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타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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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딘가에서 이 책에 대한 글을 보고 읽고 싶었었는데 품절이라 실로 애가 탔었다. 그렇게 중고알림등록을 신청해놓았었고, 드디어 겟! 해서 기쁜 마음으로 봤는데, 제일 처음에 실린 단편 <애가 타다>를 읽고 멘붕.. 이거, 계속 읽어 말어? 처음 실린 단편이 이렇다면 그 뒤의 단편들은.. 읽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하고 고민고민하다가, 아니야, 그렇게 섣불리 판단하지마, 라고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읽었는데, 하하하하, 역시 첫 단편이 이렇다면 그 다음 단편들도 마음에 안들긴 마찬가지일거라는 내 판단은 옳았다. 독서경력이 쌓이면서 이제 척 하면 착 이 되어버렸달까. 제기랄. 내 느낌을 믿을걸.


그러니까 단편에 등장하는 주연,조연 모두가 다 병맛 캐릭터인 거다. 첫번째 단편의 <애가 타다>는 삼십대초반(31이었나 30이었나 그즈음)의 여성이 24살의 젊은 남자랑 연인인지 뭔지 모를 관계로 지내는 이야기인데, 그녀는 남자를 좋아해서 더 다가가고 싶은데 그러면 흉해보이지 않을까 싶어 망설이는 거다. 



결국 깨질 때 깨지더라도 박터지게 부딪혀보자는 일념으로 마호코 씨는 전근 간 뒤 연락 없는 남자를 만나러 훗카이도로 간다. (p.278, 옮긴이의 말 중에서)



옮긴이라면 책에 대해 반드시 좋은 말만 써줘야 할까? 그렇다면 그도 못할 일이겠다,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저 옮긴이의 말을 보면 뭔가 여자가 과감한 결심을 하고 용기를 낸 것처럼 느껴지는데, 내가 읽은 본문에서는 그렇다기 보다는 좀 끔찍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근이라 이사를 갔고 그래서 바쁘다고 연락도 잘 안하는 남자를 여자는 무작정 찾아가는 거다.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의 집이 어디다, 라고 데려가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물어물어 찾아가서는, 우편함에 세 차례에 걸쳐 쪽지를 써서 넣는다. 이건 뭐... 내가 이 여자의 상대였다면 너무나 불쾌해지는 일인 것이다. 아, 너무 싫어. 이건 사귀는 사이라도 싫은데 관계가 뭔지 애매모호한 사이에는 더 불쾌한 일 아닌가. 싫다. 아니, 그러니까, 또 이 못난이 젊은 남자는, 왜 또 여자한테 확신을 안줘? 여자가 '아닌가보다' 포기할라치면 남자는 또 '기다려줘요' 이딴 소리를 해대니까 여자는 다시 희망을 갖고 이러는 거다. 애초에 미적지근하게 만났다가 연락없다가 기다리랬다가 같은 개수작 부리지 말고 노선을 확실히 했으면 사실 여자도 이렇게 애가 타서 거기까지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거 아닌가. 물론 연애는 저마다의 것이지만, 상대에 따라 다른 내 모습이 나오는 거지만, 나 또한 병맛 연애를 해본 적이 있지만, 어쨌든지간에 진짜 병맛 캐릭터들의 병맛 관계였다. 어휴.. 여자가 노선을 확실히하기 위해 움직인 것은 맞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가 해야할 일이었다. 노선을 확실히 하는 게 둘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혹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이 젊은 놈이 못하니까 전전긍긍하는 여자가 하려던 거였는데, 어쨌든 좀 거시기했다. 짜증..



옮기이는 이 책이 노처녀의 이야기라고 했는데,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되게 구린 시선을 가지고 있어서, 중간에 나는 이 작가가 몇년생인가, 다시 작가의 말을 봐야 했다. 왜 대체 이런 생각을 하는거지? 하고.



스도 안네는 전업주부다. 남편의 벌이로만 생활하고 있다. 유부초밥인지 즉석식품인지 모르겠지만, 그것만 준비하면 마음대로 놀러다녀도 되는가보다. 아주 팔자 좋네, 하고 말해주고 싶어지는 것은 내 심성이 곱지 않아서일까. (한 걸음 더, p.247)



하아- 한숨이 났다. 이건 심성이 곱지 않아서가 아니다. 심성의 문제가 아니다. '시선'의 문제다. 책 속 노처녀들은 모두 남자를 사귀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 게다가 남자를 사귀고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인정'받고 싶어한다.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 받고 싶어하는 걸까? 그러면서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고 로맨틱한 사랑을 꿈꾼다. '좋은 신부'가 되기 위해 회사에서도 남자사원들의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도맡아하는 여자 이야기가 나오는 <고마도리 씨 이야기>는 그중 가장 끔찍하다. 회사의 남자직원들에게 '좋은 신부가 되겠어' 라는 말을 듣고 자기가 정말 좋은 신부가 되겠다고 믿는 여자라니, 그렇게 직원들의 담배를 사다주는 여자라니. 진짜 씨발스럽지 않은가.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좋은 신부가 되겠다고 칭찬하는 남자들은, 자기 담배심부름 해주는 여자라서 그런 거다. 진짜 개같아서 원 ㅋㅋㅋㅋㅋ 어디 칭찬하면서 사람 부려쳐먹냐 씨발놈들아. 어느 단편에서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1도 나오질 않아..



고마도리 씨는 로맨틱을 믿고 있다. 만남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남은 우연한 것이 좋다. 우연한 기적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친구에게 소개를 부탁할 마음은 없었다. 내 쪽에서 움직여선 안 돼. 고마도리 씨 쪽에서 먼저 기회를 만들면 잘 안 되었다. (고마도리 씨 이야기, p.191)



(위의 박스 이상해... 왜이렇게 된거야 제기랄 ㅠㅠ)



배려를 하지 않는 인물들이 어느 단편에서나 툭툭 튀어나오는 데, <막내 여동생> 에서는 '전남편'이 그렇다. '전아내'가 다니는 회사의 거래처에 근무하는 '전남편'은 그러니 그 회사에 올 일이 많은데, 그 둘이 부부였던 걸 당연히 회사 사람들이 다 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이러고 다닌다.



나이는 쉰 살 정도로 가슴이 떡 벌어진 사람이다. 활달해서 분위기 메이커로 알려진 다무라 씨는 여복 많기로 유명하다.

결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노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다 젊은 혈기에 한 짓이었지, 하고 회사에 올 때마다 전처인 구와타 씨의 어깨를 두드리며 혈색 좋은 피부로 웃었다. (막내 여동생, p.74)



아니, 전처의 회사에서 전처의 어깨를 두드리며, 너랑 결혼한 건 젊은 혈기에 한 짓이지, 이렇게 말하는 개새끼라니, 그러면서 사람좋은 웃음을 웃는 놈이라니..참. 하아- 배려없는 놈들이 지천에 깔렸구나. 아니 이건 진짜 예의 문제지. 



어제 여자1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그녀는 얼마전 썸남과 헤어진 얘기를 하면서, 그 썸남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해 덧붙였다. 썸남은 '나는 할 말을 다 하는 사람이야' 라며 자신이 당당한 캐릭터임을 알린 거다. 그러면서 예로 든게, '나는 못생긴 여자한테 너 못생겼다 라고 얘기해. 할 말 다 하고 살아' 라더란다. 아니 여기에도 씨발놈이... 내가 그 말을 듣고 여자1에게 그 남자랑 안사귀길 정말 잘했다며, 그건 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할 말 안할 말 구분도 못하는 병신이라고 말했다. 더 웃긴건, 그런 얘기 듣는 게 불편해서 여자1이 '오빠도 잘생긴 건 아니야' 라고 했더니 불같이 화를 내더란다. 뭐 이런... 예의가 예의인줄 모르는 개놈들이 사방에 깔려있는건가... 


작가의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 시선이 불편하다. 예의 없는 사람, 배려를 모르는 사람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그런 사람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의미 있는 일이다. 예의 없고 배려 모르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하고 보여주는 주인공들의 시선 조차도 내가 보기엔 구리다. 작정하고 쓴 노처녀(!) 소설인 것 같은데, 노처녀라서 남자를 사귀지 못해 안달하는 것 자체가 지금과는 맞지 않는다.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그 어떤 여자들보다 나이가 많지만, 남자에게 선택받고 싶어서, 남자의 눈에 들고 싶어서 안달하지 않는다. 물론 책 뒷표지에 나와있듯이 



서른한 살이 되었다.

연애중인 그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연애를 하면서 나 역시 상대에게 기대하는 말들이 있고, 상대가 해줬으면 하는 제스쳐들이 있지만, 그래서 불안하기도 하고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그럴때마다 그것이 '내 나이가 벌써 얼마인데..' 해서는 아니다. 일정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그걸 남에게 보여야 한다, 고 이 책 속의 여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못할 경우 위축되는 거다. 그 점이 지금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소설이 쓰여진 시대 탓인지, 작가의 시선 탓인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이에 연애 한 번 못해보다니 쪽팔리다' 라든가 '결혼도 못하고 지금까지 뭐한거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과 내가 맞지 않는다. 


나는 결혼을 하게 되면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혼이란 게 살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연애를 하고 남자를 사귀면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그렇다고 애인이 없을 때 존나 우울해서 죽을 것 같거나 하지도 않다. 내 나이는 벌써 이렇게 훌쩍 많아졌지만,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한 언제든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하의 남자와 연애하게 되면 간혹 신경 쓰이고 기가 죽기는 하지만(내가 너무 늙었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대앞에서 쪼그라들진 않는다. 이런 내가 완전히 다른 성향의 여자들이 잔뜩 나오는 글을 읽으려니 읽는 내내 즐겁지가 않았다. 그냥 당신 혼자 살아, 그런 병신 같은 애인은 걷어차버려, 혼자이면 어때 우동이나 먹으러 가! 같은 말들을 이천번쯤 내뱉고 싶었다. 




음.. 재미없는 책의 리뷰를 참 재미있게 잘도 썼다는 생각이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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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6-01-29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마지막에 제가 하고 싶던 이야기를 딱 해주시네요^^ 스도 안네 이야기에선 폭발할 뻔 했어요... 나 참!
이렇게 재미없는 소설에도 재미난 리뷰를 달아주시는 대인배 다락방님^^ 점심 맛있게 드세요!!

다락방 2016-01-31 15:02   좋아요 1 | URL
네, 소설이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왜, 어떤 소설에서도 짜증나는 캐릭터는 등장하잖아요. 그러나 그런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해서 소설 자체가 짜증나거나 하진 않는데, 이 소설은 왜 소설 자체가 짜증이 날까.. 어쩌면 작가의 시선이 그 인물들을 그려냄으로써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 알수 있게 되고, 그게 나랑 안맞을 때 짜증나는 걸까. 이를테면 짜증나는 캐릭터를 그려놓지만 이야기 자체는 아름다울 수 있잖아요. 연민이 생길 때도 있고요. 그런데 이 책속의 인물들은 그렇질 못하더라고요. 하아-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싶습니다.

302moon 2016-01-29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년 전에(;) 구입해서 읽었는데, 정말 짜증나서; 읽고 난 뒤의 리뷰도 쓰지 않고, 읽고 싶어 하는 지인에게 건넸습니다.
밑에서 두 번째 문단, 엄청 공감하고 갑니다.
리뷰, 재밌게 잘 쓰셨어요.:) 저는 리뷰쓰기도 팽개쳤는데/

다락방 2016-01-31 15:03   좋아요 1 | URL
아, 302문님도 짜증나셨었군요! 아우 저는 진짜 읽다가 집어 던질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회사 동료 남자 담배심부름에선 어찌나 빡이 치던지. 게다가 왜저렇게 남자남자 .. 남자를 사귀지 않으면 자기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그런 조급함이 아주 신경질 나더라고요. -0-
 
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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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아침에 칠봉이는 카푸치노를 마셨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카푸치노란 단어를 듣노라니 나도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졌다. "아, 나도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지네, 충분히 사유한 뒤에 마실지 말지 결정해야겠다" 라고 말했더니 칠봉이는 빵 터지면서, 무슨 먹을지 말지를 사유하고 결정해, 라고 했다. 그러더니 덧붙였다. "너 최근에 읽은 책에 사유란 말 나왔구나?" 그래서 내가 '그렇다'고 했다. 사유란 말을 써보고 싶었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나는 커피를 마실까 말까 짧지 않은 시간 사유하고 마시기로 결정해서 지금 마시고 있다. 


이 책의 키워드는 사유와 은유라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어렵다. 하아. 수전 손택의 다른 책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그 동안 독서근육이 좀 붙었겠지 싶어 다시 도전하자 했던건데, 내게 독서근육은 아직도 모자란가 보다. 조금 더 읽고 조금 더 많이 알게돼야 그제서야 수전 손택이 하는 말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책장을 넘기는 내내 알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답답했다. 물론 주석으로 누구인지 알려주긴 하지만, 나는 책을 읽다가 주석을 읽으면서 흐름이 끊기는 게 싫다.

조너선 콧과 수전 손택의 대화로 이루어진 이 책은, 대화라는 게 상대방과 같은 정도의 지식을 갖추는 게 확실히 유리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더 확신을 갖게 했다. 조너선 콧은 수전 손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학생이고 수전 손택의 모든 책들을 여러차례 읽고 인상 깊은 구절들을 인터뷰 내내 인용한다. 또한 그 둘중 누군가 어떤 인물(소설가와 음악가와 사진가등등)에 대해 얘기하면 다른 한쪽도 반드시 그 사람을 알고 있더라. 이러니 그 둘이 대화를 하다가 멈추게 되었을 때 또다시 대화를 하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요즘 '대화' 혹은 '소통'이란 것에 대해 여러차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결론이 나왔는데, 대화에 필요한 가장 첫번째 요소는 바로 '상대에 대한 관심' 이라는 거다. 상대가 무슨 얘길 하고 싶어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관심'이 있어야 일단 대화가 시작될 수 있는 거다. 풍부한 지식은 그 다음에 온다. 혹여 지식이 없다면, 서로에게 알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서 상대에게 관심은 없다면, 그 대화는 성립될 수 없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지난날, 자신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달라며 밥을 굶고 집 앞에 기다리고 있던 유민아빠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우리나라 대통령을 보노라면, 우리나라 대통령이 소통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를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이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만큼 그에게 부족한 게 '지식'이었을까? 배울만큼 배운 사람이고 외국어도 여러개 한다지 않는가. 그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생활, 생각들에 관심이 없었다. 그뿐이다. 그의 머릿속을 채운 건 그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던거지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던 거다. 


조너선 콧은 수전 손택과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고, 그 이야기를 무리없이 이어나가기 위해서-물론 그 이유뿐만은 아니겠지만- 수전 손택의 저서들을 읽고 수전 손택이 감독한 영화를 보고, 그 영화의 포스터나 책의 표지들까지 관심있게 바라본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의 대화가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거다. 



수전 손택에 대해서 계속 관심은 가질텐데, 다음에 그녀의 책을 읽게 되기전까지 내가 조금 더 단단해져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게는 너무나 어렵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지만, 내가 그녀를 읽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앞으로 또 그녀의 책을 읽는다고해서 그녀가 언급하는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좀 더 잘 이해하고 싶다. 



다른 얘긴데, 나는 진짜 언젠가는 내가 머무는 곳에 다정한 이들 몇을 초대해 함께 오랜 시간을 이야기나누고 싶다. 졸려서 더이상 얘기를 나눌 수 없을 때까지 계속해서.



다섯 달 후, 11월 어느 쌀쌀한 오후에 나는 그녀가 소위 "자기만의 복구 시스템"이며 "그리움의 아카이브"라고 칭한 8000권의 장서에 에워싸여 살고 있던, 106번가와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의 교차로에 자리해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는 널찍한 펜트하우스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 신성한 곳에서 그녀와 나는 밤늦은 시각까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p.18)




이 책의 리뷰에 대한 별점은 의미 없다. 내가 이해를 다 하지 못했으므로 완전한 좋은 책이 될 수 없었기에 그냥 중간 정도의 셋을 줄까 어쩔까 망설이다 넷을 클릭하긴 했는데, 알라딘에 별점 없는 리뷰도 쓸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다. 





사람이 그 속에 있든 없든 항상 거기 그 자리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가 정말로 있어요. 그리고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내게는 글쓰기를 지금 현재 내게 벌어지는 일과 연결하는 쪽이 그 경험에서 물러나 다른 일을 하려는 것보다 훨씬 쉬워요. 안 그러면 자기 자신을 두 쪽으로 나누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p.29)

언젠가 인도에 갔을 때 인디라 간디에게, 그녀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인도의 수장이 여자라는 사실이 곧 지금 사람들에게 여자들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인지, 혹은 여자들의 경쟁력이 조금이라도 높아졌다는 뜻인지 말이에요.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제가 수상이 되었다는 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저 제가 예외라는 뜻일 뿐이죠"라고요. (p.112)

세 살 때부터 독서를 시작했거든요. 읽고 처음으로 감동을 받은 소설은 『레미제라블』이었어요. 엉엉 울고 흐느끼고 통곡을 했죠. 책을 읽는 아이는, 집 안에 돌아다니는 책들을 그냥 읽게 마련이에요. 열세 살쯤에는 만과 조이스, 엘리엇과 카프카 그리고 지드를 읽었죠. 대체로 유럽 작가들이었어요. 미국 문학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고요. 모던라이브러리 문고판에서 많은 작가들을 처음 알게 되었죠. 그대는 홀마크 카드 상점에서 그 문고판을 팔았는데, 용돈을 모아서 그 책들을 전부 다 사들이곤 했어요. 심지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같은 진짜 재미없는 책들도 다 샀어요.(웃음) 모던라이브러리의 책들은 전부 멋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p.136-137)

당연히 저는, 예술로 재현된 걸 이해할 때보다 제 삶에서 훨씬 더 편협하고 촌스러워요. 예술에 대해서는 훨씬 보편적이고 차이를 존중하죠. 그리고 확실히 저는 편협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요. 정말 친밀함을 좋아하거든요. 암호로 말하자면, 유태인적인 종류의 친밀함 말이에요. 말이 아주 많고,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고, 따뜻하고, 육체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고요. 그렇지만 브레송이나 파뇰의 영화 속에서 살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제 삶을 살면서 한계를 극복해야죠. (p.142)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네 시에 제가 하는 것 중 하나는, 양을 세는 대신 머릿속으로 문학 선집을 기획하는 거예요. 그 아이디어들 중 하나가 로라 라이딩이나 폴 굿맨 같은 작가들의 단편 선집이죠. 이 모든 일이 결국은 잘 정리되고 이런 작가들이 자기 독자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습니다. (p.171)

뉴욕은 내가 굳건한 소속감을 느끼는 장소고 내 본거지라는 느낌을 주며 내가 돌아갈 곳이기도 해요. 그곳을 내가 핵심정인 장소로 고른 건 가까운 지인들 대다수가 이곳에 살기 때문이기도 하죠. 무엇보다 제 아들, 편집자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이요. 그리고 대부분의 책을 보관해두는 절벽의 틈새 같은 공간이 있어요. 그러나 뉴욕에 참담하리만큼 부재하는 한 가지는 종류를 막론하고 자연이죠. 정상적으로 살고 죽는 것을 접할 길이 없어요. 땅바닥에 누워 밤에 하늘을 보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이지 않아요. 그런 광경은 인간에게 죽어야 할 운명과 우주에서의 자기 자리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건 무섭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잖아요. 뉴욕에서는 그냥 빌딩과 빌딩 사이를 오갈 뿐이지요. (p.187)

전 자신을 스스로 창조했다는 생각을 해요. 그게 저한테는 효과가 있는 착각이에요. 심지어 내가 독학을 했다는 생각마저 해요. 버클리, 시카고, 하버드, 굉장히 훌륭한 교육을 받았는데도 말이지요. 기본적으로는 내가 독학자라고 생각해요. 한 번도 누군가의 제자나 총아가 되어본 적이 없었고, 누가 밀어준 적도 없고, 내가 `출세`한 것도 누군가의 연인이나 아내나 딸이라서가 아니었어요. 물론 도움을 받는 게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그러나 난 혼자 해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어요. 그래야 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 도전을 받아들였어요. 그런 식으로 하면서 흥분을 느꼈죠. (p.194-195)

내게는, 무엇보다 끔찍한 일이라면 아마 내가 이미 다 쓰고 얘기한 내용에 동조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게 아마 날 그 무엇보다 불편하게 만들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p.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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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1-0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택의 책 중에 두권을 읽었죠..타인의 고통, 사진에 대하여...책의 진도 빼기가 상당히 어려웠던 걸로 기억합니다.ㅎㅎㅎ

다락방 2016-01-07 12:12   좋아요 1 | URL
저는 타인의 고통을 읽다가 포기했어요.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더라고요 ㅠㅠ 그리고 이 책, [수전 손택의 말]을 읽으면서 [사진에 대하여]가 궁금해졌어요. 그렇지만... 근육을 좀 키워서 도전해보려고요. 다른 분들께도 어려운 책이었나 보네요. 어쩐지 위안이 돼요 ㅜㅜ

살리미 2016-01-07 1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전 손택의 글을 읽고 이렇게 알기 쉽게 리뷰를 쓸 수 있는게 다락방님 매력이에요^^ 저도 어려운 건 너무 싫어요. 다락방님 표현처럼 독서근육이 많이 모자란 거 같아요. 겁나서 도전 못하는 책도 많고요. 어려운 책 읽으면 리뷰도 덩달아 어려워지고 급기야는 내가 하는 말을 내가 못알아듣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는데 ㅎㅎ
다락방님은 어려운 책을 읽고도 이렇게 재밌는 글을 쓸 수 있다니 너무 부러운 능력입니다^^ 사유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 너무 좋았어요!

다락방 2016-01-07 12:15   좋아요 0 | URL
책 내용을 바탕으로 줄거리 요약하는 리뷰를 쓰려고 했다면 저는 아마 시도도 못했을 거에요. 제가 이해를 못한 책이라서 줄거리 요약이고 뭐고 아예 접근을 못하겠더라고요. 대신 읽다가 느꼈던 것, 생각났던 것에 대해서 중얼거린, 리뷰라기엔 참 뭣한.. 그런 글입니다. 하핫. 리뷰계의 가장 핫한 오로라님께서 칭찬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헤헷. 기분 좋네요. 움화화핫. 더 잘해보겠습니다! >.<

yureka01 2016-01-07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yureka01.tistory.com/1147 오래전에 쓴 리뷰입니다.참고 하셔도 좋아요 ^^. .~~

다락방 2016-01-07 13:36   좋아요 1 | URL
우아- 엄청 성실하게 작성하셨어요.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그 책을 이해를 못할 것 같아요. ㅎㅎ

아무개 2016-01-0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리뷰는 쓸 엄두도 안나더라구요.
ㅜ..ㅜ

다락방 2016-01-07 13:37   좋아요 0 | URL
저는 아무개님 다 이해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아 이해 못하는 제가 어찌나 답답하던지요. -0-

heima 2016-01-0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되게 귀여움 받는(?) 애인이실 듯 해요- 아침부터 기분좋게 빵터지게 하는 능력이라니!!

리뷰 좋아요. 수전손택의 글을 제대로 읽으려면 나는 한참 더 근육을 길러야겠구나 느끼게 되었어요 ㅋ

저는 요즘 시집을 읽고 싶어서 뭘 읽을까 고민중인데, 며칠 전 꿈에 다락방님이 나와서(!) 시집 몇 권을 추천해주셨답니다 ㅋ 그런데 무슨 시집이었는지 깨고 나니 기억이 안나네요... 아쉬워라... ㅋㅋ

다락방 2016-01-08 08:47   좋아요 1 | URL
우앗. 제가 헤이마님 꿈 속에서 추천해드렸을 시집이 무얼지 저도 궁금하네요. 그걸 왜 기억을 못하시는 겁니까! 기억해보세요! ㅎㅎ 저는 과연 어떤 시집을 추천해드렸을까요? 시집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말이죠. 흐흣.
수전 손택은 저에겐 어려웠어요, 헤이마님.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해도 그 좋은 걸 오롯이 받아들일 수가 없더라고요. 일단 제가 뭘 알아먹어야 좋아하든 아니든 할텐데 말이지요. 아직 내 독서력이 거기까지 이르진 못했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독서였어요.

네, 애인은 요즘 제 귀여움에 흠뻑 빠져삽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뽈따구 2016-01-0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정말 뜬금없이 ˝수전(노 는 제 눈이 맘대로 붙였어요 ㅡ.ㅡ) + 카푸치노 = 카푸치노 먹고 싶은데 돈 아깝다. 라는 이상한....... ㅡ.ㅡ 제가 용돈이 똑 떨어져서 그럴까요? ㅡ.ㅡ 긁적긁적 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마지막으로.... 죄송합니다아..... ㅡ.ㅡ 극적

다락방 2016-01-08 08:5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저도 오늘 커피 사마시고 싶었는데 통장에 잔고가 없어서 못 사먹었어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아까워할 돈조차 없네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 인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뽈따구 2016-01-08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다시 정독하며, 저에게도 이런 책이 하나 있는데 ˝괴델, 바하, 에셔˝ 라고.. 저는 괴델도 좋아하고, 바하도 좋아하고, 에셔도 참 좋아하는데. 정말이지 이 책은 어쩜 그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지..... 십년도 더 묵혔어요. ㅠㅠ

다락방 2016-01-11 08:16   좋아요 0 | URL
괴델, 바하, 에셔..라니 저는 제목만 봐도 음, 어렵겠구나, 진도를 뽑을 수가 없겠어, 하고 읽지 못할 것 같아요. 혹시 또 모르죠. 오랜 시간 후에는 독서근육이 좀 더 만들어져서 도전할 수 있을지도요. 진도가 안나가는 책 붙들고 있는 건 별로 효율적이지 못한 것 같아요. 거기 잡혀 있느라 다른 책을 못읽잖아요. ㅠㅠ 그래서 제 경우엔 음 어렵다 싶으면 일단 과감히 포기해요. 문제는, 그렇게 과감히 포기한 책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진 않는다는 거죠..음.. ㅠㅠ

단발머리 2016-01-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어요. 음... 어려웠고...
<타인의 고통>은 더 조금밖에 읽지 못 해서 수전 손택은 언제나 수전 숙제....

인용 해주신 단락 밑에서 두 번째 좋아요.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나는 스스로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나는 독학했다고 착각한다.
이런 인식을 남자작가들에게서는 많이 발견할 수 있거든요. 제가 보기엔요.
스스로 아무에게도 영향받지 않음을, 스스로를 독특한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는 거요.
수전 손택에게서는 그런 아우라가 있어요.
나는 작가다..... 멋져요. 멋진 사람...

다락방 2016-01-11 08:19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도 수전 손택 어려워 포기하셨었군요. 제 경우엔 [타인의 고통]을 포기했어요. 아, 이 책은 내가 읽을 책이 아니로구나, 하고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하나같이 좋다고 말하는데 왜 나는 못읽겠을까? 해서 스스로 좀 위축되기도 했었는데요, 이렇게 나는 수전 손택이 어렵다, 라고 고백하고 보니 다른 분들도 어려워했다는 사실을 많이 알게 되네요. 일단 저는 제 능력이 닿는 것까지만 읽고 다른 것들은 근육을 키운 뒤에 읽어야겠어요.

저는 부모님이 대학등록금까지 대주셨고(용돈은 제가 벌어 썼지만),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긴 했지만,
제 경우에도 제가 스스로 여기까지 왔다는 아주 강한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그간은 어리석은 사람에 더 가까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했고요. 이렇게 되기까지는 내 시간과 내 노력 그리고 내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수전 손택의 말을 밑줄 긋게 되더라고요.

단발머리님,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매일매일 아, 오늘도 또 하나 배웠어,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시사IN 제432호 2015.12.26
시사IN 편집부 엮음 / 참언론(잡지)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시사인의 정기구독이 끝났다. 지난 2주간이었나, 정기구독이 곧 끝나니 다시 재구독 해달라는 전화가 여러차례 왔다. 낯선 번호라 받지 않았더니 문자로 남겨져서, 그래서 아 이 번호가 재구독을 권유하는 번호구나, 알았다. 


나는 텔레비젼을 보지 않고 몇 년간 보던 일간지도 구독을 끊은지 오래됐다. 인터넷으로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 그런 내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려주는 것은 시사인이었다. 물론, SNS도.

정기구독이 끝났다는 말에 친구는 1년 더 볼래? 물었고, 나는 아니, 그동안 고마웠어, 괜찮아, 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번 호를 서점에 가서 사왔다. 별책부록으로 해마다 그렇듯이 <2015 행복한 책읽기>가 딸려왔는데, 일단 시사인 보다 그 책을 먼저 봤다. 김명남 번역가를 보다가 너무 멋있어서 절망하고(!)-이런 근사한 사람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거야, 라고 생각했는데 내 또래였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난 뭐했지 ㅠㅠ-, 몇 권의 책을 보관함에 담았다. 그리고 시사인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 나는 시사인이 좋구나, 생각했다.


독자들과의 대화가 소개되는 앞장도, 편집국장의 말도 어느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이번 호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강원국씨 인터뷰>였는데,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고, 그 글을 읽는데 하염없이 좋았다가 답답해졌다가 해서, 아, 내가 시사인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알겠는가 싶어지는 거다. 잠깐 인용해보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연설일 때는 직접 구술해줬다. 한번 올라가면 두 시간씩 얘기하는데, 녹음을 해도 사실 들을 시간이 없다. 구술하고 나면 빨리 다시 보고 싶어 한다. 바로 야마(주제)잡고 써야 한다. 한번은 전화로 구술받았다가 되게 혼난 적이 있다. 5년차 신년 기자회견이었는데, 대통령 콘텐츠를 이제 안다고 생각해서 나름 해석하면서 썼다. 대통령이 당일 아침에 보고 화가 났다. 하기 싫으면 그만하라고 했단다. 그걸 부속실장이 녹음해서 줬다. 마음이 참담했다.

(노무현)대통령이 실전에 강했다. 내가 실수했어도 실제로는 연설을 잘했던 거다. 잘하고 나니 화가 다 풀린다. 만약에 못했으면 '이 자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3.1절 때도 연설문 위에 메모해서 즉석연설을 후련하게 했다. 연설 원고에 본인이 메모지 붙인 걸 나중에 나한테 보내셨다. 공부하라고. 그만큼 임기응면에 강했다. 대통령이 연설을 잘 못한 거 임기 내내 딱 한 번 봤다. (시사인 인터뷰-강원국, p.37)



(위의 연설문에 대해)우린 그런 연설문 못 쓴다. 변호사 시절부터 자신이 절실히 겪은 문제기 때문에 나오는 거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연설 안에 자기가 있다. (p.39)






올해 최악의 인물로 김무성이 뽑힌 것에 대해서 크게 동의한다. <김형민 피디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이야기>도, <학교의 속살> 코너도 나의 패이버릿이다.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은 내게 꽤 중요하게 여겨진다.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알려고 들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 한 걸음 다가서게 되는 게 아닐까.


지난주에 회사 동료와 밥을 먹는데, 동료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차장님 제가 처음 만났을 때랑 정말 많이 달라지셨어요'. 나는 그 말을 긍정적으로 들었다. 확실히 나는 그 동료를 만났던 십년전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있다고 믿는다. 극단적으로 싫다고 말하는 일도 줄었고, 저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늘어났다. 사소하게는 이 페이퍼 상에서 악플에 대처하는 자세도 유연해졌다. 세상일에 예전보다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모든 것들은 나를 예전보다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되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앞으로도 계속 멈추지 않고 나아가려면 시사인을 그만 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월1일이 되면, 새해 선물로 내가 나에게 시사인 정기구독을 신청해줘야겠다. 아니, 지금 신청해야겠다. 더 나은 인간이 되자는 격려로 이것 만큼 좋은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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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5-12-2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저도 재구독했어요.반갑네요.^^

다락방 2015-12-28 11:11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재구독 신청 막 완료했어요! 반갑습니다! ㅎㅎ

꼬마요정 2015-12-28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구독 했네요.. 주간지는 자주 와서 다 챙기지 못할 때도 있긴 하지만요 ㅎㅎ

다락방 2015-12-28 16:28   좋아요 0 | URL
18만원이라니 큰 맘 먹어야 했는데, 이게 매달결제가 가능해서 15,000원이면 되더라고요. 신문 구독하는 것과 같은 가격이니 매달 결제로 선택하니 부담이 좀 덜하게 느껴졌어요. 앞으로도 계속 해야겠어요.

테레사 2015-12-28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정말 재밌네요..시사인 구독을 은근 권유하는 글같아요..ㅎ 저는 한겨레21을 오랫동안 구독해 왔는데..시사인으로 갈아탈까..어쩔까..둘다볼까? 아냐 난 두개의 잡지를 볼 만큼의 형편은 안돼 했다가...암튼 아직도 결정 못내리고 있어요.

다락방 2015-12-28 16:30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시사인 하나도 다 챙겨보지는 못해서 보고싶은 것만 보게 되거든요. 그러니 매주 두 개의 주간지를 받아보게 된다면 무척 힘들것 같아요. 막 밀리고... 테레사님, 잘 생각하셔서 결정하세요. 하핫;;

비연 2015-12-2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최악의 인물로 김무성이 뽑혔다는 말에... 잠시 저도 구독할까 싶어지네요.
크게 동의고 또 크게 동의하고.. 사실 보기도 싫은 인간상입니다..ㅜ

다락방 2015-12-28 16:31   좋아요 0 | URL
김무성은 끊임없이 어처구니 없는 말만 골라하는 인물인데 최악의 인물로 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없지요. 아무쪼록 내년에는 최악의 인물로 선정되지 않을 수 있도록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_-

뽈따구 2015-12-2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울 아들이 매일 저보고 핸드폰 책 그만보고 종이책 읽으라고 잔소리 하는데, 저도 시사인 구독하고 아들책볼때 옆에서 시사인 종이책 봐얄까봐요. ㅎㅎㅎㅎ

근데,,,,, 악플이 있어요???! 몰랐네요, 그리고 놀랍네요. 이런 글들에도 악플이 달리다니..... >,.<

다락방 2015-12-28 16:33   좋아요 0 | URL
뽈따구님, 시사인 보시기를 적극 추천합니다. 저 위에 페이퍼에도 언급했지만 김형민 피디의 역사이야기가 정말 좋거든요. 저도 일 년 구독했으니 이제 되었다, 하려했는데 이걸 그만 볼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추천합니다!!

하하 네, 저에게도 악플이 달립니다. 왜 아니겠어요. 이런 글을 포함해서 제 다른 글들까지 되게 보기 싫고 짜증나고 화가 날 수도 있겠지요. 악플도 달리고 지적질도 달리고 그래요. 하핫.
그치만 이제 비난을 위한 비난은 그저 웃어넘길 수 있게 됐어요. 하핫.

책탐 2015-12-28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고 사러가는것도 일이네요. 매주 다 챙겨읽진 못해도 정기구독이 좋을꺼 같기도 하고..올해가 가기전에 결정을 해야하는데..ㅜㅜ

다락방 2015-12-28 16:34   좋아요 0 | URL
저도 새해에 재구독 신청하려고 했는데요, 새해부터 받기 위해서는 지금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페이퍼 쓰자마자 부랴부랴 재구독 신청했어요. 책탐님, 우리 정기구독 친구해요!! >.<

2015-12-28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8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5-12-28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글쿤요ㅜ 좋은연말보내십시오

다락방 2015-12-30 10:04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도 한 해 마무리 잘 하셔요!!

보슬비 2015-12-28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구독했어요. ^^

다락방 2015-12-30 10:04   좋아요 0 | URL
저도 재구독 했어요. 할 수밖에 없었어요. 흣.

transient-guest 2015-12-2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뽑은 최악의 인물은 2012년 12월 이래 꾸준히 `그녀`입니다. 이제 곧 다가오는 병신년, `그녀`는 변함없이 `그녀`가 하던 짓들을 이어갈 것이라 생각하니 갑갑하네요. 밤새 들어온 `위안부` `문제` 한일타결과 `그녀`의 담화에 빡쳐 하루 종일 화가 납니다. 시사인 계속 보세요.ㅎㅎ 주진우를 위해서라도.

다락방 2015-12-30 10:05   좋아요 0 | URL
진짜 토할것 같아요. 이 토할 것 같은 소식들을 알고 싶지 않다가도 그래도 알아야 뭘 해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계속 보겠습니다! 하아-

2016-01-02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4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3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교수가 아닌 시간강사가 돈을 얼마나 '못'버는지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다.  학교라는 곳이 직장일 때는, 연구를 하며 공부를 하기에는 얼마나 열악한 곳인지 알게 되자 역겨웠다. 대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받아가는 돈이 그토록 어마어마하면서, 그곳에서 공부를 하며 '잡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돈 주기를 꺼려하는 곳. 게다가 매일 하루종일을 연구실에 묶여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너무나 당연시하며, 교수와 선배의 부름에 만사 제치고 달려가야 하는 것들은 시스템이 너무나 병신같고 도둑같음을 증명한다. 게다가 시간강사로 일하는 저자는 4대보험을 보장받지도 못한다. 저자는 맥도날드에서 '알바'를 하면서 간신히 4대보험의 '혜택'을 받게 된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 건강보험에 부모님을 피부양자로 넣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쓸쓸해하는 저자의 글을 읽노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가 누군가에게는 '교수님'이라고 불릴 시간강사 라는 타이틀을 달기까지 말 그대로 '힘겹게' 살아왔으며 빚만 잔뜩 졌다는 걸 보고서는, 대체 이 나라는 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나라는... 뭐지?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밟는 내내 대출해서 생활비를 마련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람들과의 교류도 끊기게 된다. 그는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얻어먹기만 하는 인간'이 되어있었다.



나는 세 번째 술자리를 대접하고 싶어서, 근처 치킨집에 자리를 만들고 지난번엔 사주셔서 정말 잘 먹었어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했다. 그들은 아이고 고맞지, 라면서 좋게 술자리를 가졌다. 그런데 나가면서 계산을 하려고 보니 이미 U가 계산을 했다면 먼저 나와 있었다. 어 제가 산다니까 왜 그러셨어요 형님, 하니 아냐 뭘……하고 웃고 서로 헤어졌다. 그런데 네 번째 술자리에서 직장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하다가 내가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니 U 는 야 너는 뭘 가르치냐 혹시 뭐 공짜로 어디 가서 얻어먹고 그런 거 가르치냐, 라고 했다. 1년이 넘게 지난 일이지만 그 말이 아직도 토씨 그대로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나서 술값을 계산했고, 한 번 더 술자리를 갖자고 해 먼저 계산하고 나왔다. 다음 날 단톡방에서 나오고, 그 뒤로 체육관에 가지 않았다. (p.65)



부모님께도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체육관에서 운동하며 만난 사람들에게도 그는 당당히 설 수가 없었고, 그렇게 사회적인 인간에서 멀어졌다. 이게 그가 시간강사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몫이었다. 







맥도날드에서도 해주는 걸 대학에서는 해주지 않는다. '교수님'이라 불리지만 먹고 살기가 힘이 든다. 그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연구를 하는 즐거움, 논문을 쓰면서 느꼈던 짜릿함이 고스란히 담겨져있고, 첫 강의를 맡으면서 좋은 교수가 되기 위해 학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도 담겨져있다. 나쁜 상사 밑에서 보고 배우는 건 나쁜 점들이 더 먼저인데, 내가 이렇게 당했으니 너도 이렇게 당해봐, 하는 것이 더 전달 속도가 빠르고 강한데, 저자는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하고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잘못했다고 사과할 줄 알며 혹여라도 내가 이들을 압박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고 수시로 돌아본다. 좋은 교수가 되었다. 이렇게 힘든 제도 속에서, 불합리한 시스템 속에서 이렇게 괜찮은 교수로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교수가 되어서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게다가 시종일관 그는 겸손한 문체를 써서, 그간 내가 읽어온 어떤 에세이보다 묵직하게 다가온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그 공부에서 정말 신나는 재미를 찾는다.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학생들과 소통하는 좋은 교수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이토록이나 열악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포기할 거란 생각이 든다. 불합리한 시스템 때문에 병신같은 제도 때문에 우리는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는 또한 정말 재미있게 공부를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은 돌아봐야 할 일이다.



이 책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난주에 만난 친구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이 책을 주었다. 일단 이 이야기가 널리 익혀서 대학 내의 불합리한 시스템이 밖으로 드러나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또 하나, 저자에게 어떻게든 이 책이 많이 팔려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물론 책의 인세라는 것이 그 사람이 먹고사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책에서 '아파도 되는 청춘은 없다'고 하는데, 그 말은 맞다. 노력을 덜해서 젊은 세대들이 고생하는 게 아니라, 그간 어른들이 썩은 세상을 만들어놨기에 청춘들이 아파하고 있는 거다. 원래 이래왔어, 늘 이래왔어, 하고 악습을 계속 전달하는 것부터 뿌리 뽑을 일이다. 그리고 대학들이여. 등록금을 그렇게 받아 쳐먹으면서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다니, 뭐하는 짓들인가! 그러고서도 당신들이 누군가를 '가르친다'고 할 수 있는가. 니네나 똑바로 살 일이다. 게다가 교수들도 똑똑히 현실을 보길 바란다. 당신들은 얼마를 받고 무슨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는가. 자신들의 삶은 그러할진데 어떻게 한 '학기'에 육십만원 받는 사람에게 '지낼만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저자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그런 환경인 것을 그간 몰라서, 관심이 없어서. 그리고 감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줘서'. 그렇게 버텨주고 겸손한 시선으로 학생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어서, 부끄럽지 않은 교수가 되기 위해 늘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어서 고맙다고.

기회가 된다면 내가 술 한 잔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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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자연인이다
    from 마지막 키스 2015-12-21 10:08 
    나이들면서 입맛이 바뀌는 것처럼 생각하는 바도 달라지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은 '절대' 라는 말을 써서는 안되는 것 같다. 이십대 무렵,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누군가를 욕하던 행위 그 자체를 나 스스로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아, 이런 사람 나는 욕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네... 하고.그래서 이제는 다른 사람이 한 행동에 대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은 그럴 만해서 그런 게 아닐까?
 
 
기억의집 2015-12-2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란 대목에 대목에 맘이 아프네요. 얼마나 그 말에 상처가 되었으면...

다락방 2015-12-21 14:20   좋아요 0 | URL
네, 누군가에게 얻어먹기만 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는 것에서 저자가 되게 씁쓸해하더라고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자는 돈벌이도 시원찮아 더 속이 쓰렸을 것 같아요. 그런 불합리한 제도속에 놓여서 살아가야 한다는 게 너무 속상했어요. 읽으면서 이 책 참 아프고 무섭구나, 했어요. 소설이 아니라서요. 소설이 아니라서 더 아팠어요..

단발머리 2015-12-2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사 친구가 있죠. 모교랑 여기 저기 몇 군데 강의를 나가는데 집이 지방이라 서울 왔다갔다 차비 빼고나면 딸애 어린이집 비용도 낼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친구는 남편이 돈을 버니 그나마 다행이죠.
이게 취미생활도 아니고. 돈 내면서 가르쳐야 하다니....
그에 반해 교수님들, 진짜 교수님들은 많이 여유로우신것 같아요. 편안하죠~~ 경제적 여유로움이 뭐... 그대로 묻어나죠.

그런 면에서는 중학교 고등학교가 나은 것 같아요. 간단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수업을 맡는 교사라고 한다면 시간당 강의료가 크게 차이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1년 기간제교사나 정규직 교사나 월급차이가 아주 크게 나지는 않는다는 거죠.

대학이 나쁘다,로 결론짓고요.

저도 이 분 신문에서 기사와 사진을 보았더니, 무척 가깝게 느껴지네요.
저자 분~~~ 이 글 보시면 연락주세요. 다락방님이 술 한 잔 사신답니다.
만나실 때 저도 꼭 불러주시구요~~~ ㅎㅎㅎ


다락방 2015-12-21 14:22   좋아요 0 | URL
네, 단발머리님. 대학 강사가 맥도날드 알바를 겸하고 있고, 심지어 건강보험증도 맥도날드에 다녔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어요. 대학은.. 뭔가요? 이놈의 대학, 대체 하는 일이 뭘까요? 대학이라는 곳이 참 역겹더라고요. 니네 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냐, 싶고 말이지요. 등록금은 학생 한 명당 몇 백만원씩 뜯어가면서, 대체 그 돈으로 뭐하는 걸까요? 씁쓸했어요. 그렇게나 오래 공부해서 좋은 교수가 되고자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 계속 계속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게 말이지요. 강의를 나가는 지금도 계속 학자금 대출 갚느라 자기가 쓸 수 있는 돈이 얼마 없어요. 인생...

네, 저자랑 술 마실 기회가 있다면 단발머리님도 꼭!! 부르겠습니다. 흣.

transient-guest 2015-12-21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보따리 장사가 따로 없어요 게다가 매번 재계약 하려면 피말리죠 정말 나쁜 제도에요

다락방 2015-12-23 10:15   좋아요 0 | URL
그렇게나 오랜 시간 열심히 공부했는데 돌아오는 게 너무 초라한 것 같아요. 아니, 돌아온다는 말 조차 적합한 단어가 아닌 것 같아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살리미 2015-12-2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기사를 보니까 저자가 자신을 공개하고 대학강사직도 맥도날드 알바도 그만두었더라고요. 첨엔 자신을 밝히지 않으려고 309동 1201호라는 이름으로 책을 냈던데 그 책을 읽고 어떻게들 알았는지 `너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협박조로 찾아오는 선배들이 많았다는 기사도 봤습니다. 이 책 나왔을때부터 저도 너무 놀랍고 관심이 가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젠 당당히 이름을 밝히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겠다 하더라고요. 저자의 이름이 마침 우리 오빠 이름이랑 같아서 더 마음이 쓰이더군요. 정말 잘됐으면 좋겠어요.
현실이 이런데 시간강사법이 시행되게되면 더 많은 시간강사들이 제대로된 처우를 받지 못한다더군요. ㅠㅠ
다락방님, 꼭 만나서 술한잔 하시게 되면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해주세요^^

다락방 2015-12-23 10:16   좋아요 0 | URL
저도 대학강사직 그만 두었다는 것만 건너건너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조금이라도 형편이 나아졌다면 좋을텐데요. 이 나라에서는 형편이 나아지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서 안타까워요. 말그대로 젊은 사람들이 발붙이고 살기에 이 땅은 헬조선이죠.. ㅠㅠ

아애 2015-12-2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이 나는 시간강사다 가 아니고 지방대 시간강사다 라는 것도 참 가슴 아픕니다. 우리 사회에 있는 뿌리 깊은 편견이 그분들을 또 한 번 힘들게 하죠.

다락방 2015-12-23 10:16   좋아요 0 | URL
네, 책에서도 여러차례 지잡대에 대해 언급이 되더라고요. 어느순간부턴가 대학이 그저 허울 좋은 타이틀이 된 것 같아요. 그 안에서 누가 얼만큼 어떤 걸 공부하는지와는 완전히 상관없이 말이지요.

아애 2015-12-2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교수들 참 편하고 여유롭다는 말에 반은 공감하고 반은 그렇질 못하네요. 대학에 아직 살아있는 정신들이 많습니다. 다만 죽은 정신이 더 목소리 크고 힘 있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죠.

다락방 2015-12-23 10:19   좋아요 0 | URL
네, 아애님 말씀대로 모든 교수들이 다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갖고 있진 않겠죠. 가끔 언론에 보도되거나 혹은 그렇게 드러나진 않았어도 형편없는 교수들이 있는 반면에 성실히 연구하고 또 성실하게 가르치고자 하는 교수들도 있을 걸 압니다. 그런데 못된 교수들의 영향력이 너무 세요. 학생들을, 조교들을 비참하게 만들죠... ㅠㅠ

꼬마요정 2015-12-21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원 가서 선배님들 얘기 들어보니 참으로 갑갑하고 답답하고... 그래도 후배한테 머라도 사 줄라고 하시는 거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다락방 2015-12-23 10:19   좋아요 0 | URL
선배라고 후배들한테 잘해주고 싶어하는데 실상 베풀 수 있는 건 별로 없고... 마음이 얼마나 안좋을까요? ㅜㅜ
어쩌다 대학은 그런 곳이 되었을까요? ㅜㅜ

2015-12-21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3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5-12-2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둘겨 패고 감금하고 고문하고 인분까지 먹이는 교수님도 있는데요 뭘...

다락방 2015-12-23 10:22   좋아요 0 | URL
하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메피스토님? 어쩌다 이지경이 된걸까요? 대학이 엉망이라 나라가 엉망인지 나라가 엉망이라 대학도 엉망인지... ㅠㅠ

Mephistopheles 2015-12-23 11:35   좋아요 0 | URL
사실 대학은 옛날부터 엉망이었던 터라....
이런 문제들이 요즘에야 수면으로 튀어나오는 것뿐이라고 생각됩니다.

몬스터 2015-12-22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쓰신 분의 신원(?)이 드러나 학교에서 쫒겨 났다는 글을 봤네요. 씁쓸합니다.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ㅎㅎㅎ

다락방 2015-12-23 10:22   좋아요 0 | URL
네 그러게요 산다는 게 쉽지가 않네요.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왜이렇게 어려운걸까요? 학교라는 일터에서 벗어난 그 다음의 삶은 그전보다 좀 나아졌기를 바랄 뿐입니다. ㅠㅠ

dd 2015-12-26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ㅜㅜ너무너무 슬퍼요...

다락방 2016-01-04 14:52   좋아요 0 | URL
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추천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이웃집 살인마 - 진화 심리학으로 파헤친 인간의 살인 본성
데이비드 버스 지음, 홍승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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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할 때도 그렇고 다른 인터넷 쇼핑을 할 때, 나는 가급적이면 회사에서 택배를 받는다. 친구들이 주소를 물어도 대부분 회사 주소를 알려준다. 집 주소는 가능하면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남자친구인 경우엔 더 그렇다. 가급적이면 애인이라도 집 주소를 알려주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알려주지 않을 수는 없다. 연애를 하고 지내다보면 부득이하게 집 주소를 알려줘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야 만다. 좋다고 사귀면서 알려주지 않는 것도 좀 뭣해서 결국엔 알려주게 되는데, 헤어지고나면 집 주소를 알려준 게 가장 걸린다. 


나는 내가 강박증을 갖고 있어서 그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최근에서야 많은 여자사람들이 자신의 애인에게 집주소 알려주기를 꺼려한다는 걸 알게됐다. 뿐만아니라, 내가 사는 곳을 알려줬다는 거, 특히나 헤어진 애인이 나의 집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게됐다. 예전에 여자사람친구랑 얘기하는데, 그 친구가 그랬다. '나는 애인하고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닌데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까봐 무섭다' 고. 나 역시도 그랬다. 헤어지고나서 가장 무서운 건, 혹시라도 집앞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헤어진 연인을, 말없이, 맞닥뜨리기 싫었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물론, 사귀고 있을 때도 말없이 집앞에서 기다리는 건 오싹하다. 결코 유쾌하지 않다. 낭만을 찾는답시고 약속 없이 찾아오는 일은 연애중에도 나는 싫다. 오늘도 한 여자사람에게 물었다. 너도 혹시 헤어진 남자가 집앞에서 기다릴까봐 무서웠던 적이 있냐고. 그녀는 있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기본적으로 남자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릴 적에 폭력에 노출된 때문인지 아니면 여태 살아오면서 겪어온 생활속의 남자들의 모습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나는 아주 많이 남자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웃고 술 마시는 걸 정말 사랑하지만, 두려움까지 함께 가진 것도 맞다. 헤어진 뒤 쌍년이란 욕을 들었을 때도 두려웠고 욕을 먹지 않았는데도 두려웠던 적도 있다. 어떤 헤어짐에 있어서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나를 아는 여자사람들 모두에게 내가 지금 이토록 두렵다, 고 다 말하고 다니기도 했었다. 혹시라도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내가 이러이러해서 두려워했었다는 걸 알아줘, 하고. 


물론 매 연애와 이별뒤에 늘 그랬던 건 아니다. 또한 나를 두렵게 했던 남자들, 내 친구들을 두렵게 했던 남자들이 유별나게 나빴던 남자들도 아니었다. 오히려 착하고 평범한, 좋은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그중 일부는 헤어지고 나니 무서운 존재가 되는 거다. 그렇다면 그런 두려움을 느끼는 내가, 다른 여자들이 유별난걸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잠시만 생각해 보자. 순간적일지라도 누군가를 살해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가? (p.56)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특이한 사람이 아니란다. 우리 모두 누군가 한 번은 죽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살인에 대한 판타지를 가졌다는 것을 이 책은 얘기한다.


이 책에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가진 것을 잃을까봐, 경쟁상대가 꼴보고 싫어서, 모욕감을 느껴서, 두려워서 등등. 각각의 이유로 사람들은 누군가를 살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대부분은 그저 생각에 그쳤으며 그중 일부는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다보니 나처럼 헤어진 연인에 의해 내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여자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됐다. 내가 유별난 게 아니었단 말이다.



우리는 몇몇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남성들은 자신의 짝짓기 전망이 희박해질 때 살인을 저지르고 싶어진다고 응답한 반면,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말했듯이, "당신을 거절할 때, 여자들은 사악해 보인다.(Women seem wicked when you're unwanted)"(1960년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킵며 히피 문화의 상징으로 추앙받던 전설적인 록 그룹 도어스의 보컬 짐 모리슨이 가사를 쓴 「사람들은 이상해(People are Strange)」에 나오는 구절이다-옮긴이) 이 불온한 생각은 남자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상황에 대한 연구 결과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p.36-37)



자신을 버린 배우자에 대한 살인 판타지에서는, 남녀 간의 차이가 그리 크게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판타지를 실행할 가능성이 주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성들이 자신을 버린 배우자를 살해한 반면, 여성들은 살인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될 만큼 심하게 자신을 격리하고 학대하며 위협한 배우자를 살해했다. (p.174)



간략히 말해,여성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살인의 주된 동기는 자기 보호와 위험한 결혼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필사적인 욕망이다. 이렇게 학대적인 관계에 처한 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 자신의 배우자를 떠나려 시도한,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는 많은 여성들이 수잔 라이트보다 더 운이 없었다. 적어도 수잔은 자신의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p.171)



한 남자사람을 처음 보게 됐을 때, 그리고 그저 아는 사이로 지냈을 때는 그가 '사귀면서' 어떤 남자일지 알 수가 없다. 사귀면서는 그의 새로운 면들, 내가 알지 못했던 면들이 속속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사귀면서 알지 못했던 점들이 헤어지고 나서 드러나기도 한다. 이 사람이 이럴 줄 몰랐는데, 하는 것들. 데이트폭력을 당하고 가정 폭력에 노출된 여자들에게 종종 '그런 남자랑 왜 사귀어', '그런 남자랑 왜 결혼했어' 라고들 말하는데, 사귀기 전에는 그가 때릴 줄 몰랐기에 사귀었고, 결혼 전에도 그가 수시로 내게 주먹을 휘두를 줄 몰랐기에 그렇게 되었다. 또한 '맞은 여자'라는 타이틀은 오히려 가해자보다 더 많이 피해자를 위협한다. 그런 폭력 속에 휘둘린 이상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 역시 어마어마한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와 사귀기 전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남자는 여자를 때릴 남자다', '이 남자는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는 남자다', '이 남자는 집착으로 여자를 피곤하게 할 것이다' 등등. 그런 게 이마에 써있다면, 여자들이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런 남자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텐데.



남자들이 반응하는 방법을 예측할 수만 있다면(누가 애걸하며 간청할지, 누가 위협할지, 누가 스토킹할지, 누가 떠나갈지 그리고 누가 살해할지) 상당한 고통을 줄이고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살인이 상대적으로 드문 사건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가 살인을 저지를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p.139)



그는 계속 제게 전화해서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제가 자신을 완전히 떠나 버리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도 말했구요. …… 제가 사는 곳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집에 찾아와서 절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p.145)



살해당한 많은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살해당할 걸 예측하고 있었다. 누가 자신을 죽일지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고 '저 사람이 나를 언젠가 죽일거야' 하는 말을 바깥으로 꺼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두려워했던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살해당한다. 멀리 도망가기도 해봤지만 결국은 그렇게 됐다. 커다란 두려움이 계속 내게 보내는 신호를 절대 무시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7년간 살인에 대해 연구해서 이 책을 써낸 저자 '데이비드 버스'는 이렇게 오랜 시간 살인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문제에 대해 만병통치약이란 없다. (p.361)



라고 말한다. 그는 그저 나의 직관을 믿으라고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것 뿐인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살해당할 위험이 얼마나 실제적인 것인지 깨달아라. 반갑지 않은 성적인 눈길을 일 초 이상으로 오래 보내는 남자를 경계하라.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걸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 계부모에게 주의하라. 당신의 성공을 배 아파 하며 조용히 앉아 있는 경쟁자를 조심하라. 동료들 앞에서 당신이 준 모욕을 참을성 있게 받아넘긴 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하라. 방금 유혹한 이성의 전 배우자를 주의하라. 거절하기 전에 당신을 '유일한 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낭만주의자를 경계하라. 떠나지 않으려는, 스토커로 변해 버린 전 애인을 경계하라. (p.362)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한번쯤은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저자는 묻는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죽이고나면 자신이 감옥에 갈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앞으로의 삶을 암흑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고. 또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에만 그친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저자가 내게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그들에게 물었던 그대로 묻는다면, 나는 저자에게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힘이 없었고, 지금은 힘이 있지만 그가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쩌면 괴물이 됐을지도 모를 순간들을 지나쳐왔다. 나 역시도 그랬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얘기, 누군가 나를 죽일까봐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권 가득 읽고났더니 두려움보다는 슬픔이 밀려왔다. 죽이고 싶다는 욕망도-거기에 이르게 한 수치심, 모멸감, 분함 등등-,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하나같이 다 내가 알 수 있는 감정들이라 마냥 슬펐다. 이 연구를 하는 동안 저자 역시 연구를 그만둘까를 고민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러니까 살인에 대한 욕망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해 믿고 있다고 해야하나. 그리고, 나도 그렇다.


우리의 마음속에 살인을 저지르도록 자극하는 적응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받아들이고 살인을 퇴치하려는 노력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인간은 살인에 대한 적응뿐만 아니라 협동, 이타주의, 화해, 우정, 동맹 형성, 자기희생에 대한 적응들 역시 가지고 있다. 살인이 발생할 때, 인간의 본성은 문제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본성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기도 하다. (p.356)



라고 써놨건만, 조선대의전원생의 데이트폭력 사건을 듣게 됐다. 네 시간 동안 잔인한 폭력 앞에 노출되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너무 안좋았다. 피해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는데, 고작 얼마간의 벌금으로 가해자를 세상에, 피해자의 옆에 다시 내놓다니. 바로 위에 희망 운운한게 병신 같은 말이 되어버렸다.




출생 후 작동하는 살해 방어 기제는 바로 `울기`다. `울기`는 아기가 배고픔이나 고통을 부모에게 알리는 괴로움의 신호이다. 출생 후 6개월이 지나, 영아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비교적 갖추게 될 때까지, 영아에게서는 특화된 공포 반응이 나타난다. 바로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 반응(낯가림)이다. 영아의 공포 반응은 낯선 사람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남성에게 집중해서 나타난다. 이는 인간의 진화 역사 동안 영아에게 가장 큰 위험의 대상이었던 성별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p.30)

또 다른 문제는 비상하는 것은 종종 추락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질 때처럼 갑작스럽게 사랑에 흥미를 잃는다. 우리는 누구의 사랑이 식을지 확신을 가지고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이에 대해 몇몇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준다. 사랑에 빠질 때, 욕구의 충족이 중대한 것처럼, 욕구의 방해는 갈등과 이혼을 예고한다. 부분적으로 그가 가진 부와 야심 때문에 선택된 남성은 직업을 잃게 되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또 부분적으로 젊음과 미모 때문에 선택된 여성은 젊은 모델이 자신의 배우자를 유혹하면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자상하던 상대가 잔인하게 변할지도 모른다. 반복해서 관계를 가졌음에도 임신이 되지 않으면 부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더 비옥한 결합을 찾을지도 모른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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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 2015-12-01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보고 나니 생각나는 남자가 있네요. 친구에게 직장에서 묘하게 계속 찝쩍대는, 심지어 결혼한 뒤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고요.
매일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오는 기사들이나, 어제 4시간 감금폭행이나 여자를 무섭게 하는 일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되는 거 같습니다.

다락방 2015-12-01 09:38   좋아요 0 | URL
네, 무휘님. 제가 아는 여자들 중에서도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어요. 분명히 `아니`라고 말했고 심지어 `애인이 있다`고 말했는데도 무작정 들이대는 남자들이요. 소리도 질러보고 좋게도 말해봤지만 자기 말만 하고 자기 감정만 전달하기에 급급했던 남자들. 그런 남자들을 대하는 여자들은 정말로 `무서워` 했어요.

현재진행형이에요, 무휘님. 여전히요.

단발머리 2015-12-0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문기사나 방송을 통해서는 많이 들었지만 헤어진 남자, 전 남편, 전 남친의 존재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이 글을 읽고나니 더 가깝게 느꼈어요. 제 주위에서는 실제로 많이 말하지 않기 때문인것 같아요.
헤어져서도 도망갈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헤어져야 하는지...

그나저나 저는 이 책, 읽어요, 말아요? ㅎㅎ

다락방 2015-12-01 10:29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제가 ... 그러니까.. 판단이 잘 안되네요? ㅎㅎㅎㅎㅎ

네, 단발머리님. 실제로 저도 공포를 느낀 적이 있고요, 공포를 느꼈다고 말한 지인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털어놓다 보면 꽤 많더라고요. 다들 그걸 말하기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것 같아요. 내가 사귀었던 사람, 내가 호감을 가진 남자에게 실상 공포를 느꼈었다는 걸 말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돼요. 말해야 해요. 그래서 누구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지 주변인에게 알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전. ㅠㅠ

도망을 갔는데도 따라와서 총으로 쏜 남자도 있더라고요. 왜 헤어지는 일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된걸까요...하아-

뽈따구 2015-12-0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역시... 전.. 무한긍정인가봐요. 이 글을 읽으면서 십분 공감하면서도.... 실감이 안 나는걸보면. 긁적.

다락방 2015-12-01 13:13   좋아요 0 | URL
실감이 안 나는게 낫지 않을까요? 실감나는 순간 아프고 불편하니까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