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또다시 9월이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지긋지긋하게도 흐르고 흘러서, 어느새 다시 또 지긋한 9월이다. 더위에 지치고, 삶에 지쳤다. 이 구닥다리같은 표현이 너무 진부해서 욕하려다가도 이보다 더 정확한 말을 찾기가 어려웠기에, 다들 그렇기에 아마 이 말이 진부한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요즘 나는 좀 이상하다.

왜 이상하냐고 묻지는 마시길. 어느 봄날 연약하게 타오른 촛불이 모여, 수 개월을 버티며 큰 불길을 이루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꺼지고 마는 것이 한탄스러워서도 아니고, 우리의 대통령께서 하시는 일들에 하나하나 쫓아다니면서 욕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그저 날이 더워서, 그냥 그래서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요즘이다.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으면 하기도 하다.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를 읽은 것은 지난 달이다. 부쩍 더웠던 8월에 읽었으니, 나는 그만 더 덥고 지쳤다. 그런데 놓을 수 없어서, 그 뜨거움을 참고 끝내 읽어내었다. 혹시나 로이가 부르는 그 9월이 오면 어떨까 하는 기대감에서일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9월 하면 떠오르는 것. 많겠지만, 언뜻 떠오르는 것이 쑥스럽지만, 내 생일이다. 내 생일 어느 한 날이 이 9월에 속해 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이 9월은 음력 9월이다. 하여간 9월은 9월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9월 하면 떠올리는 비극이 있으니, 오는 11일이 몇 번 째 기념일인지 모르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무수히 죽은 미국의 대도시 한 복판에서 일어나 9.11 테러가 그것이다. 9월을 떠올리는 미국인들에게는 아마 이 사건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기억일 것이다. 그 숫자 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준미국인이라고 자부하며 동경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아마 많이들 이 날을 기억하며 안타까워할지 모르겠다.

이 9.11에 대한 여러 음모론도 있고 하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 가슴 아프게 잊지 말아야 할 날이긴 하다. 그러나 이 날을 더욱 오래도록 간직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그 날을 핑계 삼아 여전히 활개를 치며, 이곳저곳을 위협하고 들쑤시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 여러 곳곳에 매월매월을 가슴 아픈 기념일들로 아로 새기게, 그러고들 있다.

아룬다티 로이가 친절히 증언하듯이, 많은 이들(그러나 대다수의 미국인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준미국인들도 아니다.)이 이 9월을 아픈 기억들로 채우고 있다. 9.11에 그렇게 가슴 아파하며 이 날을 기점으로 복수의 칼날을 앞세워 세계곳곳으로 돌진하는 그들이, 그 이전의 9월을 세계 곳곳에 지울 수 없는 공포와 협박과 폭력과 살인들로 점철시켰던 역사를 또렷이 서술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태는 더 나빠졌다가 조금씩 나아질지 모릅니다. 아마도 하늘에 작은 신(神)이 있어서 우리에게 올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과 다른 세계는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이 여신을 맞이하기 위해 여기에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고요한 날, 주의깊이 귀기울이면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87쪽)  
   

이 인도의 당찬 여 소설가는 이렇게 희망차게 선포한다. 앞에서는 몇백줄에 걸쳐 참으로 암혹한 역사와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끝내 몇줄에는 이 희망을 남겨 놓은 것은, 그녀의 잔인함일까? 모를 일이지만, 그녀가 왜 "9월이여, 오라"고 말하는지를 이 대목에서 알 듯 하다. 그녀가 원하는 9월은 지금까지의 그 비극들로 가득한 9월이 아닌, "지금과는 다른 세계"에서의 9월, 아름다운 여신이 희망을 가득 품고 오는 그런 9월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나는, 그래서 모든 것이 지치고 짜증나고, 의욕이 하나도 없는 지금, 이 지금은 9월이지만,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아직 로이의 9월은 아닌 게 분명하다. 적어도 이 한국에서는 또다시 9월의 아픔을 떠올리기 일보직전인 것도 같다. 이 빌어먹을 9월은 가라.

나는 아룬다티 로이가 꿈꾸는 그 9월, "어느 고요한 날" 들려오는 여신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녀는 "저주받은 운명"이기 때문이다. 아룬다티 로이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나는 오래도록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그녀처럼 "저주받은 운명"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작가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생각 있는 모든 이들은 아룬다티 로이의 그 "저주받은 운명"을 고스란히 이어 받으시길 기원하면서, 다시 한 번 로이의 그 말을 되새긴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날마다 창문 유리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추악한 모습들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낣아빠진 뻔한 것들을 새롭게 이야기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사랑과 탐욕, 정치와 지배, 권력과 권력의 결여―이런 것들에 대해서 되풀이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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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9-06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그동안 어디 숨어계셨던거예요~~~~

순오기 2008-09-07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그동안 어디 숨어계셨던거예요~~~~ 2 ^^
연애를 한 거라면 봐 드려야지 뭐~~~

멜기세덱 2008-09-0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었던적은 없어요....
굳이 숨었다면야,....알라딘에 숨었겠죠....ㅎㅎ

2008-09-10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8-09-10 17:39   좋아요 0 | URL
전....무조건.....아프님따라./....ㅋㅋㅋ

2008-09-10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09-16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은 썼다하면 이주의 리뷰래요~ 아 완전 대단! ㅋㅋㅋ

반딧불이 2008-09-1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당선과 9월의 어느 한 날.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이매지 2008-09-17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멜기님은 썼다하면 이주의 리뷰 ㅎ
부럽부럽 ㅎㅎ
어쨌거나 축하드려요 ~

순오기 2008-09-1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은 썼다하면 이주의 리뷰 당선~~ 축하 축하!!^^

마늘빵 2008-09-22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은 당선쟁이! 축하해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