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용도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지음 / 1984Books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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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아니 에르노와 그녀의 연인 마크 마리가 “욕망과 우연이 낳은, 결국 사라져 버릴 이 배열”을 기록하기 위해 시작했지만, 다 읽고 곱씹어 보자면 앞에 내세워진 ‘욕망’보다 ‘그때의 우연’과 ‘사라져버린 부재를 확인하는 배열’이 더 방점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인 흔적에서 성의 비현실성을 포착하는 것.” 이 사진과 글이 “기억 속에서 혹은 독자들의 상상 속에서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야만, 현실 그 이상의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작가가 말하고 있듯이 그들의 사진은 현실을 모두 보여줄 수 없고 때론 어떤 초과를 보여준다.

“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에도, 그날 아침에 찍은 사진에도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다. 사진을 읽는 것은 내 기억이 아니다. 나의 상상력이다.”(p24, 서문)

 

“그 원피스는 버클에 끈을 넣어서 묶는 리본이 여러 개 달려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몸을 비틀면서 벗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모든 것은 미화됐고 비현실적이다. 우리의 사랑에 현실성을 더하기 위해 찍은 이 사진의 역설은 그것이 사랑의 현실감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사진은 내 안의 어떤 것도 깨우지 않는다. 여기에는 더 이상 생명도 시간도 없다. 여기에서 나는 죽었다.”(p166, 「사진의 역설」) 

 

 

 

 

이 사진들을 찍을 당시 아니는 유방암 치료 중이었다. 욕망만큼이나 죽음에 근접해 있었던 그때의 아니는 지금의 아니가 아니다. 작업을 하는 당시에도 작가는 이 점을 숙지하고 있었다.

“정리에 대한 반감은 극단적이 됐다. 무언가를 정리하고 보관한다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죽음에 죽음을 더할 생각은 없었다.”(p27, 서문)

 

 

그러나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투병과 죽음의 압력 때문에 꿈틀대는 욕망, 기록할 수 있는 이 순간의 작업에 그들은 더 몰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과 사진은 그런 정리이자 보관이며 죽음에 죽음을 더하는 행위이다. 폄하할 일은 아닌 것이 모든 인간의 행위가 이미 그런 것 아닌가.

 

한 장의 사진을 두고 아니와 마크의 단상이 담긴 구조다. 지속적인 작업을 하다 보면 어떤 걸 깨닫게 되는데, ‘사물’에 대한 단상은 나도 자주 하는 생각이어서 특히 공감했다.

 

 

 

“섹스 후, 바닥에 버려진 모든 것들 중 신발이 가장 마음을 흔든다. 옆으로 엎어졌거나 반듯하게 서 있지만 반대 방향을 향한다. 혹은 속옷 더미 위에 부유하고 있지만, 항상 서로 떨어져 있다. 사진에서 두 신발 사이의 거리가 보이면, 그것을 벗으려던 거친 몸짓을 헤아릴 수 있다. 주차장이나 보도에서 발견하면 누가, 왜 벗었을까 궁금해지는 그런 신발들처럼 대부분은 따로 떨어져 있다. 추상적인 형태로 변하는 의복과 다르게, 신발은 유일하게 사진 속에서 신체 일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순간 가장 큰 존재감을 구현한다. 가장 인간적인 액세서리다.”(p48, 「비밀」)

 

“사람의 자세 그대로 떨어진 옷에서 나온 생명력은 무언가 위협적이다. 영화 프릭스의 괴물 같다. M의 육체가 빠져나간, 비어 있는 형체다.

어릴 적 전쟁에 관해 들었던 모든 이야기들 중에, 주유소 근처에서 폭격이 일어난 후, 한 사람에게 남은 것은 파손된 의자뿐이었다는 이야기가 가장 끔찍했다.”(p99~100, 「내가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에는 항상 시선을 붙잡는 디테일이 있다. 다른 것들보다 마음을 더 동요시키는 디테일, 예를 들면 흰색 상표, 타일 위에 구불거리는 스타킹, 둥글게 말은 양말, 짝을 잃은 양말 한 짝, 쇼윈도에 진열한 것처럼 마룻바닥에 컵이 납작하게 놓인 브래지어. 여기서는 창문 앞에 있는 흰색 뮬이 그렇다. 이미 여름 더위는 시작됐다. 그것이 계속 이어져 ‘폭염’이 되고 폭염이 끝난 후에는 수천 명의 노인들이 죽어 나가 일요일에도 묻히게 되겠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저 아름다운 여름일 뿐이었다. 하얀 하늘 아래 세상은 비현실적으로 곳곳이 반짝일 것이고, 늘 그랬듯이 도덕성은 더위 속에 녹아 버릴 것이다.”(p112, 「노래 한두 곡」)

 

“오래된 음반 가게에서 에디트 피아프 45rpm 레코드판 재킷을 알아봤다. 내가 16살 때, ‘어느 날의 연인’이라는 노래 때문에 샀던 파란색 재킷이다. 나는 그 음반을 누군가에게 줬거나 팔았을 것이고, 그 후로 이 45rpm은 ‘음직이 좋은 노래’가 아니라고 무시를 받게 됐다. 거기, 브뤼셀의 가게에서 나는 그 레코드판이 갖고 싶어졌다. ‘어느 날의 연인’ 때문이 아니라ㅡ너무 많이 들어서 이 노래의 감정은 내게 고갈되었다ㅡ파란색 앨범 재킷과 완전히 잊고 있던 또 다른 노래, ‘갑자기 계곡’때문이었다. M은 내게 그것을 선물해줬다.(p134)……(중략)……나는 감정의 언어를 ‘믿으면서’ 사용할 줄을 모른다. 시도를 해봤지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것은 사물의 언어, 물질적인 흔적의 언어, 가시적인 언어다. (그 언어들을 단어로, 추상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을 멈추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사진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이 그의 사랑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 아니라, 명백한 것들 앞에서, 사진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증거 앞에서, 내가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는 ‘그는 나를 사랑할까?’라는 질문을 피하는 방법인 것 같다.(p136, 「그런데 그녀는 못생겼잖아!」)”

 

욕망에 초점을 두는 한 이 작업도 무한히 지속될 수 없다. 이 세계가 물질보다 암흑물질로 더 뒤덮여 있듯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불씨 같은 욕망이지만 우리를 둘러싼 것은 더 많은 부재와 상실이 아니던가.

 

 

 

 

“우리는 사진 촬영을 계속한다. 어떤 장면도 절대 서로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적으로 계속할 수 있는 행위다. 유일한 한계는 바로 욕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광경을 더는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장면을 응시하게 했던 그 고통도 더는 없는 듯하다. 사진을 찍는 것은 더 이상 마지막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글쓰기 작업의 일부다. 순수한 형태는 사라졌다.”(p148, 「처음으로 한 남자와 함께」)

 

“어떤 사진도 지속성을 나타내진 않는다. 사진은 대상을 순간에 가두어 버린다. 과거 속에서 노래는 확장되어 나가고, 사진은 멈춘다. 노래는 시간의 행복한 감정이며, 사진은 시간의 비극이다. 나는 종종 우리가 한평생을 노래와 사진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p115, 「노래 한두 곡」)

 

나는 글이 현재를 담을 때 가장 충실할 거라 생각한다. 시간의 속성상 필연적으로 과거를 담을 수밖에 없지만 기억의 윤색이 가장 덜할 것이기에 그렇다. ‘글쓰기가 현재이자 미래’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이 ‘사진들의 용도’는 그들의 과거 현재에 충분히 쓸모 있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그들과 비슷한 삶에 있는 이들의 지금 현재에도 참고가 될 지도. 우리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현재를 담는 어떤 예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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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2-31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바쁘신 중에도 많은 좋은 의견 들려주셔서 감사한 2018년이었습니다. 항상 감사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2019-01-01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1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1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31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1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수밭 전별기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9
유종인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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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으로 가득한 문장은 신선함을 주지만 방만과 미숙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미지도 준다. 그렇게만 가득한 시들이 모이면 전체 완성도는 더 떨어진다. 아케이드가 아니라 지하상가 같은 분위기가 되는 것. 이것도 데뷔 초에나 먹힌다. 자기 시의 현재에만 사는 시인은 당시에는 잘 모른다. 영리한 시인은 자신이 현재 그걸 팔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기에 어쩔 수 없다. 증오하면서도 쓸 수밖에 없다. 젊은 날의 시치고 이런 기운이 없는 게 있나. 알면서 쓰고 읽는 우리. 그래서 시는 웃기는 숨바꼭질 같지.

유종인 시어는 너무 고르고 골라 모난 데가 느껴지지 않아 옥돌 같다. 그러나 눈길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그의 시집은 모두 단아하고 소박하다. 그리고 돌처럼 단단히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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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24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메리크리스마스~^^

AgalmA 2018-12-26 01:1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님^^ 전 감기몸살로 앓아 누워 있어서 크리스마스 휴일이길 다행이다 하고 있습니다. 연말 건강 잘 챙기시길!

카알벨루치 2018-12-26 08:44   좋아요 0 | URL
아갈마님 어서 쾌차하소서!!!몸이 쉬어가길 원하나 봅니다 ^^

희선 2018-12-25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처럼 단단히 그곳에’ 이 말 느낌 좋네요

성탄절입니다 저는 다른 날과 똑같이 지냅니다(다른 날이라고 별걸 하지 않지만) 그렇게 보내는 사람도 많겠지요 AgalmA 님 성탄절 마음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AgalmA 2018-12-26 01:17   좋아요 1 | URL
몸이 아프니 성탄절이고 뭐고 신경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혼곤히 아픈 채로 지내는 것도 때론 좋아요. 아픔과 씨름하면 잡생각없이 좀 단순한 삶 속에 있을 수 있어서.

성탄절 잘 보내셨습니까. 건강히 연말 마무리 잘 하시길^^/
 
[eBook] 문단 아이돌론
사이토 미나코 지음, 나일등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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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개정판 출간으로 불판이 펼쳐진 지금 내가 오구오구만 할 독자는 아니라서 참고삼아 이 책을 읽게 됐다. 나는 좋아하는 작가일수록 더 매의 눈초리로 분석한다. 어떤 건 왜 좋고 어떤 건 왜 싫은지 알고 싶은 것도 있고, 비판점이 있다면 팬인 내가 더 잘 알아야 할 테니까. 책 제목부터 뭔가 B급스러워 평가절하 소지가 있지만 뼈 있고 수긍 가는 내용도 꽤 있다. 미나코의 통찰은 일본 만화를 보듯 잔재미 가득한 색다른 문예비평이어서 읽는 내내 재밌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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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지메 쇼이치는 초기 무라카미 작품을 가리켜 ‘다방 주인 문체’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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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버린 지금에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똑똑히 그릴 수가 있다. 며칠간 계속된 부드러운 비에 여름 동안 쌓인 먼지가 깨끗이 씻겨 내려간 산은 깊고 뚜렷한 푸름을 띠었고, 10월의 바람은 억새 이삭을 이리저리 흔들고, 얼어붙은 듯한 파란 하늘에는 가는 구름이 꼭 들러붙어 있었다."『노르웨이의 숲』

이렇게 노골적으로 서정적인 문장은 그때까지의 하루키 랜드와는 분명히 선을 달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은 새 손님을 대거 불러들였지만, 개점 당시의 오붓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단골손님 중에서는 ‘요즘 가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 언제나 손님으로 북적대지’ 하며 미간에 주름을 잡고 발을 돌리는 사람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단골손님을 위한 서비스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하루키 랜드. 『노르웨이의 숲』 다음 해에는 개점 당시(『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의 맥을 잇는, 그것도 상하 두 권으로 된 『댄스 댄스 댄스』(1988)를 출판합니다. 그리고 ‘하루키 현상’은 정점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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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하루키 랜드는 게이머로 북적이는 커다란 오락실로 변모했습니다. 이제 무라카미 문학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가 그들을 위한 게임기가 되었으며, 그곳이 과거에 다방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게이머 군단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찾아옵니다. 1994년에 드디어 대망의 신작 게임 『태엽 감는 새』 제1부와 제2부가 출시된 것입니다.

아!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직 하루키 랜드가 다방에서 오락실로 변한 것을 모르는 고상한 손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태엽 감는 새』는 그런 손님들을 당혹게 했습니다. 그리고 평가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하다’고 무책임하게 칭찬하는 사람들과 ‘이런 엉망진창인 다방에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테다’라며 격분한 사람들로."

 

일본 문예라는 좁은 범위지만 미나코의 비교 분석이 한국 문학의 경향과 비교해 볼 부분이 많다. 요즘은 일본문학이 한국 출판계 점유율이 높기 때문에 한국도 그 영향권에 있다고 봐야 할 테고 말이다. 거론하는 스타작가 8인 중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다치바나 다카시, 무라카미 류, 우에노 지즈코는 친숙하지만 다와라 마치, 하야시 마리코, 다나카 야스오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터라 더 깊이 있는 독해를 못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게다가 이 책이 일본의 1980~90년대 거품경제,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열풍 속에 움직인 일본문학 전성기를 돌아보는 문예 비평이라 현재 인기 절정이라고 할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들이 다뤄지지 않으니 지금 시점에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페미니즘, 문예, 시사, 문화인류학을 넘나드는 미나코의 현재 저작이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아 최신의 관점을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에서 내가 한국의 현상과의 유사성을 말했는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시대와 그 시대성(‘극단적인 호황과 극단적인 불황, 페미니즘의 대중적 유행, 지적 권위주의의 파괴’)은 지금 한국 출판계 분위기와 매우 흡사하다. 일본의 8~90년대 문단 이야기가 한국 90~2000년 대랑 비슷한 것이 이것도 다른 분야처럼 한국과 일본의 질긴 10년 차를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장르소설, 철학 쪽은 일본이 이미 넘사벽이 된 거 같지만.

거론하는 작품들은 호황과 불황을 오가는 시대 속에서 독자들의 책심을 잡았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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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기념일』은 중장년층 남성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만인의 환영을 받았던 것입니다. 위험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이돌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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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하위문화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소녀 대상 한정 문학’이야말로 전 세계적인 하위(부차·방계·지하·하층·피차별)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쓰인 시대는 한 세기 가까이 차이가 있으나 요시모토 바나나와 코발트계 문학은 『빨간 머리 앤』과 사실상 같은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소녀라고 하는 젠더 역할’에 얽매이지 않은 주인공 캐릭터. 작은 사건을 통해 정신적 자립을 이루어가는 성장 이야기. 여자끼리의 우정을 중시하는 가치관. 남자와의 관계를 쉽게 연애로 발전시키지 않는 신중함. 그리고 섹스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 1990년대 후반 코발트 문고가 소년끼리의 연애를 그리는 ‘보이즈 러브’로 기울어져간 데서도 알 수 있듯이(이는 장르의 쇠퇴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성의 월경과 양성구유성 등도 소녀 문학의 세계에서는 비교적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바나나가 거론되는 방식은 일반적인 문예작품의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것은 문예작품이라기보다는 문예상품, 아니 ‘바나나’라는 캐릭터상품에 가깝습니다. 질적으로 비슷한 것은 리카 인형이나 산리오의 키티 같은 가공의 캐릭터입니다. 어눌한 표현과 죽음으로 물든 멜로드라마. 그곳은 인형 놀이의 세계입니다. 인형 놀이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이 죽어도, 가족 구성이 엉망진창이어도 현실적인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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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속내’를 파는 장사꾼”이 바로 하야시 마리코다, 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오쓰키가 말하는 “출세욕, 명예욕, 물욕, 그리고 성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뒤로 감춰 마땅한 어두운 부분”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출세욕, 명예욕, 물욕, 그리고 성욕”은 오랫동안 남성의 속성, 남성에게만 특권적으로 허용된 특질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것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뒤로 감춰 마땅한 어두운 부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여자라면 누구나 뒤로 감춰 마땅한 어두운 부분’이라고 해야 합니다.

과거 여성에게 허용된 계층 이동은 결혼밖에 없었습니다. ‘옥여(玉の輿, 결혼을 통한 여성의 신분 상승을 상징하는 꽃가마 — 옮긴이 주)’란 말이 생겨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지요. 그런데 하야시 마리코는 입으로는 결혼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혼자 힘으로 출세의 기회를 거머쥐는 ‘남성적 신분 상승’을 실현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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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녀는 학자인 동시에 유능한 마케터임에 틀림없다. 시대의 변화를 재빨리 파악하는 날카로운 통찰력, 변화하는 ‘주부’와 ‘여성’의 동향과 심리를 파악하는 카운슬링 능력, 사회 분석뿐 아니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확고한 눈이 그녀에게 오늘의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유명 대학’ 출신, 양갓집 자녀, 대학 조교수라는 자신의 기호적 이미지를 충분히 활용하고, ‘어디까지나 약한 여자의 편’이라는 방침을 고수하며, ‘여자들’의 풀뿌리 네트워크를 최대한 이용해 심포지엄이나 강연 장소에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어필한다. 또 아사히 신문이라는 영향력이 큰 브랜드 미디어와 제휴해 정력적으로 계몽 활동을 펼친다. (…) 어쨌든 그녀는 다재다능한 것이다. _야마시타 에쓰코, 「밝고 경쾌한 에로 아줌마는 왜 건강의 상징이 되었는가」, 『별책 다카라지마 80년대의 정체!』, 1990년

표면적으로는 ‘다재다능함’을 칭찬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언짢은 논조의 야마시타 에쓰코는 정말로 그녀를 ‘유능한 마케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내심 씁쓸함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칭찬 범벅’이 된 것은 아닐까요.

‘B형 지즈코’를 씁쓸하게 생각한 사람은 더 있습니다. 바이링구얼의 숙명이라고 할까요. 저널리즘(밖)에서도, 학계 & 페미니즘(안)에서도 ‘이단자’로 여겨졌던 그녀. 안에도 밖에도 일곱 명의 적. 밖에서는 ‘페미니즘의 기수’로 불렸던 그녀이지만 페미니즘 업계(여성학회) 내부에서는 비판의 화살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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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면 내성적으로 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 즉, 하루키는 마리화나 같은 효과를 준다. 반면에 무라카미 류를 읽으면 강렬한 쾌락을 느낀다. 즉, 류는 각성제라고 할 수 있다’라는 시시하지만 대중에게는 잘 먹힐 만한 코멘트가 실려 있길래 대체 누가 한 말인가 하고 보니 ‘작가 가메와다 다케시’라고 쓰여 있어서 놀랐다. _가메와다 다케시, 「하루키가 대마라면 류는 각성제」, 『쓰쿠루(創)』, 1989년 3월호

류 씨의 책에는 남자들만이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고 하죠. 그런데 여자들은 그것을 지저분하다고 느껴요. (…) 류 씨의 이미지는 우선 폭력적. 느끼하고 동물적. 무섭다. 하지만 하루키 씨는 식물적이고 갑자기 달려들지도 않아요. _무레 요코, 「동물적인 무라카미 류와 식물적인 무라카미 하루키」, 『분게이슌주』, 199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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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은 경제 성장을 목표로 달려왔습니다. 그것을 전제로 개인의 정체성도 형성되어왔지요.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출세의 인생 게임’이었는지도,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회 변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1970년대까지는 효력을 발휘했던 그런 ‘이야기’들은 1980년대 들어 급속히 리얼리티를 잃게 됩니다.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가면서 자신이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하는가, 무엇을 보람으로 삼아 살아야 하는가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 체계가 흔들리면 문학도 사상도 교양도 흔들리게 됩니다. 그 틈을 메꾸는 형태등장한 것이 1980년대의 ‘문단 아이돌’이 아니었을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비평의 오타쿠화, 게임화를 부추겼고 다와라 마치와 요시모토 바나나는 그때까지 ‘여자아이 전용’이었던 J포엠과 소녀 문학의 흐름을 문학계의 공식 무대에 올림으로써 여자아이들의 문화를 경시했던 ‘문단 마을의 아저씨’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습니다.1980년대에 일시적으로 페미니즘의 기세가 높아진 것도 어쩌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가시적 계층(포스트 계급?)으로서 남녀 간의 격차가 ‘발견’된 탓인지도 모릅니다. 따지고 보면 하야시 마리코와 우에노 지즈코는 고도 경제 성장기의 남성 역할을 몸소 실천했던 존재였습니다. 출세 인생 게임 vs 사회 변혁. 체제파 vs 반체제파. 대중 vs 지식인.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파워풀한 데다 노악(露惡) 취미가 있습니다. 많은 여자들을 격려하는 한편 반감도 샀던 까닭은 한 시대 전의 남성 캐리커처를 여성이 연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 작가와 엘리트 여성학자 대결 구도로 하야시 마리코와 우에노 지즈코가 비교되었듯이 동물성과 식물성의 대결 구도로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비교되는 건 그들이 동시대에 활동했기에 더 재밌는 관전 포인트다. 이 책에서 인용된 당시 두 명의 무라카미 비교론은 너무나 단순한 논리임에도 정말 재밌다ㅎ. 이건 한국 문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에도 김금희 vs 최은영 라이벌전 을 만드는 걸 나는 똑똑이 보았으니까. 왜? 그들을 아이돌로 만드는 독자와 문단의 합작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는 현상이다. 여기서 미나코는 허점을 콕 찌른다. 비슷한 시기에 베스트셀러로 인기 절정이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는 서로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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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를 에일리언이라고 한 이유는 그녀가 ‘여자아이의 나라’에서 ‘남자 어른의 나라’로 넘어온 요술공주 샐리였기 때문입니다. 소녀 대상 문학계(여자아이의 나라)에서는 당연한 것들이 문학계(남자 어른의 나라)에서는 강력한 파워를 발휘합니다. ‘마하리쿠 마하리타!’ 소녀 문학계의 주문을 거는 순간 일제히 쓰러져간 어른 인텔리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간텍스트성’에 쏟았던 열정의 10분의 1만이라도 요시모토 바나나에게 쏟았다면, 아니, 근대 저변에 흐르는 소녀 문화라는 지하 수맥을 눈치챌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멍청한, 아니 고매한 ‘분석’으로 칠전팔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작품의 질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 인식 속에 묘한 차별이 있는 것 아니었냐는 페미니즘적 지적이다. 신빙성은 있지 않나?

다시 나의 관심사로 돌아와서, 1991년 걸프전쟁 이후 공통적으로 전쟁이라는 주제를 다룬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무라카미 류 『5분 후의 세계』를 비교하고도 싶은데 한국에서의 아이돌 저력도 하루키가 승자라 『5분 후의 세계』 책이 없어 읽을 수 없는 게 조금 아쉽다. 일본어 공부를 해서 원서로 읽으라고요? 읽어야 될 아이돌이 어찌나 많은지 그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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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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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라는 시어를 보면 나는 이성복 시인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단연 돋보이는 시어가 아니었던가.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그해 가을」, 「1959년」 등등. 이성복의 ‘그해’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그날」)아하는 삶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정확한 지점이 있었다. 이제 '그해'는 박준으로 더 기억되는 시대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박준의 ‘그해’는 미인과 관련된 지극히 개인적인 시공간에만 쓰인다. 시공간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없음’의 지대다. 미인이 영영 떠나 화답을 바랄 수 없는 화자가 추도 연서(戀書)를 보내는 제사(祭祀)의 영역이다. 있었던 일이었지만 결코 완료는 되지 않을 것이기에 좋았었다고 말하지 않고 ‘좋았을’(「마음, 고개」, 「가을의 제사」)이라 말하고, ‘좋을’-‘들어가고 있을’-‘도착했을’-‘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숲」) 것이라는 가정 시제가 계속 등장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물건을 새로 뜯지 못하는”(「잠의 살은 차갑다」) 버릇이 몸가짐처럼 되었다 말하듯이 죽음과 깊은 상실을 복기하는 특성은 박준의 독특한 시적 정황이 되었다. 그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읽은 독자라면 더 잘 이해할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이 나오기 전에 나왔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산문집에서도 느꼈지만 그 특성은 이제 바깥을 보듬는 힘으로 더 넓어졌다. 가족부터 마을 사람들까지 두루 살피며 음식을 나눠 먹는 풍경이나 '새끼 거미'(백석「수라(修羅)」)가 가족을 잃을까 염려하던 백석 같은 그런 마음 말이다. “괜찮아져라 괜찮아져라”(「안과 밖」), “쌀은 평소보다 조금만 씻습니다”(「좋은 세상」-영아)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말이 박준의 시에서는 빛이 난다. 그는 어떤 빚이 있어 이런 빛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이 비슷한 상황을 우린 레이먼드 카버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도 만난 적 있다.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빵집 주인이 따뜻한 롤빵을 건넸고 그들이 그것을 먹으며 잠시나마 기운을 차리던 것을. 백석, 허수경, 박준이 시에서 건네는 음식 풍경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면서도 주변과 읽는 이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과잉된 내적 발화와 온갖 작법의 실험으로 가득한 작금의 시들 속에 박준의 시가 이렇듯 인기를 끄는 것은 자신과 주변을 동등이 그리고 잔잔히 살피는 이 마음 씀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말을 하고 있음에도 박준의 시에서는 들으려는 귀가 더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인 거 같다. 그가 쓰는 형용사와 부사만 봐도 늘 대상을 더 살핀다. “불을 피우기 미안한(형용사) 저녁이 삼월에는”(「삼월의 나무」), “겨우(부사)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이 새로 오고”(「84p」), “가. 그냥 가지 말고 잘(부사) 가.”(「사월의 잠」) 등등. 읽은 이를 놀라게 하고 뽐내며 이기려고만 드는 멋진 수사와 문장들은 사실 읽는 이에게 스트레스다. 세상과 문제점을 비판하긴 쉽지만 편안히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문장이야말로 한 수 위다. 이것은 어떤 시적 기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다. 이것은 몸가짐이고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배운다고 하고자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럴 수 있기까지의 시간과 경험을 모두 똑같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에게 시에게 요구만 할 게 아니라 시를 문장을 읽는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 좀 해보자. 시에 놀라운 발견과 전이(轉移)만 요구할 것도 아니고, 공감을 채워주는 서정만 바랄 것도 아니다. 혼잣말을 출판까지 할 이유가 없는 이상 시도 근본적으로 상대에게 전하는 말이다. 죽은 이에게 더 공손하듯 편지로써 더 공손하듯 시에서 시를 통해 더 그러하려는 박준은 한국시에서 귀한 미인(美人)이다. 자신의 말이 진정 바라는 사람됨을 전하고 있는지 마음을 담고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좋은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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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12-23 22:24   좋아요 0 | URL
남들보기에 제가 좀 오락가락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요ㅎ;; 어떨 땐 어려워도 매우 좋은 책이 있고, 어떨 땐 남들은 별 매력 못느끼는 평범한 책이 매우 좋을 때가 있어요^^; 제 감상을 적어나가며 나는 이런 게 좋았구나 정리하는 거지 제가 누굴 평가하고 요구할 만한 대단한 능력자는 아니죠;;;
응원 늘 감사하고 따뜻한 겨울되세요^^♧

서니데이 2018-12-19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AgalmA 2018-12-23 22: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당연히 서재의 달인이실 테죠.
서재 활동을 부지런히 못해 여러가지로 소원했는데 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12-20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3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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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의 링컨은 중의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열한 살에 사망한 소년 윌리 링컨의 영혼과 많은 사람들을 남북전쟁의 죽음으로 인도하는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소년의 장례식 하룻밤에 머문 묘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에 바르도의 윌리 링컨’, ‘두 바르도에 있는 두 링컨등 여러 가지 해석거리들이 나온다.
티베트 불교 용어인 바르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죽음과 연옥의 상황을 다룬다는 걸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 바르도는 핵심 용어인데, 바르도는 티베트에서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물게 되는 중간상태를 일컫는다. 이 책은 사후세계에서 환생하기까지 49일간 머무르는 영혼을 인도하는 절차와 영혼이 취해야 할 방법을 담고 있다. 그래서 죽은 자들 옆에서 그들이 좋은 길로 갈 수 있게 이 책의 게송을 계속 들려준다.
(참고로 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채 사장이 이 책을 아주 좋아했죠ㅎㅎ;)
 
이 책에 대한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단테적인 미국판 유령 발라드평가에 동감이다. ‘바르도란 단어가 강력하지만 이 소설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바르도의 링컨에 대한 영향력은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더 강하다. 아마 바르도의 링컨에 대한 호불호도 그런 유사성에 기인할 것이다. 고전 서사시의 운문 형식으로 인해 낯설고 불편한 가독성, 환상 소설 양식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가 공감하기 어려운 전개 방식,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르포적인 글이 아닌 영혼들의 카니발리즘이 더 조명되는 데서 오는 실망 등등. 신곡은 보르헤스가 책 얘기만 하면 꺼낼 정도로 평생 극찬했는데, 인간이 죽음과 미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는 한 이 책의 입지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 같다. 내가 신곡바르도의 링컨에서 느낀 유사점은 다음과 같다.
신곡은 단테가 42세이던 1307년경 쓰기 시작해 사망 직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열린책들 신곡해설에 따르면, 단테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자기 작품을 대비되는 <코메디아comedia(희극)>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분석하는 <비극>이 고상한 주제와 인물, 문체를 다루는 것과 대비되게 그는 저승 여행이라는 세속적인 주제를 다뤘고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냈기에 그렇다. 또 단테는 중세 유럽 문인들이 쓰던 고상한 라틴어 문체가 아니라 피렌체의 민중의 언어인 <속어(俗語)>로 작품을 썼다. 바르도의 링컨에 나오는 영혼들이 쓰는 많은 속어, 비속어들은 현장감을 살리면서 작품의 리듬을 한껏 살리고 있다. 신곡이 기하학적 치밀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조지 손더스도 바르도의 링컨에서 영혼들의 어지럽게 토해내는 지껄임(서사시의 코러스와 유사)과 쌍을 맞춰 현실 속에서도 그런 대비 쌍(신문 기사, 인터뷰 글, 에세이, 편지 등등)을 가져와 배치했다. 소설을 서사 구조로 읽는데 길들여진 독자는 이런 불협화음 같은 형식이 매우 불편할 것이다. 유령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 낯선 형식을 즐긴다면 이 소설 읽기가 더욱 풍부해질 텐데…….
1290년 스물네 살에 사망한 첫사랑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단테는 신곡에서 그녀를 천국으로의 안내자로 그린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가장 사랑한 아들인 윌리 링컨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총명한 아이였다. 영혼이 된 윌리는 묘지에서 비루하게 머물고 있는 영혼들에게 우리는 모두 죽은 자들이며 죽음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가야 한다고 이끄는데 신곡에서 천국의 안내자였던 베아트리체 역할과 비슷하다. 윌리의 죽음은 아버지 링컨이 내전에 동원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심정을 제대로 통감하며 남북 전쟁의 대의를 재점검하는 계기로도 작동한다.
14세기 단테의 여러 상황이 19세기 초의 윌리 링컨과 에이브러햄 링컨과 오버랩되는 게 있어 흥미롭다. 윌리 링컨은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열병으로 사망했는데 단테는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열병으로 사망했다. 정치 생활에서도 단테와 에이브러햄은 어려운 처지였다. 단테는 피렌체 당파 싸움에 휘말려 정치적 망명을 해야 했고 평생 망명생활을 하면서 신곡을 썼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외모 폄하, 정치적 암투, 이해받지 못하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여러 상황에 대해 이 소설은 빠르게 전달한다. 윌리 링컨이 병에 걸렸을 때 공식 만찬을 열었던 것도 심한 조롱거리가 되었다. 가장 심한 것은 워싱턴의 갭 앤드 주스트라는 쓰레기 신문에 만화가 실렸는데, 링컨 부부는 샴페인 잔을 들이켜고 소년(눈 대신 작은 X자가 그려져 있었다)은 열린 무덤 안으로 들어가며 아버지, 나를 보내며 한 잔?”하고 묻는 내용이었다.”(p345) 어린 윌리가 사망한 즈음 북군의 사상자가 최대였던 도널슨 전투 사상자 명단이 발표되면서 여론은 매우 좋지 않았다. 작가는 당시 링컨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그린다.
 

이 아이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그런데도 그 무게 때문에 내가 곧 죽을 것 같아.
이런 슬픔을 밖으로 밀어냈어. 한 삼천 번쯤. 지금까지. 오늘까지. 산더미. 같은 아이들. 누군가의 아이들. 그걸 계속해야 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지도 몰라.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라면 레버를 당길 수도 있지. 하지만 여기 내가 만들어낸 것의 한 소중한 예가 있잖아, 내 명령으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지도 몰라.
어떻게 하나. 중지시켜? 그 삼천 명을 손실 구덩이로 던져 넣어? 그러고서 평화를 간청해? 항로를 거슬러올라가는 위대한 바보, 우유부단한 왕, 영원한 웃음거리, 엉거주춤한 시골뜨기, 교활한 변절자가 돼?
이건 통제 불능이야. 누가 이걸 하고 있는 거야. 누가 그 원인이야. 누가 나타나서 이게 시작된 거야.
나는 뭘 하고 있지.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지.”(p221)

죽음 이후의 모습을 다루는 신곡바르도의 링컨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떤 식으로 지상을 마무리하며 떠나는지를 상상력으로 채워야 했기에 그 묘사에서 대단한 독창성을 발휘한다. 단테와 조지 손더스의 차이는 인물들에서 극명하다. 단테 신곡이 여행자가 관찰하는 영혼으로 소극적으로 묘사했다면, 조지 손더스 소설의 영혼들은 이 소설의 첫 시작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소설을 가득 채울 만큼 능동적이다바르도의 영혼들은 가톨릭이 연옥에 머무는 이유를 가리키는 일곱 가지 대죄인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방탕이라는 고전적 이유를 초과한다. 대부분 자신의 죽음과 죄를 인정하지 못하는 미련과 혼란 상태다. 흑인이라서 숱한 강간을 당했던 소녀에게 어떤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죽어서까지 흑인과 백인으로 나뉘어 차별하는 상황이라면 죽음과 현실이 뭐가 다를까.
바르도는 종교적이지만 조지 손더스는 영혼들을 죄인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동등한 인간이었다. 그 중 로저 베빈스 3세와 한스 볼먼의 캐릭터 설정이 특히 맘에 들었다. 그들의 독특한 외양, 윌리 링컨이 이곳에서 고통받지 않게 도우려는 행동, 선행 뒤의 변화 등이 영화 장면처럼 그려지는데 이 소설에서 재밌는 장면들은 대개 이들에게서 나온다. 청렴하게 살았을 애벌리 토머스 목사가 왜 연옥에 머물러야 했는지 그 비밀을 추측해보는 것도 재밌는 설정이다. 영혼들이 그들에게는 불길하게 나타나는 빛, 그들에게는 악마인지 천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존재들의 영향으로 바르도를 떠나는 상황, 이곳에 머물며 파괴되어가는 모습 등은 현실 속 삶의 모습만큼 다양하고 절절하다.
 

"사실, 우리는 지루했죠, 아주 지루했죠, 계속 지루했죠." - 로저 베빈스 3세
"매일 밤이 참담하게도 똑같이 지나갔습니다." - 한스 볼먼
"우리는 그때까지 모든 나무의 모든 가지에 앉아봤어요. 모든 묘석을 읽고 또 읽었어요. 모든 길, 소로, 잡초가 우거진 길을 걸어봤고(달려봤고, 기어봤고, 거기 누워봤고), 모든 내를 건너봤어요 이곳의 네 가지 독특한 유형의 토양의 결이나 맛에 대한 포괄적 지식을 갖추게 되었어요. 우리 동포의 모든 머리 모양, 복장, 머리핀, 시곗줄, 양말, 멜빵, 허리띠의 철저한 물품 명세를 만들었어요. 나는 볼먼 씨 이야기를 수천 번은 들었고, 안됐지만, 나 자신의 이야기도 적어도 그만큼은 했어요." - 로저 베빈스 3세
(p178)

 

이 소설의 출발은 한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죽은 아들의 납골당에 자주 찾아가 그 주검을 안아주었다는 기사를 지인이 조지 손더스에게 전하는 순간 그는 링컨 기념관의 링컨 좌상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합쳐진 이미지를 떠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이미지는 구도 상으로 매우 흡사하다. 링컨 부자의 숭고한 모습은 소설 속에서 유령들을 깨우고 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유령들이 몰려드는 이야기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윌리와 에이브러햄 링컨은 서로를 결코 느끼지 못한 채 이야기는 끝난다. 두 사람을 통해 많은 유령들이 죽고 살 의지를 가졌던 것과 달리. 삶과 바르도는 구조만큼 복잡하고 이상한 겹침의 미로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먼 길을 선택하면서도 어떤 존재로 있든 삶을 갈망하고 사랑하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향하는 방향이 죽음인지 삶인지 제3의 길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4세기에 단테가 그랬고 21세기 조지 손더스가 그렇듯 우리는 끝없이 이것을 이야기한다. 이 모든 건 우리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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