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공부의 즐거움 - 고전에서 누리는 행복한 소요유
이상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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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를 따라서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새벽,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몰려왔다. 내 여정의 첫발걸음을 먼저 맞은 것은 지리산 자락의 볼을 저미는 차가운 칼바람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어둠 속의 혹한은 시린 손끝을 타고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눈에 덮힌 숲을 바라보다가 문득 추사선생의 '세한도'를 떠올렸다. 이 정도의 추위 속에서 마음마저 얼어붙어서야 선비의 체면이 영... 그 혹한 난세를 이겨갔던 추사 선생의 곧고 강인한 정신력이 가슴 속에서 뜨거운 정신을 살아나게 만든다. 이 땅에 살다 갔던 수많은 옛 사람들, 그들의 그림과 글 그리고 삶 속에서 추구했던 정신적인 경지는 무엇이었을까? 이 여행과 더불어 내가 챙겨왔던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다.

  우리나라와 동양고전의 문턱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던 내게 이 책은 앞뒤가리지 않고 성큼 한 걸음을 내딛어 보라고 권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보다 복잡해지는 삶의 모습과 온갖 물질과 쾌락적 삶의 향유에 촛점이 맞춰진 삶의 상품화에 대한 선비적인 꾸짖음이다. 비록 수다스럽고 거칠지는 않지만 꼿꼿이 세운 가슴으로 상대방의 눈을 뚫을 듯이 쳐다보면서 꼼짝하지 못할 비수의 말을 묵묵하게 뱉어내고 있는 삶의 스승이자 친구의 충고이다.

  중국 어느 시대인가 왕은 그 나라의 화공들을 불러 모아 과제 하나를 던져 주었다. '꿀먹은 당나귀'를 그리라는 명이었다. 방을 본 화공들은 어리둥절했다. "과연 꿀의 향기를 어떻게 흰 종이에 담아낼 것인가?"가 그들 문제의 핵심이었다. 이윽고 화공들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들은 하나둘씩 완성되었다. 신하는 장원에 뽑힌 그림을 빼어들었다. 그림을 본 화공들은 무릎을 쳤다. 그 그림엔 당나귀의 그림이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당나귀의 꼬리만 치렁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 뒤로 많은 벌떼가 꼬리를 쫓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렇듯 옛 그림에는 있는 현실을 포착하되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내는 교묘한 멋이 있었고,  그 기술은 단지 기교가 아니라 나아가 그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기도 했고, 난세의 혹한을 이기려는 꿋꿋한 정신과 삶의 지혜를 담아내기도 했다. 따라서 한 폭의 그림이라할지라도 그 속에는 한 시대와 그들의 삶과 정신이 모두 담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 그 난세를 살다간 선비들의 삶이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새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사상과 정신을 체계화했으며 그 속에서 구제도와 모순된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개혁하려했다. 또한 추사는 난기류속에 우왕좌왕하는 지식인들에게 확고한 지적 가치관과 기준을 재확정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연암 선생도 당시 선배들의 문란했던 관념적이고 소모적인 이기논쟁에 의한 당쟁의 폐해를 비판하고 실질적인 탐구와 실천을 위한 지행합일의 학문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옛 지식인들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명에 소홀히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내적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정신적 성숙을 일구어냈다.

接一物則止於所接

應一事則止於所應

無間以他也則心能一

及事過物去而便收斂

湛然當如明鑑之空也

 

어떤 대상에 닿았거든 그 닿은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말고 멈추라

어떤 사태를 만났거든 그 만난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말고 멈추라

다른 무엇이 끼어들 사이가 없도록 해놓으면 마음은 한결같을 수 있다

사태는 끝나고 대상은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쉽게 마음을 모을 수 있다

마치 깨끗한 거울 속이 텅 비어 있는 것같이 맑아지리라

 

이러한 내적 수양을 통해 대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에 닿았던 화담 선생은 자신의 인격수양의 결과 황진이의 육탄공격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 느끼는 섬세하고도 미묘한 감정들을 벗들과 교우하기도 하는데 추사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시절 벗처럼 지냈던 수선화를 보며 지은 시가 그러하다.

 

一點冬心朶朶圓

品於幽澹冷雋邊

梅高猶未離庭砌

淸水眞看解脫仙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다

성품은 그윽하고 담박하여 차갑고 우뚝 솟았네

매화가 높다지만 뜨락을 못 떠났는데

맑은 물 해탈한 신선을 진실로 보노라

 

자신이 한양에서 관직시절 흔히 보았던 매화보다 관직에서 밀려나 제주의 이름없는 곳에서 추위를 홀로 견디며 피어있는 수선화를 보았을 때 그는 바로 몰입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차가운 눈발을 견디며 홀로 청청했던 소나무와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그를 몰라 주는 세상과 몰라 주는 세상에서 한 걸음 초연해진 그래서 편해진 마음 속에 이미 신선의 경지가 있지 않은가?

 

  저자 이상국은 삶을 통한 희노애락의 예술적 승화를 넘어서 이젠 인류의 정신적 유산의 최고봉이었던 경전에까지 달음박질쳐서 간다. 도덕경, 장자, 논어, 맹자, 금강경의 깊은 지혜를 소요유하고픈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역시 경의 말은 이미 말을 떠난 자리이므로 말로써 응대하는 것으로는 뭔가 석연치 않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을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곤과 붕'을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그것은 '여시아문'에서와 같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가 된다. 듣는 주체의 의식 수준으로밖에 담은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해야 하는가? '아문'에서 아가 없어야 한다. 여시에서 계합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주의 진리가 뱉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게 된다. 어쨌거나 옛 사람들의 정신적 소요유를 넘어 인류의 가장 고귀한 정신적 유산까지 소요유하려는 그의 지적 용기와 모험정신만큼은 배울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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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6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1-0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중간에 쓰다 잠시 볼일이 생겨서 그만...

2006-01-06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6-01-0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읽어 주실 줄 알았어요^^
저는 추사 선생이 제주 유배지에서 보시던 수선화 꽃잎이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더불어 양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일부종사하신 정신도 높이 삽니다.
모두 '유배'라는 특별한 약발 때문 아닌가 싶어요.
다만 책 말미에 금강경 설명은 뭔가 아쉬운 느낌이 강했지만.
그래도 작가는 끝까지 소요유 정신을 추구할래나요?
그의 홈피 단골 방문자인데 여전히 소요유로 일관합디다^^

달팽이 2006-01-07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동심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윗 글에서 답을 찾았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묻게 되네요...

여우님 다시 화롯불 하나로 달구어지는 님의 서재가
이젠 사람들 둘러앉아 좋은 어울마당이 되더군요..
침묵으로 삭힌 마음 속에 영근 좋은 글을 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오늘 추사 고택에 들러서 한참 동안을 기분좋게 둘러보았습니다.
산월조탄금 송풍취해대(산위의 달빛은 가야금 선율을 비추고, 솔바람은 풀어진 옷고름을 날리우니) 안채 사랑채 기둥에 새겨진 추사선생의 글들이 저의 정신을 바로 세우더군요..
기껏 추위는 살갖을 떨게할 뿐이지만 그의 글은 200년이 지난 후에도 한 인생의 뼛 속 깊이까지 떨리게 할 수 있더군요..

달팽이 2006-01-1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도에 들른 김에 추사 선생의 적거지까지 다녀왔습니다.
9년동안 유배생활로 추운 나날을 보내야했던 곳이지만
그의 학문하는 자세와 정신만큼은 당쟁과 시대의 혼란상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결실을 맺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산의 고택과도 같은 쉰네칸의 잘 지은 집은 아니지만
초가를 얹은 시골 한 구석의 조그마한 곳이지만
햇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서 자신의 글과 정신을 가다듬었고 수신했던
청명한 그의 정신이 깃든 자리였습니다.
예산의 고택이 그의 안온하던 젊은 날의 공부였다면
제주의 적거지는 세상의 거친 풍파를 이겨내던 마음의 깊어짐이요
내유외강의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9년의 유배생활동안 그의 추사체도 완성이 되었고
그의 글도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를 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나도
마음 속의 유배지라도 하나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의 적거지 초가집 앞으로 세운 비석과 그것을 사이에 두고 선 소나무 두 그루는
혹한 세월을 이겨냈던 '세한도'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닮았습니다.
오늘 이 곳에 들러서 내 마음 속의 '세한도'를 품고
다시 생활의 터전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철학 에세이 - 동녘선서 93 동녘선서 93
김교빈 지음 / 동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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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8월 11일부터 13일까지의 첫 일본 여행이 나에게 남겼던 흔적이 있다. 큐슈지방이라는 한정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적인 것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깨끗하고 단정한 도시의 미관이었다. 물론 일본에서는 대도시라기보다는 중소도시와 촌락을 중심으로 돌아다녔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도쿄이나 교토 등의 대도시와 직접적으로 등치시킬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국과 비교해서 아주 정돈되고 깨끗했던 인상이다. 도로에서도 휴지나 잡다한 상행위를 볼 수 없었으며, 절과 가옥 구조도 상당히 단정하고 정돈된 느낌을 받았다.

  농촌지역으로 가면서도 숲이 아주 무성하고 함부로 파헤친 흔적이 없는 국토가 우리나라와는 대비되었고, 채석을 위해 산을 파내는 곳도 도로에서 몇 능선을 넘어서 사람들이 다니면서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날이 바뀌면서 일본의 정돈되고 깨끗한 도시와 삶은 단조롭고 미적의식이 부족한 듯 보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옛 가옥구조와 건축양식에 스며든 미적감각들이 보다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배흘림 기둥이나 굵직하고 대담한 터치의 글과 작품들, 자연과의 아름다운 조화 등)  이렇듯 강대국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서 경제나 군사력 국가의 부에서 보잘것없는 우리 나라지만 외국에서 비교해본 우리 나라는 결코 뒤지지 않는 한국적인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렇게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해방 후에 시작된 서구화와 더불어 우리의 현재 모습을 들여다보면 서구보다 더욱 서구화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가졌던 전통적인 것은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고 또한 그 잃어버림 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갖게 해주는 한국성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일러주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사상이나 철학이 있는가? 이 책은 우리의 삶의 바탕이 허물어져 가는 현대적인 한국의 삶 속에 오랜 기간 동안 우리의 삶을 지탱했던 선현들의 철학과 사상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헤쳐나가고 특히 당면한 과제인 통일의 방향을 제시하고 통일된 사회를 지향하는 철학적 과제를 촉발하기 위한 씨앗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의 원효와 지눌의 불교 사상에서 출발하여 조선 중기로 넘어가 서경덕과 이언적 이황과 이이 정제두 박지원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우리 철학사에서 한국철학이라고 할만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그 시대를 살다간 조상들의 고민과 삶에 대한 물음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당면한 현실을 헤쳐나가는 사상적 모색으로서의 철학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암시를 주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전통적인 한국철학이라고 하면 사실 어떤 사상도 딱히 취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지형과 지리에서 나온 전통 사상과 외래에서 들어온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사상과 정서를 거쳐 체계화된 그래서 한국화된 철학을 우리는 한국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 철학이란 우리 사회에서 유통되는 철학적 이론 속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 한국 고유의 사상체계나 정서이며 그것은 한국적 혼이다.

  한국 철학의 흐름을 살펴보면 첫째로는 현실적인 삶과 사회의 현실을 설명해주기 위한 형이상학적이고 근본적인 물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라든지, 유교에서의 성, 인, 덕의 개념들 노장사상에서의 도, 덕의 개념들, 조선 성리학에서의 이와 기에 대한 생각, 주역에서의 태허와 태극에 대한 개념들이 그것이다. 이것은 인간 삶의 의미와 궁극적 물음에서 도출된 것이며 우리들의 삶을 자기에게도 돌리고 내면적인 성찰을 통한 삶의 성숙과 깨달음으로 인도해준 삶의 축이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으로부터 현실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변화되고 바뀐 현실에 맞게 그리고 도래되는 사회를 더욱 촉진시키고 구래의 폐습을 고치기 위한 사상과 철학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는 점이다.

  전자는 시대나 역사에 의해 변화되지 않고 굴절되지 않아 자신의 삶의 바탕을 어떤 현실과 국면에서도 지탱해준 힘이었다고 한다면 후자는 그런 삶의 한 장과 국면에서 보다 민중과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한 도구적 힘이었다고 본다. 사실 전자에서는 한국적이니 외래적이니 하는 것이 필요없다.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이 어떤 언어적 토양과 사상적 지형을 가졌느냐만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후자에서는 한 구비 구비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대안의 제시에서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고 그것의 철학적인 배경을 갖추기 위해 새로운 철학이 모방되거나 개조되고 한국적으로 창조되기도 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삶의 모습이나 사유의 형태는 변하였으나 삶의 본질적인 의미와 물음은 변한 것이 없다고 본다. 문제는 그런 삶의 근본적인 물음으로부터 현실의 삶과 과제를 설명해내는 방식의 변화였을 뿐인 것이다. 무엇보다 절실하게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해답을 내릴 수 있는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자세야 말로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철학적 자세요 구도자적 자세일 것이다. 통일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구구한 이론과 절차가 많으나 그 이면에 자리잡은 통일의 필요성과 통일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가 더욱 중요한 것은 아닐까? 그것을 위해 이전에 내팽개쳐졌던 우리의 사유체계와 철학을 정비해내는 작업들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철학이 정말 철학다운 면모를 가지려면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밑바탕으로 들어가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고민들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해서 우리 선현들이 진정으로 이루고자 했던 그 내면적인 뜰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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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강희장 / 자유시대사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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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용에 보면 생이지지한 사람도 있고, 학이지지한 사람도 있고, 곤이지지한 사람도 있으나 지(깨닫거나 완전한 참됨을 이루면)하게 되면 다 같다고 했다. 나는 곤이지지한 범부에 불과함을 늘 느끼고 있지만 이 글을 쓴 강희장은 아홉살 때 이 대학과 중용을 해석하였다. 그가 풀이한 대학의 첫 구절인 격물을 "외부의 물에 대한 욕심을 끊어낸다."라고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그는 생이지지한 사람이로구나. 단순히 나이로 그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삶을 살다보면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이에 맞게 자신의 인격을 가다듬어온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자신의 탐심과 욕심이 더욱 눈덩이처럼 불어져서 아이보다도 못한 인격을 갖춘 사람들도 대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단순히 그 사람을 욕하며 피하기 보다는 그를 통해 비춰진 나의 닦여지지 못한 것을 닦으려는 노력을 최근에서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더러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서도 나는 전혀 어리다고 생각할 수 없는 성숙한 아이들을 보게 되니 그들을 볼 때 나도 그들에게 배우는 바가 없지 않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몸의 나이만으로 세상 사람들과 교우하기엔 너무나도 그 품성이 달라서 몸의 나이를 뛰어넘어 품성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끌리게 됨을 어찌할 수 없다.

  지극한 선, 명명덕, 천성, 참됨을 이루는 것 등 등은 비록 표현은 달라도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다르지 아니하다. 여기서 우리는 말이 갈 수 있는 그 끝에까지 가게 된다. 내가 방학을 맞아 비로소 동양고전을 체계적으로 읽어내려야겠다고 마음먹고 든 첫 책이 바로 이 책인데 역시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소감은 내가 이 길에 잘 들어섰다는 생각이다. 대학과 중용의 핵심은 바로 마음공부에서 벗어나 있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자님의 삶과 깨달음이 얼마나 깊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도 또한 깨달은 사람이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첫 출발은 자신을 먼저 닦는데 있다. 자신이 완전한 참됨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몸을 평화롭게 할 수 있고, 능히 그런 자이어야 자신의 가정을 평화롭게 하고 자신의 국가를 평화롭게 하며 나아가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늘 문제점을 외부에서 찾고 제도적이거나 사회적인 해결만이 능사인양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의 길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방법으로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그 밖의 모든 방법 또한 아무 소용이 없음을 눈이 밝아진 다음에라야 비로소 알게 된다.

  아홉살에 불과한 신동 강희장이 쓴 글은 아주 힘이 있으며 천지를 호령하는 기상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사람은 그가 가진 참됨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생이지지한 사람이다. 비록 몸의 나이는 어려도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고전의 깊이나 그가 보는 세상을 향한 눈, 그리고 그가 짧게 살다간 인생은 현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몸과 자아를 초월한 뒤에라야 비로소 참되고 완전한 앎도 가능한 것이며 어리지만 생이지지한 그와의 만남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가 가진 외부적인 편견을 버리고서 말이다.

  좀 늦게서야 시작한 글공부가 이젠 좀 더 깊어져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곤이지지한 능력밖에 없는 나로서야 안달할 이유가 없다. 다만 게을리 하지 않을 뿐이고 끊이지 않을 뿐이다. 이젠 고전의 글들이 좀 더 나의 마음속으로 때로는 삶으로서 이해되어지는 바가 생긴다. 삶으로 또는 스스로 체험하고 증험하지 않고서는 머릿속의 이해만으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대학, 큰 배움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하늘과 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오는 물에 대한 생각이 끊어진 다음에 보이는 진리는 무엇인가? 완전한 참됨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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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07-2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주역과 노자에 빠져 있습니다. 대학도 읽을 예정이고요...
방학때 좋은 글 읽고 좋은 글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시고요...

달팽이 2005-07-3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서평을 쓰진 않았지만 주역책을 두 권 정도 읽어보았습니다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더군요...언젠가 한 번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도덕경은 책을 몇 권 사두었구요...역시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세요..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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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사람의 명성을 보고 산 책이 실망스러운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신영복 선생님의 삶과 학문을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책은 또 책 나름대로의 평가가 필요한 법입니다. 이 책은 관계론이라는 입장에서 고전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해석과 이전의 주류적인 사상의 비판과 반성 속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주는 면에서는 새로운 고전해석이라 볼 수 있으며 또한 현재적 의미의 해석에서도 그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열흘간의 기간동안 한문을 따라 써가면서 그 의미를 마음 속에 담아보면서 관계적으로 본다는 것이 때로는 고전을 써내려갔던 선현들의 마음을 제대로 담아내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내 속의 또 다른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고전은 고전을 읽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새롭게 담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고전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재해석입니다. 따라서 신영복 선생님의 관계망이란 의미 역시 과거가 현재에 이어지고 미래의 우리 사회에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는 것으로 열리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마음의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의 공간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고전을 만들어내었던 지은이와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역은 이 책의 내용으로 무엇인가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 각의 고전이 만들어진 사회적 역사적 상황은 그 고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더욱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내용 자체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선생님께서도 아직 동양 고전에서 마저 파내어야 할 마음의 우물이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자에서는 '도가도 비상도'에서 그 도가 무엇인가를 깊이 체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무위라는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무사 또는 선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문맥에 따라 말은 바뀌지만 그 뜻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핵심적인 것에 다다르게 하기 위한 서술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책을 쓰면서 가장 고려해야 할 요소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장자에서는 소요유가 무엇인가? 곤과 붕이 무엇인가? 결국 말은 달라도 표현은 달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유가 사상의 근본은 무엇이고 그것이 노장 사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법가 사상은 왜 천하를 통일하였는가 하는 질문과 함께 왜 단명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은 현실을 움직이는 것과 그 현실의 이면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힘들이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현상을 움직이는 힘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시간과 공간을 얼마만큼 초월해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가 그것의 생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은 한 달 짜리 책인가 1년짜리 책인가 10년짜리 책인가 100년짜리 책인가 1000년짜리 책인가 아니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존재할 책인가를 묻습니다. 제자백가 사상은 국가의 성립과 인간의 도리에 관해서 대체로 모든 실험들을 해보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호흡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우리가 가진 호흡을 최대한의 길이로 늘여보았을 때에만 그 장단이 비교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세월의 흐름이 그 생명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엔 그것이 자신의 내면속에서 이해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는 되살아나는 법입니다.

이 책은 '미래로 가는 길을 오래된 과거에서 찾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 있습니다. 그 순간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시간과 공간이 멈추어진 자리에서 우리는 진정한 관계망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요, 현재도 아니요, 미래도 아닌 그 곳에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담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동양 고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옛 선현들의 마음 속으로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그들과 하나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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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2-06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데...님의 리뷰가 도움이 될 듯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달팽이 2005-02-0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초아낭자 2005-05-31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월 3일부터 8일까지 코엑스에서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립니다.
이 기간 중에 신영복 선생님의 사인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그리고 홍보를 바랍니다.

사인회 일시: 6월 5일(일) 1시~3시(2시간)
장소: 코엑스 이벤트홀 태평양관

달팽이 2005-06-01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군요...알겠습니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상한 일이다. 내가 가진 몸의 능력은 나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마음내는 것은 우주까지도 포용할 수있으니 말이다. 나를 살아있게 하는 진리에 대한 물음은 내 마음 속에서 무수한 천지개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몸이 살아가면서 겪는 경험 하나 하나 사이로 난 보이지 않는 문을 통해 미지로 향하는 길은 놓여져 있다. 마음의 비밀을 풀어내야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문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간다.

진리의 땅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현실의 한계인 강을 건너야 한다. 그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방편과 도구가 있어야 한다. '뗏목'을 그 방편으로 삼았다면 이제 깃을 올리고 힘차게 노를 저어야 한다. 한데 물살은 급하고 뗏목은 늘 그 물살에 휩쓸린다. 뗏목은 언어이다. 언어화할 수 없는 진리의 체험을 언어화시키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다. 그 방편은 파격이어야 한다. 아니 파격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아니하고 어찌 언어가 가지는 의미의 한계를 넘어 저 곳으로 다다를 수 있겠는가?

금강경의 말씀은 그래서 파격이다. 그 파격적인 말 중 가장 검증되고 교과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바이기 때문이다. 그 설하신 말씀에는 부처님의 마음의 가장 깊은 정수가 담겨져 있다. 이해하려고 하면 즉시 물살에 휩쓸리고 만다. 부처님의 그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폭풍과도 같은 물살을 피해갈 곳은 없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풍의 한가운데.... 그 부처님의 마음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길은 없다.

금강경이 사족을 달았다. 부처님의 마음, 진리의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 경이 나왔다면 이 경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또 주석서가 나왔으니 말이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언어적 기교에 빠져버린다면 헤어날 곳이 없다. 그럼에도 장님인 우리는 방편을 찾을 수 밖에 없다. 장님인데다가 신랄한 입을 가진 도올 선생의 손을 잡았으니...이젠 정신을 바짝 차릴지어다...잘못하다간 맞아죽을 지도 모르니까...ㅎㅎㅎ

금강경 앞에서도 당당하고 때에 따라서는 오만하기까지 한 도올 선생이 때로는 존경스럽다가도 마음한구석이 편치않은 것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生其心)하는 마음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 없음인데, 이것은 도올선생의 마음인가 내 마음인가? 아무래도 경을 해설함은 시원한 마음보다 경건한 마음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금강경을 읽는 데 가장 바른 자세는 2500여년 전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는 그 자리로 돌아가 부처님을 앞에 두고 부처님법을 듣는 마음으로 읽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금강경을 해설하는 것도 바로 부처님이 계신 그 자리의 마음자리를 될 수 있는 한 그대로 살려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부처님의 마음과 공명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책을 펼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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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08-03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일상의 분노가 쌓이거나 욕심으로 머리가 산만해질 때는 불경을 꺼내 봅니다.그저 아무데나 펼쳐서 몇 구절 씩 천천히 읽다보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문제를 다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김용옥의 금강경은 아직 보지 못했는데 조만간 읽어야겠네요.

달팽이 2004-08-03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사실 저도 금강경을 읽는 마음의 눈을 아직 갖추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를 방향삼아 맞추다보면 삶에 대한 또 다른 눈이 생기고 그 눈으로 인하여 세상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와 지혜가 생기는 것 같아서 편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