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의미 아닌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레이트
헝거로 세팅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 단편에 없는 이야기를 더 추가해 메타포를 더욱 부각했다. 세상의 끝 이를테면
아프리카까지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 해미는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을 만나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얘기를 듣는다. 단순히 배가 고픈 자를
리틀 헝거,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를 그레이트 헝거라 칭한다. 앞으로 팔을 뻗어 춤추는 리틀 헝거는 무아지경 (삶의) 춤 속에 점점 팔을 위로
쳐드는 그레이트 헝거로 변모한다. 그레이트 헝거가 리틀 헝거가 되는 역방향도 분명 있겠지. 그러나 그것을 참을 수 있을까.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종수의 아버지는 그 역방향의 말로 중 하나다. 아내가 아이들을 두고 도망가게 만들고,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한다.
급기야 그는 감옥까지 가고 만다. 그에게 늘 의미는 자존심이었고 이제 금고에 꼭꼭 숨겨둔 수집 칼 정도로 남아있다.
해미가 배우는
팬터마임도 하나의 의미 게임이다.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된다고 말하며 그녀는 허공에서
귤을 깐다. 하지만 그 말은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는 차마 없다고 생각할 수 없기에 거기 무엇이 있다고 지독히 생각한다. 공상허언증자들은
자신의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쉽게 믿도록 만든다. 종수는 해미로부터 전혀 모르는 기억들을 전해 듣는다. 학교 다닐 때
그가 해미에게 못생겼다고 한 게 유일한 말이었다는 것, 어렸을 때 해미가 우물에 빠진 걸 발견한 자신이 그녀를 구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는 소릴 듣고
어느 틈엔가 믿는다. 그녀의 말은 교묘했다. 죄책감을 유발하거나 구원자의 이미지를 씌워 상대를 옭아매는 강력한 언술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언어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자다. 문창과를 나오고도 어떤 소설을 써야 될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거짓이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는 그 속에 조금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해미는 아프리카
사막의 노을을 보며 죽는 건 무섭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종수는 그 말과 의미를 깊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의미는 그렇게 쉽게 종결되지 않는다. 성냥불을 긋듯 냉정한 한 마디가 날아온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은 그녀의 눈물을 보며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벤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위대한 개츠비가 그러했듯 비밀스럽게 살며 다른 사람의
의미를 하품하며 감상하는 자, 요리를 스스로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하며 즐기는 자,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2달에 한 번씩 의식처럼 태우는 자.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벗어난 그는 있다 와 없다 사이의 의미망과 다른 의미망이 있다.
*
“그게
불필요한 건지 어떤지는 자네가 판단하는 거군.”
“저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그곳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비와 같은 거죠. 비가 온다. 강이 넘친다. 무언가가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합니까? 보세요. 저는 절대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전 저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시
존재?”
“즉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는 도쿄에도 있고, 동시에 튀니스에도 있다. 야단치는 것도 저고, 용서하는 것도
접니다. 이를테면 그런 겁니다. 그런 균형이 있는 거죠. 그런 균형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물림쇠 같은 겁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스르르 풀어져서 말 그대로 조각조각 날 겁니다.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시 존재가 가능해지죠.”
ㅡ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중
윌리엄 포크너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를 읽고...
짐작대로 이창동 《버닝》의 아버지(분노 조절 장애, 남부의 가난한 소작농, 군인 전력, 폭력적인 남성성)는 포크너에게서 가져온 것이었다. 중요한 건 이 시대 기성세대 한국 남성과 왜 이다지도 비슷한가 하는 점이다. 그 원인을 본성이냐 쉽게 변하지 않는 가부장제 환경이냐 분리해서 보기보다 차라리 그 다일 것이다. 이창동이 포크너의 큰 테두리에서 디테일에서는 하루키를 가져오고 마지막에 자신의 화룡점정을 찍었듯이.
불은 다 타오르면 사라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혹은 무심히 타오르고 있는가. 그 심지가 우리 욕망이라는 게 가장 어려운 문제겠지. 자신마저 제어할 수 없는 고통. 일그러지며 타오르는 불길. 죽음조차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욕망의 손아귀에서 굴려지는 주사위라는 게 끔찍하긴 하지. 불로불사에 대한 염원, 살인, 사형, 자살의 선택권을 생각해보라. 즉 착각하지 말자. 자연스러운 건 없다. 현상, 현상의 종합은 결론이 아니다. 결론은 우리 머릿속에나 있다. 꿈이나 환상, 이야기로 덮어버릴 수 없는 본질적인 의문이 항상 남는 재 속을 우리는 들여다본다. 우리는 불길이 아니라 재 위를 걷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