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구판절판


문형(figure), 그것은 작업중에 있는 연인이다.

각 문형마다 그 깊숙이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구조 안에서만 용도를 갖는 하나의 문장, 대개는 미지의(혹은 무의식적인?) 문장이 잠들고 있다.

문형은 사랑하는 동안 내내 주체의 머릿속에 순서 없이 떠오르는 그런 것이다.

사랑 이야기(또는 '모험')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공물(貢物)이다.-14~21쪽

그 사람의 부재를 말하는 남자에게는 모두 여성적인 것이 있음을 표명하는 결과가 된다. 기다리고 있고, 또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남자는 놀랍게도 여성화되어 있다. 성도착자여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것이다.

그리스어에는 욕망에 대한 두 단어가 있다. 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포토스(Pothos)'가, 현존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보다 격렬한 '히메로스'가.

부재는 지속되고, 나는 그것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부재를 조작하려 한다.-31~4쪽

어떤 괴상한 논리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의 전체로 인지한다(가을날의 파리마냥). 동시에 이 전체는 말로는 할 수 없는 어떤 여분의 것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 사람의 전부가 미학적인 영상을 산출한다. 그는 그 사람이 완벽하다는 사실에 찬미하며, 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선택한 자신을 찬미한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그리고 어쩌면 얼마나 많은 탐색이) 필요했던가!-39~41쪽

이미지의 변질은 내가 그 사람을 부끄럽게 생각할 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지는 부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갑자기 목격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더 이상 나의 그 사람이 아닌), 한 낯선 사람(미치광이?)이기 때문이다.

망가뜨림에 대한 공포는 잃어버림에 대한 고뇌보다 더 강렬하다.-48~52쪽

독창적인 관계일 때에는 상투적인 것은 모두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한다.-62~3쪽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68쪽

언어의 힘, 나는 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특히 말하지 않는 것조차도. 내 언어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내 몸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몸은 말해 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그럴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거짓말쟁이이지(역언법에 의해), 배우는 아니다. 내 몸은 고집 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바른 어른이다.-74쪽

절망의 두 체제: 부드러운 절망, 능동적인 개념("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해야만 하듯이 절망 속에서 당신을 사랑한다")과 격렬한 절망-79쪽

'가우디움'은 "현재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거나 장차 소유할 것이 확실시될 때 영혼이 느끼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어, 그리하여 우리 세력하에 있어 우리가 원할 때면 언제나 그것을 즐길 수 있다." 이에 반해 '래티시아'는 보다 경쾌한 즐거움, 즉 "우리 마음속에 즐거움이 지배적인 상태"(때로 모순되는 여러 다른 감각들 중에서)를 가리킨다.-82~3쪽

최고선을 믿는 것은 최고악을 믿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89쪽

조금 떨어져 있자. 거리감을 쌓는 훈련을 하자. 타자의 죽음 뒤에 홀로 살아남는 그 순간부터 모든 주체의 입에서 나오는 저 억압된 말, 살자(Vivons!)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자.-91쪽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고,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알리고 싶고, 포옹받게 하고 싶고, 누군가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바란다."-95쪽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마치 손가락 대신에 말이란 걸 갖고 있다는 듯이, 또는 내 말 끝에 손가락이 달려 있기라도 하듯이.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 이 동요는 이중의 접촉에 기인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담론 행위가 "나는 너를 욕망한다"란 유일한 시니피에를 은밀히 간접적으로 가리키면서 그것을 풀어주고, 양분을 주고, 가지를 치며 폭발하게 하는 것이라면(언어는 스스로 만지는 것을 즐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그 사람을 내 말 속에 둘둘 말아 어루만지며, 애무하며, 이 만짐을 얘기하며, 우리 관계에 대한 논평을 지속하고자 온 힘을 소모한다.-110쪽

"우리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좀 알기나 하니" 혹은 "우린 너에게 생명을 주었는데"(-"하지만 그 생명으로 도대체 제가 어쩌란 말입니까!" 등등). 선물을 말하는 것은 곧 선물을 침묵 속의 소비와는 대립되는, 교환 경제(희생의, 경매의)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115~6쪽

나는 '고통'이란 말이 그 어떤 고통도 표현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짜증나게 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우스꽝스럽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146~8쪽

나는 찾으며, 시작하며, 시도하며, 더 멀리 나아가며, 달려간다. 그러나 내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불사조가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지 죽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그렇다면 나 또한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충족되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자살하지도 않는 내게 있어 사랑의 방황은 숙명적이다. 베르테르 자신도 '저 가엾은 레오노레'에게서 로테로 옮아가며 그 사실을 체험했었다. 비록 그 움직임은 중단되었지만, 베르테르가 살아남았더라면, 그는 똑같은 편지를 다른 여인에게 다시 썼을 것이다.-150~1쪽

나는 모성적인 것과 생식기적인 것을 원하는, 동시에 두 명의 주체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린 에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발기된 아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154쪽

세상은 이렇게 내가 더불어 그 사람을 공유해야만 하는 염치없는 이웃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란 '공유의 구속'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세속적인 것)은 내 적수이다. 나는 끊임없이 이런 불쾌한 것들로 방해받는다.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억지로 우리 식탁에 와 앉거나, 또는 그 사람이 옆에 앉은 사람들의 저속한 대화에 정신이 팔려 내가 말하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할 때, 또는 하나의 물건, 이를테면 한 권의 책조차도 모두 불쾌한 것이다. 쌍수적인 관계를 순식간에 말소하고, 공범 관계를 변질시키며, 소속을 해체하는 것은 전부 그러하다. 세상은 "당신은 나에게도 또한 속해 있다"라고 말한다.-160~1쪽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야 한다. 나는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어떤 본질과 일치가 있다고 가정한다(바로 이 점이 나를 기쁘게 한다). 이미지·모방: 나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다 그 사람처럼 하려 한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 똑같은 살갗의 자루에 갇혀 있다는 듯이, 나는 그 사람이며 그 사람은 나이기를 열망한다.-186쪽

반전(retournment):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 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196~7쪽

모든 연적은 처음에는 스승·안내자·흥행사·중개자였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면, 결코 사랑하지 않았을 사람도 많다."

"사랑이 시작되기 전 아름다움은 그 표지로서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게 될 사람을 칭찬하게 함으로써 그 사랑을 좌우하게 된다."-199쪽

합리적인 감정: 모든 것은 잘 되어 나가지만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의 감정: 잘 되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은 지속된다.

지금의 나로서는 자기 희생을 하나의 고결하고도 연극적인 형태로만 파악하고 있으며, 이것은 여전히 희생을 상상계의 영역 안에 붙잡아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05쪽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213쪽

아무리 그 대답이 긍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저도 그래요') 그 사람이 하나의 단순한 시니피에로만 대답한다면 그건 충분치 않다. 그는 내가 그에게 보낸 "난 널 사랑해"란 말을 다시 발화해야 하며, 그래서 공식화해야 한다. 펠레아스가 "사랑하오"라고 말하자, "저도 역시 사랑해요"라고 멜리장드는 대답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면에서, 어떤 새어나감도 없이, 완전하게, 문자 그대로, 사랑의 말의 원형을, 그 공식적인 표현을 받고자 함이다.-222~3쪽

물건 OBJETS. 사랑의 대상이 만졌던 물건이면 모두 그 몸의 일부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것.-251쪽

어쩌면 '울음'은 너무 투박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모든 종류의 눈물을 동일한 의미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러 명의 주체가 있어,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우는 게 아닐까? '눈에 눈물이 나 있는' 이 '나'는 과연 누구일까? 혹은 어떤 날 '거의 눈물까지 날 뻔했던' 또 다른 나는 누구일까? '내 몸의 모든 눈물을 쏟으며 우는' 나, 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홍수 같은 눈물을' 퍼붓는 나는 누구일까? 이토록 다양한 울음의 방식을 가진 까닭은 아마도 내가 울 때면 언제나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며, 또 그 수신자는 항상 동일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 눈물을 가지고 주변에 행사하려는 공갈협박의 유형에 따라 내 울음의 방식을 조정하는 것이다.-262~쪽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려 하고, 또 압력을 가하고자 한다.

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는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표현이 아닌 기호이다. 나는 내 눈물로 하나의 이야기를 하며, 고통의 신화를 만든다. 그렇게 하여 나는 고통에 적응할 수 있으며, 또 그 고통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장 '진실한' 메시지, 혀의 메시지가 아닌 몸의 메시지를 거두어 주는 한 과장된 대화 상대자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말, 그것은 무엇인가? 한 방울의 눈물도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하리라."-~263쪽

내게서 그 사람은 결코 지시물이 될 수 없다. 당신은 결코 당신일 뿐이며, 나는 타인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267쪽

'주체'란 우리에게(기독교가 생긴 이래) 괴로워하는 자를 의미하며, 그러므로 상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체가 존대한다는.

처음 우리는 하나의 정경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첫눈에 반하기 위해서는(운명과도 같은 그 무엇에 휩싸여 넋을 잃는, 그리하여 내 책임이 아닌) 갑작스러움의 기호 작체가 필요하며, 또 이런 모든 대상의 배열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정경이기 때문이다.

나를 매혹하고 황홀케 하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 있는 육체의 이미지이다.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이 나를 흥분케 한다.

내가 매혹되었던 그 처음의 장면은 단지 나중에 재구성된 것일 뿐이다. 현재 시제로 체험하지만 과거 시제로 변형시키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이렇듯 항상 단순 과거로 표현된다.-272~9쪽

사랑의 행로는 세 단계(또 삼막)를 거치는 것처럼 보인다. 첫번째 단계는 즉각적인 사로잡힘의 단계이다(나는 이미지에 매혹된다). 이어서 일련의 만남이 그 뒤를 따른다(데이트·전화·편지·짧은 여행 등).

다음 단계란 고통·상처·고뇌·비탄·원한·절망·당혹·함정의 긴 행로로서, 그것의 희생물인 나는 끊임없이 그 사람, 나 자신, 그리고 우리 서로를 발견하게 해준 그 경이로운 만남마저도 실추하게 될지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 속에 산다.-282~3쪽

사랑의 근심은 육체적인 노동만큼이나 육체를 혹사시키고 소모한다. "나는 너무도 괴로워했다. 하루 종일 사랑하는 이의 이미지와 싸웠더니 밤에는 잠이 잘 왔다"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베르테르 또한 자살하기 바로 직전 침대에 드러누워 오랫동안 잠을 잤다.-290쪽

결국 내가 매달려 있는 질문은, 그리하여 내가 그 사람의 얼굴에서 끈질기게 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난 당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죠?라는 질문이 아닐까?-305쪽

반과거는 매혹의 시제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움직이지 않는다. 불완전한 현존, 볼완전한 죽음. 망각도 부활도 아닌, 기억의 기진맥진한 미끼. 그 기원에서부터 하나의 역할을 하기를 열망하는 장면은 추억 속에 자리한다.-309쪽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정의해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꿈꾼다.-314쪽

성적인 쾌락은 환유적인 것이 아니다. 일단 얻고 나면 끝이 나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닫힌 축제, 잠시 열린다 해도 금지에 의해 통제를 받는 그런 축제이다. 반대로 다정함은 무한한, 충족될 줄 모르는 환유이다. 다정한 몸짓이나 에피소드(어느 날 저녁의 그 감미로운 조화)가 중단될 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다.-319~20쪽

완전한 결합일나 "유일하고도 단순한 즐거움이요" "흠도 불순물도 없는 기쁨이자 꿈의 완벽함이며, 모든 희망의 종착역이요" "신과 같은 찬연함이다." 그것은 분리되지 않는 휴식이자, 또는 소유권의 충족이다. 우리는 서로를 절대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즐길 수 있기를 꿈꾼다. 그것은 결실(fruitif)의 결합이자 사랑의 향유(fruition)이다

"예전의 완전한 것을 그리워하고 욕망하는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미치광이 같은 커플에서 부부의 외설스러움이 생긴다(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위해 평생 음식을 만든다.)-321쪽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라는 속담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게 하며, 명석하게 만든다. "나는 당신에 대해, 당신에 관해 절대적인 앎을 갖고 있다."

그는 에메트(Emeth), 즉 진실이라 불렸으나 사람들이 한 글자를 지워 버리자 메트(Meth), 즉 '그는 죽었다(il est mort)가 된다.-3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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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12-2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반딧불이 2008-12-25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가슴을 치는군요. 메리크리스마스요~

Alicia 2008-12-2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에 읽는 사랑의 단상. 좋아요. :)

Arch 2008-12-2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멜기님!
사랑의 단상을 다 읽은거랍니까? 오호! 전 맨날 들고 다녀도 거북이 걸음만큼도 못나갔는데.(거북이 미안) 같은 책인데도 나와 밑줄이 다르시네요. 우리 성실한 멜기님. 메리 크리스마스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