어리를 녹이기 시작하는 지금, 그는 그 사실을 깨닫는다.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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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2-10-08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받았던 상처보다는 내가 상처를 줬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커져가더군요.

도서관에 신청한 '소수의견'이 얼마전에 왔길래 주말에 읽었어요. 법률쪽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작가가 쓰면서 공부 많이 한듯 하더군요. 전 소설이 너무 현실적이면 '에잇, 소설에서라도 좀 비현실적이게 해피앤딩이면 안돼?' 이러다가도 또 해피앤딩의 소설을 만나면 '뭐냐 이게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세상에 해피앤딩이 어딨어?'이러면서 혼자 투정을 부려요. 소수의견도 그랬답니다 '에잇!!!'하고 말이에요.

월욜 아침부터 머그잔을 씻다가 놓쳐서 홀랑 깨뜨려 먹었네요. 에잇!!

다락방 2012-10-08 09:55   좋아요 0 | URL
마중물님, 저도 그랬어요. [소수의견]을 읽을 때, 에잇, 소설에서만이라도 좀 다르게 끝나면 좋잖아, 했다가 아니 그러면 현실적이질 못하지, 현실은 이따위인거야, 하고.

아니, 그나저나 머그컵을 깨버리셨다니!! 흑흑. 그런 기억은 빨리 잊으세요, 빨리. 마중물님 다음 책은 어떤걸 읽으려고 골라두셨나요?

아무개 2012-10-08 10:11   좋아요 0 | URL
<생의 이면> <굿바이 카뮈> <인간의 굴레에서> <이반데니소 비치,수용소의 하루>를 대출해왔어요.
지금 회사에서 읽고 있는 책은 <굿바이 카뮈>입니다.

머그컵이 깨져서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까봐 신경쓰였는데
'김치찌개'를 먹고싶다는 생각으로 올인 되버렸습니다.
다락방님 덕.분.입.니.다! ^^

다락방 2012-10-08 12:05   좋아요 0 | URL
[굿바이 카뮈]는..뭔가요. 제목 되게 어렵게 생겼어요. ㅎㅎ [인간의 굴레에서] 도 어려울 것 같고. ㅎㅎ

저는 어이없게도 [연애와 결혼의 원칙]을 시작했어요. 이게 좀 황당한게, 이런 책(?)인줄 모르고 읽었는데 이런 책(?)이라서 당황스러워요. 그런데 좀 재미있기도 해서 일단 끝까지 읽어보려구요. ㅎㅎ

moonnight 2012-10-08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책부터 보관함에 넣고;;
저는요. (뜬금없지만;;) 파란 알약 한 통. 이 무척 부럽습니다. 뭐랄까.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해질 것 같아요.

다락방 2012-10-08 12:36   좋아요 0 | URL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면서 파란 알약을 한 통 준비해놓은 주인공 때문에 애가탔어요, 문나잇님. 이것은 그의 첫사랑이었고 또 아팠죠. 그가 이 순간을 견뎌내야하는데, 그걸 할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더라구요. 애잔하다고 해야하나, 여운이 있는 책이에요, 문나잇님. 게다가 아주 빠르게 읽히고요.
 















윤보인의 『뱀』을 읽다보면 김이설이 떠오르고, 박연준이 떠오르고, 김사과가 떠오른다. 그들 사이의 어디쯤, 을 작가가 노린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나 윤보인은 그들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김이설의 고발성을 가졌고 김사과의 하드코어를 가졌다. 그런데 박연준같은 아련한 슬픔도 있다. 윤보인의 책속에서 외로운 사람들은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비참함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희망은 저 멀리 있는 것. 해피엔딩은 그들에게 생소한 단어. 만약 내가 일본 소설인 '가네하라 히토미'의 『뱀에게 피어싱』을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책, 『뱀』은 끔찍할 정도로 하드코어인 건 아니다. (하드코어를 좋아한다면 이 세상에 '뱀에게 피어싱'만한건 없다고 생각한다. 의미는 없는 하드코어였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실린 첫 단편 「뱀」에서 주인공의 외로움보다 내게 더 끔찍하게 느껴졌던건 어항에서 키우던 뱀이 없어진걸 발견하게 된 순간이다. 허물을 벗고 탈출한 뱀. 으악, 그 뱀이 어디로 간걸까. 난 절대로 뱀을 키우지 않겠어. 엊그제 만난 친구가 키우던 개구리가 밤사이 어항을 탈출한것을 여동생이 잡아서 다시 넣었다고 한 말도 생각났다. 으악. 난 개구리도 안키울거야. 일전에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서 악어를 애완용으로 키우다가 너무 커져서 차 트렁크에 싣고 달리던 장면도 생각났다. 난 악어도 안키우겠어!



뱀 
악취 
줄 
일요일 
꼽추의 장례식 
바실리 사원 
살풀이춤 



이 책에는 총 여섯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나는 어젯밤 네 번째 단편인 「꼽추의 장례식」까지 읽었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 생각했다. 단편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단편도 짧지만 하나의 이야기인데, 그 단편을 한 편 씩 읽어야 되는게 아닐까? 나는 항상 단편집을 한 권의 책으로 대하고 손에 잡으면 다 읽었기 때문에 많은 단편들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게 아닌가. 그래서 단편은 기억날만큼 강렬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렇게 읽었어도 피츠제럴드는, 로맹 가리는, 줌파 라히리는 여전히 기억나잖아. 윤보인의 단편들은 강렬하니 한 권을 다 읽어도 되지 않을까? 아니, 그걸 떠나서 이건 한꺼번에 주루룩 다 읽어내기엔 좀 벅차. 이것들을 단숨에 다 읽는건 내가 나한테 좀 못할짓인것 같아. 하루에 한 편씩만 읽어도 충분히 우울해지는데 이걸 죄다 읽자고? 어림없는 소리. 네 편이면 선방했어. 그만둬. 그리고 이건, 그러니까 나머지 두 편은 나중에 한 편, 그리고 또 나중에 한 편 읽도록 하자. 그렇게 나는 책장을 덮고 침대에 책을 두었는데, 그건 베개 옆이었다. 그리고 표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화장대 의자 위로 책을 치워놨다. 꿈에 뱀 나오면 어떡해.



책을 치웠기 때문인지 꿈에 뱀이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꿈에 나는 갈비를 데웠다. 그리고 약한불로 데워, 약한불로, 라고 잠꼬대를 하다가 내 잠꼬대 소리에 놀라 깼다. 갈비는 약한불로.



자, 다시 단편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나는 며칠전부터 피츠제럴드의 「리츠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를 읽고 싶었다. 분명 일전에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단편으로 읽었는데 어째서 기억나지 않을까? 리츠호텔만큼 큰 다이아몬드 얘기는 당연히 아닐테고, 그것은 상징이나 은유일테지, 어떤 내용인지 다시 읽어보자 싶어서 민음사의 단편을 꺼내들었다.


















아, 그런데 리츠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는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었다. 정말 그런, 그토록 큰 다이아몬드였다. 일전에도 피츠제럴드의 단편 「낙타의 뒷부분」을 읽고, 정말 낙타의 뒷부분의 얘기라며 놀라서 페이퍼를 썼던 기억이 나면서, 그래, 피츠제럴드는 정말 그것에 대해 얘기했었지!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자, 보자.



존이 열심히 말을 이었다. "다이아몬드도 있었어. 신리처 머피네 집에는 호두만 한 다이아몬드가 있는데 ‥‥‥."

퍼시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 아버지한테는 리츠칼튼 호텔보다 더 큰 다이아몬드가 있는걸." (p.136)



아, 정말 그런 다이아몬드에 대한 얘기였어. 정말 큰 다이아몬드에 대한 얘기. 이 단편의 등장인물인 존이 시골에서 보스턴의 명문학교로 진학하는 얘기는 선명히 기억났다. 맞어, 이건 읽은 기억이 있어! 그런데 왜 정말 저렇게 큰 다이아몬드에 대한 얘기는 전혀 기억나지 않을까. 자, 다시 다이아몬드.



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침대야, 아니면 구름이야? 퍼시, 네가 나가기 전에 사과하고 싶어."

"왜?"

"네가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말했을 때 의심했던 거." (p.145)



나도 의심했다. 그러니까 어떤 허영의 표시이지 정말로 그렇게 큰 다이아몬드가 있을거라고는(아무리 소설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퍼시를 의심했다. 퍼시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뭐, 결과적으로 보자면 퍼시가 존에게 미안하다고 오백 번 사과해도 모자라지만. 아니, 사과 따위로 될 일이 아니지만.





요즘 나의 남동생은 '하림'의 「출국」이란 노래에 뒤늦게 푹 빠져있다. 어제와 오늘, 생각난김에 친구들과 그 노래를 주고 받으며 하림에 대한 이야길 했다. 한 친구는 이 노래를 들을때마다 자기는 미친다고 했다. 출국도 좋고 같은 앨범에 실린 난치병도 좋다고. 나는 하림이 [ven] 이란 그룹으로 활동했던 시절의 노래, 「키보다 큰 사랑」을 엄청 좋아한다고 했다. 맙소사,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나는 십년도 훨씬 더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노래를 처음 라디오에서 듣게 될 당시의 나는 대학 4학년이었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재수생 남자아이와 사랑에 빠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하를 어떻게 남자로 보겠느냐고 코웃음치며 다녔는데, 나는 그때 단단히 빠졌더랬다, 정말. 이런일이 내게 있을 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녀석은 편의점에 적힌 연락망을 보고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겠다고 온 날 부터 내게 매일매일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서 나는 귀찮아 핸드폰을 꺼놓기도 했다. 다른 알바생들은 원래 알던 아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처음 본다고. 처음에 나는 그런 녀석이 귀찮고 싫었다. 몸에 딱 맞는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도 싫었고 그렇게 싫다는데도 들이대는게 싫었다. 그런데 어느틈엔가 녀석의 전화가 오지 않았던 날, 하루 종일 우울했다. 그래서 나는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왜 전화 안해? 그 문자를 받자마자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전화 기다렸어? 라고. 그 때, ven  의 노래를 듣게 된거다.



사랑했었어 너 떠나지만 
함께한 시간 너라서 나 행복했어
이젠 슬픔만 남게 됐지만 
너때문이면 아파도 나 견딜거야
내 친구의 누나였던 너를 
처음 만나서 시작된 사랑
빨리 어른이(어른이) 되고 싶었어 (싶었어)
뭐든 널위해(널위해) 다해줄 내가 되도록
이별이(이별이) 먼저 오게 됐지만(됐지만) 
니가 있어서(있어서) 그때는 난 행복했어

*내 친구의 누나였던 너를 
누나라곤 한번도 부를수가 없었던거야
사랑했지만 내 전부였지만 
너보다 키도 큰 나였지만 
내 넓은어깨로 아무리 안아도 
언제나 너에겐 부족했겠지

너를 사랑해도 너의 어려움에도 
달려가 도울수 없었던 혼자서 
울어야 할 시간들이 더 많던 사랑이야
사랑해~~~

널 사랑해 세상 누구에게도 
너라고 말할수 없었던 웃음에 
가려진채 잊혀질 내사랑을 너만은 
너만은 기억해줘 

나의 사랑을



아,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이 노래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내내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내가 이 노래를 들었던 대학 4학년때도 이 노래는 몇년전 발표된 노래였던지라 내가 간 레코드샵에서 이 앨범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 때의 나는 시디가 아닌 테입을 들으며 다녔다. 보다못한 친구가 자신의 동네에 있던 허름한 레코드 가게를 찾아가 다행히 하나 남아있던 테입을 사다 내게 주었었다. 오늘 다시 이 노래를 찾아듣는데, 하아- 






몇 년 전,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다시 다른 직장으로 옮겨서도 꽤 오래 근무했을만큼 그때로부터 오래된 후에,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청나게 오랜만이라 우리는 반갑게 통화를 했는데, 녀석은 내게 말했다. 

그때, 너도 나 좀 좋아하긴 했어? 

나는 녀석에게 당연하지, 그렇게 매일 전화하는데 어떻게 안좋아해, 라고 답했다. 그러자 녀석은 '그러면 지금 다시 매일 전화하면 우리 잘 될 수 있어?' 라고 하는거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진 않다고.


아, 이게 다 하림 때문이야. 방금전에, 오전 09시 40분. 나는 충동적으로 까페로 달려가서 생크림이 얹어진 뜨거운 커피를 사왔다. 생크림을 좀 더 넣어달라고, 많이 좀 넣어달라고 컵의 뚜껑을 닫기전에 말했다. 지금은 이걸 꼭 마셔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생크림이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아, 원래는 제목을 [단편을 읽는 방법]으로 하고 문학적인 페이퍼를 쓰고 싶었는데, 이게 뭐람.


다 하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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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5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2-10-05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리츠호텔만한 다이아몬드 저도 읽었어요 ㅋㅋ 굉장히 특이했던 작품이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생크림 얹은 커피는 역시 커피 지름신을 부르네요^^ 다락방님이 러브 스토리는 언제나 들어도 달달해요. 생크림보다 더요

다락방 2012-10-05 17:26   좋아요 0 | URL
네, 블랑카님. 굉장히 특이하고 섬뜩한 작품이에요. 그 엄청나게 부자인 집에 친구를 초대해서 다이아몬드 산을 보여주고 대신 그 말이 밖에 새지 않도록 그들을 나중엔 가두거나 죽여버리죠. 어떻게 이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될 수 있는지 새삼 피츠제럴드에게 감탄했지 뭐에요!!

달달한 부분만 적어서 달달하지, 저 뒤는 아주 썼답니다. 흑흑 ㅠㅠ 내게 사랑은 너무 써~♪

테레사 2012-10-05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근데 다락방님, 다락방님은 주로 언제 이런 글을 쓰세요? 진짜 부지런하시고, 기억력 좋으시고, 문장력도 짱!!

다락방 2012-10-05 17:49   좋아요 0 | URL
저는 주로 사무실에서 근무시간에 직장 상사의 눈치를 봐가며 다다다닥 씁니다. 뭔가 생각나면 긴 글이어도 쓰는데 시간이 걸리지는 않아요. 다다다닥 쓰면 되니까ㅎㅎ 부지런하기 보다는 근무시간에 딴짓을 하고 있...............인용문은 책 봐가면서 쓰는거니 기억력은 패쓰고, 음, 문장력은 .. 어디...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칭찬 들으니 짱 좋네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당고 2012-10-0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다른 소설집에서 윤보인의 <악취>를 읽고 충격받았더랬어요. 저한테는 좀 강렬했나 봐요. 흠-

다락방 2012-10-05 17:52   좋아요 0 | URL
우앗, 저 악취를 빼놓고 읽은 것 같아요! 어떻게 건너뛴거지? 오늘 집에 가서 책을 다시 봐야겠어요. 바로 [줄]로 넘어갔는데..

유부만두 2012-10-05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하림은 그저...닭;;;;

다락방 2012-10-05 17:53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아까 제가 알고 있는 정보가 맞나 싶어서 검색창에 하림 쳤더니 닭이 먼저 뜨더라구요. ㅋㅋㅋㅋㅋ

가연 2012-10-0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극적인 재수생이네요. 근데 나이차가 쫌..ㅎㅎ 대학교 4학년과 재수생이면 한 4살 차이나지 않나요? 제 친구 중에 그 정도 나이차보다 조금 더 심했던가 덜했던가 어쨌든, 그렇게 사귀고 있는 아이가 있는데 여자애가 나이가 어린 쪽이에요. 그런데 풋풋하기는 한데 싸우기도 많이..ㅎㅎ 저야 그저 부럽.. 지만, 아아니, 그게 아니라 어쨌든 먼 훗날의 이야기보다는 사귈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구먼요

다락방 2012-10-06 12:23   좋아요 0 | URL
나이차는 세 살이었어요. 저는 스물셋 그 친구는 스물. 이건 뭐 나이차 나는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실제로 띠동갑으로 나이많은 남자를 만나보기도 했고 네 살 어린 남자를 만나보기도 했는데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이 생기는거지 나이는 크게 장애가 되거나 불편하진 않은것 같아요. 전 누굴 만나든 별로 싸우면서 사귀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자주 싸웠다는 친구는 다른 사람을 만나도 자주 싸울것 같은데요? 그건 나이들고 이별과 사랑을 반복하면서 점차로 나아지겠지만, 사람 성향문제인 것 같아요.

다 지나가버린 일이라거나 다가올 일들에 대한 얘기는 부담없이 할 수 있지만 진행중인 얘기는 좀 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건 엄청나게 (제 개인적으로는)오글거리는 일이에요. ㅎㅎㅎㅎㅎ

크크크 2013-06-13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덕분에 이 노래 듣네여... 감사여...

제이제인 2015-01-27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저와 비슷한 추억을 가지고 계시네요

물론 전 반대의 남자역할이였지만 ㅋ

하림을 좋아해서 틴휘슬이란 악기도 접해보고 ㅎㅎ 키 보다 큰 사랑에 푹빠져 살았던

그때가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