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년 전 쯤에, 맹랑한 댓글을 하나 달았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나보다는 십수년을 더 살아오신 그 분께 눈물을 흘리라느니 운운하는 것은 정말 맹랑한 짓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댓글은 그 분이 남긴 짧은 메모 속 깊이 담긴, 행간에 스민, 어떤 슬픔 혹은 그 무언가를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맹랑함의 허튼 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부터는 그 분께 섣부른 댓글을 달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다른 분들께도 한 번 씩 더 댓글을 닮에 생각하게 한다.
사실 그 때는 내게 눈물이라는 것은 메말라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1년 여가 지난 지금 내가 왜 예전의 그런 댓글을 생각하고, 또 왜 눈물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그 때의 그 댓글은 맹랑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눈물을 한 번 흘려보세요!"라는 지금의 권유는 어쩌면 내게는 한 소망일지 모르겠다. 지금 나는 울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슬퍼서도 아니고, 서러워서도 아니다. 삶이, 몸이, 고통스러워서도 아니다. 말하자면 그냥, 이다.
지금으로부터 가장 최근에 울어 본 기억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얼마 전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살짝 울컥 했던 기억은 있다. 그러나 그건 울음이 아니다. 울컥한 김에 눈물을 찔끔 댄 기억은 멀지만 또렷하다. 이번에도 영화다. '타이타닉'. 이 영화를 나는 극장 상영이 한참 지나고 어느 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봤다. 몇 년 전이었을게다. 심심해서였을 것이고,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이 대목에선 여자들은 죄다 운다던데, 왜 일까? 어둔 방 구석, 새벽녘에 이 영화를 보면서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잠겨드는 디카프리오를 보면서 그 여주인공처럼 나도 울었다. 울컥해서였을 뿐이다. 그리고 '아마겟돈'을 극장에서 친구와 보다가 마지막 장면, 브루스 윌리스가 딸과 작별하면서 나는 울었다. 울컥해서 울었다.
이때 나는 왜 울었을까? 그때 내 상황과 처지가 잘 재생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심정적으로 어려웠었던 것 같다. 좀 막막했었다고 해야 될까? 그때 영화는 울컥했고, 나도 울컥해서 울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 상황과 처지를 가까운 시일내로 돌려보아도, 여전히 막막하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별다른 혼란과 걱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안니다. 막막하고 막연하다고나 할까? 이럴 때도 영화를 보면 울컥할 수 있을까?
나는 중학생 때쯤, 아니 국민학생 때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 가운데, 그 때만큼 서럽게 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얘기는 지금까지 입밖에 내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못 할 것 같다. 어쩌면 산전수전 다 겪은 다음에야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건 내 가족사의 숨겨둔 일면이기에 아직은 나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때, 그 서러운 눈물이 지금은 왠지 부러워진다. 서러워서라도 울고 싶은 지금이다.
어려서는 참 말썽이 많았나 보다.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오죽하면 어렸을 적 별명이 '찔통'이었을까? 동네 슈퍼에 가서 과자를 한아름 안고도 더 안지 못해 서럽게 울었다나. 하여간 그때는 많이도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근 5년 넘게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서럽지 않아서였을까? 슬프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삶도 몸도 편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서럽지만 그 서러움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슬프지만 그 슬픔을 알지 못해서였을까? 삶도 몸도 고되지만 그 고됨에 익숙해져서가 아닐까? 서럽고 슬프고, 서른 즈음의 나이에는 그나마 조금은 느낄 수 있는 인생의 고됨이, 산전수전의 반(半)전은 겪어서 그만큼은 가졌을 나이에, 나는 왜 울지 못할까?
내년이면 서른을 맞는다. 아직은 익지 않은 나이여서 '설은'이고, 더욱 따갑게 익어야할 나이여서 '서(러)운'인지 모르겠다. 이 서러운 서른에는 울 수 있을까? 11월이 며칠 남지 않았다. 그건 얼마있을 시험이 그만큼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 그리고, 그 후의 어떤 일들도, 계획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서른 즈음의 이 나이에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가 의아해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나 조차도 의아하고 으아~하다. 그러나 어쩌랴? 막연하고 막막하고 앞은 까마득하다.
어쩌면 내년에도 올해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될지 모르겠다. 안주하자는 것일 게다. 그냥 이렇게 대책없이 좀더 살아보고 나중에 고민하자는 것일 게다. 그 선택을 내가 하더라도 나를 탓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오늘은, 아니 요 한동안은, 좀 울어봤으면 좋겠다. 무엇인지 모를 허무가 호되게 느껴지는 지금, 왠지 울어 봤으면 싶다.
울면, 눈물을 흘리면, 몸에도 좋다고도 한다. 남자는 여자보다 눈물을 덜 흘려서 수명이 짧다나. 미국 남자들은 한 달인지, 한 주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평균 1.4회를 운단다. 그런데 나는 최근 연 평균 단 1회도 울지 못했다. 그래서 더 일찍 죽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죽거나 사는 것의 문제보다, 그냥 아무런 댓가도 없이 울어 봤으면 좋겠다. 울고 나면 정신이 한층 맑아진다고도 한다. 뭔가 빈 듯한 이 마음을 눈물로 채우고, 뿌연 이 정신이 맑아졌으면 좋겠다.
삼국지를 보면서, 유비, 관우, 장비, 세 의형제가 고성에서 만나는 그 장면에서, 책을 읽으면서 한 번, 드라마로 보면서 또 한 번, 나도 울었다. 나는 책을 보면서 운 기억이 이것 말고는 없다. 하다 못해 성경책을 보면서까지도 울지 못했던, 그래서 날라리 기독교인인, 그런 신세다. 책을 읽으면서 책 갈피 갈피에 한 방울의 눈물 자국 한 번 남겨보는 것도 작은 소망이다. 박완서를 더 읽어보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작은 희망이 생긴다.
그러나 오늘 밤은 여전히 울음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런 헛소리들을 이렇게 해댔겠는가? 여하튼, 이 해가 가기전에는, 서른이 오기 전에는, 그래서 서러운 서른을 서럽게 울기 전에, 지금, 막막하고 막연한 울음 울어서, 그래서 정신이 맑아지든가, 수명이 연장되든가, 아니면 더 슬퍼지던가, 더 서러워지던가, 더 인생이 고되고 힘들어지도라도, 그냥 한 번 크게 울고 싶다.
울고 싶은 마음이 나뿐은 아닐 것 같아서, 이것저것 들춰보다가, 찾아보다가, 이런 시가 눈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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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난다
- 이수인
이따금씩
사는 게
구질구질할 때가 있다
내 자신에게 진실하고 싶은데
내마저 내 자신을 우롱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깊은 밤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하다 삶이
구질구질하다고 느끼며
내마음 깊은 곳에서 펌프질하듯 눈물이 난다
나에게 진실하고
남에게 정직하고 싶은데
세상은 가끔씩
사람은 자꾸만
나를 치사하게 만든다
세상에게
사람에게
가끔씩 우롱을 당할 때면
내 자신이 초라해져서 눈물이 난다
사는 게
살아 있는 게
힘들어서 구질구질해서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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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는 게 "구질구질"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나에게 진실하지 못하고, 남에게 정직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구질구질"해서, 그래서, 지금 울고 싶은 게냐? 그런 게냐?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