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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라기보다 무엇을 하다 보니 혹은 어쩌다 보니 또 여름을 맞는 건 아닐까. 더 정확히는 여름 카테고리에 온갖 것을 집어넣고 여름을 겪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걸” 배웠다고 나름 자긍하더라도 그건 순간이었고, 그는 아이를 잃어버린 이후의 시간으로 다시 배워야 했다(「입동」, 《바깥은 여름》). 사소하고 시시한 삶들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약손’(《비행운》 우찬제 해설 중)이 된 김애란은 무엇을 배워나가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단편 소설집 《달려라, 아비》(2005), 《침이 고인다》(2007) 인물들이 사춘기에서 청춘에 해당하는 시기의 열기, 실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과도기인 《비행운》(2012)을 거쳐 《바깥은 여름》(2017) 인물들은 반지하 자취방과 노량진과 학원과 고시촌과 고시원의 사슬, 서울살이의 미숙함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러나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호텔 니약 따」, 《비행운》),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건너편」, 《바깥은 여름》)라고 말하며 파국을 곱씹는 시간을 여전히 겪고 있다. 앞의 두 단편집과 확연히 다른 《비행운》과 《바깥은 여름》의 단편들이 여름의 폭염과 장마 풍경인 게 우연은 아닌 거 같다. “아주 먼 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물속 골리앗」, 《비행운》)이란 표현처럼 악전고투하지만 더위에 더위가 더해지고 비에 비가 더해지듯 대부분의 나날이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들의 연속이라 지리멸렬하고 싱거워지는 인생살이와 닮았기 때문이리라.
카뮈의 '여름'이 굴복하지 않는 태양의 결기, 절망하지 않는 문학정신으로서 작품에 반영됐다면 김애란의 '여름'은 물기(氣)-죽음과 눈물의 위치라 아주 대조적이다.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물속 골리앗」, 《비행운》) 같은 게 자연뿐만이 아니라서 이 세계는 더 나아가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가리는 손」, 《바깥은 여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누군가와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해 종종 물속으로 뛰어든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비행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바깥은 여름》) 계절과 달리 사람은 잘 돌아오지 않는다. 남은 이들은, 떨어지지도 썩지도 못한 채 겨울 은행나무에 매달린 은행처럼 죽은 이가 남긴 테이프 속 목소리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를 대답할 상대도 없이 따라 하거나(「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비행운》), 기계장치 Siri와 대화다운 대화를 하며 인간적 편안함을 느끼거나(「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바깥은 여름》), 기성을 답습하는 것을 넘어 다단계 조직원으로 서로를 악랄하게 착취하며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걸 깨달을 땐 돌이킬 수 없게 되거나(「서른」, 《비행운》),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 묻기만 하고 자기 욕구에 충실하느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노찬성과 에반」, 《바깥은 여름》).
《바깥은 여름》에서 특히 아프게 다가오는 작품은 「노찬성과 에반」이었다. 이 작품은 「달려라, 아비」부터 김애란 소설의 큰 줄기인 ‘소통과 유대를 가장 잘 나눌 수 있는 존재 - 부모 세대를 잃은 소년’의 최신판이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침이 고인다》),「물속 골리앗」(《비행운》) 까지 그 빈자리를 판타지로 채우던 상상력의 실험은 모두 사라지고,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자신의 설자리마저 살얼음판으로 만드는 팍팍한 현실과 소년만 덩그러니 소묘로 묘사해 놨다. 아이를 얻고 기르려는 새로운 부모 세대도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 철거지역에서 양수가 터지거나(「서른」, 《비행운》),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기르려고 이사한 곳에서 어이없이 아이를 잃거나(「입동」, 《바깥은 여름》), 아이의 미래를 위해 생이별을 하거나(「침묵의 미래」, 《바깥은 여름》), 인종차별과 도덕적 잣대를 걱정하지만 부모 자신이 혼혈아인 자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일쑤다(「가리는 손」, 《바깥은 여름》). 소통과 유대를 가장 잘 나눌 수 있는 존재의 부재나 방기나 오해가 부른 부비트랩 상황이다.
이광호 평론가는 《침이 고인다》 해설에서 “김애란 소설의 문학적 성취는 동시대 젊은 세대의 사회문화적인 궁핍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개인성의 균열과 심연을 탐사하고, 그 안에서 실존의 지리학과 우주적 공간을 발견하는 상상적 모험을 펼쳐 보인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우찬제 평론가는 《비행운》 해설에서 김애란의 발전상에 대해 “이런 상황을 구성하면서 작가는 단지 사회구조의 모순을 드러낸다거나, 그 안에서 이전투구하는 인간관계의 난맥상을 그린다거나,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가혹한 시대의 피해자일 뿐이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그 어떤 부류의 면죄부를 위한 알리바이도 대지 않은 채, 자신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문제의 근원을 전면적으로 재탐사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종합해 보면 “어른이 되는 시간이란 게/결국 실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지만/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보다 ‘잘’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어”(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2011))란 작가의 문장이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같다. 김애란의 초기작은 좋아했지만 최근작에 대해서는 예전만큼 호감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독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갈린다고 생각한다. 연인의 대표적 이벤트 날인 ‘크리스마스’가 가난한 연애 해프닝(「성탄 특선」, 《침이 고인다》)에서 더 이상 참지 못 하는 부부의 이혼 결정(「건너편」, 《바깥은 여름》)으로 묵직해졌듯이 김애란의 자연(특히 여름)-환경과 소재들은 반복되는 소용돌이 속에 침묵의 결을 키워가고 있다는 게 지금 내가 주목하는 점이다. 어느 대목에서는 이 침묵이 레이먼드 카버의 그것과 비슷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판타지나 상상력의 실험이 아니라 김애란은 더 많은 실망과 실패의 실험으로 진지하게 접근하리라 짐작한다.
서른을 넘겼던 작가가 쓴 「서른」의 주인공은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거 같다고. 조만간 다시 옛날이 될 오늘이, 이렇게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있네요.”라고 말했지만, 작가는 과거나 사실을 보고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 시간, 감정, 인상’ 모두에 공기처럼 배어 있는 것들을 글로 표현하려는 자 아닌가. 바깥의 여름도 스노볼 안의 폭설도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할 때, 품이 드는 ‘이해’가 시차를 좁힐 것이고 한 사람만의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