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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평점 :
약속된 시간이라면 기다릴 수 있다. 일 년 뒤, 혹은 오 년 뒤라도. 그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릴 수 있다. 일상을 보내다가 하루가 또 지났어, 그 날이 가까워졌어, 하는 마음으로 매시간을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기약없는 날이라면 달라진다. 희망이 없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 매일을 어떻게 보내야할까. 그리고 내가 기다리는 날이 사랑하는 사람이 내곁에 돌아올 날이라면. 아니,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면,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여자는 이중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갇힌 남자에게 편지를 띄운다. 이중종신형이란,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살았던 나이만큼 그 시신을 감금해 놓는다는 가혹한 형벌이다. 그녀와 그는 결혼한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면회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와의 결혼을 신청하지만 번번이 기관으로부터 거절 당한다. 그녀는 바깥에서 자신의 일상을 살면서 그에게 편지를 쓴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그녀 주변의 일상을 담는다. 매번 다정한 호칭으로 그를 부르며 편지를 시작하고 또 매번 당신의 아이다, 라고 편지를 끝맺는다.
당신의 아이다.
내 이름앞에 붙는 '당신의' 란 말이 이토록 무게가 느껴지는 단어였다니. 이 소설에서 나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습관적으로 붙이는 말이 아니다. 그녀에겐 진심이다. 그녀는 바깥에 있으면서, 감옥에 갇힌 그를 생각하며 당신의, 를 붙인다. 이런 그녀의 진심은 그에게 보낸 편지마다 묻어나지만, 그녀의 그 깊은 마음은 보내지 않는 편지에서 더 드러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과 다정한 일상은 그에게 보내지만, 아팠고 고통스러운 일들, 그로 하여금 같이 괴로워하게 만드는 일에 대한 편지는 보내지 않는다.
남자의 답장은 이 책에 실려있지 않다. 그녀의 편지들만으로 읽어보건데, 그녀는 그로부터 답장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건 그녀의 편지이고, 그녀의 편지뒤에(그녀가 양면으로 쓰질 않아서) 그가 적어둔 메모이다. 야속하게도 그 메모에서는 다정한 언어를 발견할 순 없다. 그는 여전히 감옥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저항을, 대화를, 혁명을 기록한다. 그 메모는 그 자신의 것이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외침이기도 하고, 그녀에 대한 속삭임이기도 하다. 그 메모는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다. 그 메모는 그녀로부터 받은 편지로부터 파생된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하루, 그는 단 한 줄의 짧은 메모를 그녀의 편지 뒤에 적어둔다. 바로 이런 메모를.
아. 그는 메모에 그녀에 대한 사랑을 속삭인 적이 없다. 그녀에게 직접 전해지는 편지에 그가 어떤 말을 적어두었던간에, 메모로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단 한 줄은 그동안의 메모와 다르다. 이 메모는 그녀가 볼 수 없다. 이 메모는 그녀의 귓가에 그가 속삭이는 말이다. 이건 그녀에게 전해지는 편지가 아니다. 이건, 그녀가 옆에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매일 매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는 그가, 온전한 자신의 마음으로 적은 것이다. 그녀가 알 수 있을까? 이걸 적어두는 그의 마음을. 어느 한 밤에 그에게 잘자라고 속삭였음을, 그녀가 죽기전까지 알게 될 날이 올까?
그녀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 그려진 손 그림들과 문장들 그리고 행간들. 그의 메모와 여백 그리고 보낸 마음과 보내지 못한 마음까지, 꾹꾹, 진심이 눌러 담겨져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에 꽂아넣기도 아쉬운데, 그러나 책장에 꽂힌 순간 내 책장이 진심 가득한 마음으로 꽉 차게 된 것 같아 뻐근해진다.
좋은 소설이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런 소설을 쓸 수는 없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