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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
이재성 지음 / 들녘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이들이 문법을 어렵게 생각한다. “문법 어렵지 않아요!”라고 할 수도 없다. 사실 문법은 어렵게 생각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국어 문법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문법은 어렵고 따분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문법을 어떻게 하면 쉽게 공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수도 없이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그 방법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왕도는 없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문법에도 왕도는 없어 보인다.
근래에 들어 우리말 관련 책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의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라는 책은 베스트셀러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글쓰기 관련 책들도 다양하게 출간되고 있다. 최근 대학 입시에서의 논술 반영의 영향이 큰 듯하다. 글쓰기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부분이 아무래도 맞춤법이나 문법이지 싶다. 그래서인지 문법 관련 책들도 출간되는데, 이 책 <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이하 <국어책>)이 그런 종류다.
사실 이런 대중적 글쓰기 관련 도서들을 나는 외면해 왔다. 아니 내게는 별 도움이 되는 책들은 아니어서 읽을 필요가 없었다. 말하자면 내게는 이런 분야의 전공서적들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어디까지나 전공서적은 아니기 때문에 내겐 외면의 대상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최근 이 <국어책>을 읽게 된 것은, 뭐랄까 어떤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수년간 공부해 온 문법을 어떻게 설명하고 풀어놨기에 대중적으로, 그러니까 문법이라면 치를 떨 일반인들이, 이 책을 그렇게도 많이 사서 읽을까 하는 의문에서 오는 그런 호기심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어느 정도 그런 호기심을 풀 수 있었다.
“제발 외우려고, 공부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문법책을 내던졌던 거예요!”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그럼 난 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법이라는 것이 공부 안하고, 외우지 않고 되는 거란 말인가? 내가 그렇게 문법 공부를 해 왔건만, 문법은 외우지 않고 되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저자 참 “구라가 심하다.”고 생각이 되는 대목이다.
문법은 우리의 언어사용에서 하나의 규칙을 찾아내어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 규칙은 어떤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이럴 땐 이 규칙이, 저럴 땐 저 규칙이, 어떨 땐 규칙이라고 할 수 없는 예외적 사항들이 적용된다. 그러니 외워야 하는 것은 문법 공부에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외우는 것은 지극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내 전공을 말아먹는 일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참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외우지 말라고? 외우지 않고 되는 것은 없다. 저자의 뻥은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뻥일 뿐이었으니, 이 책을 ‘내던져’ 버려야 할까?
이 책은 문법을 나 같은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국어학을 하나의 공부대상으로 하는 나와 같은 국어학도의 입장이 아니라, 대중의 입장, 즉 일반 언어사용자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일반 언어사용자, 즉 언중들에게 있어서 문법은 보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법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도 이 책은 제대로 ‘뻥’치고 있다. 사실 다소 재밌게 읽히기는 했지만, ‘공부’ 안하고, ‘외우지 않고’는 이 책을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여기서 이 책의 몇 가지 점들의 문제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실 내가 문법을 공부하는 것은 문법의 전 분야가 아니라, 그 한 부분이랄 수 있는 학교문법을 공부하고 있다. 사실 일반인들에게 적용되는 문법이란 것이 바로 학교문법인데, 학교문법에 있어 이 책은 어떤 설명들은 학문문법, 즉 개인 문법학자의 설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 점은 분명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문법 용어에 관한 저자의 생각이다. 문법 용어에는 아무래도 한자어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저자의 입장처럼 “어려운 한자어를 써서 겁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한자어를 쓰지 않고서는 문법의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간소화를 이루기 어렵다. 논의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어 더 왈가왈부 하지는 않겠지만, 이 책을 읽는 처음부터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어 언급하고 간다.
저자는 말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면서 “글보다 말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말이 먼저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에서는 말과 글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말이 중요하면 글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과 글을 그렇게 분리해서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 보인다.
“[더우기]라는 소리를 영어처럼 소리 나는 대로 쓰면 ‘ㄷㅓㅜㄱㅣ’가 됩니다. ‘더우기’가 맞춤법에 맞는 표기인지 ‘더욱이’가 맞는 표기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런데도 한글을 마치 한자처럼 네모 안에 답답하게 갇혀 있어요. 훈민정음을 만들 때 우리나라가 한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네모반듯하게 규격화되어 있는 한자의 글자꼴에 이미 익숙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글도 한자처럼 모아서 쓰게 되었어요.”
미치고 팔짝 뛰겠다. 이 저자는 우리나라 맞춤법의 기본 원리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문법을 논하면서 말의 소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알겠지만,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식의 말은 너무하다 싶다. 더욱이 한글의 모아쓰기가 세계적으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를 저자가 알고 있다면 이런 식의 무식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저자는 한자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듯싶다.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앞에서도 내가 학교문법을 공부한다고 했는데, 학교문법이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 무식한 것이 아니다. “‘학교문법’은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쉽게 만든 문법”이라고? 갈수록 가관이다. 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게 학교문법이 아니다. 학교문법은 말하자면 일반 언중들의 말하기에서 사용하는 하나의 규칙이다. 저마다 말하는 것이 다르고, 문법을 논하는 학자마다 그 규칙들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규칙이 필요하다. 그것이 학교문법인 것이고, 그런 규칙이 가르치는 곳이 학교일 수밖에 없기에 이름하여 학교문법인 것이다.
“문법은 규칙인데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규칙만으로 말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문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말은 맞는 말인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문법이 규칙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말은 그리 간단한 것이 못된다. 특히 우리말에서의 규칙화는 무척이나 어렵다. 그래서 외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일반화되지 못하고 규칙화되지 못하는 것을 문법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그 예외적인 것들을 빼버린다? 그럴 수 없기에 여러 가지 예외적 현상들을 문법에 포함시키고 있다. 저자 말대로 ‘제대로 된 문법’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제대로 된 문법을 하고 있는가? 웃지 못 할 일이다.
이 책에서 ‘-아/어, -게, -지, 고’를 부사형 어미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현행 7차 학교 문법에서는 이것을 분명 부사형 어미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런 언급 없이 부사형 어미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저자의 소홀함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 문법에서는 부사형 어미라고 인정하지만 이러이러 해서 부사형 어미라고 할 수 없다 식의 설명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7차 학교문법에서는 “국어에서 궁극적으로 연결 어미는 부사형 어미로 볼 수 있다는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설명도 그 안에 들어있다고 보여 진다. 부사형 어미에 관해서는 여전히 학계의 논의가 있고 필자의 주장은 그 일부이다. 그 일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중에게 내어 놓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중주어문도 학교문법에서의 견해와 조금 다르다. 저자는 서술절 내포문으로도 볼 수 있고, 이중주어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앞서 주장한 대로라면 이 또한 모순일 수 있겠다. 학교문법에서는 원칙상 이중주어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아무런 언급 없이 이중주어문으로도 볼 수 있다고만 한다. 마치 그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어 설정의 문제도 학계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부분이다.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논란으로 정리되는데, 저자는 아마도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에 있는 듯하다.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하게 되면 보어의 규칙화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온다. 이런 이유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괜한 필수적 부사어로 짜맞추기식 설정이라고 보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관형격조사 ‘의’에 대해 전면 부정하면서 ‘연결조사’로 설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말만 듣고 어디 가서 이건 연결조사야 하면 창피당하기 십상일지도 모른다. 다만 저자의 주장을 일정부분 수긍할 수 있는 부분도 크다. 하지만 학교문법에서 소유격조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관형격조사로 이름 하면서 체언간의 연결의 역할을 하고 있음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책에서의 상대높임법 분류에도 문제가 있다. 현행 7차 문법에서는 격식체를 4가지, 비격식체를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격식체를 2가지만으로 구분한다. 거기에다가 “비격식체에서도 상대방이 아주 높을 때만 ‘-요’를 붙여 상대방을 높인다는 사실을 표시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요’를 붙이지 않는 것으로 상대방이 아주 높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요’는 분명 두루 높임으로 상대방이 ‘아주’ 높지 않더라도 붙여 쓰고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담겨있다는 것은 이 책이 ‘4천만’ 국민의 ‘국어책’으로 기능하기에 의문을 들게 한다. “만약 몽룡이가 형을 무서워하고 어렵게 생각한다면, 몽룡이는 형을 아주 높은 사람으로 생각해 ‘-요’를 붙여 말할 거예요.”라는 설명에 과연 수긍할 수 있는가? 웃지 못 할 노릇이다.
저자의 주장은 시제의 문제, 즉 미래시제의 설정에서도 나타난다. ‘-겠’이 그것인데, 현행 학교문법은 미래시제로 ‘-겠’을 설정하고 있다. 분명 이것은 문제이지만, 그런 언급은 전혀 없이 ‘-겠’은 미래시제가 아니라고 설명하면 그렇게 배운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미래시제 ‘-겠’의 설정여부는 학계의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 아직 합의되지 않은 그 논란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학교문법과 배치되면서까지 일반 대중에게 떳떳하게 내어놓는 저자의 자신감을 높이 사야 할 듯하다.
이 외에도 사동 표현에서 ‘-시키다’가 빠져있다. 그리고 이중모음을 설명하면서 “두 개의 단모음을 합해서 만든 글자”라는 어느 문법책, 언어학 책에도 없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이중모음은 단모음 두 개의 합이 아니다. 그럼 이중모음은 다시 단모음으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얘긴데, 어느 문법학자도 이중모음을 단모음 2개로 나누지 않는다. 저자가 반모음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엿보이지만 이만 줄이기로 하겠다. ‘4천만’의 ‘국어책’임을 자임하는 이 책이 이런 문제들을 안고 있다면 극히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삽화와 예들이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따분하고 지루하게 문법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도 이 책의 중반까지는 그런 대로 가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는 여느 문법책과 차별을 두기는 어렵긴 하다. 하여간 이 책이 ‘4천만’에게 쥐어질 ‘국어책’이기에는 저자의 사견과 일방적 주장이 곳곳에 너무 많이 담겨있어 지극히 부족해 보인다. 그리고 그 ‘뻥’, 즉 문법을 공부하지 않고 외우지 않고 알 수 있다는 그 ‘뻥’은 ‘뻥’으로 검증되었다고 본다. 만약 문법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저자가 굳이 책을 쓸 필요도 없었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