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語文論說]

文字 選擇의 基準

李炳銑(釜山大 名譽敎授)


  只今 우리는 한글專用이냐 漢字 混用이냐 하는 重大한 갈림길에 놓여 있다. 新聞 ․ 雜誌 ․ TV의 字幕에서는 勿論 學術 論著에서도 젊은 讀者層에 맞추어 거의 한글을 專用하고 있다. 어려운 漢字는 括弧 안에 넣고 있으나 漢字를 모르는 讀者들에게는 無意味하다. 또 大學마다 先學들이 애써 쓴 山積한 書籍을 學生들이 읽지 못하고, 할아비[祖]가 쓴 冊을 孫子가 읽지 못한다. 이는 學問의 斷絶과 世代間의 斷絶을 招來한다. 우리는 왜 이와 같은 슬프고도 不幸한 일을 해야 하는가?

  한글을 專用해야 할 理由로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우며, 또 우리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쉬운 것이 能事가 아니니, 이것이 文字 選擇의 基準이 될 수 없다. 한글專用이냐 漢字 混用이냐 하는 選擇의 基準은 첫째, 兩者 中 어느 것이 視覺上으로 읽기가 쉽고 思考를 돕느냐 하는, 文字生活의 效率性에 比重을 두어야 하며 둘째, 말(낱말 ․ 語彙)의 槪念 形成과 縮約性 ․ 造語力 等 言語의 經濟性에 무게를 두어야 하며 셋째, 傳統文化의 繼承과 넷째, 漢字文化圈의 여러 나라들과의 連帶를 생각해야 한다.

  위 첫째 基準에 있어서, 漢字는 視覺性이 있어서 읽기가 便利하다. 또 表意性이 있어서 思考를 도우며, 表音文字인 한글보다 뜻을 생각하며 글을 읽을 수 있다. 한글은 制字上으로는 매우 科學的이기는 하나, 글字의 꼴이 비슷하여 英語의 大文字와 같이 읽기가 不便하다. 한글專用의 글은 한 字 한 字를 같은 速度(템포)로 읽어야 하나, 漢字 混用의 글은 몇 字 或은 몇 낱말이 한눈에 들어오며 뜻도 쉽게 理解된다. 1970年代에 全國圖書館協會에서 調査한 바에 依하면, 圖書館 利用者의 84%가 漢字 混用의 글이 讀書의 能率을 높인다고 하였다. 國語의 文章은 名詞와 動詞 ․ 形容詞로 된 意味部와 이에 助詞 ․ 接尾辭 等이 添加된 形態部로 構成되었는데, 漢字語로 된 意味部는 漢字로 表記하고 形態部는 한글로 表記함이 바람직하다. 다만 生活에 익은 말은 한글로 表記해도 좋으나, 한 줄[行]에 漢字가 몇 字씩 섞여 있는 것이 읽기가 便하다. 이와 같은 表記方法은 新羅人의 文字生活에서도 볼 수 있다. 卽 鄕歌(慕竹旨郞歌)의 “去隱春皆理米”(가는 봄 그리매‘慕’)에서 가[去]와 봄[春]은 漢字의 訓으로 表記하였고, “毛冬去叱沙哭屋尸以憂音”(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구나)에서 시름[憂音]도 ‘근심 우(憂)’ 字를 借用하였다. 日本人들은 漢字 한 字를 읽는 데 걸리는 時間이 1千分의 1秒 以下라고 한다. 우리는 아직 이러한 報告가 없으나, 假令 한글 한 字를 읽는 데 1千分의 1秒가 걸린다고 하더라도 한글에는 뜻이 없다.

  言語는 소리[音聲]와 뜻[槪念]으로 이루어진 生命體이다. 그 中 어느 것이 不分明하여서는 生命力을 잃는다. 言語는 時代의 變化에 따라서 生成하고 消滅하는데, 하나의 말에 槪念이 形成되는 데는 經驗이나 敎育 等 時間이 걸린다. 아래와 같은 우리 文化의 基盤을 이루는 漢字語를 漢字로 表記하면 先驗的 知識이 없어도 그 뜻을 쉽게 理解할 수 있고, 또 槪念이 形成되는 데 걸리는 時間이 節約된다. 食藥廳 ․ 行自部 ․ 勞使政 ․ 聯政 等 機構名과 政治 用語, 抗訴審 ․ 損賠訴 ․ 言渡 等 法律 用語, 自社株 ․ 船團式 經營 ․ 産業 空洞化 等 經濟 用語, 無敵艦隊 ․ 地對艦 미사일 ․ 鶴翼陣 等 軍事 用語, 有實樹 ․ 水耕栽培 ․ 天日鹽 等 農 ․ 水産 用語, 骨多孔症 ․ 血糖 ․ 中耳炎 等 醫學 用語, 脫亞入歐 ․ 遠交近攻 等 政策上의 用語, 易地思之 ․ 事必歸正 等 四字成語. 이를 한글로 表記하여서는 읽어도 뜻을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 이는 生命力을 잃은 것이다.

  오늘날의 文字生活에서 努力의 經濟를 爲해 말을 줄여 쓰는 일이 많다. 建交部(건설교통부) ․ 終土稅(종합토지세) ․ 安保理(안전보장이사회) 等은 그러한 例이다. 이러한 말도 漢字로 表記하는 것이 理解를 돕는다. 漢字는 글字마다 뜻을 가지는 字素文字로서 造語力이 豊富하다. 卽 守成 ․ 守備 ․ 守舊 ․ 守己…, 城門 ․ 城山 ․ 城主 ․ 城域…과 같이 쉽게 말을 만들 수 있다. 이와 같은 有緣性으로 漢字 二千字로 워드프로세서(打字機)에서 약 五萬 個의 말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造語上의 經濟를 생각해야 하며, 또 言衆들의 語彙數를 늘리도록 해야 한다. 漢字語에는 多樣한 思想이 담겨 있다. 語彙가 不足하여서는 未開民族으로 轉落한다.

  셋째 ․ 넷째 基準에 對하여서는 說明을 要하지 않는다. 한글이 우리글이니까 하는 우리의 主體性을 말함을 본다. 그러나 歐羅巴 各國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로마字는, 元來 라틴語를 表記하기 爲하여 로마時代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文字란 國籍을 따질 것 없이 自國의 말을 便利하게 적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宗敎가 그의 國籍을 따지지 않는 것과 비교된다. 漢字는 二千年 동안이나 우리 祖上들이 써 온 文字로서, 漢字語는 우리 文化의 中心部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漢字를 굳이 中國의 글字라 하여 排斥함은 閉鎖的이고 國粹主義的 思考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의 칼도 내 칼집에 들면 내 칼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글專用을 主張하는 사람들도 漢字를 배워만 놓으면 便利하다고 한다. 漢字가 어렵다고 하나, 마음만 먹으면 二千字 程度를 배우기란 큰 問題가 아니다. 1948年 한글 專用法이 制定되던 當時는 國民 一人當 GNP가 100弗도 못 되었다. 國民 95% 以上이 農民으로서, 이 法은 晝耕夜讀하던 時代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法은 오늘날의 狀況과 맞지 않으니 廢止되어야 한다.

  日本에서는 初等學校에서부터 漢字를 배워서 한平生 便利한 文字生活을 하고 있다. 이는 ‘先苦後樂’이다. 이에 比해 우리는 于先 便한 것을 좋아하여 ‘先樂後苦’를 하고 있다. 이러하여서는 日本에 더욱 落後될 것이다. 우리는 한글專用으로 漢盲者를 量産하여 漢字의 表意文字로서의 優秀性을 모르게 해 놓고― 漢字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게 해 놓고 한글專用으로 가고 있다. 이와 같은 政策은 하루빨리 바꾸어야 한다. 愛國과 文字의 機能을 混同해서는 안 된다. 漢字의 利點을 살려 國力을 키우는 것이 더 愛國하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語文生活> 通卷 第112號,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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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저술가 김용옥'에 대한 생각

오늘자 한겨레 책-지성 섹션의 '한국의 글쟁이들' 코너에서는 '동양철학 저술가 도올 김용옥씨'를 다루고 있다. 돌이켜보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민음사, 1985/ 통나무, 1987)와 <여자란 무엇인가>(통나무, 1989)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지 어즈버 20년이 넘었다. 하버드대 박사 출신으로 고려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이후로 언제나 화제와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이 지식인-저술가, 혹은 한 저작의 표현을 빌면 '우리시대의 문화무당'도 어느덧 세는 나이로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

 

 

 

 

그간에 출간한 저작목록을 일별하는 일이 곧 내가 살아온 지난 20년을 회고하는 것과 겹친다는 것은 '묘한 느낌'을 가져다준다(이미 '살아버린 세월'을 마주할 때의 느낌 말이다). 그의 파격의 지지자였으면서 한편으론 과장된/낭비된 언어들을 유감스러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비록 최근 몇 년간의 저작들을 나는 읽어보지 않았지만(하지만 그가 문화일보 기자시절 쓴 칼럼들을 나는 대부분 읽었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책들을 얼른 떠오르는 대로 나열하자면, 앞에서 꼽은 데뷔작들 외에 <절차탁마 대기만성>,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 그리고 화이트헤드 번역서인 <이성의 기능> 등을 더 얹어볼 수 있겠다. 그런 밑그림을 갖고서 한겨레의 기사를 부분적으로 다시 읽어본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저술가로서 도올이 거둔 대중적 성과는 일반인들의 예상 이상이다. 지금까지 모두 41종 52권을 펴냈고, 총 판매부수는 250만부를 넘겼다. 80년대 그의 이름을 알린 <여자란 무엇인가>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가 각각 40만부와 20만부, 방송강의로 화제가 된 <노자와 21세기>(전 3권)가 50만부 넘게 팔렸다. 이 밖에도 10만부를 넘긴 책이 여럿이다. 인문학자의 인문학책으로는 놀라운 수치다.

-그러나 저술가로서 그가 대단한 점은 판매부수보다도 20년 동안 활동을 계속해 온 생명력, 그리고 꾸준히 변화해온 데에 있다. <여자란…> <동양학…> 등 도올의 초기 책들은 인기는 높았지만 일반 교양서 차원이었다. 하지만 이후 도올의 책은 점점 그만의 사유를 담으며 일관성을 갖고 진화해갔다. 그의 관심은 동양철학에서 시작해 조선사상사를 훑은 뒤 동학과 개화기 독립운동사를 거쳐 최근에는 현대사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런 과정속에서 민족주의를 매개로 한반도와 민족문제를 다루며 고유의 목소리로 비전을 찾아가고 있다.

-그의 강점으로는 독자들의 반응이 크게 엇갈리는 ‘강력한 문체’가 꼽힌다. 단번에 써내려가는 집필 스타일이 더해져 흡인력이 더욱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도올의 글쓰기 스타일은 전형적인 ‘몰아쓰기’에 ‘일필휘지’형. 스스로 “나는 항상 글이 잘 써진다”며 “문장을 시작하면 글로 써달라고 아이디어들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을 쳐서 귀찮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체상의 강점은 바로 대중성이다. 도올의 글은 어려운 용어를 쓰지만 소화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이처럼 자기 사유를 알기 쉬운 대중적인 언어로 펼쳐보이는 학자는 무척 드물다(*도올을 학술적으로 비판하는 이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덕목이다). “저술의 기본 대상을 항상 25~35살로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에요. 어떻게 하면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끈을 놓치지 않느냐는 것이 내 삶에서 끊임없이 벌여야만 하는 사투라고 할 수 있지요.”

-저술가로서 도올의 최대 승부처는 바로 ‘시간과의 싸움’. 자신이 정말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자리가 아니면 참석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저술세계가 신이 되는 것, 원고를 쓰는 게 신에 대한 경배가 되는 것이 중요해요. 권력이나 명예도 저술을 위해서는 뭉개버릴 수 있다는 프라이드가 없으면 저술가가 못돼.” 이는 동시에 학자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학자는 곧 저술가에요. 궁극적으로 학자의 사명은 책을 쓰는 데 있지 강의하는 게 아니야. 그 시대에 결국 남는 것은 강의가 아니라 책이에요. 강의는 사람의 마음속에 남겠지만, 그건 듣는 이들이에게 밑거름을 주는 것이지 내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도올은 그러나 “프로 지식인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해본 사람은 상상 못한다”고 강조한다. 요즘에는 인문학의 위기가 겹쳐 더욱 상황이 어렵게 느껴진다고 한다. “사립대 교수 연봉이 한 7000만원쯤 될거에요. 내가 그 정도 벌려면 1만원짜리 책을 7만권을 팔아야 해요. 요새는 책이 안나가서 일반 교수들 정도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면 뭔가 끊임없이 지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야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인거지. 그나마 나는 방송하고 연계하는 등 새로운 방식을 개척해왔는데도 요즘에는 불가항력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가 저술만으로 먹고 살 수 있다면 방송은 안해도 되는 거에요.”

-그토록 ‘튀던’ 그도 이제 환갑을 앞두면서 바뀌는 듯하다. 요즘에는 특유의 ‘잘난척’과 ‘오버’, 그리고 ‘공격성’이 많이 덜해졌다는 평을 듣는다. “내가 지금 내 책을 봐도 과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걸 수용해준 사회에 감사해요. 사실 내가 그렇게 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나를 까대고 뭉개려는 인간들에 대해 ‘너희들이 그래도 도올은 사라질 수 없다’는 생명력을 보여주려는 과시이자 생명력의 표출이었어요. 이젠 정갈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그가 진화할 방향은 어느쪽일까? 분야로는 ‘현대사’, 구체적 주제로는 ‘재즈’와 ‘동학’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요즘 현대사를 다루는 것은 현대사에서 모든 학문이 출발해야겠다는 자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보고 이념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가 관찰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특히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동학이란 주제도 급해요. 동학의 마지막 세대들과의 작업이 필요한데 이젠 워낙 나이 드신 분들이어서…, 시간이 부족해요.”(구본준 기자)

06. 09. 22.

P.S.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들을 며칠 전에도 옮겨다놓은 바 있지만, 사실 그런 위기는 도올과 무관해 보인다. 적어도 그는 대학이나 국가에 자신의 학문을 의탁하거나 의존하지 않았기에. '프로 지식인' 혹은 '프로 저술가'의 곤난에 대해서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가 엄살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쨌거나 우리 현실의 삶과 학문을 '통섭'시키고자 부단히 애쓴, 드문 사례로 기억되어 마땅하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의 자기과시와 튀는 언변이 튀어보이지 않을 만큼 다양한 분야, 다양한 목소리의 '도올들', (그가 애용하는 표현을 가져오자면) '돌대가리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도들이여, 무소의 뿔처럼, 돌대가리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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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文隨想]

‘難易度’는 있어도 ‘高難易度’는 안 써

鄭龍起(前 <서울新聞>編輯委員)


  特히 只今으로부터 40年 後인 2046年은 大韓民國에서 한글專用 敎育을 始作한 지 100週年이 되는 해다. 現在와 같이 方向을 잃고 漂流하는 漢字敎育이 繼續되거나 그나마 中斷된다면 아마 그때쯤 우리 땅에서 漢字는 自然 消滅되고 자취를 찾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이 무렵 어느 시골 中學校 3學年쯤 되는 國語 時間을 想定해 보기로 한다.


敎師 : ‘조령모개’라는 것은 임금도 좋고 대통령도 좋고 하여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침에 이렇게 하라고 영을 내렸다가 저녁이 되자 아니다 저렇게 하라고 딴소리를 한다는 뜻, 한마디로 변덕을 부린다는 뜻이다.

學生 : 선생님 예, ‘조령모개’라카는 게 와 그런 뜻입니꺼? (이 선생님은 애당초 漢字를 배운 일이 없으니 ‘朝令暮改’라는 漢字를 구경한 일조차 없었다. 그러나 질문에 대답 안 할 수 없다.)

敎師 : 먼 옛날 우리 조상 때부터 그런 뜻으로 써 왔다. 조령모개.

學生 : 조상들은 와 그런 뜻으로 썼습니꺼?

敎師 : 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어? 조령모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아버지, 조령모개는 조령모개, 알간?


(以上은 月刊 <한글+漢字文化> 通卷 87號에 실린 金聲翰 님의 「第3의 機會」의 한 대목이다.)


  漢字 없는 時代 國語敎育 現場의 한 場面을 잘 描寫해 주고 있다. 敎師도 學生도 漢字를 모르니 ‘朝令暮改’의 質問에 對한 答辯이 神經質的이고 若干 强壓的이다. 하긴 더 以上 잘 說明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아버지가 아버지인 것처럼, 조령모개는 조령모개라니 참 답답하다. 全혀 知的이지 않다.

  이런 답답한 心情을 굳이 40年 後에서 찾아볼 것이 무어 있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데 當場 配達된(2006年 10月 11日) 한 朝刊 新聞 ‘讀者칼럼’ 「韓國語가 眞짜 어려운 言語인가?」에서 그 답답함을 또 接했다.


  얼마 전 미국 국무부가 전 세계에 파견된 외국어 보직자들이 사용하는 69개 언어를 난이도에 따라 ‘세계어, 고난이도어, 기타 언어, 초고난이도어’ 등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한국어는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 등과 함께 초고난이도 언어로 선정됐다. 우리말 가르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미약하나마 한국어의 세계화에 힘써 온 필자로서는 한국어가 초고난이도 언어에 선정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하략)


  以上 韓國語 專門家의 글이다. 韓國語가 ‘초고난이도 언어’라니 도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아주 어려운 言語라는 말인가, 아니면 매우 쉬운 言語라는 말인가. 앞뒤 文脈으로 미루어 韓國語가 中國語, 日本語, 아랍語와 함께 아주 어려운 ‘超高難度 言語’로 分類된 것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難易度’란 어려움[難]과 쉬움[易]의 程度를 헤아린다[度]는 뜻이다. ‘難易度’란 말은 있어도 ‘고난이도’ ‘초고난이도’란 말로는 안 쓴다. 그렇게 써서는 問題가 어렵다는 말인지 쉽다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修能考査 問題의 難易度 調節’ 하면 어려운 問題와 쉬운 問題를 고루 챙기겠다는 뜻의 말이 된다.

  ‘難度’는 어려운 程度를 말한다. ‘高難度’ ‘超高難度’로 말할 수 있다. 앞의 글 가운데 ‘69개 언어를 난이도에 따라’라는 表現은 맞다. 한데 “한국어는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와 함께 ‘초고난이도’ 언어로 선정됐다” 라는 表現은 語法에 안 맞는다. 美 國務府에서 韓國語가 배우기 어려운 言語 축에 分類됐다는 뜻이라면 ‘高難度語’ ‘超高難度語’라 말해야 한다.

  덧붙여 ‘선정됐다’라는 用言은 肯定的 意味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 用言에 ‘超高難度 言語’라는 否定的 意味가 强한 말이 오는 것은 共起制限이 되는 語塞한 말이 된다. 筆者 또한 新聞에서 韓國語를 바르게 쓰는 일을 平生의 業으로 삼았던 사람으로서 ‘초고난이도 언어로 선정됐다’는 文章에 어리둥절했다.

  都大體 어떤 좋은 條件이 ‘초고난이도 언어로 선정’되게 된 理由인지 알 수가 없다. 美國에서 英語를 基準으로 해서 볼 때 韓國語가 배우기 매우 어려운 言語라는 뜻의 말인 것만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초고난이도’가 아니라 ‘超高難度 言語로 分類됐다’ 또는 ‘屬했다’로 말해야 맞다.

  漢字를 안 쓰니 ‘초고난이도’인지 ‘超高難度’인지를 分揀 못하고 있다. 또 ‘分類됐다’ 또는 ‘屬했다’로 말해야 하는데, 漢字를 모르니 ‘分類’의 뜻도 ‘選定’의 뜻도 대충 類似語로 두루뭉술 넘어가고 있다.

  소쉬르가 말한 恣意性 單語는 어느 言語에나 그 言語의 基礎的 要素로 存在한다. 비, 물, 나무, 불, 밥, 손, 발, 다리, 길, 바위, 바다 等等 大槪 形態 單一語가 恣意性 單語에 屬한다. 이런 單語들은 듣는 瞬間 意味가 느낌으로 把握되는 自然言語로서 多分히 情意的인 面이 强한 말이다. 말의 뜻을 말처럼 비는 비, 나무는 나무, 바다는 바다로 認識한다.

  오늘날 韓國語는 한글專用으로 그 많은 漢字語가 恣意性的 單語로 變하고 있다. 假令 ‘조령모개’도 漢字를 알면 ‘아침 朝, 하여금 令, 저물 暮, 고칠 改’ 4個의 形態素로 이루어진 合成語인 것을, 漢字를 모르니 ‘朝令暮改’는 ‘조령모개’로 말해 意味를 條理 있게 說明하지 못한다. 漢字를 모르고 소리만 적으니 意味의 有繫性을 喪失하여 類似語가 氾濫한다. 意味의 外延이 넓고 明晳性이 不足하여 긴가민가하는 대충 느낌의 말이 된다. 이런 言語는 詩語로는 어떨지 모르나 學問의 言語, 매스컴의 言語로는 不適合하다.

  이러니 韓國語가 ‘초고난이도어로 선정되었다’해서 異常할 것이 없어 보인다. 漢字語를 한글로 表記함으로써 意味를 斟酌으로만 아는 言語, 읽기는 하되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全혀 知的이지 못한 言語, 自國民에게도 알기 어려운 ‘超高難度語’로 變해가고 있다. 한글專用이 가져온 韓國語의 오늘이다.

<語文生活> 通卷 第111號,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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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가는 인터넷 바둑 사이트가 있다. 요즘은 각종 온라인 게임들을 많이 즐기고 젊은 사람들이라면 그런 것 하나쯤 못 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게임에는 도통 재능이 없다. 조금 유별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온라인 게임은 이 바둑 뿐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내 주위에는 더더군다나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다. 그런 나에게 인터넷이란 매체는 바둑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해 주었다. 온라인 바둑 사이트에 적을 두고 여러해 접속하면서 온라인 상의 바둑 친구들을 많이 만난다. 오늘은 요 며칠 전 있었던 한 바둑 친구와의 씁쓸한 대화 몇 마디 소개하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대학의 조교이다 보니, 내 일은 아는 사람들은 곧잘 물어오는 것들이 있다. 대학 입학에 관한 것이라던지, 학과에 대한 질문들이다. 이 친구도 편입학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나에게 우리 대학으로의 편입학에 관한 일들을 물어왔다. 나는 그래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고, 그 친구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이 친구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주 망설이면서.

"대학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나요? 제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거든요. 화장실도 좀 문제고요."

나는 순간 말 문이 막혀 버렸다. 4층짜리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을 리 만무하고, 화장실에도 장애인 시설은 갖춰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고작 장애인 시설이라봐야, 건물 입구에 형식적으로 마련된 경사로와 주차장의 장애인 전용주차 구역 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그 친구에게 말하는 것이 다소 망설여졌다.

그러나 어쩔 수 있겠는가. "우리 학교에는 그러고 보니 그런 시설이 전혀 갖춰져 있질 않네."하고 말해 놓고는 안심이 되지 않아 이렇게 덧붙였다. "아니 어떻게 대학이라는 공간에 그런 기본적인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은지, 참 우리 학교가 너무 부끄럽다." 그 친구가 빈말처럼 느끼리라고 생각되었지만, 어느 정도 나의 진심이었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이 일이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대학을 고를때, 그 대학에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화장실에 어떤 시설들이 갖춰져 있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친구를 다른 무엇보다 이것이 대학진학에 있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아무리 좋은 조건과 시설을 갖추었다고 해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친구는 포기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우리 사회의 구조가 어디에 맞춰져 있는 것인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장애인에 비해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나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팅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이러한 구조는 소수자인 장애인의 차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누리는 이 사회는 기본적 혜택들이 그들의 피해를 담보로 제공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이것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난 무엇보다 이것을 고민해야 했다. 왜 그 친구는 나 같은 사람들이 대학 선택에서 고민하는 문제 외에도 그런 이상한, 어쩌면 문제가 될 만한 것 같지도 않은, 엘리베이터와 화장실을 가지고 고민해야 하는 걸까? 그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은 나의 고민을 하나도 덜어주지 못하는 답변이다.

나는 장애인들도 나와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대학선택을 고민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말도 안되는 문제들이 장애인들의 대학진학을 방해한다는 것은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무언가 잘못되다 한참 잘못 되었다.

한가지 더 고백할 것이 있다. 내가 이 대학을 횟수로 10년째 다니고 있지만, 아직까지 장애인들이 이 대학(단과대학)에 다닌다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안 뽑는다는 얘긴가? 하긴 장애인이 다니기에는 아무런 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장애인들 중에 이 대학(단과대학)에 오고싶어 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또 하나의 차별이다. 장애를 갖게 된 것도 억울한데, 남들보다 더 걱정하고 고민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일 가지고 자신의 진로를 포기해야만 하는, 이 사회는 분명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말하면서도 화가 나는 것은 그 친구에 대한 부끄러운 나의 마음을 숨기고자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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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5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언젠가 한겨레21에서 장애인들이 대학입학시 박대받는 걸 다룬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안된다고 말하는 학교도 있고, 한명의 입학생을 위해 학교를 뜯어고치는 학교도 있었죠. 아직 장애인 시설에 대한 대학의 인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예전보다는 경사로도 설치하고, 엘리베이터 만드는 학교도 있고 하여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멀었죠...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편 1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경원.김철호 지음, 최진혁 그림 / 유토피아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대학의 교과과정은 크게 교양과 전공 과목으로 나뉜다. 다시 교양은 교양필수와 교양선택으로, 전공도 마찬가지로 전공필수와 전공선택으로 나뉜다. 사실 밥 먹여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마도 전공과목일 터인데, 전공과목만 열심히 한다고 대학졸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대학졸업의 장애가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교양필수와 졸업인증제가 아닐까 한다. 내가 적을 두었던 대학에서는 졸업인증으로(나는 졸업인증제의 굴레에 다행스럽게도 얽히지 않았다.) 영어와 컴퓨터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게 졸업하는 데에 영 걸림돌이 된다.

말하자면 대학의 교양필수나 졸업인증 같은 것이 사회에 나가 밥벌어 먹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학에서는 그것을 교양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사는데에야 실제적으로 효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는 해야 어딜가든 뭘하든 대학나온 사람입네 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요즘 대학에서 공통으로 교양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는 과목들은 영어와 컴퓨터, 그리고 인문학분야 한 과목과 자연과학분야의 한 과목 정도, 그리고 대학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문장작법과 생활한문 등을 적은 학점으로 채택하고 있는 정도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교양필수 과목으로 영어와 컴퓨터, 그리고 인문학분야 외에, 국어와 한국사 과목이 있었다. 문장작법도 있었으나 생활한문은 없었다. 그러니까 요즘은 국어와 한국사가 없어지고 영어가 강화되었으며 생활한문이 살짝 들어갔다. 변화의 양상을 보면, 영어의 비중이 높아지고, 국어의 비중이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사실 문장작법은 레포트 쓰는 법 정도나 가르쳐 주는 글쓰기 과목에다가 2학점 밖에는 안되어서 대학 교양 국어 수준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가져야할 기초 소양중에 국어는 슬쩍 빠져버렸다.

요즘 시대에 누가 뭐래도 영어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로인해 국어의 중요성이 심각한 침해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얘기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배운 수준이면 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이런 얘기도 가능하다. 대학에서 영어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고등학교에서의 영어 수준 이상을 대학에서는 필요로 한다는 얘기다. 즉,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는 국어 수준보다 영어 수준이 더 높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학생들의 국어와 영어 실력을 비교해 보면, 국어 실력이 영어 실력보다 좋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말을 무리없이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의 모국어로서 요구될 그런 수준에 한없이 모자란다. 조금 수준 있는 글을 주고 읽을라치면, 국어사전을 몇 번을 들추어보아야하는지 모른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나 일반인들의 맞춤법 실력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조사들도 보고되고 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 국어교육이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원론적인 지적도 가능하나, 대학에서 요구하는 과목에는 국어가 없으니 그런 총체적 문제점을 타개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대학 입시에 논술이 도입된다고 하여 논술 학원이니, 논술 교재들이 호황을 맞았다. 서점에 가보면 논술관련 교재 및 도서들이 서점의 가장 요체에 자리잡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거기에 국어교육은 없고, 다만 화려한 글쓰기 교육만 있다. 그렇게 해서 될 글쓰기도 아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그런 책들에 불티가 나는 이유일 것이다.

얘기가 자꾸 엇나가는 듯 한데,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는 유혹에 가득찬 제목의 책이 나와 잘 팔리고 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의 국어 수준으로는 사실 학사학위의 소지자가 그에 걸맞는 글을 쓰기에 심히 부족함이 있다. 언어라는 것은 사실 계속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퇴화된다. 우리는 국어야 계속 말하고 쓰고 읽고 하니 그 실력이 어디가겠느냐 하지만, 거기까지 일뿐이다. 고등학교에서 배운만큼 그 국어실력으로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대학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대학 수준의 국어실력이 요구되어진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는 사실 뻥에 가깝다. 나같음 사람이야 그럴 수 있겠지만, 대학에서 국어전공한 사람이 그걸 가지고 밥 벌어 먹기에는 굉장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일반인들에게 오죽할까. 그러나 그것은 국어가 필요없어진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어지는, 당연히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니 국어는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본적인 수준까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가 기본일까?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지 않으니, 고등학교 수준의 국어실력이면 기본이라고 생각하지만, 오산에, 육산, 십산에 가깝다.

대학 나오면 대학수준의 국어실력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은 그것을 포기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오히려 일반 대중이 몸소 체감한 것인지, 요즘들어 국어관련 책들이 우후죽순 흘러나오고 있다. 대학이 포기한 과목을 일반인들이 일일이 찾아가 배워야 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쓸데없는 소리가 길어졌다. 이 책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리뷰를 정리하도록 하자. 이 책은 말하자면 우리말의 뉘앙스 사전의 전초격이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들 중에 대부분의 의미를 어림짐작으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반 없다. 중고등학생들에게 '주관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우리말의 미묘한 차이들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도 차이를 제대로 알고 쓰지 못할 때가 무수히 많다. 말의 미묘한 차이는 그것이 전달되었을 때 전달된 사람에게 커다란 차이, 즉 오해와 오독을 불러올 수 있고,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한 바를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다. 또한 표현할 때에 보다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기도 하다.

속과 안, 사내와 사나이, 고개와 머리, 엉덩이와 궁둥이 등등,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그 쓰임이 조금씩 다른 말들이 우리말 속에 무수히 많다. 그런 미묘한 차이를 보다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말 실력은 좋아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그런 무수히 많은 우리말들을 이 책은 다 다루고 있지 못해, <낱말편1>이라는 부제를 달아 놓고, 다음 편을 기다리게 하고 있다. 이런 작업이 차곡차곡 쌓여 우리에게도 알찬 우리말 뉘앙스 사전하나 갖게해 주었으면 한다.

중언부언은 글쓰기에서 꺼려지는 것이지만, 아무리 중언하고 부언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 있으니, 우리에게 국어는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이라는 얘기다. 대학에서는 다시금 교양필수 과목으로 국어의 비중을 영어만큼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투른 리뷰를 과감히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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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2-07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을 잘 붙인 상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해요. ^^
그리고,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좀 어수선하기도 합니다.
님 말씀마따나... 사전으로 정리돼야죠. 이런 책이 시작이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