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나사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것이 떨어진 곳을 알고 있다. 예전에도 떨어져서 죈 기억이 있다. 다시 떨어질 거라는 걸 예상하면서 돌이키기 어렵게 망가진 자리에 임시변통으로 죄었던 나사였다. 처음같이 변함없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게 많다. 사물만이 아니다. 사랑 특히 모든 사랑의 전사(前史)가 되는 평생의 사랑에서라면 냉정한 판단은 더욱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이 가장 큰 장애인데 기억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 나사는 짐작하지 못한 데서 회전하고 멈추기도 하니까. 줄리언 반스는 그걸 내내 의식하면서 연애의 기억을 써나갔다.

 

내가 꼭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적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기억에는 다른 종류의 진정성이 있고, 이것이 열등한 것은 아니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걸러진다. 우리가 기억이 우선순위를 정하는 알고리즘에 접근할 수 있을까? 아마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짐작으로는, 기억은 무엇이 되었든 그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 데 가장 유용한 것을 우선시하는 듯하다. 따라서 행복한 축에 속하는 기억이 먼저 표면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따르는 작용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단지 추측일 뿐이다.”(하나)

 

케이시 폴이 수십 년간 공책에 사랑에 관한 문장을 채우고 지우길 반복하며 사랑의 진실을 찾으려 애썼듯이 이 소설에서도 그렇다/아니다를 오가는 저울 같은 문장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기억과의 사투일까, 진실과의 사투일까. 아니면 기억과 진실 간의 사투일까.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하나)

그는 가끔 자신에게 인생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 가운데 어느 게 더 진실할까? 그는, 결국,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너는 공감과 반감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인간의 마음에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감정들이 나란히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너는 그간 읽은 책에 화가 난다. 단 한 권도 이런 것에는 대비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엉뚱한 책들을 읽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엉뚱한 방식으로 읽었거나.”()

삶의 슬픔. 그것은 그가 가끔 생각에 잠기게 되는 또 다른 난제였다. 어느 것이 올바른또는 더 올바른공식이었을까. ‘인생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아니면 인생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둘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진실이지만, 어느 것이라고는 결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최종 평가는 사후에 가능하다. 정확한 사후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고 있나삶의 문제에서 더 하고 덜 하고를 현명하게 선택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한다. 무신경 혹은 무책임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때도 있다. 어쩌면 더 많이. 그에 따른 결과가 행복이나 불행, 진실이라고도 재단할 수 없다. 어떤 문제는 고통, 시간의 경과, 기억과 사실의 부재나 혼동으로 인해 깊이 고찰하기도 어렵다. 가능하다 해도 올바른 판단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일흔이 넘어서야 폴은 수전을, 수전과의 사랑을, 진실을 알기 위해 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모든 연인이 자신들의 관계를 두고 하는 착각ㅡ“자신들은 범주와 묘사를 다 벗어나 있다는 것”(특수성)ㅡ을 제일 먼저 경계하면서. 폴은 자신이 일기 같은 기록을 남긴 적이 없고 시간, 장소 같은 걸 순서대로 나열해 쓰고 있는 게 아니라고 재차 강조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써 나가며 그는 깨닫는다. 자신도 “어떤 식으로든 연인들은 시간의 밖에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걸. 그럼에도 그가 남기는 이 연애의 기록은 그가 사랑했던 첫 사람—단 한 사람—의 지워지고 잃어버린 모습을 되찾고 그녀의 순수를 기억하고 유지하고자 하는데 의미가 있다. 또한 ‘그들 둘 다를 위한 마지막 의무’이다.
줄리언 반스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내게 진부한 사랑, 19년 연상연하 커플의 사랑과 삶의 파국, 신파로 읽히지 않는 건 그가 인간 삶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결합ㅡ우리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는 것ㅡ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이 시작되는 첫 공모의 순간(“어떤 음모나 계획은 물론, 접촉, 키스, 말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몇 마디 던지고 진입로를 따라 걸어가기 전, 그냥 그렇게 함께 차 안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공모를 하는 관계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 뭔가를 하자는 공모는 아니었다. 그냥 나를 조금 더 나로 만들어주고, 그녀를 조금 더 그녀로 만들어주는 공모일 뿐이었다”),

독특하게 고지식한 첫사랑의 특징(“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 둘이, 그리고 우리가 이르러야만 하는 곳이 있다,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내가 꿈꾸던 곳에 가까운 어딘가에 실제로 이르렀지만, 나는 대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청춘 시기에 사람의 습성, 관습, 기성세대에 대해 가지는 불만과 혐오 그것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내가 어른의 무엇을 싫어하고 불신했을까? 글쎄,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자격을 가졌다는 느낌, 우월하다는 느낌, 가장 잘 알지는 못해도 더 잘 안다는 가정, 어른이 지닌 의견들의 엄청난 진부함, 여자들이 콤팩트를 꺼내 코에 분을 바르는 모습, 남자들이 두 다리를 벌려 음부의 묵직한 윤곽을 바지에 그린 채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정원과 정원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말투, 그들이 쓰는 안경spectacles과 그들이 자신들을 재료로 만들어내는 광경spectacles, 음주와 흡연, 기침을 할 때 가래가 끓는 끔찍한 소리, 자신의 짐승 냄새를 감추려고 바르는 인공적인 냄새, 남자들이 대머리가 되고 여자들이 풀 분무기로 머리 모양을 만드는 모습, 그들이 여전히 섹스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생각, 사회적 규범에 대한 유순한 복종, 풍자나 의문을 드러내는 모든 것에 대해 짜증을 내며 못마땅해하는 모습, 자식의 성공은 부모를 얼마나 잘 모방했느냐로 잴 수 있다는 가정, 서로 맞장구를 치며 내는 숨 막힐 듯 시끄러운 소리, 조리한 음식과 먹는 음식에 관한 논평, 내가 역겨워하는 것(특히 올리브, 절인 양파, 처트니, 야채 겨자 절임, 고추냉이 소스, , 샌드위치 스프레드, 악취가 나는 치즈, 마마이트 이스트)에 대한 그들의 사랑, 감정적 자기만족, 인종적 우월감, 잔돈을 세는 방법, 잇새에 낀 음식을 추적하는 방법, 나에게 충분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원치 않을 때 나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는 것. 이건 짧은 목록일 뿐인데, 수전은 당연히 또 이런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 한 가지 더. 진짜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유전적 공포 때문이 틀림없지만, 그들이 감정생활을 비꼬고, 양성 간의 관계를 반복해서 멍청한 농담거리로 삼는 태도. 여자들이 실제로 모든 일을 좌지우지한다는 남자들의 암시, 남자들은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여자들의 암시. 자신이 강하기 때문에 여자는 귀여워해주고 응석을 받아주고 돌봐줘야 한다는 남자들의 허세, 축적된 성적 민간전승에도 불구하고, 상식과 실용성을 갖춘 사람은 자신들이라는 여자들의 허세. 양성 모두, 상대의 모든 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여전히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흐느끼며 인정하는 것. 그들하고는 살 수 없어, 그들 없이는 살 수 없어.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과 결혼해 살았으며, 어떤 재사(才士)가 표현했듯이, 결혼은 정신적 제도*라는 의미에서 제도였다. 누가 그 말을 먼저 했을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어느 시대든 자식의 불길한 사랑에 부모들이 겪는 혼란(“부모가 당황하고, 이웃들이 뭐라고 할지 궁금해하고, 잠시 잠적하고, 문을 닫아놓고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내 앞길에 놓인 곤경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결국 자신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의 투사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가설을 세우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을 수용하는 자신들의 능력에서 약간의 침착한 영웅적 자질을 찾아내고, 어머니는 페드로가 계속 자신의 머리를 자르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적절한지 궁금해하고, 그러다최악의 단계로자신이 새로 발견한 관용에 명예의 훈장을 수여하고, 그러는 동안에도 내내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서 이런 날을 보지 않은 것을, 믿지도 않는 하느님에게 감사할 것이다…….”),

사랑 뒤에 우리가 괜찮은 척하는 연기들(그건 연기야. 우리 모두 연기를 하지. 너도 언젠가는 연기를 하게 될 거야, 오 하고말고.”, 그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지. 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

나이가 들고 사랑의 파국을 겪어본 이들이 연인들을 보게 되는 시선(“젊은이들이 내가 그들을 부러워한다고 믿도록 놓아두는 것. 글쎄, 먼저 죽는다는 잔인한 일과 관련해서는 분명히 부러워하지만, 그 외에는 아니다(중략)나는 세상이 아마도 그들에게 하게 될 일로부터, 그들이 아마도 서로에게 하게 될 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싶다. 하지만 물론, 이건 가능하지 않다. 나의 돌봄은 요구되지 않고, 그들의 자신감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니까”),

결국은 모두에게 진짜로 남는 사랑-이야기가 있다는 것(“어쨌든 절대 잊지 마세요, 폴 도련님.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 때로는 어떤 쌍을 보면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그리고 이 과정은 인간의 기억 작용을 짐작게 한다.

 

행복, 기쁨, 웃음으로 이루어진 오랜 기간들은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미 내가 묘사하기도 했으니까. 기억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그것은…… , 이런 식으로 표현해보자. 통나무를 쪼개는 기계가 작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아주 인상적이다. 통나무를 일정한 길이로 잘라, 기계의 대에 올려놓고, 발로 단추를 밟으면, 통나무가 도끼날처럼 생긴 날 쪽으로 밀려간다. 거기에서 통나무는 결을 따라 쪼개진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말이 그것이다. 인생은 단면이고, 기억은 결을 따라 쪼개지는 것이며, 기억은 그것을 끝까지 쭉 따라간다.
따라서 나는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기억하기 가장 힘든 부분이라 해도. 아니, 기억이 아니라묘사하기에. 그것은 나의 순수함의 일부를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성장이란 순수를 잃는 필연적 과정 아닌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삶에서 문제는, 그런 상실이 언제 일어날지 아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안 그런가? 그리고 어떻게 될지, 그 뒤에.”(하나)

너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공적 개입은 원하지만 너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건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너의 진실성이라는 것이 위태로울 정도로 유연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잃어버린 기억 하나는 순수 하나를 잃는 것과 같다. 상대에 대한 순수 하나를 잃어버리면 내 순수 하나도 잃어버리는 게 된다. 폴은, 우리는 얼마나 추적해나갈 수 있을까. 진실과 마찬가지로 그 순수는 정확히 거기 있으며 하나일까. 폴과 수전은 세상의 눈총과 족쇄에서 달아나 둘만의 새로운 세상을 바랐지만 그곳에 순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수전은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폭력을 혐오했으면서 자신도 알코올 중독과 정신 이상으로 폐인이 되어 갔다. “알코올중독자의 파트너는 그 습관에 혐오감을 느끼기는커녕아니, 그 습관에 혐오감을 느낌에도 불구하고스스로 그 습관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듯이 수전도 그리되었다. 그러나 원인은 더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사망, 친척 아저씨의 집요한 성폭력, 전쟁과 시대적 상황, 연인의 사망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개인적 이유들이 있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수전과 다른 듯 비슷하게 폴도 무력하고 수동적이었다. 그녀를 돌보느라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고 전도 유망한 변호사가 되기보다 시원찮은 일을 하며 삶을 꾸려나갔다. 거기서 또 보람을 느끼면서. 그가 이리 된 걸 수전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자신이 말짱하게 남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바라며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며 속이면서도 그들은 상호의존적이었다. 안타깝게도 삶을 채우는 사랑, 가식, 의무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내면화되는 인간성이다.

 

젊은 시절, 수전을 사랑한다는 자부심으로 뜨거웠던 그는 경쟁심이 강했다, 모든 젊은 남자가 그렇듯이. 내 좆이 네 좆보다 크다, 내 심장이 네 심장보다 크다. 젊은 수컷들은 또 여자친구에게 딸린 것들을 자랑하기도 했고. 반면 그의 자랑은 달랐다. 나의 관계가 너희의 관계보다 얼마나 더 위반적인지 봐라. 그리고 또,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 또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의 강도를 봐라. 그게 중요한 것이었다, 당연히. 감정의 강도가 행복의 수준을 지배한다, 그렇지 않은가? 당시에 그에게는 그것이 지극히 논리적으로 보였다.”()

그에게는 그녀가 과거에 어땠는지 돌아보고, 그녀를 탈환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었다. 돌아보고…… 자신을 탈환하는? 무엇으로부터? ‘그 이후 그의 삶의 난파로부터? 아니, 그것은 멍청할 정도로 신파적이었다. 그의 삶은 난파한 적이 없었다. 그의 심장, 그래, 그의 심장은 불로 지져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 방도를 찾아냈으며, 그 삶을 계속했고, 그것이 그를 여기로 데려왔다. 여기에서, 그는 그 자신을 한때 그랬던 모습으로 볼 의무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젊었을 때는 미래에 아무런 의무가 없는데, 나이가 들면 과거에 의무가 생긴다. 하필이면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것에.”()

낡은 교조로부터의 이런 해방은 그 나름의 복잡한 상황을 초래했다. 의무감은 내면화되었다. ‘사랑은 그것 자체로 의무였다. 너는 사랑할 의무가 있었고, 이제 그것이 너의 중심적인 믿음 체계이기 때문에 의무감은 더욱 강해졌다. 사랑자체가 많은 의무를 수반했다. 그래서, ‘사랑은 겉으로는 무게가 없어 보여도 아주 무거울 수 있었고, 강하게 속박할 수 있었으며, ‘의무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큰 재앙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이 열아홉에 느끼려 한 사랑의 진실과 일흔이 넘은 뒤 돌이켜보는 사랑의 진실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 반스는 그 비교도 썼다.

 

당신은 나이 열아홉에 사랑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법정에서라면 그런 이해가 책 몇 권과 영화 몇 편, 친구들과의 대화, 어찔한 꿈, 자전거를 탄 어떤 소녀들에 관한 가슴 아린 환상, 내가 잠자리를 함께한 첫 여자와의 사분의 일 쪽짜리 관계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평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열아홉 살짜리 자아는 법정의 평결을 바로잡을 것이다.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나중에 오는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성에 근접한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심장이 식었을 때 오는 것이다. 무아지경에 빠진 애인은 사랑을 이해하고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고 싶어 하고, 그 강렬함, 사물의 초점이 또렷이 잡히는 느낌, 삶이 가속화하는 느낌,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이기주의, 욕정에 찬 자만심, 즐거운 호언, 차분한 진지함, 뜨거운 갈망, 확실성, 단순성, 복잡성, 진실, 진실, 사랑의 진실을 느끼고 싶어 한다.
사랑과 진실, 그것이 나의 신조였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나는 진실을 본다. 그렇게 간단해야 한다.”(하나)

몇 번의 검열에서도 살아남은 그의 공책의 한 기록.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사랑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한 가지 주제다.” 그는 처음 이 말을 발견한 이후로 계속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 더 넓은 생각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즉 사랑 자체가 절대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 그 참가자들 누구도 그렇지 않다는 것. 한 사회가 강요하려 하는 감정과 행동의 모든 엄격한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그것을 미끄러져 지나쳐버린다.” ()

 

열아홉의 폴은 사랑과 진실이 단순한 실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흔이 넘은 폴은 진실은 항상 변하고 있었으며, 양립할 수 없을 때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며 여러 관점에서 해석해본다. 자신과 수전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여러 상황을 가정해본다. 수전의 남편 매클라우드 입장에서 상황을 재해석해보기도 한다. 자신의 사랑이 사라진 시점도 파악한다(“가장 열렬하고 가장 진지한 사랑이라도, 정확한 공격을 받으면, 연민과 분노의 혼합물로 응고해버릴 수 있다는 깨달음”, 죄책감과 가책, 불가피하다는 도덕적 판단을 내렸지만 결국 그녀보다 자신을 구원하기로 한 선택, 연민과 분노와 함께 자기혐오를 감당해야 하는 수치에서 벗어나기). “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라는 말을 청년 시절에는 절망의 권고처럼 들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정상적이고, 감정적으로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수전의 순수를 찾는 이 과정은 자기 보호이자 용기이자 비겁인 모순적인 양면성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단 한 번의 사랑을 평생 전사로서 간직하며 사는 폴은 사랑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을 연기하며 독신으로 생을 마감할 듯하다. 수전의 삶이 그랬듯 그의 이유도 복합적이다. ‘그의 부모, 그들의 성격과 상호작용, 다른 결혼에 대한 그의 관점, 그의 눈에 보인 가족이 주는 피해, 그것에서 탈출해 수전 매클라우드에게 간 일, 어떤 마법의 세계에 빠져들었다는 짧은 착각, 관계 속 환멸과 소심의 왕복, 거듭되는 상심, 그의 생각을 바꿀 대상의 부재등등. 그는 인간이 너무 불완전해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그것은 또한 영화에서 파생된 환상(브롬화물)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주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다고도 말한다. 어느 시대 어느 세대나 ‘사랑’이 온 세상을 바꿀 혁명적 힘이자 만병통치약인 듯 말한다. 줄리언 반스의 이 소설은 어떤 형태로 있든 사랑의 민낯, 사랑에 대한 불가피한 통찰과 현실성을 말했다. 공감할 수 없어 반스에게, 나에게 사랑에 대해 이것이 정녕 최선이라고 생각하는가 묻는다면 우리가 알고 겪었던 많은 사랑이 대개 이렇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거 같다한계와 때늦음을 곱씹으며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이런 사랑의 통찰을 통해 우리는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랑은 어떤 이에겐 외면하고 덮고 싶은 상처이고, 어떤 이에겐 삶의 의지와 위안을 주는 행복이며, 어떤 이에겐 가질 수도 누릴 수도 없는 평생의 숙제이지만, 우리는 승자도 패자도 아니고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하며 살아간다.

 

그래, 사랑은 그에게는 완전한 재난이었다. 그리고 수전에게. 또 조운에게. 그리고그의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당연히 매클라우드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줄을 그어 지운 기록 몇 개를 훑어보다가, 공책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어쩌면 늘 시간을 낭비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랑은 결코 정의로 포착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오로지 딱 이야기로만 포착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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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0-16 22: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아닌 듯 하고. 나의 기준에 따른다면 다른 이들의 사랑은 저와는 또 다른 것도 같은. 그래서, 사랑은 아마 그 때 그 장소에서 당시의 나에게 일어났었던 박제된 감정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뭔 소리를 하는건지...ㅜㅜ)

AgalmA 2018-10-16 22:44   좋아요 2 | URL
백 가지 사랑이 있다면 백 가지 정의가 있겠죠. 일반화로 모으려 하지만 예외와 불가해를 우린 늘 직면하잖습니까.

겨울호랑이님 그 감정, 뭔 소린지 저는 좀 알 거 같은데요ㅎ; 이심전심도 아니고 이건 뭐람;; 공부가 부족하여....;;;
 
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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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질서가 참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어떤 이는 글을 쓰고 어떤 이는 음악을 듣고 어떤 이는 총을 쏜다. 나는 소심하면서도 완강하게 연도와 날짜를 적지 않고 일기를 써나간 적 있다. 계절 얘기나 특정 사건 때문에 대략의 시간은 추정할 수 있어 완벽한 미스터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2018년인데 2008년이라고 찍힌 다이어리에 쓰고 있었다면? 많은 시간이 지나 한 300년 뒤 이 다이어리를 누군가 발견한다면 이 기록을 2008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용 표시 같은 걸 하지 않고 책의 여러 문장들을 내 꿈과 생각과 합쳐 적어 놓았다면? 멀리 갈 것도 없이 10년 뒤 글을 쓴 당사자인 내가 봐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앞뒤 인과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 또는 '사실'은 우리 기대설정에 지나지 않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생각과 상상을 쏟아내고 실현하는 이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을 떠올린 순간부터 인간은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더라도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그들을 생각한다. 성 정체성도 평생의 족쇄로 따라다닌다. 이런저런 구분의 질서 속에 있는 한 내가 라는 인식은 늘 불만스러운 좌표 위에 있다. 반문도 따라 나온다. 도대체 왜 이래야 하는가.

 

배수아는 근간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질서가 아니라 시간과 자아의 철저한 망각을 실험한다. “바늘 없는 시계의 세계에서, 사라지고 죽는 일은 너무 흔해서 지워지지도 않아 한 번도 없었던 일처럼 일어나고, 꿈과 과거-현실-미래와 이야기가 트럭이나 문, 교수대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경계 없는 시공간이 펼쳐진다. 당연히 주인공도 특정한 사건도 없다. 같은 이름의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겪는 일들로 가득해 AB여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살면서 같은 이름의 사람을 만난 적 있다. 흔한 이름이라면 좀 더 씁쓸해 하면서.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일도, 누군가가 죽는 일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다들 겪는다. 그것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내가 겪는 특별함이자 기억이기 때문이다. 배수아는 여기서 다시 비튼다. 이해할 수 없이 공유되는 특별함을.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여자는 오래전에 떠났던 할머니의 양철 가방을 벼룩시장에서 발견해 그 가방과 함께 자신도 여행 중이다. 어느 날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이해할 수 없는 반두어로 적힌 편지를 받는다. 그녀는 그녀대로 이 편지를 이해하고, 어머니 뱃속에서 반두어를 들었을 뿐인 잭도 편지 낭독을 듣고 그 나름대로 이 편지를 이해한다. ‘낭독은 배수아 작가가 여러 소설에서 쓴 소재인데, 언어와 음악의 결합 같은 이 방식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인류의 소통 방식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 당신이 소리 내어 읽은 그 언어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어요. 어쩌면 내게는 선험적 말이고, 말 이전의 말이었는데! 제안을 하긴 했지만, 크게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적당히 꾸며대서 당신을 웃겨볼 생각이었던 거예요. 정말로 내가 온전히 이해하리라고는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정말로 이해를 했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도저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요. 그건, 그건 당신의, 아니, 당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어쩌면 당신 할머니일 수도 있는 소녀의,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매우, 매우, 아아 답답해 미치겠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매우 언유주얼한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더욱 놀랍습니다.”

잭은 충격과 감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서 이어서 말했다.

놀랍게도,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p265~266)

 

작가가 문학작품을 쓰고 독자가 그 책을 읽는 과정도 위와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을 누군가 글로 보여줬을 때의 쾌감과 공감, 강렬했지만 구체적으로 복기하지 못하던 꿈을 실제로 만났을 때의 기시감 같은 것 말이다. 현실에서는 기억을 못해 실수를 하거나 꾸지람을 듣거나 봉변을 당하기 일쑤지만 꿈을 기억하지 못해 그런 일을 당하는 일은 없다. 꿈에서 나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이는 무의식을 지배하는 오직 나 하나다. 사실과 환상을 모으고 설치하는 문학은 현실에 틈을 비집고 공유할 자리를 만든다. 많은 작가들처럼 배수아가 제시하는 잔상들은 그로테스크한 악몽의 이미지들이다. 아이들이 극히 비극의 대상인데 누군가 쉽게 훔칠 수도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존재이다. 여왕에게 잡혀가지 않게 소녀들은 남자아이로 살거나 검은 아네모네즙 때문에 눈이 멀고 야만인 흉노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급기야 처형당하기도 한다. 질서의 대행자 남성들은 위로는 사령관, 경찰, 의사, 아래로는 교사, 역장, 눈표범 조련사, 돼지 장수, 살인자 등 타인에게 적극적인 개입을 하는 역할을 하다 사라진다. 얼이에 대해서의 얼이처럼 빨리 죽거나 1979의 남교사의 히키코모리 남동생처럼 편지를 쓰면서 눈에 띄지 않게 살지 않는 이상 그들은 대체로 그레이하운드 사냥개처럼 당당하다. 반면 여성들은 적당한 자리가 없다. 의탁할 곳 없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꼭 아버지에게 물어보려 하고 버림받아도 아버지를 찾아가고 아버지가 사령관이길 바라는 여자아이, 미친 자, 아이 낳는 자, 아이를 잃는 자(남성이라면 부하를 잃는 자, 노인 울라에서), 강간당하는 자, 죽임을 당하는 자, 여승, 갈 곳 없이 떠도는 자, 사라지는 마술을 하며 살다가 정말 사라지는 자로 부유한다. 유일하게 분명한 역할이 있었던 뱀과 물에 나오는 여교사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삶을 산 끝에 죽음을 꿈꾸는 파괴적인 몽상을 하면서 그렇다면 어디로를 되뇌며 사직서를 쓰고 있다.

 

배수아가 펼쳐놓는 이 이미지들의 나열과 중첩에서 여성으로 산 시대적 감수성을 제거하고 읽기란 힘든 것 같다.

우선 이 단편들 속에는 이국적인 것도 조금 끼어 있지만 대체로 작가가 자라온 시대, 정서적 매개물을 보여주는 사물들과 호칭으로 가득하다. 이 단편들이 어린 시절을 다루기에 더욱 그렇다. 작가가 상상하고 재구성한 어린 시절이면서 작가가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이기도 하다. ‘우물, 두레박, 서커스, 고아원, 철봉, 전신주, 담배가게, 모래를 실은 손수레, 바구니를 이고 등에는 아기를 업은 아낙네들, 함지박을 옆구리에 낀 식모아이들, 돼지 장수, 등받이가 높고 따르릉 소리나는 화물용 자전거, 굵은 설탕을 뿌린 달콤한 도넛, 달걀 행상 노파, 무당, 초가집, 보건소, 기찻길, 주름진 함석지붕을 얹은 길가의 오두막등등. 이것들은 이제 많이 사라져서 오래된 동화 같은 분위기로 이 소설의 독특한 정서를 만든다.

여성 작가라는 관점에서는 어떤가. 여왕이 일곱 살이 넘은 여자아이는 잡아가지 않기 때문에 일곱 살 이후로는 여자아이라는 정체성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아버지를 찾아가는 눈 아이 이야기는 여러 단편을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깔려 있다. 얼이에 대해서에서 아이는 동급생 얼이, 여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누나가 주는 흰색 원피스를 받으며 여왕 얘기는 더 이상 믿지 말라는 훈계를 듣는다. 도둑 자매에서 아이는 가짜 언니에게 납치당한 뒤 가짜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낡고 검은 광목 원피스 차림에 가방을 들고 어린 시절과 작별하며 집을 떠난다. 1979에는 분홍 원피스를 입은 키 큰 소녀를 어려워하는 동급생 남학생들과 달리 성적으로 끌리는 성인 남성이 여럿 나온다. 작가는 이 시기에 아이들의 정체성이 갈리는 풍경 묘사를 이렇게 쓰고 있다.

 

정전기를 일으키는 비슷비슷하게 거칠고 건조한 천에 싸인 채 흐릿한 몸 냄새를 풍기는 여든한 개의 작은 육신이 두 종류의 무의식을 주장하며 교사를 사이에 두고 마치 길처럼, 두 갈래로 나뉘었다.”(p85)

남교사의 남동생은 성 정체성의 갈래만이 아니라 아이와 성인의 갈래도 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p94)

남동생의 말처럼 이 소설 속의 아이들은 실제 시간 속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기억 속 아이들이고, 여러 시공간을 넘나드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며, 작가가 형상화한 아이들이다. 자의식 이후 어린 시절을 포획물로 남겨둔 자들에 대해서는 뱀과 물에서 언급하고 있다.

 

어린 시절도 일생 동안 지속될 너울거림을 불현듯 멈추었다.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뼈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p223)

일기나 글쓰기는 기억을 구체화함으로써 성장과 치유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아직 를 내세우지 못하고 기어 다니고 세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절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이렇게 아직도 한참 쓰고 읽고 말하고 있다. 가방도 매일 지니고 다닌다. 대관람차가 허공의 같은 자리로 돌아오듯이 내 방에 매번 돌아오면서도 여행자 같다. 바늘 없는 시간인데도 빠르다, 느리다, 늙었다 하면서 우리는 삶을 더 사는 망상, 죽음을 더 늦추려는 망상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망상을 돌리는 윤활유는 대체로 욕망 아닐까.

내가 라는 감각을 가장 극도로 느낄 때는 삶 속에서가 아니라 죽음에 다다를 때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듯 이 책의 여러 단편에서 죽음과 에로티시즘은 다양한 겹으로 펼쳐진다. 이 경향은 작가가 내비치는 세계관과 연관된다. 도둑 자매의 끝 문장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뱀과 물에서 이어지는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라는 문장은 대조되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보여준다. 시간을 비순차적으로 여기는 인식 속에서 상상과 실재는 서로의 우위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힘과 신비에서 동등하며 동시적인 가능성을 지닌다.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다. 명확한 서사를 강조하는 질서의 세계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바로 무너지지만 배수아가 그려내는 동시성의 세계는 끊임없으면서 불쑥불쑥 이어지는 세계다. 폭력과 불협조차도 이 세계에 있어야 할 조건이다.

읽고 쓰고 말하며 매일 경험 속에 있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비친 것만 더 심하게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잘 보고 있는 것일까. 정면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자신의 뒤통수를 평생 상상으로만 채우는 우리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내리는 비와 눈과 빛과 어둠 속에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가. 어디에도 보낼 수 없는 신비한 말들을 이렇게 묶으며 배수아는 자신의 갈래 길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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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0-03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뱀과 물」을 못 읽었지만, AgalmA님 글을 읽어보니 언어, 시간, 보편성, 특수성, 경계라는 단어들이 떠오르네요. ^^:) 제겐어려운 작품임을 확인하고 가볍게 패스~.

AgalmA 2018-10-03 23:41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읽는 책 보면 제가 더 어려워할 책이 많던데요-,.-)...어려운 건 둘째고요. 두꺼워서 저 같은 싫증쟁이가 참기 버거운ㅎㅋㅎ;

2018-10-14 2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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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4 2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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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0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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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17: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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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7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7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7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8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7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식물원 아침달 시집 2
유진목 지음 / 아침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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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흑백사진이 49페이지에 걸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사람의 일생 혹은 여러 사람의 인생이 겹쳐 있다. 마지막 두 장은 종려나무 사진이다. 그리고 시가 이어진다.

 

 

 

 

21

종려나무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고, 그중에 어떤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는 자주 고개를 숙였고, 남몰래 주먹을 쥐었고, 그러다 하품을 하였고, 이대로 끝이 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지루함을 견디며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다른 것이 아닌 그는 종려나무인 것이 좋았다. 길고 가느다란 잎과 뾰족한 끝이. 찌르기 전에 꺾이는 무력함이. 천천히 말라가는 목숨이. 때로 휩쓸리는 삶이. 여럿이 모여 있으면 징그럽기도 한 것이 좋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도 그는 어깨를 움직여 그것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바람이 부는 줄 알았다. 그는 사람들을 속이며 계속해서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어떤 사람은 종려나무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떤 사람은 휘파람을 불었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그는 불면에 시달렸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가까스로 잎사귀를 모으고 잠이 들었다. 그럴 때 함께 밤을 지샌 바다도 그랬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나중에는 돌아누울 힘도 없어 보였다. 그는 바다에 있을 때보다 산에 있을 때 자신을 건강하게 여겼다. 다시 한번 떠나기에 앞서 깊은 숨을 쉬었다. 그는 잠자코 서서 바다의 종려나무에서 산의 종려나무로, 낮의 종려나무와 밤의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시 전문)


   
이 시집을 읽으며 다른 종려나무 그림자가 내게 드리워졌다.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1991).

어렵게 찾아갔는데도 친어머니가 만나는 걸 거부해 돌아가던 아비. 아비는 종려나무숲을 한참 걸으면서 친어머니가 궁금해할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 애증의 시퀀스와 묘하게 어울리는 시가 이 시집에도 있다.
   
   

24

어머니, 하고 부르자 그는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어머니는 베란다에서 벤자민에 물을 주고 있다. 나는 어항의 물이 줄어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어머니, 물이 줄어든 것 같아요. 어머니는 벤자민에 주고 남은 물을 어항에 따랐다. 어항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손자국이 남잖니.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니의 벤자민은 길고 두껍고 무성했다. 어쩜 이렇게 잘 자랐을까요?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래요. 어떨 땐 좀 징그럽더라구요. 그래요? 어떨 땐 그래요. 마냥 좋지만은 않아요. 나는 벌써 얼마나 죽였는지 몰라요. 벤자민을 죽인 사람은 나뿐일 걸요. 나도 처음엔 여러 번 죽였어요. 자꾸 죽으니까 싫더라구요.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나 싶고 왜 그렇잖아요. 어머니는 벤자민 바구니를 천장에 매달 때 발꿈치를 들어 키를 높였다. 어머니, 제가 걸어 드릴까요? 어머니는 괜찮다고 말한다. 나중에, 나중에 해주렴.

그때는 집에 어항이 있었다. 다른 집에도 어항이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물고기는 한 마리만 남아서 구석에 가라앉아 있었다. 모서리를 두드리면 조그만 입을 뻐금였다. 언제부터 이랬니? 모르겠어요. 이제 곧 죽겠구나.

어머니, 하고 부르자 그는 다시 떠나고 싶었다.

(시 전문)



아비와 친어머니’가 끊을 수 없는 에토스(이 글에서는 ‘어느 사회 집단의 특유한 관습’이라는 뜻으로 씀)적 관계라면, 함께 시계를 보며 1분을 공유한 뒤 짧은 기간 연인이 된 ‘아비와 소려진’은 파토스로 묶인다. 아비에게 버림받고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복도에서 거리에서 서성이던 소려진. 그리고 아비는 그녀에게서도 이 지상에서도 영영 사라진다. 소려진을 사랑했던 경관이 우연히 아비의 임종에 있었던 광경까지 이 시집에도 《아비정전》의 첫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다른 버전 같은 시들이 있다.   
   
   
   

28

형광등의 불이 두어 차례 깜빡인다.

제가 고쳐 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들어 형광들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그런 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제 돌아가 달라고 말했습니다. 돌아가요. 다시는 오지 말아요. 그때는 왜 그랬을까요? 그는 싸구려 볼펜의 머리를 딸깍이고 있다.

방은 이따금 어두워졌다가 밝아졌어요.

여자의 인중은 깊고 노여웠습니다.

그런 건 절대로 잊을 수가 없더군요. 갈라진 모양이 불길했어요. 어떻게 하면 자신을 전부 맡길 수 있을까요? 이제 나는 더 이상 줄 것도 없고……. 그는 손이 가는 대로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 그런 뒤 비가 왔을 겁니다. 여잔ㄴ 노랗게 질린 얼굴로 울면서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지나쳐 갔어요.

(시 전문)



25

그해 여름에 그는 옆 방에 사는 남자가 궁금했다. 랜드로바 봉투에 든 와이셔츠를 보고 이런 건 이제 필요 없다며 돌려 보내는 걸 본 뒤로

여자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서 있었다. 한참을 그러더니 영수는 잘 있어요 하고 울먹였다.

그는 여자가 랜드로바 봉투를 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것도 보았다. 플라타너스 아래로 버스가 오고 버스가 가고 여자는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그는 방에 누워 영수는 잘 있어요 하고 말해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옆 방이 비어 있었다. 그는 그가 영수에게 갔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영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하고 방문을 닫았다.

어쩌다 미친 연놈을 들여가지고. 씨팔. 문에 귀를 대고 서 있었다.

여름이 끝나면 죽을 것이다.
매미처럼 울다 잠이 들었다.

(시 전문)


 
《아비정전》은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아 외로움을 겪었음에도 타인에게 같은 아픔을 주며 모두가 징그럽게 모여 있으면서도 무력하고 뾰족한 자신의 잎을 감출 수 없이 종려나무처럼 존재하던 영화였다. 한 시대의 독특한 감수성, 청춘에서 전체 삶으로 확장되는 삶의 고통과 구도적 고행을 보여줬던 왕가위와 또 겹치는 종려나무가 있다. 헤르만 헤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발표했다. 유명한 작가인 그가 굳이 익명으로 책을 발표한 이유는 자신의 명성과 위치를 내세워 말하기보다 동년배가 말하듯 젊은이들의 정신적 방황을 공감하고 위로하고 싶어서 였다고 했다.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명문장과, 《아비정전》에서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곤 한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라는 명대사는 어떤 흐름을 짐작게 한다. 헤세의 작품은 고독과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지만 1900년부터 죽음에 이른 1962년까지 그가 쓴 3천여 편의 서평과 에세이에서 젊은이의 정신적 방황을 공감하고 위로하고자 한 작가 의도도 고려해야 하고, 고행 속 종교적 해탈을 자주 그렸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으려는 희망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저 대사는 초극 의지가 느껴진다. 20세기의 헤세와 달리 21세기로 넘어가는 즈음의 왕가위 작품은 그런 초극성을 꿈꾸지 않는다. “발 없는 새” 대사를 한 뒤 장국영이 그 유명한 맘보춤을 추듯이 꿈과 희망은 저 먼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만 존재한다. 《아비정전》의 또 다른 명대사처럼 말이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1분 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이 1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됐으니.” 기억은 우리 머릿속에서 무수히 변조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가장 기억하려는 것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영원의 속성을 지닌다. 기억 작용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27

잘못 기억하는 거예요. 나는 그런 적이 없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자꾸만 나보고 그러는 거예요. 정신을 차리라고. 천벌을 받는다고. 보세요. 내 손을 가져다가 자기 목을 이렇게 해요. 차라리 죽이라는 거예요.
(중략)
여자는 간다고 말하고 싶었다.
기다리지 말라며 문을 닫고 싶었다.

(시 부분 인용)


  
이 시집을 여는 문장은 이렇다.
“이른 아침 그는 식물원으로 들어갔다. // 해 질 녘 그가 식물원에서 나왔을 때는 / 전 생애가 지나버린 뒤였다.”
  
식물은 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의 형태와 닮은 꼴을 나타내는 프랙털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생명력의 강인함과 순환을 보여주지만, “발 없는 새”가 있을 수 없듯이 물과 대기와 빛 없이 살 수 있는 식물도 없다. 식물은 식물로서 슬픔을 표현할 테지만 인간은 슬픔을 소설로 시로 영화로 모든 수를 동원해 가장 강력하게 인간으로서 표현하며 사라진다.       


32

살면서 가장 슬펐을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사람은 왜 그런 걸 궁금해하냐고 해요. 나는 몇 번 째냐니까 몇 가지 떠오르는 일이 있나 봅니다.

무슨 생각해?

그는 가지 끝을 떨구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너처럼 고운 빗을 가지고 있었어. 그걸로 내 머리를 빗겨 주었거든. 널 보면 그때 생각이 나.

그건 마치 바람이 불어서 네가 흩어지는 것과 비슷한 거야.

그는 좋았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나무 아래 서 있었습니다.


   
ps)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려는 건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서 왕가위 감독이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찍은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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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9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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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2018 제9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작 모두를 ‘윤리’라는 스펙트럼에 모을 수 있다. 그래서 전체가 비슷비슷하게 느껴졌고 각각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음에도 기존에 비슷한 소재와 접근법이 있었던 게 겹쳐져서 신선도가 떨어졌다. 심사평은 9회를 맞은 이 상에 대단히 자부심을 내보였지만 이 7편의 선정이 심사 위원의 취향과 역량 탓인지 2017년 발표된 한국 단편의 역량의 바로미터인지 나는 의심만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피터 싱어는 『더 나은 세상』에서 2011년 철학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데렉 파피트 《중요한 것에 관하여》(국내 미출간)를 언급하며, “이 책은 윤리적 객관주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궁금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적인 위협을”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성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말해주며, 우리의 내재적 욕망과 기호는 이성의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피트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다. ‘1+1=2’가 참(진실)이라고 이해하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미래의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그런 동기나 욕망을 갖고 있고, 미래에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는 무관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할 동기도 갖고 있다(비록 그게 항상 결정적인 동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자명한 규범적 진실이야말로 윤리학에서 파피트가 주장하는 객관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윤리적 객관주의를 반대하는 주요한 반론 중 하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지와 미혹으로 비난할 수 없는 철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약 임마뉴엘 칸트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조차 우리가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행동에 이견을 보인다면, 과연 객관적 진실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반론에 대한 대응으로, 파피트는 객관적 윤리에 대한 자신의 변론보다 훨씬 더 과감한 주장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것에 대한 대표적인 세 가지 이론인 칸트의 도덕 이론,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존 로크(John Locke),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및 현대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 스캔론(T. M. Scanlon)의 사회계약론, 그리고 벤담의 공리주의 이론을 살펴보면서 칸트의 이론과 사회계약론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수정된 이론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공리주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결과주의(Consequentialism)의 한 가지 형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민정 「세실, 주희」는 ‘J-세실-주희’ 라는 세 여성이 민족주의와 젠더 사이에서 어떤 삶과 선택을 했는지, 그 속에서 상대가 원한 바 없는 어떤 곤경을 주는지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성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유비적이고 주요 사건도 상동(相同)한다. 사대주의적이며 서구 문화의 향유자인 J를 동경하고 따르던 주희는 그녀와 함께 뉴올리언스 축제에 갔다가 어쩐지 J의 의도로 혼자가 되고 마는데, 마초적인 남성들에게 성 모욕을 당한다. 더 점입가경은 그때 자신의 영상이 ‘쌍년’이란 꼬리표로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가 그녀는 이 해결을 위해 전전긍긍한다. J와 주희의 관계처럼 한류 아이돌 문화를 동경해 한국으로 온 세실과 직장 동료인 주희는 언어적 문화적 우위에 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해 왜곡해 받아들이며 살아온 세실을 주희는 우연찮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집회에 섞이게 만들면서 앞서 J-주희의 상황을 재현하고 만다. 뒷날 세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건 누구의 잘못이 될까. 옳고 그름의 경계를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진실의 본질은 뭘까. 파피트와 싱어의 고찰에서 보듯 우리는 각자가 가진 ‘윤리적 객관주의의 모호성’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킬 정답을 도출하기 어렵다. 이 단편의 해설을 맡은 이은지도 이 어려움을 잘 정리해 말했다.

 

“세실이 소녀상의 의미를 모르듯이 그 순간의 의미를 주희는 ‘모른다’. 이 무지한 투사의 이미지에 우리는 열광하는 동시에 곤혹스러워해야만 할 것이다. 주희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가 이데올로기에 대적하는 순간을 영원히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세실, 주희」는 언제 어떻게 무엇을 향해 투쟁해야 하는지 안다고 착각하는 이 시대의 주체들이 처한 곤경을 가리켜 보이는 서사로서 값한다. 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분명 우리를 비참하게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를 더욱 직면해야 할 것이다. 주희가 그러했듯이.”

본심 심사위원이었던 이장욱의 평도 귀담아 둘 만하다.
     

“박민정의 「세실, 주희」를 읽으며 다시 확인했다. 오늘날 소설이라는 장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공인된 사실을 재확인하고 알리는 일보다는, 그 올바름의 위태로움 속으로 들어가 더 예각화된 고통과 갈등을 마주하는 쪽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나는 이 단편이 그런 소설적 사유의 사례라고 느꼈다.”

 


『2017 제8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대상 「고두」에서도 그랬지만 임현에게 ‘윤리’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의식이다. 이번 수상작 「그들의 이해관계」도 그랬다. 정의와 윤리 문제에서 꼭 거론되는 ‘한 사람과 다수의 죽음 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게 옳은가’ 같은 문제가 등장한다. 한 여자(해주)로 인해 여러 사람이 살아남게 되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수해를 받은 이들은 안도에 그치고 만다. 한순간에 사라진 이 존재에 대해 유독 죄책감에 시달리는 두 사람이 있다. 여자를 고속버스 휴게소에 두고 떠나버린 운전기사와 해주의 남편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운전기사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자신의 이전 선택도 있었기 때문에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주의 남편은 해주와 성격 차이로 인해 끝없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조목조목 거론하고, 해주가 여행을 떠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음을 이유로 밝히며 「고두」의 윤리교사처럼 기만적인 면을 드러낸다. 해주가 죽은 이유를 파헤치는 것조차 자기 위안을 위해서다. 물론 이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아버지 표도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피한 이반보다 윤리적 죄책감은 덜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해관계」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라서 우연이라고도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요소가 달랐다면 한 가지만이라도 달랐다면 그녀는 살았을까. 그래서 임현은 결정론적 물리법칙보다 확률적 양자역학 속 인간을 더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로 존재했다가 그중 가장 낮은 확률의 나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되지 못한 무수한 또 다른 나를 떠올리다 보면 그들도 어딘가에서 지금의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나로부터 한참 떨어진 뒤에도 내가 되지 못한 것을 두고 후회하고 그것으로 소설도 쓰고 그러는 걸까. 진짜 그렇다면 거기도 뭐, 별거 없네. 그 별것 아닌 것으로 나를 너무 낭비했다.

   그럼에도 만약, 내가 나를 미리 알고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때도 나는 여전히 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의 나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대신 미래의 나는 평범하고 성실하게 늙어가면서 앓는 질병과 처방받은 약품의 성분으로 나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수도꼭지의 온도를 조절하느라 오랜 시간을 허비할 것이고, 매번 왼쪽부터 먼저 닳는 신발이라든지, 길 한가운데 버려진 양말 같은 것을 발견하며 이건 또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나 궁금해할 것이다. 어딘가 서로 닮은 것들을 바라보며 ‘너무 나 같네’ 하고 적적해하겠지. 아니더라도 내게 없던 장면들을 상상하고 나랑 비슷한 누군가를 등장시키며 무언가를 써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쓴 거의 대부분의 것들도 이미 그렇게 쓰인 셈이다.”
ㅡ 임현, 작가노트

우리는 이런 소설을 읽을 때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기 힘들어졌다. 이 사건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우리는 국민적 미궁 속에 빠져 버렸다. 누구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어서 언제까지라고 할 수 없이 고민 속에 숙연해진다. 다수가 그래야 한다고 말하면 너무 윤리 강요적일까.   
    


김세희 「가만한 나날」은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시뮬라크르(가상)에 함몰된 인간의 한 예를 보여준다. 경진은 블로그 마케터로 가짜 블로그를 만들어 첫 직장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자기 전공을 살린 만족감에 도취한다. 그런데 자신이 광고한 ‘뿌리는 살균제(옥시 사건)’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속은 줄도 모르고 외려 경진의 안부를 걱정하는 피해 이웃의 쪽지에 경진은 자기방어부터 생각한다. 혹시나 책임 소지가 있지 않을까 싶어 자신의 실수를 고민하고 상관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아무런 죄책감을 받지 않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행동도 상관과 다르지 않다. 속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정들었지만 자신의 과오가 남아 있는 블로그를 지워 버린다. 책임을 전가하기 쉬운 이런 사회 구조에서 현실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이런 선택을 자주 한다. 그러나 알고리즘으로 복잡하게 얽힌 콘텐츠 생태계처럼 아무리 지운들 우리는 살아오며 남긴 자신의 수치를 확실히 피할 수는 없다. 적성 갈등과 업무 무능력으로 퇴사했던 직장 동료를 우연히 만난 경진은 진실을 살펴볼 생각도 없이 가짜 블로그가 자기 적성에 맞는다며 우월성을 과시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깨닫는다. 정정하고 싶지만 동료는 이미 떠났다. 우리는 어디까지 부인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어디까지 사과해야 하며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한계와 미진할망정 잠정 결론이라도 그을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매우 다른 윤리의 지형에서 헤맨다.
선정적인 작품으로 논란이 많았던 D. 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제목을 따와 경진이 만든 채털리 부인 블로그 얘기를 잠깐 짚고 가자. 이 작품은 숱한 에로물의 전범이 되기도 했고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지배 계급의 성적 억압과 위선을 잘 다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채털리 부인’은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경진에게 ‘채털리 부인’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 테지만 그걸 쉽게 가져왔고 쉽게 소비한다. 우리의 성과 욕심과 고민 없음이 의미를 지워버리는 결과만 남는다. 누구라도 이런 게 없을 리 있나. 이런 공통점은 서로에게 고백할 수도 없다. 세상은 그래서 가만-기만한 나날, 가만-기만한 사람들로 넘쳐나는지도 모른다. 문제가 생기면 외면하거나 도망치면서 홀로 삭이면서.
   


“그곳을 나온 이후 나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 있으나 어쩐지 펼쳐볼 마음이 일지 않는 책. 나는 어디에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ㅡ 김세희 「가만한 나날」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과 윤리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오는 현대 작가로 나는 필립 로스와 미셸 우엘벡을 바로 떠올린다. 이 수상 작품집을 읽으며 미셸 우엘벡을 자주 생각했다. 예술이 작품의 뼈대 모티프가 된 최정나 「한밤의 손님들」, 임성순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의 풍자성도 그렇고, 최정나의 ‘가족 해체’는 미셸 우엘벡 『소립자들』, 뉴에이지를 끌어들여 기괴하게 빠지는 『어느 섬의 가능성』의 시도가, 임성순이 보여준 ‘자본주의와 중심 없는 해체에 빠져든 예술’은 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가 떠올랐다. 특히 『지도와 영토』는 스위스에서 상업화된 안락사 소재가 나오는데 정영수 「더 인간적인 말」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미 이런 접근과 고민들은 있어왔다. 없는 게 이상하겠지만. 최정나, 임성순, 정영수가 한국적으로 잘 요리했고 문체와 스타일이 다른 게 칭찬받을 점이라고 해도 예상되는 결말과 정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내 인상이다.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자기 과잉과 자기 함몰적인 기존의 퀴어물과 크게 차별성이 있지는 않다. 질주하는 욕망, 현실 부적응, 일탈 속에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로 끝나는 엔딩은 42년 전 나온 퀴어 문학의 고전이라고 할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1976)에 비해 청출어람이 되지도 못했다. 박상영도 류를 의식했던지 작가 노트의 제목을 “한없이 평범한 날들”이라고 붙였던 게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타개점이 잘 보이지 않는 성소수자 처지, 한국적 상황, 현재 시대 반영 등을 감안해야 하는 것일까. 동시대적이라는 면에서 재미와 공감할 부분이 많지만 나는 이 작품의 ‘문학적 평범성’에 아쉬움이 많은데 신형철 평론가는 “‘실패를 반복하는’ 패기 넘치는 찬가”라고 격찬하니 생각의 온도차만 느낄 뿐이다.
또 짚고 싶은 게 심사 총평에서 신수정 평론가가 박상영과 김봉곤을 비교하며 박상영을 우위에 둔 너무나 주관적인 평가에 불만스럽다.

 

"나는 박상영의 내레이션에 푹 빠져 그가 풀어내는 기나긴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버렸지만 이 소설의 과잉에 질려버린 것도 사실이다. 이토록 많은 디테일들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설도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일기나 페이스북 낙서처럼 휘갈기는 김봉곤의 스타일과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두 사람 다 자전성이 많이 반영된 퀴어 문학을 보여주는 작가다. 퀴어 성향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 두 사람은 영화와 음악에 대한 관심도 많아 작품에 적극 활용하는 것도 비슷하고 둘의 등단 시기도 2016년이라 비교가 많이 되는 듯하다. 그러나 신수정 평론가가 김봉곤을 ‘일기나 페이스북 낙서처럼 휘갈기는 스타일’이라 폄하하며 박상영을 추어올리는 건 부당하게 보인다. (김봉곤이 신춘문예, 박상영이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 등단자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아니길 바라며...) 김봉곤의 소설을 여러 편 읽어보며 김봉곤의 문체와 스타일이 그가 관심 가진 작가들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질의 비교는 제쳐두고 롤랑 바르트, 이인성 같은 작가들처럼 그의 소설에서 파편적이면서 단상적인 자조와, 스토리보다는 의식의 흐름처럼 가고자 하는 면을 자주 발견한다. 그런 작중 인물들을 통해 이성만이 아닌 심리와 정서를 자극하는 내밀하고 강렬한 문장들을 만나 한 방 맞고는 한다.

 

 


박상영과 김봉곤이 주류 문학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퀴어 파라 그런 거 같은데, 라이벌 구도로 만들지 않았으면 싶지만 인간 특징이 또 비교라...... 주목할 것은 해설을 맡은 노태훈의 말처럼 퀴어 문학은 자신만의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작가와 작품을 구분하고, 다시 그 작가를 자연인으로서의 개인과 분리하여 예술가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층위를 나누어 예술을 분석하는 태도를 객관적이며 또 진보적인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비롯한 ‘미투 운동’의 폭발적인 전개 양상을 감안한다면 예술을 작품 그 자체로서만 평가하는 관점에는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럴 때 퀴어적이라는 것은 삶과 예술이 구별될 수 없다는 감각에서 특별해진다. ‘가짜’ 정체성으로는 ‘진짜’ 예술의 영역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가장 첨예하게 인식하는 집단이 퀴어이고, 그들은 그 진정성(authenticity)을 무기로 기존의 예술에 균열을 가한다.”

요즘 철학, 과학, 문학 분야를 가리지 않고 대두되는 경향이라든가 전 세계적인 화두라 할 수 있는 공동체의식과 분배, 성차별과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 ‘윤리’는 인류가 끝까지 고민하게 되는 문제의식 같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머무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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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7-20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은 작가상이라 현재 우리 주변의 과제 상황을 배경으로 하기에 낯설지 않은 주제가 흥미롭습니다.^^:) 우리의 현재 이슈가 문학 작품에 녹여 들어가는 맛이 있을 것 같네요!

AgalmA 2018-07-21 03:06   좋아요 1 | URL
낯설지 않아서 좀 식상하기도^^; 제가 문학을 읽는 건 현실적인 걸 보려는 목적은 낮거든요. 그런 건 뉴스나 다른 책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거라서...
 
물류창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510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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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창고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하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떠오른다. 슈뢰딩거 고양이는 양자역학의 확률 문제를 말할 때의 역설이다. 미시 세계에서 하나의 전자가 확률적으로 위치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다면 물류창고는 거시 세계의 사물이라 그럴 수 없을까. 언어가 상징 기호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양자역학에서 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관측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결정하듯이 언어에서도 서술자의 인식 행위가 대상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언어의 특성상 읽는 자의 해석도 감안해야 하지만 대상을 선택하고 배치를 결정하는 서술자의 역할은 매우 크다. 그래서 나는 이수명의 물류창고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이수명의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무한증식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보르헤스) 같은 세계는 이번 시집의 첫 시에서도 바로 드러난다. “무덤 속을 미친 듯이 빙빙 돌았다”(「나의 경주용 헬멧」) 이수명 시는 늘 그렇듯 주체와 행위자, 공간 모두 모호하다. 무덤 속에서 빙빙 돈다는 자체가 불편한 모순을 체험하게 하는데 그렇다면 이 무덤은 누구의 것? 사실 이건 무덤이 아닐 수도 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 물건들이 계속 사라지고 증식하는 시공간은 이 시집 전체를 언어의 물류 창고로 보이게 만든다. 오늘과 밤을 잃었는데 오늘과 밤은 계속 온다(「밤이 날마다 찾아와」). 풀이 한 포기도 없는데 모두 모여 풀을 뽑는다(「풀 뽑기」). 죽음은 죽음을 죽인다(“모두들 죽음으로부터 다시 한 번 / 튕겨 나와 / 무언가로 죽음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디야 커피」). 최근은 점점 더 최근으로 갱신되지만 끝을 알 수 없다(「최근에 나는」). “이미 깨어 있어서 / 언제나 깨어 있어서 / 다시는 깨어나지 못해 아무도 나를” 깨울 수 없다(「물류창고」, 29페이지).
    
1부에 집중적으로 제시된 「물류창고」 열 편의 연작시 속에는 미시 세계의 파동과 전자들의 움직임들처럼 명확히 관측할 수 없는 것들로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 우리나 오늘과 내일의 구분도 중요하지 않고 연극을 하든 말이 안 되는 무슨 대화를 하든 큰 의미가 없다. 가야 할 배송 물건과 돌아온 반송 물건이 섞여 있는 중첩의 장소인 물류 창고니 이상할 게 무언가! “자신이 왜 그렇게 흰 목장갑을 끼고 있는지 몰라 장갑 낀 손을 내려다”(마지막 「물류창고」 시, 50페이지) 보는 이해 불가능한 상태만이 체셔 고양이의 미소처럼 남을 뿐이다. 
    
2부의 첫 시는 무한을 계산해내던 칸토어(혹은 칸토르)의 무한집합론이 연상된다.

“숲 속에서 네가 나왔는데 화분을 들고 서 있었는데 화분에는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아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너에게 말했지 화분은 단단하지 않다고 네가 붙잡는 대로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있다고 너는 말했지 시신을 찾는 사람들이 여태 숲속에 있어서 숲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시신이 텅 비어 있어서 시신에는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아서 시신이 없다. 처음부터 없다. 하지만 시신을 찾는 사람들이 여태 숲속에 있어서 숲을 늘리고 늘려서 그렇게 숲을 들치고 마침내 시신이 발견되는 것이다. 시신으로 나를 몰아내는 것이다. 나는 없다. 처음에는 없다. 시신이 웃는다. 숲속에서 네가 나왔는데 너는 누구의 시신인가, 너는 화분을 어디에 놓으면 좋을지 묻는다.”

ㅡ 「너는 묻는다」 시 전문

애초에 없는 것을 만들고, 없음(시신) 속에 있음(숲)을 넣는 기묘한 상황! 이러한 역설 상황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늘도 거의 유사한 뒤통수로 돌아오는 중이다”(「녹지 않는 사람」). 안부는 돌고 돌아 내게 다시 묻고(「안부 기계」), 집은 연립으로 도달하며 알 수 없게 되고(「연립주택」), 모든 것이 노면 위를 지나가지만 우리는 상태와 순간만을 볼 뿐이며(「노면의 발달」), 눈이 오고 숱하게 겪었고 눈으로 보면서도 우리는 매번 놀란다(「투숙」). 우리는 그저 공처럼 개처럼 이상한 운동 상태에 있다(「오늘의 경기」, 「원주율」, 「머릿속의 거미」, 「계속」). 살아 있다면 우리는 정말 지쳐야 정상 아닌가. 
    
끝장을 바라고 있지만 이 운동을 아무도 멈출 수 없다. 3부의 시들은 그래서 더 절망스럽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있다. 하얀 직사각형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네모난 유리 창문들, 현관문들이 줄지어 있고 이불이 혼자 춤을 춘다. 기우뚱거리며 떨어질 듯 날아오를 듯 위태롭게 떠다닌다. 도약 중에 잠깐 접히다가 두 번 다시 같은 모양으로 접히지 않는다. 저 이불은 너무 많은 직사각형을 가지고 있구나,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있다. 이불은 어떤 소식도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먼지를 쏟아낼 뿐이다. 먼지들은 자리를 바꾸면서 떠돈다. 어떤 먼지는 다시 이불에 달라붙는다. 빙빙 돌면서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먼지 속에서 이불은 언제 멈출지 모른다. 무엇을 겨누지도 못하고 각도를 맞추지도 못하고 어떻게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혼자 춤을 출 뿐이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고 있다. 커다란 직사각형을 계속해서 흔들어대고 있다. 저 이불을 누가 그만

빼앗았으면”

ㅡ 「이불」 시 전문

수도 서울은 삶의 장소가 아니라 ‘소멸’ 좌표에 더 가깝고(「여기서부터 서울입니다」), 아무리 부서져도 정작 갈 곳도 없고(「흥미로운 일」), 어지럽게 떠있다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덤불 가운데 식탁보」). “비는 길고 계속 길어서 모든 비가 이어져” 있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모든 것들은 바닥에 흩어져 있다(「나의 중얼거리는 사람」). “눈을 뜨는 순간 모두 찢겨져 뒤로 물러난 듯이”(「우리를 제외하고」) 이수명의 시들은 끔찍하게 갇혀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누구도 예외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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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7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7-07 16: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수명 시인 데뷔 때부터 좋아해서 신간 나오면 늘 부리나케 찾아봤죠. 여전히 좋아요. 읽고 싶게 시를 쓰는 시인의 공이 크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