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이의 모습을 일정 부분 가지고 있듯 시인의 시어와 상상력도 계속 변용되어 나타난다. 구력이 꽤 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왔을 때 기대보다 걱정이 더 앞선다. 특히 재기 넘치는 상상력을 보여주던 시인 경우 더 그렇다. 만물의 흐름처럼 자신의 독특한 모난 매력을 퇴색 없이 유지하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어디로 옮겨도 알알이 슬프다는 표제시 박상순「슬픈 감자 200그램」이나 시집 전체에 대한 내 감상은 아쉽게도 슬픈 실망의 200그램이다.

* 시집 전반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시어의 남발이었다.
(‘초승달 눈썹, 연분홍 입술, 터질 듯 말 듯 커다란 젖가슴, 출렁이는 머릿결, 불룩한 엉덩이‘ - 「여배우 김모모루아는 바르셀로나에 갔다」)
* 긴장감 넘치는 도약 없이 감상적인 전개도 실망스러웠다.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능숙하지 못하다./그래도 몇 절은 아름답다./ 내가 여전히 우울하고/ 내가 여전히 고독하고/ 내가 아직도 꿈꾸기 때문이다.‘ - 「음악은 벽 속에 있다」, ‘바다는/ 이미 오래전에 닥쳐온 나의 고독/ 모래알 같은 고독이 파도에 쓸려/ 밀려가고 밀려오는/ 여름은 아직 살아 있는 나의 죽음‘-「죽은 말의 여름휴가」)
시인의 말을 보면 박상순 시인이 문제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내가 처음에 이 길을 선택했던 이유처럼, 나의 도구는 언어이고, 이미지와 소리와 문자이고, 나 자신이고, 문제인, 오래된, 낡은 집이어서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인 나 자신만의 미미한 독자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미한 개인에게도 사실이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가슴에 묻어두고 가야 하는 것 또한 진실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참이, 거짓이나 침묵, 헛것들을 만나 진실을 삐껴서는 것이기도 하지만 뒤집고, 버리고, 되돌아서는 작용점으로써 실재적인 곳으로 도구를 끌고 가려는 마음과 같다. 하나의 작품은 발단의 연유나 종결의 의미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
그러나 세상은 지각이나 감각 또는 인지의 결과와는 다른 것일 수 있고, 나는 그 한계 안에 있다. 허구처럼 보이는 사건들과 이미지로서의 환영을 교차하면서, 미미한 나의, 문제와, 절박하게, 침통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대면하고자 했지만, 더 즉물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어떠한 의미도 배제해야 한다. 문제들은 즉물적인 것들을 통해 마침내 미적으로 환상을 만들며 소멸한다. 따라서 그런 즉물성을 통해 구조에서 구축으로, 시선에서 포착으로의 이동이 필요하지만 나의 도구는 아직, 거리보다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아직은 상황과 감정이 햇빛 속의 먼지처럼 떠돈다.
언어. 공간을 여는 길은 경계의 확장이나 출구를 통한 방법이 아니라 공간을 먼저 확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시선이나 표현을 넘어서는 시적 대상이나 상황을 현재와 같은 고정된 무대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상의 동태를 내 안에 옮겨, 다시 바깥과 잇는 과정에서의 호흡과 박동의 차이, 잡음에 관한 것들. 그리고, 매체가 경직된 내용을 생성하기 전에 방향의 역전을 꾀했지만, 의미를 단순하게 확정하는 경향을 가진 구체제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심란하다. 그런 심란함은 자연을 차용하거나 정서적 상황에 머물게 한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의지나 욕망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ㅡ 「시인의 말」 중에서

 

시인이 뭘 답답해 하는지 알겠는데 그 문제는 오직 창작자 자신만이 풀 수 있어 나는 책이 끝나기까지 바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에서 홍상수 감독 이야기를 하고 싶다. 홍상수 영화를 디지털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카메라워크도 컷을 잘게 쪼개는 최신 영화들의 경향과 달리 풀숏이나 클로즈업, 줌 인 아웃의 고전적인(?) 방식을 주로 쓴다. 저예산 조건의 문제보다 홍상수 감독의 독특한 스타일이 되었고 중요한 건 작품의 현장성으로 남지 영화가 낡아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왜?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를 보며 홍상수 감독의 돌발의 미학과 판타지 구성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볼 수 있었다. 선배와 한가롭게 공원을 걷다가 다리 앞에서 갑자기 절을 하는 영희(김민희)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움과 쾌감을 동시에 준다. 박홍열 촬영감독이 연기한 무명의 남자 설정은 또 어떤가. 그는 영희가 등장하는 독일 함부르크와 강릉 바닷가에 계속 나타난다 ‘무명의 남자 설정‘은 참 상상력을 자극했는데(참고로 홍상수 감독은 데뷔작 때부터 검은 옷을 입은 의문의 남자를 종종 영화에 넣었다) 함부르크에서는 바닷가로 걸어가던 영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컷이 바뀌자 무명의 남자가 그녀를 들쳐 업고 그녀의 일행과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납치를 하는 중인지 죽으려던 그녀를 구하게 된 상황인지 어떤 암시도 부연 설명도 없이 감독을 이야기를 끊어버린다. 강릉에서는 영희가 투숙한 호텔 룸에서 무명의 남자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창문 닦이를 하고 있다ㅎ; ‘무명의 남자‘ 설정답게 모두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데 불륜과 지질한 관계들의 일상성과 대조를 보이며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든다. 또 놀랍고 아름다웠던 장면은 바다를 마주한 영희의 등을 수평으로 잡고 긴 테이크로 가던 클로즈업이었다. 영희의 앞모습을 분명 볼 수 없는데 밀려드는 겨울바다와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우리는 분명 어떤 정서를 받아들게 된다.

 

 

 
감독과 여배우 간의 스캔들 때문에 왜 이 영화 속 여자 인물들이 다 -희자 돌림(영희, 준희, 도희...)인지 슬며시 이해하게 됐고, 홍상수 영화에서 왜 그녀들은 해변에서 그를 기다리는지도 어쩐지 이해할 것도 같지만, 내가 지금 홍상수 감독 영화 얘길 꺼낸 이유로 돌아가야겠다.

이미지 특히 자신만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언어의 이미지성과 메시지성은 사진, TV, 영화 같은 영상 매체의 등극과 함께 그 지위를 많이 잃었다. 그럼에도 창조의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내내  창작의 세계에서 공존하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당당함은 공감을 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감을 날세워 다루는 창작력을 잃지 않고 있어 그의 사생활과 별개로 그의 작품을 응원한다. 얼마 전에 홍상수 《그 후》(2017)가 개봉했는데 출판사 사장과 불륜;; 보기도 전에 공감부터 발동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상상력 먼저 볼 것이다. 진부함을 낱낱이 쪼개 어떤 알갱이를 드러내는 작업을. 공감을 하게 될지 말지는 그 이후 일이다.

모두를, 모든 것을 칭찬할 수 없는 내 한계도 이해 부탁드린다. 

 

 

 

 

 

 

Yates - virtue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7-07-25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포메이션과 백석시집 나란히는 뭔가 앙상블 아닌 것 같습니다. ^^ 인포메이션 한달이나 껴잡고 있었는데 통독 실패한 일인으로서 독후 감상 기대합니다. ^^

AgalmA 2017-07-26 00:55   좋아요 0 | URL
제 독서취향이 좀 중구난방틱하긴 하죠ㅎ;; 필 꽂히면 하룻밤에도 다 읽어 치우면서 어떤 건 몇 달을 가도 완결을 못 보기도 하고... 그래서 <인포메이션> 감상기가 언제 나올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ㅎ;;

2017-07-25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7-26 00:21   좋아요 1 | URL
더워서 하루에 한끼는 꼭 면 종류를 먹게 되는데 계속 먹자니 약간씩 변화를 주게 됩니다ㅎ; 향신료나 데코 조미료류 좋아해서 파슬리 가루나 후추, 치즈 가루도 엄청 좋아해요ㅋㅋ
요즘 어쩌다보니 음식 일기를 쓰고 있는 듯ㅎ;;

음... 낼 기대되네요^^ 더위는 안 기대ㅜㅜ

2017-07-25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7-26 00: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비빔면에 맥주 자주 먹는데 다들 비슷한가 봅니다^^ 반복적인 걸 워낙 싫어하는 성격이라 자주 먹는 음식은 이리저리 다르게 먹는 걸 좋아해요. 어쩔 땐 콩나물도 살짝 넣으면 쫄면처럼 맛있죠^^ 더워서 재료 공급을 소홀히 한 관계로 오늘은 방울 토마토로 조촐히 해서 먹었습니다. 반찬 이것저것 만드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신경도 안 쓰면 제 자신을 넘 박대하는 거 같아서 조금이나마 신경을 쓰려 합니다.

더운날 칭찬과 격려 얼음물 잔뜩 주고 가셔서 감사합니다^^)__)
건강 잘 챙기시길//

겨울호랑이 2017-07-26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이미지성‘이라... 시대가 바뀌어 영상매체가 발달해도 언어만이 가지는 주관성의 세계는 대체불가라 생각됩니다... 로크가 말한 ‘표상적 실재론‘의 내용이 떠오르네요..^^:

AgalmA 2017-07-26 00:31   좋아요 1 | URL
그럼요^^ 여전히 세상의 많은 부분은 언어의 힘으로 굴러가고 있잖아요. 미래엔 언어를 어떤 식으로 대체할 것인지도 궁금한 점이죠.

2017-07-26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7-26 23:18   좋아요 0 | URL
홍상수 감독 다작 감독으로도 유명한데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ㅎ 그래서 여인들도 많은 건가;;;;

2017-07-26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