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드의 물고기 책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유나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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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물학자 닐 슈빈은 인간 몸속에 물고기의 일부가 남아 있는 진화 흔적을 찾아냈다. 인체 해부 구조가 물고기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는 사실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RNA로 시작한 단세포 생명체가 DNA가 있는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한 장구한 시간의 역사를 우리가 잘 모르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다. 내 눈이, 내 손가락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모르면서 인간의 권리와 나라는 주체의 고귀함을 의기양양해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생명은 또 탄생하고 있을 것이다
  
관광객에게 사기나 치며 하루하루를 임시변통으로 살아온 시드 해밋은 그리 멀지 않았던 19세기 초 기결수이자 예술가였던 윌리엄 뷜로 굴드(빌리 굴드)가 남긴 물고기 책을 우연히 발견한다. 해밋은 그 기록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곳 인간의 역사가 끝없이 환생하고 있는 이상한 기적을 본다. 끔찍할 정도로 뒤죽박죽인 물고기 책은 굴드가 캥거루 피에서 얻어낸 붉은 잉크, 훔친 보석에서 얻어낸 파란 잉크, 성게에서 얻어낸 자주색 잉크로 꿈처럼 악몽처럼 써 내려간 기록이었다. 해밋은 색의 경이가 그가 속한 세계의 참상을 상쇄해주었을까?”생각했지만 우리가 이 소설에서 확인했듯이 그 색은 삶을 닮았고 담았을 뿐 어떤 해결과도 연결되지 못한다. 해밋은 이 책이 도서관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한 권 더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도서관 책은 굴드가 비굴한 부역으로 그렸던 삽화만 담겨 있는 침묵과 가려진 역사의 권위라면, 해밋이 발견한 굴드 책은 죄수에게 금지된 것을 기어코 남기려 한 말과 폭로의 권위의 책이다그런데 해밋은 물고기 책을 잃어버린다. 필연적이게도 그 책은 사라져 버린다. 마치 물고기처럼 잽싸게. 과연 무엇이 기억이고 무엇이 계시이며 무엇이 역사인가. 광기 안에 진실이 있거나 진실 안에 광기가 있듯, 일체의 선도 일체의 악도 똑같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듯 풀잎 해룡은 물속에서 우주를 헤엄치고 있는데
  

한 장의 그림, 한 권의 책은 기껏해야 한 채의 빈집으로 여러분을 초대하는 열린 문에 불과할 뿐,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나머지 부분은 여러분 스스로가 최대한 만들어서 채워넣어야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곤 여기서 일어난 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무슨 이유로, 이런 것은 분 바른 가발과 검은 법모를 쓴 판사들, 엉터리 비평가 부류에게는 그야말로 장황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죄의식, , 동기, 영감, 선악 따위를 누가 알며,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구타와 만조를 번갈아 겪는 와중에 간수 팝조이가 등기소에서 빼돌린 싸구려 종이 몇 장을 가져다주고는 컨스터블풍의 목가적이고 행복한 풍경화유쾌한 건초 작업, 팝조이 자신과 똑같은 시골 바보들, 햇빛이 아른거리는 잉글랜드 시내를 건너는 우마차 따위가 등장하는, 판매하거나 다른 물건과 교환할 수 있는 회화를 그리라고 시켰다는 것뿐이다.”(p60~61)

당시 비천한 사생아의 삶이 으레 그랬듯 굴드도 이런저런 죄명에 세라섬으로 끌려온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배웠던 미술 재능으로 선장의 애인을 위한 그림을, 세라섬 외과의사의 야심을 채워줄 물고기 삽화를, 섬을 통치하는 사령관의 치하를 꾸미는 여러 작업을 하지만 그가 예술에 대해 처음 느꼈던 것처럼 덧없는 작업이었다.

 

 

늦여름의 지독한 열기 속에서 사암으로 지은 온갖 흉측한 창고와 세관, 쇠사슬로 엮인 죄수들과 군인들이 득시글한 밴디스먼스랜드의 저 추레한 근대 세계에 도착하자, 나는 이 섬 북부의 수도로 취급되는 론서스턴의 마차 제조공 파머 밑에 배속되었다. 거기서 가문의 반짝이는 문장들을 마차에 그렸고, 구세계의 우스꽝스러운 제복을 차려입고 싶어하는 신세계의 사생아들을 위해 휘장을 고안했다. 뒷발로 일어선 사자, 상록 떡갈나무, 피에 젖은 손, 영원히 우뚝 서 있을 검들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마차 문짝 위에서 어수선하게 뒤섞였다. 수간으로 복역중인 한 아일랜드인 성직자가 작문해준 우스꽝스러운 라틴어 문구들, 과거에 악덕이었던 것이 지금은 예의다. 호바트를 보고 죽으라, 봄이라고 항상 꽃이 피는 건 아니다 같은 걸 그 아래 달고서 말이다. 이는 내가 최초로 얻은 값진 예술적 교훈이었다. 즉 식민지 예술이란 새것을 낡은 것으로, 미지의 것을 기지旣知의 것으로, 대척지(오스트레일리아)를 유럽으로, 경멸스러운 것을 존경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희극적인 요령이다.”(p84~85) 

처음엔 살기 위해 굴드가 그리던 물고기는 서서히 만물에 대한 귀 기울임, 깨달음을 얻는 대상이 된다. 그의 그림을 보고 취하는 이들이 자기 식대로 감탄하고 취할망정.

내가 그린 것은 훈훈한 것, 행복한 것이 아니라 차가운 것, 추하고 무시무시하고 겁에 질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게 원한 것은 위안이었지만 이 그림은 절망이었다. 나는 잠재된 폭력도, 광기에 찬 환상도 포착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희망과 진보를 원했지만, 두렵게도 내가 본 것은 부루퉁하게 마주 응시하는별바라기(한국에서는 통구멍이라 부르는 어류)였다! 그들은 새로운 신을 원했지만, 나는 엄청난 혼돈 속에서 그들에게 물고기를 주었다!”(p192~193)
 
"그림을 끝내고 이제 탁자 위에 죽은 채로 놓인 불쌍한 쥐치를 보았을 때, 나는 물고기 한 마리가 죽을 때마다 그 피조물이 품은 사랑의 양만큼 세상이 줄어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 한 마리가 그물에 끌려올라갈 때마다 세상에 감도는 경이와 아름다움도 그만큼 줄어드는 게 아닐까? 우리가 포획과 약탈과 살해를 계속한다면, 그래서 세상에 사랑과 경이와 아름다움이 점점 더 결핍된다면 결국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p221)
 
"그토록 오랜 시간을 물고기와 함께 보내면서 그들의 차가운 눈과 떨리는 피부의 무언가가 공기 중을 거쳐 내 영혼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란 불가능해 보였다.“(p236)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죄수들의 비참한 삶, 터무니없는 철도역 건설이나 마작의 전당건설, 제국주의 시대 야비하고 잔인한 지배자들의 면모, 그 실상을 폭로하고 증언하려 한 이들의 기록, 굴절되어 남는 역사는 역사학을 공부하고 논픽션 집필에 주력했던 플래너건이 12년 뒤 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과 맥이 닿는다.

그것은 그 모든 피물고기 눈깔의 피, 몸이 찢긴 반란 노예들의 피, 모레파의 못 박힌 어깨에서 철철 흐르던 피, 우리가 짚자리를 걷었을 때 기계 파괴범의 눈에 맺혀 있던 피였다. 또 그것은 나와 그들과 모두를 가두어놓은 이 깨진 세상에 대한 나 자신의 공포였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때는 이 모두가 잠시 하나로 묶여 죽어가는 한 마리 켈피(비늘돔의 일종)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그리 우습게 느껴지지 않았다.”(p108)  

섬의 모든 기록이 담겨 있다는 비밀 장소 등기소를 우연히 발견한 굴드는 섬에 대한 모든 것이 날조된 것을 확인한다. 사령관이 호러스 대위로 사칭해 신분을 세탁하고 이 섬으로 흘러 들어와 사령관이 되고 토마스 드 퀸시가 사령관의 가족 앤 누나라고 사칭해 그를 농락한 것이 섬을 광기의 장소로 만든 것만큼 어이없었지만 기록으로 남는다면 그것이 사실이고 역사가 되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서류란 기억에 대한 신의 농담이자, 현재에 대한 해석 가운데 미래에 전해질 유일한 것이니까.“(p409)

“인생이란 역사화에서 관습적으로 묘사되는 식의 진보도 아니고, 적절한 순서에 따라서 열거되고 이해되는 사실의 연속도 아니다. 그것은 변형의 연속이다. 어떤 변형은 즉각적이고 충격적이며, 어떤 변형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느리지만 너무나 철저하고 무시무시해서, 우리는 삶이 끝날 때쯤 노망든 자아와 어린 시절의 자아가 일치하는 순간을 찾아 기억을 헛되이 더듬게 된다.
세라섬에서 보낸 오랜 시간이 실은 무한히 느린 변형의 과정이었음을 내가 언제 처음 깨달았는지는 말할 수 없다."(p333)

“이야기꾼은 자기 삶의 심지를 이야기 불꽃에 태워버리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선량한 트리스트럼 샌디처럼 나는 누구의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내 그림 곁에 단어들의 모닥불을 지펴, 초라한 그림에 담긴 진실의 하찮은 순간이라도 비추는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p109)

굴드는 탈옥해 이 잘못됨을 바꿔줄 사람으로 섬의 반란자이자 혁명가로 여겨지는 맷 브레이디를 찾아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그가 찾아낸 것은 그것 또한 사람들이 꿈꾼 허상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잡혀서 감옥으로 온 굴드는 이 세계를 진짜 뒤바꾸는 것은 한낱 인간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힘임을 목도한다. 그의 교수형을 코앞에 두고 불길이 식민지 전체를 덮친다.

“우리는 각자가 사는 다양한 세계의 연장으로만 불을 언급했을 뿐, 그것이 이 세계의 종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p396)

교수대에서 탈출한 굴드는 풀잎 해룡으로 변신한다.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물고기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면 왜 그 역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을 막는 것은 지금 우리의 직선적이고 합리만을 추구하는 시간관념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먼먼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로만 가능한 일일까. 

“그래서 이 두 가지. 이 둘을 나는 도저히 화합시키지 못하고, 그것이 내 몸을 둘로 찢어 놓는다. 세상이 너무나도 끔찍하다는 인식, 삶이 너무나 특별하다는 감각ㅡ이 두 가지 감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람이 물고기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신비를, 이 질문을, 이 고통을, 이 선과 악을, 이 사랑과 증오를, 이 삶을 풀기 위해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온 그대 잠수부들이여, 나를 위해서 이것을 해결하고, 내 이야기를 헤아리고, 나를 이 삶과 결합시켜서, 이것이 내 본성의 불가분한 일부가 아니라고 말해달라ㅡ제발……”(p434)

그러나 역사의 서류철은 우주의 카오스만큼이나 이 모든 걸 뒤섞는다.

 

 

 

웬만해서 오타 지적 안 하는데요. 매우 중요한 오타가 있습니다.
p27 "1928년 그는 세라섬 유형지의 외과의사로부터, 아마도 과학 연구가 목적이었을 텐데, 이곳에서 잡히는 모든 어류를 그림으로 묘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ㅡ 그때가 19세기 초라는 설정인데 “1928”말이 안 되죠. 굴드 사망 연도가 1831년이니 1828이 맞습니다.

 

이 환상적 이야기를 책 표지가 충분히 표현해주지 못하는 거 같아 제 그림으로 좀 바꿔 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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