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숨 : EXHALATION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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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테드 창은 상반된 관점의 대비를 계속 보여주는데, 엄밀히 따지면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타임슬립이라 하겠지만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와 비슷하게 평행우주론을 믿지 않는 결정론을 제시한다. 이후 단편인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서는 평행우주론에 입각해 펼쳐진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는 여러 인물이 과거로 돌아가나 그들 모두는 ‘변화‘가 아니라 ‘이해‘를 배운다.


2. <숨 : EXHALATION>은 만물 유전 사상 비슷하다고 할까. 오랫동안 ‘영혼‘이라 여기던 자리에 그는 ‘공기‘를 배치한다. 폐 같은 기관을 돌려쓰고 자기가 자신을 해부하는 위치까지 간 인간에겐 ‘자기‘라는 개념은 뒤떨어진 생각으로까지 보인다. 그런 인간이 바라보는 이 세계의 모습은 ‘기압의 흐름‘ 같은 것.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1.
젊은 시절에는 무의미하게만 여겼던 관습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그 효용을 이해하게 되듯이, 어떤 정보를 감추는 것은 그것을 밝히는 것만큼이나 쓸모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산은 깨달았습니다. "아뇨, 오히려 경고해주지 않아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2. "...정상적인 방법으로 복도를 거쳐가는 것보다 더 빨리목적하는 방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 말입니다. 어떤 통로를 이용하든 방 자체에는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과거와 마찬가지로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까?"

"회개와 속죄는 과거를 지워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얘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유감이군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미래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잠시 이 말에 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자신이 지금부터 이십 년 뒤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죽음을 피할 방법은 전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바샤라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낙담을 안기는 말처럼 들렸지만, 어찌 보면 그 사실이 일종의 보장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십 년 뒤에도 살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가정해보지요. 그렇다면 향후 이십 년 동안은 그 어떤 것도 저를 죽일 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 아무 걱정 없이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습니다. 살아남을 것이 확실하니까요."

3. 현자들은 말합니다. "세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네 가지 있다. 입 밖에 낸 말, 공중에 쏜 화살, 지나간 인생, 그리고 놓쳐버린 기회."

4. "그녀는 떠났고, 저는 몇 시간 동안이나 해방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러면서 줄곧 바샤라트가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5. "생각건대, 제가 가진 가장 값진 지식은 이것입니다.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숨 : EXHALATION>

1. "내 몸은 어디 있는 것일까? 나의 시력과 동작을 더 넓은 공간으로 연장해준 도관들은 나의 원래의 눈과 손을 뇌에 연결하고 있는 도관들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실험을 진행하는 동안 조작기들은 실질적으로 내 손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내 전망경 끝에 달린 확대경들은 실질적으로 내 눈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나는 안이 밖으로 나온 인간이었다. 확장된 뇌의 한가운데에, 해체된 조그만 몸이 위치해 있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형태로 내 몸을 배치해놓고, 나는 나 자신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나는 현미경을 돌려 기억 담당 하위 부품 중 하나의 형태를 관찰했다. 나 자신의 기억을 해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았다. 단지 기억이 기록된 방법을 추측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예상대로 겹겹이 포개진 박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톱니바퀴나 개폐기마저 보이지 않는 것은 의외였다. 대신 하위 부품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가느다란 공기 관들의 뱅크(동시에 작동하도록 배열된 부품이나 단자 — 옮긴이)였다. 이 세관들의 틈새로 뱅크의 내부를 지나가는 잔물결 같은 것이 흘끗 보였다."

2.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추정과 달리, 공기는 단순히 우리의 사고를 발생시키는 엔진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는 사실상 우리의 사고가 각인되는 바로 그 매체였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공기 흐름의 패턴이었다. 나의 기억은 박편에 팬 홈이나 개폐기의 위치가 아니라, 지속적인 아르곤의 흐름으로서 각인되는 것이다."

3. "뇌의 연구가 과거의 비밀이 아닌 미래의 궁극적 운명을 밝혀냈다는 사실에서 아이러니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과거에 관해 중요한 뭔가를 알아낸 것이라고 믿는다. 우주는 엄청난 양의 공기가 비축된 데서 시작됐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한다. 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욕구와 고찰은 우리의 우주가 점진적으로 내쉬는 숨에 의해 생성된 소용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내쉼이 끝날 때까지, 나의 사고는 계속될 것이다."

4.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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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미제 사건이던 화성 연쇄살인자 이춘재가 쏟아내는 범죄 사실, 검찰과 사법 정의 문제로 시끄러운 요즘 펼쳐보지 않을 수 없는 책.
마녀 재판에서 시작하는 담담한 서술에서 푸코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진지해서 좋다.









오늘날 90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보면, 어렵지 않게 신성 재판 제도의 결점들을 찾아낼 수 있다. 불과 물로 행한 신성 재판에서 유죄를 결정하는 메커니즘은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았다. 죄가 없는 남자나 여자도 당연히 뜨거운 쇳덩이나 끓는 물에 화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물통에 가라앉을지 아닐지 여부는 주로 폐 안의 공기량의 문제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체지방 비율의 문제였다. 여자와 몸집이 큰 남자는 당연히 (그리고 불공평하게) 불리했다.
비록 그 절차가 타당했더라도 그런 신성 재판은 어떤 형태의 진정한 일관성도 없이 운영되었다.

지금부터 900년 이후의 누군가는 현재 우리의 사법제도를 어떻게 볼까?
사실을 말하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가 선조들의 신성 재판을 보고 받는 충격 못지않게 오늘날 우리가 용인하는 정해진 절차와 체계적인 불공정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 시대 판사와 배심원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수백 년 전에 재판을 주재했던 주교와 수도원장들에게서 인지하는 만큼이나 명백한 편견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형사법을 살펴보면서 이단 금지만큼이나 잘못되고 불합리한 법들을 찾아낼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도 다수의 남녀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한테 얼마나 괴로운 문제인가? 낮춰 잡아도 25명 가운데 1명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1980년대 DNA 검사의 발전은 우리 사법제도를 따라다니는 문제점과 일별하게 해준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깜깜한 거대한 저택 안에서 겨우 성냥 하나 켠 모양새가 아닌가 싶다. 어슴푸레한 빛 덕분에 우리의 형사 사건 처리 절차가 끔찍하게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다. DNA 검사 이후 300명이 넘는 사람이 유전자 불일치로 혐의를 벗었는데, 이들 가운데 95퍼센트 이상이 살인범과 강간범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이들이었다. 존경받는 법관이자 법률가인 러니드 핸드Learned Hand가 언젠가 장담한 것처럼 ‘유죄 판결을 받은 결백한 남자의 유령’이 떠도는 것이 ‘비현실적인 꿈’이 아니다.

우리 사법제도가 직면한 위기의 전체 규모는 몇 배나 크다. 혐의를 풀어줄지 모르는 DNA 증거 활용이 불가능해서, 좋은 변호사를 찾지 못해서, 잘못된 유죄 판결이지만 굳이 싸울 가치가 없어 포기한 엄청나게 많은 사건들이 아직도 어둠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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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하게 밤을 새워야 하고 이건 내 잘못인가.
그의 시집 속에 비처럼 쏟아지는 생활과 언어의 무게를 들여다보며, 나는 나의 무게를 생각해 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의 잘못인지 아는 사람을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모두 짓눌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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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 라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지음, 강주헌 옮김 / 나무생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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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록이 대체로 그렇듯 공감되는 문장도 있지만 인간의 판단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영향받으며 구축되는지 사실 관계를 따지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자세가 부족해 두루뭉술한 게 많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240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즐거움은 어떤 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균형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체적인 윤곽, 선과 색, 선과 그 인물의 외관에서 찾아지는 비밀스런 관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의 판단 기준이 시대, 지역에 따라 달랐다는 건 역사적으로도 많이 드러났다.


오늘 jtbc 조국 사태 토론에 나온 유시민 작가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상대방을 칭찬해가며 주장을 펼치는 유연함을 보였지만 논쟁의 해결 기미가 안 보이자 그는 슬슬 짜증을 내는 단계로 넘어갔다. 급기야 손석희 사장 같은 언론인은 안 되지만 보통 사람들이 진영 논리를 가지는 것은 괜찮은 일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이데올로기 타파를 말년까지 꾸준히 주장했던 칼 포퍼 생각이 났다.
모든 사람이 완벽한 사고를 할 수 없고 자기 논리에 빠져 순간적으로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유시민 작가의 그 말은 논쟁에서 이기려다가 자충수를 뒀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주의 주장을 가질 수 있다. 그 말은 그가 늘 좋은 가치로 말하던 자유주의를 확장한 의미일 거라 추측하지만 진영 논리의 긍정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49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62 솔직함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솔직한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보는 솔직함은 다른 사람에게 신용을 얻고자 하는 교묘한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63 거짓에 대한 혐오는 우리의 말에 신빙성을 더하고, 우리의 발언을 종교적 교리처럼 존중하게 만들려는 작은 야심이다.

64 진실을 가장한 거짓이 세상에 피해를 주는 만큼 진실이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84 친구에게 배신당하는 것보다 친구를 믿지 않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다.

85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정을 낳는 것은 이해 관계일 뿐이다. 우리가 친구에게 헌신하는 것은 그 친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친구에게 도움을 받기 위함이다.

86 우리의 불신이 상대의 속임수를 정당화시킨다.

105 합리적인 사람은 우연히 사물의 이치를 찾아낸 사람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알고 그것을 판별하며 음미하는 사람이다.

145 우리는 종종 칭찬이란 수법을 통해서 그런 식이 아니면 감히 폭로할 수 없는 그 사람의 결점을 교묘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이른바 독을 넣은 칭찬이란 것이다.

175 변함없는 사랑은 끝없는 변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의 온갖 장점들을 앞에 두고 어떤 때는 이런 장점을 어떤 때는 저런 장점을 떠올리며 사랑을 이어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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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계절 시작시인선 43
조연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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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인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처서 지나고」)라고 했다면, 조연호 시인은 ˝메뚜기 앞이마 같은 집을 얻었구나, 내 방을 둘러보고 할머니가 말했다.˝(「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라고.


김춘식 평론가 평에 공감해 내가 애써 더 덧붙일 게 없다.
이렇게 품절되긴 아까운 시집.

그 벽 한구석에 나는 달력 대신 뭉크의 판화「죽음의 집」을 붙여놓았다. 창 밖은 비극적 세계관이지 않은가
ㅡ「죽음의 집」

겨우내 나는 길눈이 어두웠다. 나는 또 詩라는 잘 닫히지 않는 상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해맑은 소년 같던 옆집 고양이,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처럼 평생 바람을 퍼올리던 아카시아숲, 나는 또 病이라는 낡은 산책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친구가 남기고 간 화분 속 석회가루들이 잎새 쪽으로 희게 몰려간다. 고즈넉한 자목련과 친족들의 장례와 트럭 폐유의 냄새, 모든 걸 다 숨기기에 이 상자는 너무 거짓말이 많았다. 소음벽 아래 모인 목련이 용서로 가득 채워진 꽃잎을 꺼낸다. 다만 한 발짝씩 기억에서 발을 옮겨놓았을 뿐인데도, 좌판을 벌이는 노인네의 감자 몇 알처럼 뎅글뎅글하게달이 떠오른다. 생명체가 있을지도 몰라, 시력 나쁜 애인은 깊게 패인 쪽의 달이 신비롭다. 전생이 있다면, 그것이 서로의 열매를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의 흔들림이라면, 목련이 있던 자리에서 한걸음 비껴서서 목련꽃이 핀다. 달의 인력이, 애인의 월경이 목련을 끌어당긴다. 영영 소년이 될 수 없는 아이와 상자 속의 거짓들은 용서 받아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ㅡ「달의 목련」


누군가 강 저편으로 외롭게 돌 던졌고, 항상 돌은 더 아프고 더 외로운 쪽으로만 날아갔다. 어떤 이가 몸 속에 깊은 웅덩이를 파고 목마름을 담는다. 식물에게 四柱가 없는 것이 슬펐다
ㅡ「불을 꿈꾸며」


좁은 골목을 휘저으며 산꼭대기로 오르던 과일장수 여자의 두꺼운 팔뚝이 행복에도 불행에도 가깝지 않았다.
ㅡ「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어떤 나무들은 스스로 꺾이고 어떤 나무들은 스스로 젊어진다.
ㅡ「나쁜 혈통」

봄볕 내리던 날, 다투어 가지 않아도 아물지 않은 상처와 만나졌다.
ㅡ「오월」


비 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 서서 심장이 저울질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 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 굴리는 소리만큼 크다.(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고,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이 없을까. 나는 그리다만 그림에 붉은 명암을 넣었다.) 어쩌면 세상은 평안하고, 이렇게 될 줄 예감하면서 주일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쏟아졌을 것이다.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燈을 켜지 않았다.
오월은 늦은 식사로부터 와서 늦은 식사로 떠난다. 붉고 지친 꽃잎 위로 지하 방직공장 실먼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늦은 식사, 우는 엄마들, 햇복숭아를 사들고 칠팔월로 훌쩍 가버리는 오월 분수대에 손을 넣고 바람의 패총을 줍는다. 덜 마른 기억의 껍질들이 떨어진다.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은 없는가. 비 갠 하늘빛을 따라 느린 삶을 옮기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과 그의 집이 옮겨가며 뒤에 남는 반짝이는 것들이 함께 모두 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ㅡ「오월」


너무 많은 질투를 가진 이상한 아동인 빨간 모자, 따뜻해지고 싶은 어린 시절이 모두 불화의 색깔이었다.
ㅡ「빨간 모자」


연인의 퍼즐 맞추기가 석양 아래 거진 끝나가는 것이, 뭔가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태양은 억새꽃 아래,
굴뚝은 수납장 옆에, 뿌리는 가지 위에, 연인의 손끝이 세상을 하나하나 완성해 간다. 마지막 한 조각을 남겨두고 이제 갈림길과 걸음을 마주했으니 어쩌나, 뒤집힌 무당벌레처럼 擬死하는 하늘, 이 길들 중 어느 쪽을 죽여 붉고 무거운 쪽을 가질 수 있을까.
ㅡ「갈림길」


바퀴벌레는 바퀴벌레와만 교미했고 뒤집힌 손이 뒤집힌 손을 맞잡았다.
ㅡ「해피엔딩」

배부름과 같거나 비슷해진 말들이 그의 속에서 텅텅 울린다.
ㅡ「斷食」


처음엔 生이 얇은 비닐막 같았고, 다음엔 김 휘휘 도는 찌개그릇 같았고, 나중에 生은 자기 입에 못 담을 험담들이 되어갔다. 
ㅡ「모래의 시작」


희망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해 내가 울다.
ㅡ「희망」


여름 개암열매에는 아직 세속의 이름이 없다고 애인이 말했다.
ㅡ「몇 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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