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이랑 딱 맞는 문장! 역시 우리는 통해!
샹탈 : 음악이 문학적 창작의 일부분이라는 건가요?
파스칼 : 그건 모르겠습니다. 둘이 나뉘는 게 아니에요. 방금 표현하신 창작자 혹은 창조자는 이 창작이라는 의미를 의식하면 안 돼요. 오히려 허튼소리, 어리석은 말, 스스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착란 들이라고 말해야 할 겁니다. 그런 창조가 내 눈 밑에 어떤 매개체처럼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으니까요. 창조요? 전 그걸 한 번도 못 봤어요.
샹탈: 『음악의 증오』에서 "음악의 비밀스러운 기능은 소환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음악은 죽음 속으로 끌어들이는 미끼"라고도 하셨어요. 그러나 그건 또 『음악 수업La Leçon de musique』에서 옹호하신 것처럼 일종의 본국 송환, 복구, 수리 같은 거 아닙니까?
파스칼: 맞습니다! 두 책은 은근히 모순적이에요. 음악이 쉴 깊은 침대를 파다 보니 써진 책입니다. 음악과 언어의 상류에서, 그러니까 두 가지가 분화되기 이전에, 운문으로 쓰인 신화에 대한 기억이 탄생하기 이전에, 신들린 상태와 희생제 의식을 구분하는 춤이 탄생하기 이전에 언어는 순수 상태로 유인하는 미끼였죠. 음악-노래-언어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무엇을 위한 미끼입니다.
샹탈: 당신에게 음악과 침묵은 어떤 관계인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파스칼: 침묵은 음악보다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언어보다 앞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침묵은 그것들에 드리워진 그림자입니다. 하나의 음계를 만드는 데 있어 고유한 음이 없듯이, 알파벳을 만드는 데에도 고유한 자음과 모음은 없습니다. 그것들에 선행하는 침묵 없이는요. 이 침묵이 반양립적인, 융합적인 매개물을 침묵하게 만듭니다. 옛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카오스라 불렀습니다. 신플라톤주의자와 조르주 바타유는 그것을 연속성이라 불렀습니다. 중세 서양의 기보 음악은 실레테silete를 동시에 고안해냈습니다. 실레테란 '침묵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개시되면서 연속선이 끊어집니다. 홍해가 둘로 갈라집니다. 그러면서 심장 한복판에서 (음악가들이 흔히 빈 마디라고 하는) 엇박자를 내듯 시간이 빠지고, 그러면서 숭고한 아타카를 던집니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숭고한 늘임표 같은 피날레가 옵니다. 죽음이 성의 분화에 거의 맞닿아 있듯이, 침묵은 음악과 맞닿아 있습니다.
ㅡ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 《파스칼 키냐르의 말》
키냐르의 말은 부유하는 듯하지만 언제나 악기들의 팽팽한 활 같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로 ‘소환’적이고 늘 ‘복귀’를 향하며 독자에게 던지는 ‘미끼’이다. 나는 환희에 차서 언제나 덥석 문다.
요 며칠 읽고 읽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사고의 본질》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에서 논하던 언어의 속성을 떠올리며 이 불협에 심란해진다.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지속적인 범주화 덕분에 인지가 이루어지며, 모든 인지의 토대에는 (모든 것을 고정되고 엄격한 정신적 상자 안에 넣으려는) 분류와 달리 놀라운 유연성으로 사고를 가능케 하는 유추 작용을 통한 범주화라는 현상이 있다.
우리는 유추 작용을 통한 범주화 덕분에 유사성을 포착하고 새롭고 낯선 것에 대응하기 위해 그 유사성을 활용하는 능력을 얻는다. 또한 새롭게 접한 상황을 오래전에 접했으며 부호화되어 있고 기억 속에 저장된 다른 상황에 접목함으로써, 이전 경험을 활용하여 현재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유추 작용은 두뇌가 지닌 이런 능력의 초석으로서, 무작위로 예를 들자면 개, 고양이, 기쁨, 체념, 모순처럼 라벨이 붙은 개념뿐만 아니라 “그때 나는 뜻하지 않게 문이 꽝 닫히면서 살을 에는 듯한 날씨 속에 집 밖에 남겨지게 되었다”처럼 라벨이 붙지 않은 개념까지, 과거에 뿌리를 둔 풍부한 지혜의 창고를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간에 이런 개념은 매 순간 선택적으로, 거의 언제나 자각 없이 동원되며, 이 쉼 없는 활동이 우리가 처한 상황의 정신적 표상을 구축하여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고차원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어떤 사고도 과거의 정보 없이 형성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오직 현재와 과거를 잇는 유추 덕분에 생각할 수 있다."
ㅡ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사고의 본질》
호프스태터 & 상데, 월리스는 기본적으로 언어 문법이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촘스키 “보편 문법”을 따른다. 그들은 규칙과 질서로 세계를 재구성한다. 키냐르는 좀 다르다. 그가 언어와 음악의 중추라고 생각하고 강조하는 것은 카오스적인 “침묵”이다. 앞선 이들처럼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키냐르가 인터뷰에서 말하는 것은 “유추”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그렇듯 비밀로 감싼다. 어찌 보면 그가 어릴 때 음식을 거부했듯 극도의 거부 반응처럼 느껴진다.
상탈: "우리가 어떤 것을 말할 때, 화가가 어떤 것을 말할 때, 음악가가 어떤 것을 말할 때, 그것을 알지 못한다. 베르크하임 같은 도시가 쾰른이라 불리는 또 다른 도시와 지척임을 알고 나서, 당신의 아이를 키운 여인이 바로 거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순간 대단히 이례적이게도, 극히 사적인 어떤 영역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 순간은 언어에 선행했던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비로소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이며 그때 이뤄져서는 안 될 어떤 것이 내게 이뤄진 것 같아 보인다"라고 당신은 로익 주르댕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좀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파스칼: 글쎄요, 직접적으로는…… 자기 고유의 광기에 대해서는 기만할 수밖에 없지요.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요…….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살았습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울부짖습니다. 다른 자들의 입술 위에 있던 국어를 배우기 이전의 외침, 누더기 같은 목소리 조각들이랄까요? 다른 자들의 입술 위에 있던 그 언어에 압도당해 무너지면서 이른바 언어의 습득이 시작됩니다. 서서히 안에서 모음을 발성하게 되고, 그게 군群을 이루면서 말을 하게 됩니다. 간헐적인 메아리 현상처럼요. 우린 그걸 의식이라고 부르지만 타자의 소리가 반향되는 겁니다. 획득 언어, 사회 언어는 우리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이어 그다음은 해선 안 됩니다. 이건 세상에 있는 그 누구와도 상관없습니다. 선행했던 야만성과 세계의 재판정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길들이기는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약, 코나투스conatus, 오렉Orexis 같은 것이 그 자체로 역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명명되어서는 안 됩니다.
ㅡ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 《파스칼 키냐르의 말》
키냐르의 단호함. “의식은 획득 언어의 메아리 방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언어적으로 구축된 가공물”이자 “언어를 통한 재번역에 따라 완전히 변하는 오열”이자 “징후”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감동적인 수사이지만 단순하게 보면 행동주의 심리학처럼 냉정하다. 그래서 그의 사유를 내가 더 좋아한 건지도 모르지만, 종국의 관점에 대해서 지금의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 같다. 나는 계속 언어를 좇는다. 이번 생에서만 하고 두 번 다시 안 하고 싶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