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런'은 데이트앱을 통해 '패트릭'이란 남자와 만나게 되고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만날수록 더 좋아지는 남자. 결국 내 연애가 그간 실패로 끝났던 것은 결국 이 사람에게 닿기 위한 게 아니었나 싶게 만든 남자.



엘런은 실패로 끝난 자신의 과거 연애를 늘 뭐랄까, 정말로 실패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엘런은 그 세 번의 연애가 사실은 지금 이 해변에서의 순간이라는 운명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기초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트릭 스콧이라는 녹색 눈의 측량사에게 닿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p.37)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나면 늘 언제나 슬프고 힘들지만, 언젠가의 연애에서는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연애들이 그런 식으로 끝난 것이 내게 행운이었다' 라고 생각하게 됐던 거다. 만약 그 연애들 사이에 결혼이라도 끼어있었어봐, 나는 지금 이 남자를 만날 수 없었을 거 아냐!

분명 헤어지고 다시 혼자가 되는 힘든 시간들을 겪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좋았다고 생각했던 일이 내게도 분명 있었던 거다.


그러나 연애를 하고 헤어졌다고 해서, 다시 싱글이 됐다고 해서 그 사랑이 '실패한' 사랑은 아니라고, '마리 루티'가 자신의 책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사랑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마리 루티의 말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장기적인 안정성을 기준으로 연애의 성공을 측정하곤 합니다. 남녀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지속석 외에도 다른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영혼을 건드리지 않는 밋밋한 관계를 오래 끌고 가느니 아주 잠깐이라도 무모한 열정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불안정한 관계를 좇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안정감, 편안한, 신뢰감이 추구할 가치가 없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를 이런 식으로만 평가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근본적인 소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감동적인 통찰은 사랑의 좌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좌절은 인생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재평가하게 만듭니다. 그것이야말로 좌절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보상인 셈이죠. (pp.22-23)




엘런은 패트릭을 만나기 위해 결국 이렇게 돌아온 것일까, 를 생각하는데 패트릭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과연 그 말은 무엇일까. 나는 혹시 프로포즈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할 말이 있다고 한 뒤에 나쁜 말을 듣고 싶진 않으니까.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 뒤에 고백을 들은 적도 있어서, 당연히 흐름은 그렇게 가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엘런은 '우리는 아닌 것 같다, 그만 만나자'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워한다. 잠깐 그가 화장실 간 틈을 타, 그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려는 거구나, 그만 만나자고 말하려는 거구나, 두려워하고 겁을 먹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것처럼 '너를 사랑해' 하는 고백도 아니고, 엘런이 생각한 것처럼 '그만 만나고싶다'는 고백도 아니었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 그에게 스토커가 있다고 한다. 스토커가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패트릭은 '사스키아'란 여자와 사귀었고 함께 살기도 했다.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애인이면서 동시에 패트릭의 아들인 '잭'의 엄마 노릇을 했다. 사스키아가 채 준비되지 않았는데, 사스키아는 아직 사랑으로 가득찼는데, 그런데 패트릭은 사스키아에게 '그만두자'고 말을 했던 거다. 그 후로 계속해서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뒤를 따라다니고, 그가 없는 동안 집에도 들어갔다 나오고, 아들의 축구경기를 보러가고, 이메일을 보내고 문자메세지를 보낸다. 패트릭이 그만하라고 해도 막무가내. 그녀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신에게 패트릭이 없는 게, 잭이 없는 게.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사귀려고 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결국 그녀는 패트릭이 새로 만나기 시작한 '엘런'이 최면술사란 직업을 가진 걸 알고 그녀에게 찾아가 가명을 대고 최면을 받으며 엘런의 내담자가 되기까지 한다.



'리안 모리아티'의 책은 읽을 때마다 항상 수다스럽게 느껴졌다. 조용히 은근히 감상할 수 있는 책이라기 보다는 헐리우드 영화를 한 편 보는 것 같은, 그것도 시끄러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딱히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그런데 나 마니아..), 그녀가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쓰는 건 사실이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가 힘드니까. 게다가 수시로 '나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만, '엘런'에게 이입이 되지 않아 초반부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남자가 전여친으로부터 아직 정리되지 못했다는데, 나는 너무 짜증이 나는 거다. 그런데 엘런은 그녀가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는거다. 좀 재미있게 생각한달까. 나는 이런 엘런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아서 너무 싫은 거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에게 '전여친이 스토커가 되어서 쫓아다녀, 지금 여기에도 와있어' 라고 하면 너무 스트레스 받고 무섭고 걱정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 관계를 어쩌나 고민할 것 같은데, 엘런은 그렇지가 않은 거다. 왜 스토커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 아 스트레스...



그런데 놀라운 건, 읽다 보면 나 역시 스토커인 '사스키아'에게 이입하게 된다는 거다. 나는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그는 내게 끝났다고 하는거지, 나는 여전히 그의 옆자리가 내자리인것 같은데, 왜 그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두려고 하는거지. 노이해... 이런 마음, 너무 잘 알겠는거다. 그를 향한 집착,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 그게 뭔지 너무 알겠어서, 그래서 또 스트레스인거다. 내가 사스키아, 이 스토커랑 다른 게 뭔가, 이 집착, 이 열정, 이 미련... 모두 다 내것인데, 나나 사스키아나 별다를 바 없는 거 아닌가. 스토커에게 이입하다니, 그래도 되는 것인가... 막 이렇게 되어가지고 스트레스가 대박 찾아오는 거다. 나.. 스토커 가능성 있는건가. 이래서 너무 스트레스 ㅠㅠ



누구나 사랑을 잃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힘이 든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이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깝고 친근했는가, 얼마나 많은 걸 나누었는가. 우리가 그저 친구였다면 계속 그렇게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여전히 다정할 수 있을텐데, 우리가 애인이었으므로 다시는 이 뜨거운 사랑을 줄 방법도 없고 그의 다정함을 느낄 수도 없다니. 가장 가까운 사이가 어떻게 이토록 가장 먼 사이가 되었나, 다시 보지 않을 사이가 되었나, 너무 슬프잖아. 아, 이별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한 사람과 아주 친근한 관계를 맺고 매일같이 함께 자고 일어나고 주기적으로 엄청나게 사적인 일들을 함께하다가 갑자기 그 사람의 전화번호는 물론, 어디에서 사는지,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지난주에는, 작년에는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이가 되다니, 엘런에게는 가끔 그런 상황이 아주 기묘하고도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p.38)



매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매시간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주말에는 무얼하는지 죄다 알고 있다가 이제는 어디에서 사는지, 무얼 먹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는 거, 엘런 말대로 너무 기묘하고 잘못된 것 같잖아. 그렇지 않은가요, 여러분... 슬픔의 새드니스.....




엘런과 패트릭의 사랑은 무럭무럭 자란다. 사스키아가 졸졸 따라다녀도 그들의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 그렇다고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엘런은 '나는 사스키아만큼 패트릭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 사랑의 크기는 그보다 작다' 라고도 생각하고,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게 맞나, 나는 그저 사랑에 빠지고 싶었던 건 아닌가'도 수시로 자신에게 묻는다.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깊어가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 남자 때문에 짜증도 난다. 아아..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지금 아버지 사진은 하나도 없냐고 물은 건가? 그러니까 내 얘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거네? 내가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한지 벌써 몇 년은 됐다는 듯이, 자세한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거야? 엘런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또다시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워졌다. 내가 이 사람하고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에 절실하게 매달려 있는 거면 어쩌지? 이 사람에 대한 모든 생각이 내 지나친 망상이면 어쩌지? 이 사람이 사실은 그저 피상적이고 이기적인 멍청이라면 어쩌지? (p.124)




그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 그들은 같이 살기로 한다. 그렇게 패트릭과 그의 어린 아들 잭은 엘런의 집으로 짐을 싸가지고 들어오는데, 아아, 여기서 또 한번 스트레스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데이트 할 때는 몰랐는데, 데이트 할 때 그의 집에 가서 자고 그럴 때는 몰랐는데, 이 남자가 세상에,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이었고, 오래된 짐을 가져와서 놓고는 그걸 치우라고 치우라고 잔소리를 해도 치우지 않는 사람이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엘런은 이제 딥빡이 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씨양 내가 뭘한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스트레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아, 이 부분에서 나 엘런하고 같이 대박 스트레스 받았다. 그러게, 혼자살아 이 여자야!! 막 이렇게 일어나서 소리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달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 패트릭 거지?"

매들린이 덥석 그 주제를 잡았다.

"맞아. 계속 옮겨달라고 부탁했거든. 상자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잔소리를 하지 않고 남자가 일을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엘런이 물었고,

"오호, 그거야말로 10억짜리 질문이군."

매들린이 대답했다. (p.408)



아아 스트레스 스트레스. 엘런은 그러지말자고 스스로에게 속삭이지만, 자꾸만 상자는 언제 치울거냐고 묻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외조부가 살던 이 집이 패트릭의 짐으로 좁아지고 지저분해졌어, 아 빡침이...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


그러나 무릇, 사랑이란 무엇인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게 되는데 어찌 순탄하기만 할것이요, 이렇게 마찰이 일어나면 해결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짐을 치우지 않는 패트릭과 거기에서 빡침 오는 엘런을 보면서 건지 아일랜드 생각을 했다. 건지 아일랜드에서도 약혼자가 같이 살러 들어오기 때문에 책장의 절반을 내어줬더니 거기에 트로피만 잔뜩 진열하는 남자가 나왔더랬지. 나중에 여자는 약혼자랑 헤어지지. 후훗.



그러나 사실 엘런이 패트릭과 결혼하게 되는데 가장 망설이는 이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은 따로 있었다. 어쩌면 그가, 패트릭이, 죽은 그의 아내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신과 비교하며 자신을 그만큼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는 것. 그 점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늘상 그녀를 괴롭힌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이 남자가,그러나 나를 '가장'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

슬픔의 새드니스..

우리는 이렇게 다들 각자의 슬픔을 안고 사는건가요..






한편,스토커 사스키아는 패트릭의 애인으로서 그리고 잭의 엄마 역할까지 잘해내면서 행복했다. 게다가 패트릭의 부모님들까지도 자신을 좋아하고 다정하게 대해줬고. 그런데 패트릭과 헤어지니 잭도, 그리고 패트릭의 부모님도 잃게된 것이다. 자신은 이곳에 다정하게 지냈던 사람, 소속감을 느끼던 사람이 이들 뿐이었는데, 그런데 한꺼번에 이들을 모두 잃게된 것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잃었지만, 그 사람들을 대체할 사람들을 나는 충분히 알지 못해. 나에게는 이모도, 고모도, 사촌도, 조부모도 없단 말이야. 나는 백업이 되어줄 사람들을 마련해두지 못했어. 이런 상실을 겪었을 때 나를 지탱해줄 보험을 들어놓지 않았어. (p.225)



사스키아가 패트릭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 그의 집에 침입하고 그의 새로운 애인을 감시하는 것 모두, 그녀에게는 패트릭 외에 다른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항상 같이 있고 싶고 생각나고 보고싶고. 헤어진 뒤에 상실감 역시 어마어마할 것이다. 늘 친근했던 그의 소식을 이제 알 수조차 없다니 얼마나 미칠 노릇인가. 그러니 어떻게해서든 그의 삶을 엿보고 싶고 누구를 만나는지 알고 싶은 건 당연한 욕망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스키아와 내가 같다. 그러나 사스키아는 그러기 위해 상대의 스트레스와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한다. 누굴 만나는지 보고 약속장소에 따라가고. 그녀의 삶은 온통 그로 채워져있다. 나는 그녀가 갈 데까지 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토킹을 하면서 그녀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녀는 여전히 '그의 옆엔 내가 있어야해' 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면 화가 난다. 제발 날 따라다니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게 스토킹을 하면서 그녀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그녀의 바람대로 '역시 너만큼 날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어' 하고 그녀에게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 이제 패트릭의 새로운 여자친구는 임신했다. 그 사실마저도 사스키아는 알게 됐고, 이 때는 정말 그녀가 미칠지경에 놓인다. 아이고.. 참... 몰랐으면 미치지는 않았을텐데. 게다가 초음파 사진 찍으러 패트릭과 엘런이 잭까지 함께 데리고 갔는데 거길 따라가서 통곡을 한다. 이 때는 정말이지 너무... ㅠㅠ 아니 이 여자야, 거길 왜 따라가서 자기한테 스스로 상처를 줘, 몰랐으면 됐잖아, 몰랐으면...

몰랐으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스토커에게도 스토커의 사정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이 이야기를 시작한걸까, 싶었는데,

마지막에는 스토커가 상대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얘기해준다.

사스키아 역시도 자신이 자신의 감정, 자신의 사랑에 빠져서 상대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스러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은 패트릭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패트릭이 어떤 기분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다.


나는 상대를 괴롭히는 사랑은, 그것이 상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스토커의 경우에도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 잊지못해', '나는 늘 너랑 있고 싶어' 라고 표면적으로 상대를 사랑해서라 말하지만, 그러나 스토킹을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지마', '하지마', '니가 그러면 괴로워'라고 누누이 말해도 그걸 들을 생각조차 없는 거다. 자신의 사랑에 갇혀서 거절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도무지 상대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거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리는데, 네, 그 사랑 크죠, 너무 큰데, 그거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에요.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를 괴롭히면 안되는거죠. 괴롭게 하는 게 무슨 사랑이에요.



사스키아가 뒤늦게라도 이걸 깨닫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당신이 계속 전화를 걸었을 때, 패트릭은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면 패트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패트릭은 그날 밤 두려웠을까요?"

이상한 건, 지난 3년 동안 나는 패트릭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작 패트릭이 어땠을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거야.

"폭력을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육체적인 폭력만 폭력인 건 아니에요. 당신은 패트릭을 무기력하게 만든 거예요."

"무기력하게 만들다뇨? 나는 패트릭을 사랑했어요. 그저 다시 함께하기를 바란 것뿐이에요."

"다시 생각해봐요, 사스키아."

내 정신과 의사는 나를 어디로든 달아나지 못하게 했어. 마치 나를 거울 앞에 세워놓고는, 내가 자꾸 외면하고 다른 곳을 보려고 할 때마다 내 어깨를 붙잡고 다시 거울 앞으로 돌려놓는 것처럼 느껴졌어. 내가 손으로 눈을 가릴 때마다 그녀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고 내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는 거야. 마침내 나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게 말이야. (p.621)






진짜 반복해 말하지만, '너 없이 안돼' 는 안된다. '너가 없어도 된다'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씩씩하게. 다른 사람들과도 다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돼. 물론 당신이 있으면 내 삶은 더 즐겁고 행복해지겠지, 가급적이면 당신하고 같이 살고 싶겠지. 그러나 '너 없으면 난 못산다' 로 살아가면, 헤어짐을 견디지 못할 뿐더러 상대를 괴롭히게 된다. 범죄자가 되는 겁니다.

사스키아가 자신이 '백업해둔' 인간 관계가 없다고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없으니 미치는 거다.

그러나 사스키아의 경우, 없다고 생각한 것 역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 곁에도 다른 사람들이, 친구랑 회사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녀가 몰랐다. 그녀가 그들을 관계라고 생각하지를 않은 거였어. 이게 그녀가 자신의 사랑안에 너무 갇혀 있어서 그렇다. 자기 사랑에, 자기의 큰 사랑에 갇혀 있으니, 상대으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따라다니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보지도 못해. 그것은 그렇다면 '상대를 향한 이토록 큰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내 사랑은 사랑이되 상대의 사랑은 타이밍일 수 있다.

나 역시 내 사랑이 타이밍이고 상대의 사랑이 사랑이었던 적도 있고.

사랑이 그저 순수한 사랑이라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게 시작되고 또 끝나는 관계는 드문 것 같다. 사랑이 식어서 헤어지기도 하지만, 사랑이 식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이유들로도 헤어질 수 있다.

사랑은 중요하고 또 많은 것들을 해결해주지만, 사랑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순간순간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홀로 서는 것도, 살아갈 방향을 바라보는 것도, 때로는 애인과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거니까.





내 정신과 의사는 패트릭이 나와 헤어진 이유가 사실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그녀는 패트릭이 나와 헤어진 건 그 자신의 문제, 콜린을 잃은 슬픔 때문일 거라고 했어.

"만약 그때 회의장에서 만난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 엘런이었다고 해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헤어졌을 거예요."

내 정신과 의사는 그렇게 말했어.

"아니에요. 두 사람은 소울메이트인걸요. 두 사람은 정말 서로를 사랑해요."

내가 말했어.

"타이밍의 문제예요." (p.623)





어디에서 어떤 타이밍이 어떤 방식으로 끼어든걸까, 나는 계속 생각한다. 멈추지 않고 생각한다.

이토록이나 큰 사랑을 품고서, 아무도 이렇게 큰 사랑을 품을 수 없다고 자부할만큼 큰 사랑을 품고서는, 그러나 사랑하고 헤어지게 된 것은 어디에서 어떤 우연이 끼어든걸까. 어쩌면 운명이란 큰 틀에서 이 시기에 누군가 들어오고 또 이 시기에 누군가 나가고 하는 것들이 다 정해져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정해져있다면, 그래서 이 시점에 헤어져야 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큰 사랑은 남겨두지 말고 같이 거둬갔어야 하는 건 아닌가. 이 감정은 남겨둔채로 관계만 정리하라고 하면 그건 너무 엉망진창의 운명의 흐름 아닌가. 헤어지는 게 운명이었다면 고통스럽지 않아야 운명을 받아들일 거 아냐.

나에게는 사랑이었고 상대에게는 타이밍이었던걸까.




누군가를 뒤에서 한참 응시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돌아보게 돼. 실제로 쳐다보는 사람을 보지는 못하지만 공기를 흐르는 기운이 다르다는 걸 느끼는 거야.

그게 바로 내가 패트릭을 오랫동안, 충분히 오랫동안 생각하면 패트릭이 나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이유야. 같은 방에서 한 사람을 오랫동안 쳐다봤을 때 그 시선을 느낄 수 있다면, 아무리 떨어진 지역에 있어도 엄청난 감정을 계속해서 보내면, 수많은 감정을 해일처럼 보내면, 그 감정을 느낄 수도 있는 거잖아. (p.145-146)




겁나 텔레파시 쏘고 있는데, 느껴지니?







사스키아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 온 친구가 사스키아가 받은 초콜렛을 먹어봐도 되냐고 묻고서는 하나씩 계속 먹는 장면이 있다.




나는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려고 했지만, 아주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손이 너무 떨려서 꺼내지지가 않았어.

"내가 해줄게요."

랜스가 부드럽게 말했어.

"초콜릿 한 개만 먹어도 돼요?'

케이트가 말했어.

"나중에 할게요."

내가 말했어.

"초콜릿 하나 먹으면 안 돼요?"

케이트가 말했어.

"케이트!"

랜스가 말했어.

"미안해요."

케이트가 말했어.

"당연히 드셔도 돼요."

내가 말했어. (p.523)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우리가 가져다 줄게요."

케이트가 초콜릿을 두 개쩨 먹으면서 말했어. (p.524)



나는 다시 랜스의 아내를 봤어. 정말로 말랐고, 가슴은 평평했어. 엄마가 봤다면 '남자아이처럼 매력적으로 생긴 여자구나'라고 했을 것 같아. 케이트는 산림지대에서 온 사람처럼 머리가 정말 짧았고 눈이 컸어. 그리고 아주 이상한 각도로 의자에 앉아서 여전히 내 초콜릿을 먹고 있었어. (p.524-525)



아이고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나는 평소에 늘상 초콜릿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초코릿을 좋아한다. 어느 날에는 되게 먹고싶어질 때가 있는 거야. 그렇지만 매일 그런 건 아니야. 초콜릿보다는 와인을 더 사랑합니다. 아니 근데 저 장면 읽는데 갑자기 나도 하나씩 꺼내먹는 초콜릿이 너무 먹고 싶은 거다. 고디바라든가 길리안 이라든가, 왜 그렇게 하나씩 작게 들어가 있는 그런 초콜릿. 아 너무 먹고 싶어, 나도 하나씩 꺼내먹다가 정신을 차린 다음에 '헐, 내가 이거 다 먹어버렸네..' 이렇게 하고 싶은 거야. 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장면 읽은 뒤로 머릿속에 초콜릿 생각만 하다가 잊고 있었는데, 아까 페이퍼 써야지, 하는 순간 '아 초콜릿 먹고싶어!' 이렇게 된거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에게는 얼마전에 동료로부터 받은 초콜렛이 있지.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서 허겁지겁 그 초콜릿을 먹기 시작했는데, 이건 내가 원한 그 낱개 초콜릿이 아니라 뭐라고 하지, 막대 초콜릿이라고 해야 하나 통 초콜릿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부러뜨려 먹어야 하는 허쉬초콜렛이고, 아아, 초콜렛이 순수하지 못하고 피넛버터랑 캬라멜 크림.. 어쩌고 막 이렇다. 아쉬우나마 이거라도 먹긴 했지만, 이건 내가 원하는 그 초콜릿이 아니야,진짜가 아니다! 아아, 고디바 낱개 박스째 열어놓고 하나씩 집어 먹고 싶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런거 부러뜨려 먹는 거 말고, 그런걸로 하나씩 집어 먹고 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리고 제일 하고 싶은 건 다 먹은 다음에


Oops!! I did it again!!



하는 것이야...











길게 쓰긴 했는데 뭘 썼는지를 모르겠다. 킁킁.





엘런은 그런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알고 있을까? 엘런은 특별히 운동을 좋아하는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아. 엘런이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어. 나에게 엘런은 그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찬가를 읊는 사람일 뿐이야. 요가는 하겠지. 태양을 보고 합장하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할 것 같아. - P148

엘런은 언제나 엄마가 늘 엘런 자신을 그렇게 날카롭고 맹렬하게 쳐다보는 이유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건 엄마가 엘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감추려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들키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항상 사랑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엄마의 사랑스러운 단점이라고 생각해왔다. 언제나 엄마에게 ‘나를 조금만 더 좋아해봐. 사랑에 좀 더 너그러워지란 말이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가 사랑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감내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엘런도 사랑이 얼마나, 문자 그대로 얼마나 아픈지를 안다. 가슴 한가운데가 사랑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 P613

"패트릭이 널 보는 눈길이 참 좋더라. 네가 옳아. 존은 재미있기는 했지만, 패트릭이 바라보는 것처럼 너를 보지는 않았어."
"패트릭이 나를 어떻게 보는데?" - P541

"난 항상 패트릭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그를 더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냥 내가 훨신 사랑하면 되는 거니까." - P498

엘런의 혈관 속으로 따뜻하고 평온한 감정이 퍼져나갔다. 엘런의 마음을 움직인 건 패트릭이 한 말이 아니었다. 엘런의 이해가 너무나도, 너무나도 절실하다는 듯이, 말하는 내내 패트릭의 미간에 잡혀 있던 두 가닥 굵은 주름이었다. - P571

존과는 4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엘런은 존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런한테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존은 엘런하고는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였다.
엘런은 정말로 상처를 입었다. 도자기 컵 여러 개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것처럼 감정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예리한 통증이 파편이 되어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콧구멍 속을 따끔거리게 만든 고통들이 커다란 통증이 되어 쐐기처럼 가슴 깊이 박혔다. - P192

"그만두라고요?"
"맞아요. 그게 내가 주는 아주 끝내주는 충고예요. 그만둘 것!"
"그냥……그만두라고요?"
케이트는 웃기 시작했어.
"내가 치료사라면 그렇게 말할 거예요. 사스키아, 그냥 그만둬요. 스토킹은 관두고 뜨개질이나 해요!" - P588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치료했어야 했어요."
엘런은 걸어가는 로지를 보면서 말했다.
"뒤늦은 깨달음이라. 항상 문제가 생겨야 알게 된다는 거구나."
엘런의 아버지가 말했다. - P585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내 마음을 다해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반쪽 마음도 아니고, 두 번째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남은 평생을 다해서 그걸 당신에게 증명해 보이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 미친 최면술사님?" - P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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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로이트 콤플렉스] 스토커와 아버지
    from 마지막 키스 2020-10-15 10:37 
    프로이트에 따르면, 일반적인 경우에 나르시시즘은 발달의 한 단계로 간주될 수 있는데,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대상에게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러한 사랑은 보통 부모 중 한명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자기애를 다른 사람에게로 전이시키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원래의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심각한 정신 질환을 초래하게 되고, 이는 정신병의 발달 과정을 따라 진행된다.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 정신병의 징후들에는 자기 자
 
 
jeje 2019-03-29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낱개 초코렛 하나씩 집어먹고싶은 최면에 걸렸습니다아아아아.....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3-29 22:24   좋아요 0 | URL
가까운 시일내에 고디바를 꼭 사먹고 싶습니다!!! 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19-03-2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랑학 수업 꼭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19-03-29 22:25   좋아요 1 | URL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 후회하지 않으실거라 말씀드려요. 후훗 :)
 
















며칠전 읽은 소설《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에는 폭력적인 아버지가 나온다. 딸의 머리채를 잡고 던져버리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늙은 족장을 집에 데려와서는 자신의 열네살 딸을 팔아치울 계획을 갖고 있다. 열네살 딸은 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소유물로써 존재하며 그렇게 다른 남자에게 넘겨질 판이다. 여기에 딸의 의도나 목적, 동기는 없다. 집에 찾아온 늙은 족장의 눈에 띄었고, 그러므로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건네져야 했다.

《가부장제의 창조》의 <제5장 부인과 첩>은 바로 이런 내용을 다룬다. 여성학 서적을 읽어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유물로써의' 여성.

보존되어 있는 세 가지 주요 메소포타미아법전들-함무라비법전(CH), 중기 아시리아법(MAL), 히타이트법(HL)-과 성서 율법은 역사적 분석을 위한 풍부한 자료다. (p.181)

보존되어 있는 법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당시의 여성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데, 나이지리아의 최근 소설을 읽다보니 그 때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왔나,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멀리 왔는가...하는 것.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 보자.

약혼자가 결혼 전에 죽은 신부는 시아버지에 의해 그의 아들들 중 한 명에게 주어질 수도 있다. 반대로, 만일 한 남자의 신부가 죽으면, 장인은 그의 다른 딸들 중 한 명을 그에게 부인으로 줄 수 있다. MAL §33 은 아들이 없는 젊은 과부는 남편의 형제 중 한 명이나 그의 아버지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녀와 결혼할 남편의 친척이 없을 경우에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이 법들은 결혼교환이 개별 부부들이 개입된 거래가 아니라, 한 가족의 여성구성원들에 대한 또 다른 가족의 남성구성원들의 권리가 개입된 거래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

이 개념은 유대인들의 수혼제(嫂婚製, 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풍습-옮긴이)의 기초를 이룬다. (p.206)

여자가 다른 남자 가족에게 '주.어.질' 수 있다. '주어지기'도 한다.

얼마전에는 한 만화가의 아내가 이십대 젊은 여자일 때 예쁘게 꾸미고 얼른 좋은 남자랑 결혼하라는 유튜브를 올렸는데, 이 얼마나 가부장제에 충실히 복무하는 마인드인가. 가부장제에 들어가고 충실히 복무하기 위해서는 이십대에 예쁘게 꾸며야 가장 잘 팔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셈이다. 게다가, 이십대에 가장 잘 '팔릴 수' 있고, 그렇게 팔리는 걸 자기의 권력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그거 아니죠. 그녀는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평소 그 만화가에 대해 '대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는 어떤 여자와 대화하는 걸까' 했는데, 아내의 마인드도 남편과 같았다. 가부장제 만세죠?

여성은 그들의 성적 활동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식활동에 의해서도 더 높은 지위로 배정될 수 있었다.

유산이나 낙태에 관한 법들은 성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을 제공한다. 메소포타미아의 법은 피해자의 계급에 따라 처벌이 달라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여성들의 경우, 이것은 대체로 피해자에 대한 소유권이 있는 남성의 계급을 의미한다. 그래서 함무라비법은 일반 시민의 딸인 경우 그 처벌은 5세켈의 벌금인 데 비해, 귀족의 딸을 때려서 유산하게 하면 10셰켈이다. 만일 때려서 귀족의 딸이 죽으면, 그 처벌은 가해자 딸을 죽이는 것이고, 피해자가 시민의 딸이면 처벌은 벌금이다. 다시 한번, 가해자 딸의 생명은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에 따라 죄지은 아버지의 생명을 대신한다(CH§ 209~214).

아시리아법은 더 넓은 범위에서 가능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MAL§50 은 결혼한 여성을 유산하게 만든 남자는, 자기 부인이 똑같이 취급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p.207)

성접대도 마찬가지. 아니, 대체 '성접대'라니, 이런 단어가 애초에 왜 존재해야 할까. 단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너무 끔찍하잖아. 성으로 접대를 한다는 생각자체도 끔찍하지만, 성'접대'를 할거면 지들 성을 접대하지, 왜 여자들 데리고 와서 그 여자들 성으로 접대를 해? 접대는 지들이 하는 거니까, 지들 성으로 해야할 거 아니야. 남자1이 남자2에게 접대를 한다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일 거다. 저 좀 잘 봐주십쇼, 하고. 그게 돈이든 지위든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든, 어쨌든 접대를 함으로써 뭔가 얻게 된다면 그건 바로 자신일 터. 그런데 왜 접대를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여성의 것'을 가져오는가. 왜 남자1과 남자2의 거래에 여자가 수단으로써 활용되는가. 이게 어떻게 성접대야. 타인의 몸을 가져와 '사용'하는데. 그건 성폭력이지. 남자1과 남자2가 본인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으로써 그건 여자를 물화 시키고 타자화 시키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성폭력이다. 왜 내 성으로 니가 접대해?




위의 인용한 문장을 보면 현재의 성접대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죄를 지은 건 남자인데 그 벌을 받는 것은 그 남자에게 '속한 여자' 였던 것. 가해자가 살인을 했고 그것이 동등한 복수의 법을 적용해 살인으로 처벌할 것이었다면, 그 살인은 가해자에게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의 '딸'에게 적용되어졌다. 다른 여성을 괴롭힌 남자가 있다면, 그 남자가 처벌 받아야 하는데 그 남자의 '아내'가 처벌받았다. 딸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아내는 다른 여자를 유산시킨 게 아닌데, 그런데 그녀들은 남자들을 대신해 벌을 받아야 했다. 내가 대신 벌을 받는 것도 억울해 미치겠는데, 나는 집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남자들이 어디가서 죄짓고 다니는 건 아닐지 신경써야겠네.

이에, 나는 여자를 산 채로 화형시켰던 사티가 생각났다.





어제, 정부의 금지조치가 내려졌음에도 엄청난 수의 인도인 군중이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되는 신부이게 찾아와 경의를 표했다. 18세의 신부는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남편의 머리를 무릎에 뉘고 조용히 앉은 채로 불태워졌다.지난 9월 4일, 결혼한 지 8개월 된 신부 칸와르Roop Kanwar는 무늬를 넣은 비단으로 지은 결혼예복 사리를 입고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앉아 사티를 거행했다. 이 분신자살은 예부터 인도에서 정절을 드러내는 궁극적 행위로 여겨진 관습이지만, 이미 몇 세기 전부터 불법화되었다.이 젋은 신부의 행동 덕분에 라자스탄 주의 서부에 위치한, 자이푸르에서 8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이 사막 마을은 순례객들의 성지가 되었다. (p.238)









MAL§ 55는 처녀에 대한 강간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만일 결혼한 남성이 친아버지 집에 사는 처녀를 강간하면

강간이 도시 내에서 범해졌건, 트인 벌판에서 일어났건, (공공의) 거리에서 밤에 일어났건, 혹은 도시의 축제에서 일어났건, 처녀의 아버지는 처녀를 범한 남자의 부인을 취해서 그녀를 불명예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부인을 남편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자기가 취할 것이다. 아버지는 능욕당한 딸을 그녀를 능욕한 남자에게 배우자로 줄 것이다.

만일 강간한 남자에게 부인이 없다면, 그는 그 아버지에게 숫처녀의 값을 지불해야 하고 그 소녀와 결혼해야 하며 결코 그녀와 이혼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소녀의 아버지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아버지는 돈은 벌금으로 받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딸을 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강간이 희생자의 아버지와 남편에게 해를 입힌다는 개념이, 고통받은 여성들에게는 절망적인 결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203)

강간당한 내가, 나를 강간한 놈하고 결혼까지 해야되냐? 야... 진짜 .....아니, 강간은 내가 당했는데 왜 명예는 아버지 명예가 떨어지죠? 강간은 내가 당했는데 왜 나는 나를 강간한 놈하고 결혼까지 해야해? 다들 미친거야 진짜? 내가 숫처녀인데 숫처녀의 값을 누구에게 지불해 썅?! 내가 숫처녀인데 숫처녀 값은 어떻게 매길건데? 누가 매기는건데?

이 미친세상에서, 여성들이여, 어떻게 살아오고 버텨냈습니까. 물론, 버티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하고 아주 많은 여성들이 죽음의 길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가기도 했지만, 아, 여성들이여, 어찌도 이리 고단한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오래전에 본 티비 프로그램에서 한 여성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 제목은 생각이 안나는데, 인간극장 류의, 보통 사람의 삶을 보여주고 얘기를 듣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그 날 주인공인 여자는 자신이 다니는 공장의 남자동료가 자기에게 구애했고 여자는 그를 거절했었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으므로. 그러자 공장 동료가 그녀를 강간했고, 그녀는 강간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와 결혼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죽어서(왜 죽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그 무덤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이 어마어마한 범죄가, 강간이라는 범죄가 텔레비젼에 나오는데 그 남자를 잡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단 강간이 용인되어 온것일테고, 그리고 아주 많은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면 강간한 남자와 함께 사는 걸 택해야 했다. 강간당한 여자는 여자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거니까.

김형경의 소설 속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나온다. 운동권 여자가 같은 운동권 남자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결국 그 남자랑 결혼하는 걸 택하는 삶. 대학교육을 받았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고,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생각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강간 앞에서는 강간범과 결혼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삶이야, 이게 어떻게 삶이니.

이 소설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까?

많은 남자들이 이 여자를 '사귀고' 싶은데, 사귀자고 해도 사귀어주질 않으니, 제뜻대로 되질 않으니, '강간해서 갖자'로 방법을 찾는다. 맙소사. 하아-

강간의 역사가 이토록이나 길고,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로만 생각했던 역사가 이렇게 긴데, 세상이 과연 바뀌기는 할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지만, 바뀌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려나. 혹여라도 지쳐버리면 이 견고한 여성 물화, 성적대상화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될까봐 지치기도 쉽지 않다.

이 책의 <제6장>은 '여성에게 베일 씌우기' 라는 제목이다. 자, 겁내지 말고, 지치지 말고 계속 읽어나가자.

여러분, 기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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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6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3-26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죄를 지은 아버지의 형벌을 딸이 받는 것으로 정해진 당시의 법에 가장 경악했어요. 복수라는 측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여성의 정조에 대한 범죄를 ‘재산권에 대한 침탈’로 이해했다는 것이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성접대’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남성이 ‘접대’ 받았을 때 제일 좋아하는 것이 ‘여성’, ‘여성의 성’이고, 그게 필요하다면 ‘여성’을 ‘공급’해 ‘접대’하겠다는 거죠. 여성이 사물화 되었기 때문에, 남성 의지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인간이 아니니까요. 나의 필요(접대)를 위해 대접(성접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거겠죠.

다락방 2019-03-27 15:10   좋아요 0 | URL
제가 위에 썼던 것처럼, 접대는 ‘내가‘ 가진 것으로 해야 하는 거잖아요. 내 집, 내 돈, 내 성의,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진‘ 것으로 해야한다고 봤기 때문에 ‘여성‘을 접대한것 같아요. 여성은 나와 같은 하나의 인간이라기 보다 ‘내 꺼‘ 니까요. 내가 돈 주고 살 수 있는, 내가 마련할 수 있는 ‘것‘.
예전부터 법에서까지 여자를 남자의 소유로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의 것이다가 남편의 것이다가... 어휴........ 같은 인간이 아닌거에요, 정말.

비연 2019-03-27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사이드>의 저 장면. 인도의 사티. . 조용히 앉은 채로 불태워진 18세의 신부. 정말 소름이 돋았었어요, 너무 끔찍해서. 아직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니. 도대체 여성을 뭘로 보는 건지. 그냥 소유물? 물건? .. 그러니 선물로 주고 그러겠죠. 접대하라고. 정말이지 아직도 멀었다 멀었다. 라는 생각만이 들면서 그날 잠이 안 왔었어요..ㅜㅜ

다락방 2019-03-27 15:12   좋아요 0 | URL
죽은 남편과 함께 산 채로 태우면서 그렇게 정절을 지켜 남편과 죽은 여자를 ‘성녀화‘ 시키니, 그 문화는 여자들에게 강요될 수밖에 없겠죠. 그걸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니,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서 산 채로 불타 죽는 걸 보면서 숭배할 수 있을까요. 너무 끔찍해요 진짜 ㅠㅠ
 















아동치한범의 특징을 보자면 일반적으로 열등감이 많고, 고독감을 자주 느낀다. 자기 존중감이 낮고, 정서적으로도 미성숙성을 보인다. 또한 자기주장을 잘하지 못하고, 수동적 공격성이나 적대감이 크기 때문에 성인과 성숙한 대인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결과적으로 부정이나 인지 왜곡, 합리화와 같은 자기방어 기제를 더욱 많이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 처리의 미숙과 대인관계의 어려움은 다른 성인과의 친밀감을 발전시키고 확고히 하는 데 방해 요인이 되어 사회생활에서 문제를 겪게 된다. (p.78)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문제는 바로 저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성인과 성숙한 대인 관계를 맺기 어렵다'는 점. 성인과 성숙한 대화를 맺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람이 그러므로 다른 수단을 써서 원하는 걸 강제로 갖겠다는 것. 책에서 보여준 사례로는 미성년자를 성폭행 한것으로도 모자라, 아내까지 있는 남자가 그 미성년자로부터 애정을 갈구하고 관계를 지속하길 원한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감싸주길 원하다니,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닌가.

성매매도 마찬가지. 돈을 주고 쉽게 섹스를 함으로써, 성인 여성에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서고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하는 노력 같은 것들은 다 건너뛰게 된다. 그런 것 없이,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나 노력없이 돈만 주면 섹스가 오니까. 이런 식으로 살다보면 그 후에 대체 누구와 성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강간이라고 다를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혹은 무기를 이용해서 굴복시켜 자신의 고추를 쑤셔박는 추한 일. 거기에서 오는 만족감은 무엇일까. 그것은 제대로된 욕구충족일까. 그것으로 자신이 채워지지 않으니 또 강간을 하고 또 강간을 하고..



죄를 저질렀다는 데에서 일단 끔찍하지만, 정신이 자라지 못했다는 데에 있어서 더 끔찍하다. 그렇게 성숙하지 못한 정신은 다른 사람을 파괴한다. 어른이 되자. 제대로 어른이 되어야 한다.




이수정과 김경옥의 이 책을 읽는 일은 정말이지 권하고 싶지 않다. 아직 이 책의 절반도 안읽었는데 나는 우울증에 시달릴 것만 같다. 연쇄살인에 대한 것도 그렇지만 성범죄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바닥으로 자꾸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특히나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경우에 있어서는 이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달까.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읽어야 하나. 너무 우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거다.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않았지만, 나는 나처럼 이런 이야기에 치명적으로 약해지는 사람들이라면 읽지 말기를 권하고 싶다. 성폭력 과 강간 사례를 읽는 것은 도무지 담담하게 넘겨지지가 않아서 너무 힘들다. 그래서 나는 고민중이다. 이 책의 남은 부분을 마저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성범죄 부분 지나갔으니 마저 읽을 수 있을 것 같긴한데, 심장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 얹어진 기분이다. 특히나 아이를 상대로 저지른 성범죄는 너무 힘들다. 어른이 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보는 거 너무 끔찍하고, 그 아이들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거, 자신을 돌봐주고 감싸주길 원하는 거 너무 진짜 불태워죽여버리고 싶다. 그런 놈들 한 군데에 몰아넣고 불태워버리고 싶어. 너무 답답하고 가슴이 아파서 울고싶다 진짜 ㅠㅠ 



이 책 다 읽으면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책을 읽어야겠다. 휴...그런 게 뭐가 있을까.. 조조 모예스 읽을까? 미 비포 유 시리즈가 2,3 편이 다 있다는데...




발레리노에 대한 소설을 읽고 싶어서 발레리노로 검색했다가 원하는 책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어제는 '발레'를 넣고 검색했다. 그러자 뜻밖에 이런 책이 나오는 거다.



















(책소개)

프랑스 작가 베로니크 셀이 쓴 장편소설. 바르브린이라는 발레리나 지망생과 각기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라고 불리는 한쌍의 젖가슴의 독백이 번갈아 나타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셋?) 등장인물들은 절대로 소통하지 않는다. 서로 딴 이야기만 한다. 그 소통 불가능성 자체가 이 작품의 철학적 바탕을 이룬다.

여성의 육체적 조건을 상징하는 젖가슴은 여성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 자의식 속에서 서로 대화하는 한 쌍의 젖가슴은 그들의 주인인 바르브린이 자기들 때문에 겪게 되는 비극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바르브린에게서 고전 발레를 빼앗아갔던 저주의 큰 젖가슴, 그녀를 땅으로 고꾸라지게 했던 무거운 살덩어리, 쾌락의 자기반영성 안에 빠져 있던 젖가슴은, 풍선이 되어 그녀를 하늘로 들어올린다.




완전 나를 위한 책이 아닌가! 나를 위한 소설이다.

내 너를 꼭 사서 읽어주리!




발레리노에 대한 책도 검색됐다. '니진스키'라는 발레리노에 대한 것인데, 마침 오늘 아침에 알라디너 분이 댓글을 달아주기도 하셨더라.

















사실 나는 소설...을 읽고 싶은건데..그래도 이것밖에 없으니까....그런데 또 절판이고...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 검색해봤더니, 오오, 대출가능한 책이라고 나온다. 급한 김에 이 책을 빌려서 봐야겠다.




그건그렇고,

좀 전에 [가부장제의 창조] 페이퍼 썼는데 등록이 안되고 있다 ㅠㅠ

도박,음란성 글은 게시할 수 없다는 안내와 함께 글이 등록이 안돼.

왜때문이지 ㅠㅠ 그 글의 어떤 단어가 문제가 되는걸까? 단어를 바꿔보기도 했는데 등록이 안된다. 그렇다고 단락을 들어낼 수도 없고. 어떡하면 좋은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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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03-2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등록이 안되고 있어요... 그냥 평범한 내용인데. 뭔 단어가 문제일까요...ㅜㅜㅜㅜㅜㅜㅜ

비연 2019-03-26 12:21   좋아요 0 | URL
이제 되네요...ㅜㅜㅜㅜ

다락방 2019-03-26 13:48   좋아요 1 | URL
비연님 댓글 읽고 저도 해봤는데 저는 여전히 안돼요 ㅠㅠ
비연님 페이퍼 방금 읽었는데, 등록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는 페이퍼던데요?
제 페이퍼에는 강간,성접대, 성폭력 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일까요? 아아.. 썼지만 등록이 안되는 이 슬픔이여.. 지금 그래서 다른데다 일단 붙여놨어요. ㅠㅠ

비연 2019-03-26 14:49   좋아요 0 | URL
저도 이상하다 생각... 그냥 에러였었나봐요. 근데 이제 그런 단어 들어가면 페이퍼도 못 쓰는 건가요. 책에 나온 글 옮겨도? ㅜ 말도 안되요!

카스피 2019-03-2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관계로 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관련 다큐책들을 좀 읽은 편인데 살인이 난무하는 추리소설보다 오히려 현실의 살인이 더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해서 읽기 거북하더군요.그래서 추리소설을 많이 읽은(흠 피에 익숙한) 분들이 아니라면 ‘사이코패스는 일상속에 숨어지낸다‘와 같은 책들은 안 읽으시는 것이 정신 건강상 좋을듯 싶어요ㅡ.ㅡ

다락방 2019-03-26 13:49   좋아요 0 | URL
피에 익숙한 것과는 좀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살인이라서, 피라서, 기괴해서가 아니라 피해자들에 이입이 돼서 읽기 힘든거니까요.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폭력을 당한 글을 읽는 건, 그래서 힘듭니다.

블랙겟타 2019-03-3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게시에 제한이 있는 건 지금 알았네요.
이제는 글이 올라간거죠?

음..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을경우엔 더욱 그럴 것 같네요.
그럴땐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책도 가끔은 읽어야겠더라구요.

그런데 의식의 흐름대로 갔더니 마음의 쏙 든 책을 만나시다니 부럽네요. 다락방님^^

다락방 2019-04-03 08:58   좋아요 1 | URL
네, 지금은 올라갔어요. 이 다음에 올린 글도 안올라가길래 아주 신경쓰였는데, 나중에 욕설 두 개를 수정하니(하하하하) 등록이 되더라고요. 심한(?) 욕설은 게시가 안되는걸로 바뀌었나봐요. 분명 예전에는 등록됐던 욕설이었는데 말입니다. ㅎㅎ

저는 4월도서 시작하기 전에 좀 부드러운 책들 몇 권 읽고 저를 다스려야겠어요. 그 후에 4월의 도서를 시작하렵니다. 후훗.

 

아주아주 오래전에, 내가 학생이었을 때였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 텔레비젼에서 단막극을 보았다. 연속극이 아니라 그 날 하루 한 방송으로 끝나는 거였는데, 만약 내 기억이 맞다면 그 극의 여자주인공은 전미선이었다. 그 어릴 적에 보고도 내가 이 드라마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남아잇는데, 아마 결론이 되게 인상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전미선이 입사한 회사에는 입사 동기로 아주 예쁜 여자동료도 있다. 이 여자동료는 모든 남자들이 다 관심있어하고 인기가 많은데 전미선과 전미선의 다른 입사동료는 그 여자가 너무 못됐다고 그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 회사에는 전미선이 좋아하는 남자 선배도 있는데, 전미선은 이 선배에게 연정을 품고 있으며, 그래서 이 선배가 좋아하는 이상형을 알고 싶다. 어느날 그에게 슬쩍 물어보니, 그는 예쁜 여자보다는 착한 여자가 좋다고 말한다. 이에 전미선은 '아, 이 선배는 다르다, 다른 남자랑 다르다, 이 선배에게 고백해야지.' 하고 그에게 고백한다. 그는 나를 받아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고백의 순간에 그 예쁜 여직원과 사귀는 사이라고 말한다. 전미선의 고백은 부끄러움으로 얼룩지고...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후, 엘레베이터 안에서 전미선은 그 선배와 둘이 있게 된다. 그 때 전미선은 물어본다. 


"선배, 선배는 그 여자가 왜 좋았어요?"


분명 선배는 얼굴 예쁜 여자 보다는 착한 여자가 좋다고 했던 터라, 도대체 어떤 매력 때문인지 궁금했던 것. 그러자 선배는 이렇게 말한다.


"응, 착해서."



그때 전미선의 그 황당한 표정이란.....





책을 읽었다.
















동생 '아율라'는 사귀던 남자를 세 번째 살해하고 언니 '코레드' 에게 전화를 한다. 또 남자를 죽였다고. 언니는 동생을 보호하고픈 마음에 시체 처리를 돕는다. 동생은 예쁘고 몸매도 좋아서 모든 남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반면, 언니는 키만 크고 예쁘지도 않아 연애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언니가 간호사로 일하면서 그 회사의 의사인 '타데'를 좋아하는데, 어느날 동생이 병원으로 언니를 찾아오는 바람에 타데도 그녀를 보게 되고, 그렇게 타데와 여동생은 사귀게 된다.


언니는 그게 너무 불안했다. 동생이 예전 남자들을 죽였던 것처럼, 타데를 죽일까봐. 그는 안되는데, 그까지 죽이면 안되는데, 그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인데. 코레드는 타데에게 말한다. 동생은 그렇게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 그러나 타데는 그런 언니를 '동생을 짍투하는 여자' 라고만 몰고간다. 동생은 너를 믿고 의지하는데, 너는 왜 동생을 나쁘게만 봐? 너야말로 동생 편에 있어줘야지. 


동생에게도 그와 사귀지 말라고 말했었는데, 동생은 '그 남자는 언니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특별한 남자가 아니' 라고 말한다.




"언니가 그 사람을 원하는 거면, 그냥 그렇다고 말해."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내게 소유권을 주장할 시간을 준다. "게다가, 알다시피, 그 사람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는 아주 다르다. 친절하고 섬세하다. 아이들에게 노래도 불러 주는 사람이다.

"깊이가 없어. 그가 원하는 건 예쁜 얼굴밖에 없어. 남자들이 원하는 건 언제나 그것뿐이지."

"넌 그 사람을 몰라!" 예상보다 내 목소리가 크다. "그는 친절하고 섬세하고, 그리고 그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증명이라도 해 보일까?"

"그냥 그 사람이랑 더 이상 말 섞지 마, 알았어?"

"글쎄, 원하는 걸 항상 얻을 수는 없지." 그녀는 의자를 돌리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방을 나왔어야 했는데. 그런데 그 대신, 나머지 옷을 집어 들고 하나씩 개기 시작한다. 분노와 자기연민을 꾹꾹 누르면서. (p.82)




코레드는 그 남자가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자신의 외모에 홀려 다가왔던 남자들을 여러차례 겪었던 아율라로서는, 언니가 연정을 품은 상대에게서도 똑같은 걸 본다. 과연 타데는 어떤 남자일까, 언니가 생각한대로 '다른' 남자일까, 동생이 예상한대로 '특별할 게 없는' 남자일까. 

타데는 동생에게 청혼하고 싶어하고, 그 일에 대해 언니에게 말한다. 이 때 언니는 타데에게 자기 동생이 왜 좋은지를 묻는다.



"타데... 내 동생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모든 것이요."

"한 가지만 말해야 한다면요."

"글쎄요...그녀는...그녀는 아주 특별해요."

"그래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특별한가요?"

"그녀는 아주... 그러니까 내 말은, 아름답고 완벽해요. 누군가와 이렇게까지 함께 있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른다. 아율라가, 누가 어떤 바보짓을 해도 그냥 웃어넘길 뿐 절대 뒤끝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타데는 콕 집어서 말하지 못했다. 그녀가 게임을 할 때 얼마나 재빠르게 속임수를 잘 쓰는지도 언급하지 않았고, 눈감고도 치마에 햄스티치를 할 정도로 재주가 좋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모르는 것이다, 그녀가 가진 최고의 장점을. 혹은 그녀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어쨌든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다. (p.188-189)




아... 타데는, 자신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같이 있고 싶은 여자, 그래서 결혼까지 결심하게 만든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모른다. 그녀가 가진 특징들을, 최고의 장점을, 어두운 비밀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다만 아름답고 완벽하기에 함께 있고 싶어한다. 아아, 타데여. 아아, 아율라, 당신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이런 놈들만 만나니 얼마나 고달팠을까. 아니, 그렇지 않은 놈이 하나도 없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아, 역시 특별한 남자는 없는 거였어. 제대로 사람을 보면서 다가오고 사랑하는 그런 남자는 없는 거였어.


나는 타데의 저 대답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에 본 드라마를 떠올린 거다. '이 남자는 달라' 라고 여자가 생각해도, 사실 그 남자는 '다른' 남자가 아닌 것이다. 다르다고 '내가' 생각할 뿐이지. 다르다고 '내가' 믿고 싶을 뿐이지. 그래봤자, 다 그놈이 저놈이고 저놈이 이놈이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아아, 아율라의 통찰이여. 



나는 타데의 저 대답을 읽으면서 궁금해졌다. 내가 사귀었던 남자들은 만약 저런 질문을 받는다면, 그러니까, '그녀가 왜 좋아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답했을까. 뭐라고 답할 사람들이었을까. 


일전에 어떤 스님이 연애 강의를 하는데 질문을 받았다. '아주 인기가 많은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데 내가 그녀랑 사귀려면 어떡해야 할까' 라는 뉘앙스의 질문이었다. 이 스님의 대답은 되게 어이없었는데, '제일 인기있는 여자 말고 제일 예쁜 사람 말고 그보다 좀 떨어지는 사람을 사귀어야 된다' 고 하는 거다. 그래야 이루어진다고. 아니 저걸 강의씩이나 하고 앉았다니, 헐... 했었는데, 진짜 저게 말이냐 방구냐.... 되게 유명한 스님이었는데 어떤 스님이었는지 기억이 안나네. 헐. 갑자기 그 강의 생각이 난건, 만약 내가 사귄 남자에게 누군가 '그녀가 왜 좋은데?' 라고 묻는다면, 혹여, '가장 예쁜 여자가 아니라서 사귈 수가 있지' 같은 대답을 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타데가 아율라를 사랑했던 것처럼, 아름답고 완벽함과는 아주,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거리가 먼 여자니까. 과연 그 남자는 어떻게 답했을까. 아, 뭔가 궁금한데 듣기 싫다... 이런 거 뭔쥬알지. 아무튼 타데 대실망이랄 것도 없이, 그럼그렇지...



일찍이 그녀가 나에게 경고처럼 말했었지- 그는 깊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저 얼굴만 예쁘면 더 바라는 게 없어. (p.191)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장점이 있는지, 어떤 비밀이 있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그저 보이는 면에 반하기만 한 거 아닌가? 보이는 면에 반한거라면, 자신이 반한 부분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될 수 있을까?



몇 해전에 방송했던 주말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 에서 김석훈은 김현주를 좋아했다. 김현주에게 관심이 있고 그래서 김현주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런 김석훈과 '잘 해보고 싶은' 이유리는 김현주와 함께 있는 김석훈을 찾아오는데, 김석훈은 그녀에게 '나는 김현주와 함께 있어야 하니 돌아가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오해하지 않게, 분명한 뜻을 밝히는 거다. 나는 이 장면을 진짜 몹시도 좋아했는데, 그것은 지금 내가 관심있는, 좋아하는 상대에게 예의를 지킨 것이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도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있으면 좋아하는 상대가 있다고 분명히 밝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아는 여자, 나를 좋아하는 여자 주변에 여럿 두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고, 돌려 말하는 것은 너무 비열하고 치사하잖아.


언니는 늘상 동생에게만 사람들의(심지어 엄마까지도) 관심이 쏠린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비밀을 모두 말한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 동생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당신 동료들이 그러더군요,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라고. 하지만 직접 본 적이 없으니 그녀에겐 관심 없어요. 당신은, 내가 알지요."

그가 나를 가리킨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선생님은 날 몰라요."

"당신을 압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깨어난 거예요. 나를 부르는 당신의 목소리 때문에. 지금도 꿈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어요." (p.195-196)



나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로의 온전한 관심이어야 한다. 코레드는 그동안 저런 말을 듣지 못하고 살았어. 괜히 짠해지는데, 그런 한편, 나는 이렇게 말하는 남자에 대해서도, '니가 아직 동생을 못만나서 그렇지 만나면 너도 달라질 줄 어떻게 아냐' 싶어지는 것. 아아, 세상에 믿을 놈은 없잖아요?



이 소설은 나이지리아의 여자 작가가 쓴 소설이다. 동생이 너무 언니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언니에게 사건의 이후를 부탁하기 때문에 너무 민폐라 딱히 좋아할 순 없는 캐릭터였다. 아아, 동생 언니에게 너무 민폐야, 언니에게 그러지마, 이런 마음으로 읽게 되었던 거다. 그러나 소설은 틈틈이, 코데르와 아율라가 어떤 '아빠' 밑에서 자랐는지를 보여준다. 나이지리아의 문화. 고작 열네살인 자신의 딸을 늙은 족장에게 팔아버릴 생각을 하는 아빠, 고작 열네살의 조카에게 '니가 족장에게 추파를 던졌다'고 맗하는 고모. 그리고 얼굴만 보고 사랑한다고 덤벼드는 남자, 남자, 남자들. 아율라는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많은 장점들과 또 단점들은 다른 남자들에게 인식되어 지지 않는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에쁜 여자였을 뿐. 아율라를 있든 그대로 봐주고 아율라의 특징을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코데르 뿐이었다. 코데르는 아율라의 편이다.









토요일에는 유니버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보고왔다. 발레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아주 달랐다. 처음부터 계속 울컥 눈물이 나려고 했는데, 그건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그간 고된시간에 대한 성취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저렇게 높이 점프하기 위해서, 저렇게 어깨를 활짝 열어젖히기 위해서, 저렇게 몇차례를 회전하고도 똑바로 서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훈련한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다. 


요가 동작에는 한 다리로 균형을 잡고 서는 자세가 아주 많은데, 그중 가장 힘든 동작들 중 하나를 꼽자면, 한 다리로 서고 한 다리를 직각으로 들어올리는 거다. 나는 아직 직각으로 만들수도 없을 뿐더러 간신히 45도 정도 들어올린 뒤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너무 아파 다리를 금세 내려야 한다. 요가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어렵다. 처음보다 조금 더 들어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직각까지는 어림도 없다. 그런데 발레리나가, 와, 그렇게 한 다리를 든 채로 콩콩콩 뛰기까지 하는 거다. 맙소사... 대체 당신들, 얼마나 오래 연습하고 애쓴겁니까. 나는 어깨가 굳어 팔을 귀 옆으로 똑바로 들어올리지 못한다. 그나마 요가에서 계속 어깨와 등을 활짝 펴고 열게 시켜서 처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내 어깨는 앞으로 굽어 있다. 그런데 발레리나가 양 어깨를 뒤로 활짝, 활짝 여는 거다. 당신들, 정말이지, 얼마나 오래 연습을 한겁니까. 얼마나 오래 많은 것들을 참으며 지금에 이른 겁니까. 결국 그들은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기까지 하니, 그 성취가 얼마나 뿌듯할까. 그 뒤의 보이지 않는 노력 같은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지는 거다.



그러고보니 나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긴 내가 나와 내 주변 친구들 말고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어떻게 알겠는가. 막연히 짐작만 할뿐이지. 발레리나가, 저렇게 마르고 온 몸을 쫙 펴고 높이 뛰는 저 발레리나(노)들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식사를 할까, 술을 마시기는 할까? 나처럼 살아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겠지?



너무너무 궁금해졌다. 지그프리드 역과 광대역의 발레리노들은 점프를 굉장히 높게 했는데, 아, 발레리노도 너무 궁금해졌어. 나는 인터미션 동안 알라딘에 얼른 '발레리노'를 넣고 검색해본다. 으음, 내가 발레리노에 대해 알 수 있는 책, 읽어보고 싶은 책은 검색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내가 그동안 읽어온 그많은 소설들 속에서도 '발레리노'가 주인공인 소설은 없었던 것 같다. '발레리나'는 [다락방의 꽃들]에서 이미 만났었는데!! 주인공 캐시가 나중에 발레리나가 된단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여러분,



발레리노가 주인공인 소설을 아신다면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 읽어보고 싶습니다. 



없다면, 

제가 쓰겠습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면 발레리노 취재를 해야 할 것이고, 취재하기에 나는 발레리노 아는 사람이 1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추천해주세요. 다른 사람이 쓴 걸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는 잠실에서 밥을 먹고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샀다. 세 권을 사려고 마음 먹었던 책이고 한 권은, 아니, 그러려던 건 아니었지만, 뭔가 책의 물성을 보자 읽고 싶어졌고, 표지에 '스톡홀름 증후군' 막 이런 거 있고 그래서 아아, 같이 사고 말았다. 어제 산 책 네 권은 이런것들.


















아니... 내가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사놓고 보니 너무 내가 드러나버리는 것 같다. 책의 제목들이 어쩌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어제 산 네 권을 포함해 최근에 구매한 책들.



네, 4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도 구매를 완료했습니다. 후훗.




하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니, 아홉시 반이라니, 어쩐담 ㅠㅠ 일요일이 다 가버렸다니. 너무해 ㅠㅠ 일요일 너무 빨리가는 거 아닙니까. 이제 놋북을 끄고나면 가부장제의 창조를 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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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9-03-25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레리노가 나오는 영화인 댄서가 생각나는데 보셨을거 같아요. 진짜 그사람이 아름다워서 극장에서 바로 한번 더 볼까 생각했었어요.

다락방 2019-03-25 17:4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그 영화 보고 싶었었는데 놓쳤어요. 시간날 때 그 영화 좀 봐야겠어요. 저는 발레리나, 발레리노의 일상 생활도 궁금하더라고요. 어마어마한 훈련을 할텐데, 그 시간들 외에 시간에는 술과 고기를 먹는건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도 주말쯤에 찾아봐야겠어요.

단발머리 2019-03-25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곰곰 생각해봐도 ‘발레리노’가 주인공인 책이 생각이 나지 않네요.
접수 조금 더 받다가 안 되면 다락방님이 쓰시는 걸로 해야 되겠어요. ㅎㅎㅎㅎㅎㅎㅎ

<여자 전쟁> 두께가 좀 되겠거니 예상하고 있었는데, <질의 응답>이랑 <마초 패러독스>가 장난하냐고 묻네요.
요즘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읽는 다락방님! 멋지십니다!!

다락방 2019-03-25 17:5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정말 발레리노가 주인공인 책이 생각 안나죠? 저도 그렇게 책을 읽어왔건만 발레리노가 주인공인 책이 전혀 생각이 안나요! 아마 다들 발레리노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런걸까요? 아 너무 궁금해... 역시 제가 직접 쓰는 게 답일까요? 제가 머릿속에 구상한 건, 이 발레리노가 발레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 여자1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겁니다. 이 일반인 여자는 발레가 다 뭐람, 술과 고기에 탐닉하며 집에서 엉덩이만 벅벅 긁는 떡대있는 여자, 네, 바로 제가 모델이 되어서.... (쿨럭) 그만하겠습니다.


여자 전쟁도, 질의 응답도, 마초 패러독스도... 단발머리님, 페미사이드나 백래시에 비하면 진짜 괜찮은 두께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9-03-25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3-26 08:10   좋아요 0 | URL
그동안엔 니진스키를 모르고 있다가 어제 ‘발레‘를 넣고 검색하니 니진스키 책이 나오더라고요. 절판이길래 도서관에 검색해봤는데 마침 제가 가는 도서관에 책이 있습니다. 후훗.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보면 될 것 같아요.

검색하다가 발레리나가 주인공인 소설도 알게 되어서 역시 장바구니에 담아뒀어요. 책과 독자가 만나는 시점, 운명이란 것도 정말 있는가 봐요. 훗.

비로그인 2019-04-04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재밌게읽었습니다

다락방 2019-04-04 11:11   좋아요 0 | URL
아하하 다행입니다!!
 















21살의 여자는 사이다공장에서 일하다가 약지를 다치고, 그 후에 표본실의 접수라는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딱히 간판도 없는 곳인데 사람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무엇, 보관하고 싶은 무언가를 들고와서는 표본으로 만들어달라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악보와 거기에 담긴 음악을 표본으로 해달라 요구하고, 반려동물의 뼈를 표본으로 해달라 요구하고, 집이 타고 남은 자리에 생긴 버섯을 표본으로 남겨달라 요구한다. 여자는 일년 남짓 이 곳에서 성실히 일했고, 그 곳의 남자 사장과 좀 더 깊고 내밀한 관계가 된다. 일하는 사람이라곤 남자 사장과 여자 접수원 단 둘 뿐이고, 퇴근 시간 후에 이들은 오래전 여성전용 아파트였던 곳의 커다란 욕실에서 데이트를 하게 된다.


하루는 이 남자가 여자에게 '네 나이보다 너무 어려보이는 구두를 신는다'며 성실히 일한만큼 구두를 선물할 수 있게 해달라 한다. 그렇게 남자는 여자에게 구두를 선물하는데, 이런 요구를 한다.



"이제부터는 매일 그 구두를 신어 줘."

세 바퀴째 열네 걸음을 걸어간 참에 그가 말했다. 나는 걸으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철을 탈 때도, 일하는 중에도, 휴게 시간에도, 내가 보고 있을 때도 보고 있지 않을 때도, 아무튼 내내, 알았지?" (p.45)



변태새끼...도망쳐!!



나는 여자에게 도망치라고 말했다. 물론 여자는 내 말을 듣고 도망치는 대신, 그가 원하는대로 매일 그 구두를 신고 다닌다. 매일 그 구두를 신고 좀처럼 벗질 않아. 그럼 그렇지, 만약 내 말을 듣고 도망쳤다면 그게 내가 쓴 소설이지, '오가와 요코'가 쓴 소설이겠냐. 아무튼.


뭐지.. 이 새끼는 변태인가. 5센치 정도 되는 굽이라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계속 신고 있으라는거야. 그거 발 아파.

여자는 그 구두를 매일 신고 있는데, 어느날 구두를 40년째(50년이랬나) 고치던 아저씨가 표본을 맡기러 와서는 그녀의 발을 보고 엄청 좋은 구두를 신었다며 한 번 닦으러 오라고 했다. 그러나 구두가 발을 먹어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여자는 후에 손님이 없는 틈을 타 구두닦이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구두를 닦아달라 한다. 할아버지는 벗고 도망칠 수 있는 건 지금 뿐이라고 말한다.



"글쎄, 어떤 걸까요? 지금까지 연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과는 한 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질 수 없다는 그런 마음하고 정황만은 분명해요. 그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둥의 단순한 것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의미에서 그에게 꽁꽁 묶여 있답니다."

"허어, 그런 어려운 얘기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뭐 완전히 이 구두 탓이구만. 구두가 먹어드는 것과 남자 친구가 먹어드는 거, 그건 한 줄기로 엮여 있는 거야.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지금 당장 이 구두를 벗지 않으면 앞으로는 영원히 도망칠 수 없고, 절대로 이 구두는 아가씨의 발을 자유롭게 해 주지 않는다는 거야." (p.109)



할아버지는 물론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뿐 여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잠시 후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저는 이 구두를 벗을 마음은 없어요."

긴 침묵 뒤에 나는 중얼거렸다.

"자유롭게 되고 싶지 않아요. 이 구두를 신은 채 표본실에서 그 사람에게 봉인되어 있고 싶어요." (p.110)




이 책을 읽는데 나는 오래전에 본 영화, '매기 질렌할' 주연의 《세크레터리》가 생각났다. 으으- 제목은 그러니까 '비서'인데, 사장과 둘이 있으면서 뭔가 때리고 벌주고 하면서 일하는 약간 변태삘의 영화로 기억된다. 《약지의 표본》속 분위기가 이 영화 너무 생각나게 하는 것. 영화에서는 아마도 둘이 사랑해서 마지막에 결혼했던 것 같은데, 약지의 표본에서는 여자가 죽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약간 ... 호러?


















세크레터리는 영화소개 읽다보면 '오피스 로맨스'라고 되어 있던데, 약지의 표본은 오피스 로맨스보다는 호러물에 가까운 듯. 낭만이 1도 나에게는 안느껴지고 뭔가 '도망쳐'만 계속 말하고 싶어지는 거다.



약지의 표본속 사장은 살짝 변태끼가 느껴지는데, 여자가 그런 남자를 좋다고 하면, 그에게 봉인되고 싶다고 하면.. 그것은 본인의 의지이므로 그냥 두어야 하는걸까. 신발이 발을 먹어들어가고 있는데, 그것이 그녀가 원한다면 내버려둬야 하는 일인걸까. 아, 혼란스럽다.



'김종서'의 노래중에 <아름다운 구속>이란 노래가 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게 구속되는 것은 기꺼이 견딜만한 것이라는 의미로 '아름다운' 이란 수식어를 썼을거란 건 충분히 짐작되는 바이지만, 나는 세상에 '아름다운' 구속은 없다고 생각한다. 구속은 그 자체로 답답한 것이고 벗어나고 싶은 것이 맞다. 다만 우리가 사랑에 빠져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고자 하는 것이지.


내 경우 연인과 이별할 때 상대랑 싸우거나 나쁜 상태로 헤어졌던 적은 없고 대체로 좋을 때 헤어졌었다. 그러니 헤어지고나면 슬프고 힘들고 아프고 울게 된다. 이제 이 사람이 없구나, 라는 상실감은 무척 커서 힘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만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나를 힘들게 하고. 그렇지만 금세 해방감이 찾아온다. '이제 내 앞에 놓인 주말이 다 내꺼다!'하는 자유로움이 확- 찾아들어, 처음 그런 느낌이 찾아왔을 때는 '나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지만 그 자유로움은 정말 너무 좋은걸...내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 나는 온전히 나란 느낌은 그 자체로 충만한 것이다. 기꺼이 부자유를 선택하는 마음도 뭔지 잘 알겠지만, 나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또다시 구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구속이 기본적으로 아름다울 순 없다고 생각한다.



이 약지의 표본은 프랑스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음.... 포스터 분위기가.... 너무.... 음....



이 책에는 <약지의 표본> 외에 <육각형의 작은 방>이라는 소설도 실려있다. 육각형의 작은 방은 이야기방을 뜻하는데, 아무도 없는 그 작은 방에 들어가서 혼자 그냥 이야기하고 나오는 방. 실제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주인공도 어떻게 이런 곳이 있지, 하는 그런 방인데, 처음엔 낯설어하던 주인공이 그곳을 좋아하며 찾게 된다. 그 안에 들어가서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던 말을 하게 되는 거다.


그녀는 헤어진 애인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와 헤어진 일이 내 페이스를 마구 헝클고 있는 거예요. 등이 아프기 시작한 시기와도 꼭 맞아떨어집니다. 그와 헤어져서 섭섭하다든가 괴롭다든가 우울하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런 거라면 이야기는 간단하겠지만, 사실은 좀 더 추한 것이랍니다.

나는 그 사람이 정말 견딜 수 없이 싫어졌어요. 그래서 헤어졌습니다. 그 사람 말고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도, 그가 내게 폭력을 휘두른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저, 이유도 없이 싫어졌어요. (p.183)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나는 내가 말하는줄????????????????????????? 사귀었던 사람이 '견딜 수 없이 싫어지는 거', 내게도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뭔가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아아 꼴도 보기 싫다, 이런 경험, 다들 있지 않은가. 뭘 해도 미운 거, 밥 먹는 걸 쳐다봐도 화딱지가 나. 나는 밥 먹는 거 보고 화나는 나를 보며, 아 이건 회복불가능하다, 하는 걸 느꼈었지. 여자는 그런 자신을 추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결코 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여자는 이유가 없다고 하지만, 이유가 없이 누군가 미워지면, 그건 추한건가? 처음 그가 꼴보기 싫어진 건 약혼식을 앞둔 요리를 준비하다 남자가 넘어지며 음식을 쏟았을 때였는데, 미안한 표정을 비롯한 여러 표정을 짓는 그를 보고 확- 마음이 사그라든 것. 실수할 수 있고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여자는 그 때 남자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렸다. 단순히 요리를 쏟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쏟아진 요리안의 호출기를 보았고, 그 호출기가 그와 단둘이 있는 다정한 시간마다 울려대어 의사인 그가 환자에게 달려가야만 했던 일이 떠오르고... 이걸,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일이, 여자로하여금 남자에게 애정이 식어버리게 만든 이 일이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식으로 터지느냐의 문제지. 언제나 사랑하는 여자인 자신보다 위급한 환자가 중요해 달려나가는 그를 보아야만 했던 여자로서는, 그것이 의사의 본분이라 해도, 어쩌면 '이것을 그만두고 싶다', '평화로워지고 싶다' 는 생각을 했을 거라고 보여진다. 은근히 원했던 것. 그러나 어떤 정당한 이유를 댈 수는 없는 거지. 그런참에 음식이 쏟아졌고, 그런참에 그간 생각했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던 것은 아닐까.



여자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



만일 그때 미치오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했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상상은 무의미합니다. 그를 미워할 운명은 유전자가 만들어진 그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지금 막 생각이 나는군요. 미도리 씨가 그 비슷한 말을 했었습니다. '여기까지 와 닿았다는 게 중요하다' 라고요.

어떤 길을 더듬건 우리는 그저 미리 정해진 장소로 향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예요 ……. (p.189)




본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의지나 노력이라는 게 이미 운명인 거라고 나는 느낍니다. 결코 인생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에요.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항상 내 힘으로 선택하고 판단하고 쌓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아무리 운명이 바꾸기 어려운 것이라 해도 미리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다는 건 너무도 어리석습니다. 누구에게나 운명의 종착역은 죽음이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살아갈 기력을 상실해 버리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p.182)




여자는 남자가 너무 싫어 헤어졌는데, 남자는 헤어진 뒤에 여자를 찾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하고, 여자는 당연히 보조장치를 잠근채로 빼꼼 얼굴만 내민다. 싫어... 싫어하니까 찾아오지마 좀... ㅠㅠ 싫어하는데 막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만나고 ㅠㅠㅠ 싫어하니까 보이지마, 좀 ㅠㅠㅠㅠ 싫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재작년 봄에, 그때 사랑하던 남자의 어떤 행동 때문에, 그가 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그와 그가 알고 지낸 지인의 행동 때문에 너무 힘이 들었다. 나는 그게 너무 힘이 들어서 그렇게 좋아하는 상대에게 잠깐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그렇게 그 없이 며칠을 지내면서도 내내 괴로웠다. 그가 없다는 사실보다 '그 일'이 나를 너무 괴롭게 한거다. 이게 아무리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되고 용납이 안되고 용서가 안됐다. 그가 단 한마디만 했어도 그런 일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었는데, 그 한 마디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버렸고, 그 일이 내게 고통이 되었고...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사랑에 대해 공부해야겟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인데 나를 이렇게나 괴롭게 한다면, 내가 사랑을 더 배워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공부하자 사랑을' 이라고 생각한거다. 연락을 하지 않던 그 며칠동안 나는 그에게 몇 번이나 하소연하고 싶었다. 애원하고 싶었다. 제발 나를 좀 어떻게 해달라고, 이 고통속에서 나를 좀 꺼내달라고, 나는 미쳐버릴 것 같다고.



그 일이 있고난 후 우리는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 또 헤어졌다.



나는 그 당시의 그 일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화날 수밖에 없었을까, 그 일은 그렇게 용서 안되는 일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큰 일도 아니고 짜증 한 번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게 왜그렇게 화가 났을까.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까. 그 일은 그렇게 관계를 위태롭게 할만한 일도 아니었는데, 그 땐 왜그렇게 내 가슴을 탕탕 치며 숨을 쉬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만약 지금 그 일이 내게 다시 반복된다면, 나는 지금도 그 때처럼 숨도 못쉴것 같은 괴로움에 시달리게 될까?


만약 그 때 내가 화내고 괴로워하는 대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일을 넘겼다면, 그와 나는 어떻게 됐을까?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까?

나는 내가 그에게 '그만두자'고 말했던 순간에 대해 자주 떠올린다. 그를 잃은 상실감이 너무 커서, 내가 계속 그의 옆에 있었어야 하는데, 내가 그 순간도 넘겼어야 했는데, 종종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좋은 관계로 지냈을까? 그리고, 서운함과 속상함을 밑바닥에 꽁꽁 숨긴채로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건 과연 좋은 관계일까? 나는 '그 일'로 터져버렸지만, 결국 언제든 터질 일이 아니었을까. 내 안에 서운함과 속상함은 계속 쌓이고 있었으니까.



여자는 육각형의 작은 방을 통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것을 혼자 말하고 그러면서 자신에 대해 돌아본다. 우리가 그 때 다르게 행동했다면 지금 다른 결과가 펼쳐졌을까? 그러나 운명은 작은 우연으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이 책속에도 나온다. 운명은 작은 우연으로 만들어진다. 여자는 남자가 싫어 헤어지고, 그 일로 스스로를 추하게 여기고 창피하게 여겼다해도, 그것을 꺼내놓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게될 만한 공간을 발견한다. 그 공간을 발견하게 되기까지는 수영장에서 같이 수영을 다닌 다른 회원에게 뭔가 호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길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를 뒤에서 졸졸졸 따라갔기 때문이었다. 결국 여자는 지금 이 타이밍에 여기 와있어야 했던 것일테다. 작은 우연들은 그녀를 여기로 데려왔다.




나는 시간이 우리를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다 놓을 거라고 곧잘 말하곤 했는데, 정말 그렇다. 재작년에 내가 그 때 그렇게나 화가 나고 고통스러웠던 일, 그렇게나 좋아하면서도 그만두자고 말했던 일,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 순간순간의 일들이 섞이고 결정들이 만들어낸 것일테다. 그리고 앞으로는 또다른 삶이 펼쳐질텐데, 그것들 역시 작고 작은 우연과 선택들이 만들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일을 겪고, 그러면서 여기에 이르렀듯이 또 저기 어딘가에 이르게 되겠지. 운명의 이 시점에 여기 있어야 했고 또 운명의 다른 시점에 다른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될 것이다. 현재에는 지금 여기 있다.




책 속에 잠깐 여자의 썸남 얘기가 나온다.

여자는 썸남과 레스토랑에 가 함께 런치코스를 먹기로 했는데, 여자가 수영 끝나고 가려다가 하필 시선을 붙잡는 다른 회원과 잠시 말을 하게 됐고, 결국 약속 시간에 많이 늦었고, 결국 가고자 했던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고, 결국 헤매다 들어가게 된 다른 레스토랑은 음식이 맛이 없었고, 결국 썸남은 그 뒤로 여자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이런 일이, 누군가의 현실에 일어났던 일인데(결국 그도 썸녀에게 그만두자고 말했고), 소설 속에도 등장하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건가...




아무튼,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그렇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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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3-22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래전에 본 영화 <뿅뿅뿅>이 생각났다˝ 이런 대사를 왕왕 치시는 다락방님이 멋있고 좋아요.
아니 당최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지???? 난 <캡틴 마블>도 지금 벌써 아리까리한데?!😣😣😣😣

다락방 2019-03-22 10:33   좋아요 0 | URL
아이참.. 또 남들은 모르는 저만의 매력을 발견해서 좋아해주시네요? ㅋㅋㅋㅋ 참애정이다, 트루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9-03-22 11:18   좋아요 0 | URL
syo님 계 탔네요!!
다락방님이 트루럽이래요!!
춤 안 춰요? (덩실덩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3-22 11: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3-22 11:32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다락방님을 트루럽하는 건데 춤까지 저더러 추라는 말씀이세요? 세상에 이렇게 불공평할 데가??

(덩실덩실 더덩실 덩기덕쿵덕)

단발머리 2019-03-22 11:42   좋아요 0 | URL
음악 끝날때까지 딱! 계속 추고 있어요! 무한 반복이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3-22 11:54   좋아요 0 | URL
좋다 덩실덩실 우리모두 덩실덩실.
아니 요즘 나는 체력 딸리니까 흐느적흐느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9-03-2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감동하고 읽으면서 소리치는 그런 소설 읽고 싶은뎅...
손이 안 가는건 나도 모를 일 ㅠㅠ

다락방 2019-03-22 11:27   좋아요 0 | URL
저는 소설을 놓지말자고 계속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의지를 가지고 읽고 있어요. 물론 읽다보면 재미있지만. 아, 이 책이 재미있다는 건 아니고, 뭐 나쁘지도 않지만 ㅎㅎ

지금은 당분간 보관용이 아닐것 같은 책을 먼저 읽을 예정인데요, 한국여성민우회 에서 바자회용 물품을 기증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오호라, 이번엔 개인에게 방출하지말고 민우회에 보내자 싶어서, 부지런히 읽으려고요. 훗.


단발머리 2019-03-22 11:42   좋아요 0 | URL
나란 여자~ 민우회 기증 전에 책 읽어주는 여자!! 키햐!!!

다락방 2019-03-22 11:55   좋아요 0 | URL
제가 오래 안읽고 있는 책들도 쌓아두지 말고 보내버리자 싶어서 어제는 제 책장 앞에 서서 책을 골라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왜 또 책장 앞에 서니까 죄다 읽고싶죠? 내보낼 게 없어요 아놔 ㅋㅋㅋㅋㅋ 이것은 욕심이 똥구멍까지 차서 그런걸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nine 2019-03-22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꽤 괜찮기에 저자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자 하고 집어든게 <약지의 표본>이었는데, 다 읽을때까지 저는 제대로 소설 속으로 몰입을 못하고말았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이지?‘ 이러면서요.
<세크리터리>는 못본 영화인데 적어주신 주인공 이름 매기 질렌할을 보니 제가 아는 제이크 질렌할이 얼른 떠올라서, 흔한 성도 아닌데 혹시 제이크 질렌할의 부인인가 하고 찾아봤더니 여동생이네요.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라는 마지막 문장이 마치 오늘의 화두처럼 다가와요.

다락방 2019-03-22 12:43   좋아요 0 | URL
저도 박사가 사랑한 수식 되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요. 사실 내용은 기억이 안나지만요.. 그런 참에 약지의 표본은 반가웠는데, 저도 딱히 몰입이 되는 소설은 아니더라고요. 무엇보다 구두가 발을 먹어들어가고 있는데 거기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가 없어서요 ㅠㅠ 오히려 뒤에 실린 단편 <육각형의 작은 방>이 좀 더 나았던 것 같아요.

저는 어떤 영화가 처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매기 질렌할 주연의 영화를 몇 번 보았었거든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란 영화 혹시 안보셨으면, 이거 괜찮아요, 나인님! 그 영화에서도 봤고 세크리터리에서도 봤고.. 검색해보니 <다크 나이트>, <사랑해, 파리>에도 나왔네요.

아, 그리고 매기 질렌할은 제이크 질렌할의 누나입니다! 닮았지요? 후훗.


그러고보니 저 얼마전에 <어쩌다 로맨스>라는 영화를 봤거든요? 약간 음주후에 보긴 했는데, 아니 갑자기 남조연이 크리스 햄스워스로 보이는거에요. 어? 왜 그렇게 보이지? 하고 다시 자세히 보니 아니더라고요. 영화 끝나고 찾아보니 ‘리암 햄스워스‘라고 크리스 햄스워스 동생이더라고요. 닮았어요. 아주 많이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