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타설 - 하 남회근 저작선 6
남회근 지음, 설순남 옮김 / 부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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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달여 남짓 걸린 도덕경 읽기가 한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아직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에 대한

깨달음을 갖진 못했다.

다만

창밖에 보이는 세상은 보이는대로의 세상이 아니고

또한

지극한 진리는 그 어떤 말과 표현으로도 다하지 못하니

마음 속의 '혹'이 하나 생겼을 뿐....

"위이부쟁"으로 끝나는 도덕경을 덮으며

"도"편은 가물가물

"덕"편은 파릇파릇

남회근 선생님의 웅장하면서도 해박한 역사적 설명을 따라가기에는

내 가랑이가 크지 못하다.

앗 하는 순간 길을 잃었다가

다시 길로 접어들다 잃기를 반복하다

어느덧 81장이 끝나고 말았다.

 

올해의 도덕경 읽기는

그래도 한자의 뜻풀이에 매몰되지 않고

나름대로

문맥을 살피려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는다.

머지 않아

다시 찾을거라는 다짐을

왕필주 "노자익"에

마음 한자락 고리처럼 걸어두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려 한다.

한편 부끄럽고

한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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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림을 배우다 - 21세기에 읽는 사자소학
김태완 지음 / 호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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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생들에게 인성교육을 한다면 어떻게 할까? 인성이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너무나도 빨리 변해가는 세상을 살고 있다. 즉흥적이고 감성을 자극하는 아이돌가수와 엄청난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자신의 욕망의 성격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접할 수 있는 정보와 지식, 그렇지만 관계에는 상당히 약한 요즘의 청소년들이다. 핵가족화되고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당숙부, 이모, 재종 등 친척은 그냥 있을 뿐...직접적이고 입체적인 관계를 맺을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런 속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은 강조되고 조장되는 세상을 살아간다. 대중 매체, 상품 광고, 사회가 모두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어 그들에게 어떤 조상의 지혜로 인성교육을 하고 때로는 시대에 맞는 코드를 찾아낼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우리의 조상들은 청소년 시기에 어떤 마음 가짐으로 살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래서 찾은 책이 이 책이다. 사자소학은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사서삼경에서 자라는 청소년에게 필요한 글들을 추려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조선시대에는 아이들 교육이 주로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와 배움에 대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내리사랑은 동물의 세계 어디에나 있지만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 중 하나다. 그래서 부모에게 물려 받은 몸으로 이 인생의 경험을 고스란히 누리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과 은혜를 신의로서 잘 지켜야 함을 이야기한다. 부모님은 생명체로 낳아주시고 우리가 스스로 자라지 못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우리를 길렀으니 나이가 연로하셔서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부모님의 부양하는 것이 그 은혜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갚는 것이 된다. 부모님께 물려 받은 몸을 성히 지킴으로써 부모님께 근심을 드리지 않음은 물론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게 자신의 출처와 돌아옴을 보고하고 부모님의 의식주가 편한지 살피고 또 부모님의 마음을 편히 하도록 늘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부부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는 부부 간에 서로 공경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부는 결정하고 아내는 부드럽게 따라가라는 두 문장 뿐이다. 아마 현실의 부부들을 보면 별로 할 말이 없을 게다. ㅎㅎ

 

  다음으로 형제 간의 우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형제 간에 서로 보듬어주고 아껴주면서 때로는 타이르고 경책하면서 서로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라고 한다.

 

  다음은 스승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스승을 어떻게 만나고 누구를 만나는지는 자신의 인생의 격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하다. 다음 편에 나오는 벗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에게서 벗의 모습도 볼 수 있고 벗에게서 스승의 모습도 볼 수 있다면 이 시대의 유연해진 스승과 벗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소년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한다.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상대방을 높이고 겸손하며 이웃을 돕고 살면 그 복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자녀들을 보고 대할 때 자라는 청소년을 대할  때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빌려오되 이 시대에 맞는 접근법을 병행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조상들의 지혜 속에 그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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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 - 유가.묵가.도가.법가
이중텐 지음, 심규호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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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나온 백가쟁명, 그 많은 학파와 논쟁은 어떤 현실에서 나왔고 또 어떤 삶의 이념을 지향했던가? 미국과의 대결 속에 새로운 시대의 패권 국가로 발돋움하는 중국의 현실과 그 미래에의 전망까지 제자백가사상이 담고 있다고 말해도 우격다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송나라 나대경의 "학림옥로"란 책에 보면 [논어 반 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란 말이 있다. 이 말이 오랜 세월 세간에 널리 떠돌았던 것처럼 왜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유가와 도가는 살아남았을까? 또한 어떤 매력으로 현재의 우리들의 삶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비전으로 우리 인류의 미래에도 어떤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역사가 흐른다는 것은 같은 사건의 반복일런지도 모른다.(세월이 흘러가도 해질녘 불어오는 바람이 태초에 불어오는 바람과 다르지 않듯이...) 제자백가 사상의 심오한 세상으로 발을 들여다 놓기 시작한다면 삶의 본질적인 면들은 삶의 역사적 모습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늘 우리들 눈 앞에 존재해왔던 것은 아닌지...하고 생각하게 된다. 


   유가사상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공자 사후 100년도 훨씬 뒤에 태어난 맹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인의 사상에서 의, 예, 지, 신(지와 신을 예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으로 표현된 핵심사상 속에 내 부모와 형제를 대하는 것처럼 친척을 대하고 이웃을 대하고 나아가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대하면 극기복례하여 세상의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유가의 태도는 군주의 입장에서 본 것이었다.  


  묵자는 보다 실천적이었다. 그는 천자, 제후, 대부, 사 그리고 서민들의 계급적 차별을 타파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렸다. 가난과 굶주림도 마다하지 않고 철저한 자신의 수양을 통해 그 모든 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꿈꾸었던 그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 추구에서 모두 평등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아무나 따라하기 힘든 실천이었다고 본다.


  도가사상은 양주의 극단적인 입장(털 한 올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에서 부터 노자와 장자로 이어지는 무위의 실천을 강조하기도 한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 유가와 묵가가 결국엔 급변하는 사회에 참여하여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려 했다면 도가 사상가들은 그런 노력들이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보았고 자연적인 질서로 회귀하자는 사상을 담아내었다.  


  법가 사상은 상앙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한비에 의해 완성되었다.  천자나 제후 등의 위정자들의 전제적인 통치에 반대하였고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다. 법가사상은 양면삼도설로서 형벌과 덕치를 함께 사용하려했고, 권세와 권술과 권능으로서 지휘력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세를 통해 위신을 세우고 술을 통해 신하를 부릴 수 있으며, 법을 통해 백성을 제어할 수 있다. 이것들이 바로 군주의 수중에 있는 지휘도다."라고 한다.  예악이 붕괴되고 이해타산에 따라 서로 먹고 먹히는 비정한 정치현실에서 위정자들은 어떻게 하면 제국의 달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이 사상은 매우 유용했다. 진시황제는 법가사상에 매료되어 이웃나라를 침략해서 법가사상가 상앙을 데려오기도 할 정도였다.

   이렇듯 그 사상의 갈래와 특색은 달랐을지라도 이 사상들은 모두 급변하고 혼란스러워보이는 현실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를 원했고 또 극도의 혼란과 전쟁 속에서 천하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시작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들의 사상이 얼마나 생명력을 가졌건 또 얼마나 현실설명력을 가졌건 그것은 뒤로하더라도 그 사상가들의 초심만은 어지러운 현세를 구원할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왜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러한 백가쟁명이 나오게 되었을까? 이중텐 교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사상적으로는 인본주의를 확립하고 정치적으로는 덕치를 실현하며 제도적으로는 예악에 의한 교화를 실시했던 주나라는 성숙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섬세하고 뛰어난 제도와 문화가 있었기에 그 문화 속에서 백가쟁명의 사상이 꽃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 둘째, 주나라의 봉건제가 붕괴되고 사회가 급변하게 되면서 예가 파괴되고 악이 붕괴되면서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고 하는 사회적 필요가 있었던 점, 셋째, 정치적으로 신분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였던 사인들의 활약을 든다.  


  중국민족의 지적 탐험의 총체적인 자산이고 그들의 문화유산이 되버린 백가쟁명은 인류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이정표의 역할도 하리라 생각한다. 읽는 이의 시야를 넓히면 백가쟁명은 인류의 지혜의 보고이자 문화유산이기에 급변하는 그러나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현실의 변화 속에서 선현들의 지혜로 우리들의 위치를 점검해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틀어서 보다 큰 수레 위에 우리 삶을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중텐 교수는  추상적 승계와 합리지양이라는 계승방법을 권한다. 백가쟁명의 각 학파는 그것이 급변하는 현실에 따라 어떤 사회적 필요에 의해 제기되었고 또 그 현실을 극복해가는 돌파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단순한 비교를 통해 어떤 것은 우수하고 어떤 것은 열등하다라고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유가사상은 이미 도가 사라져버린 다음 인과 의, 그리고 예악을 지키려 한다는 것에 자체적 한계를 가지고 있고 또한 군주의 입장에서 본 관점이라는 단점을 가지며 묵가는 이를 비판하여 전 계층의 평등을 주장하였지만 전 계층의 자유와 권리가 충돌할 경우 결국엔 상동이라는 의미로 다시 서열화된 해결을 주장한다. 결국은 독재나 전제정치의 출현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서열이 아니라 합리화된 법질서에 의해 통치하자는 법가 사상이 나오게 되나, 권세만 있고 도의는 없는 이해타산의 비정한 논리는 생명력이 그리 길지 않게 된다. 도가사상은 이 모든 내용을 되돌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또한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엔 사회적 해결을 바라고 그 제도와 사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이 모든 사상은 그 각 각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구체적인 현실의 체험이 불가능한 후대의 우리들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감정과 추상적인 체험을 통해 그 학파가 가진 고유한 장점을 습득하여 현실에 맞는 우리들의 모델을 찾아내면 된다. 또한 그 학파가 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고 대립하는 다른 학파의 치명적인 논리비판 속에 현실설득력을 잃어갔는지에 대해 문제점을 합리지양을 통해 역사적 교훈으로 갖자는 것이다. 법가 사상이 잔인하다고 해서 무조건 내칠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의 요청에 따라 나온 법가사상이 가진 장점, 군주의 전제나 독재를 타파하고 합리화되고 제도화된 법에 의한 통치는 결국 색깔은 다르지만 근대에 와서 모든 입법국가가 취하게 되었다는 점은 눈여겨볼만 하지 않은가. 


  제자 백가에 대해 몇 권의 책을 읽어보았지만 노장사상과 유가사상 그리고 묵가와 도가에 대한 큰 밑그림을 그리고 방향을 잡아가게 하는 데 아주 그만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원서로서는 난해하여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을 소설책 읽듯이 술술 읽어낼 수 있게 하며 그를 통해 제자백가의 출현배경과 원인 그리고 사상의 핵심을 간략하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정리해내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도가사상에 대한 이 교수님의 평가가 썩 내키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내용으로 볼 때 수작이라고 평가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책이다. 

 

  오랜 세월을 통해 왜 어떤 사상은 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유가사상은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오며 분서갱유의 탄압 속에서도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면면히 그 생명을 이어왔을까? 왜 그처럼 강한 생명력과 영원한 매력으로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일까? 나는 책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인류의 보편적인 지혜와 진리를 담고 있으면서도 세상과 끊임없이 호흡하려 했고 또 세상의 급변속에서도 사상의 본류를 간직한 채 필요한 곳에 생명수의 지류를 대어주는 물과 같은 유연함이 아니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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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이야기
모로하시 데쓰지 지음, 조성진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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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는 크게 내편과 외편 그리고 잡편의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곤과 붕의 이야기는 무척 잘 알려져 있다. 나도  상상력의 벽을 허물어주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자를 한 번쯤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호접몽은 인생을 빗댄 이야기로서 많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된다. 화창한 봄날 볕이 잘 드는 창가에서 책을 펴고 앉아 읽다가 슬그머니 꿈길로 들어선 장자는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다가 문득 잠이 깨면서 생각한다. "내가 나비가 된 것일까? 나비가 내가 된 것일까?"하고.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일까,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꿈일까?"그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장자의 글을 쓰는 기법은 우언, 중언, 치언의 방법을 사용한다. 우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남의 입을 빌려서 하는 방법을 말한다. 중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위대한 옛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치언은 임기응변의 요령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원래 치는 술잔을 가리키는 글자인데 술잔이란 술을 부으면 기울어지게 마련이고, 비고 나면 다시 차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으나 시의 적절하게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화법을 일컫는다.

  여기에서도 도덕경에서의 무위와 현묘지문 등과 같은 마음으로 경험해내어야 하는 말들이 많다. 곤과 붕부터 혼돈, 병아리 울음소리, 암컷, 물, 골짜기, 갓난애, 통나무, 고요함, 허, 섭생, 양생 등 모든 것이 말로써만 이해될 수 없다. 그의 글은 너무 시니컬하고 비유적이고 적나라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깊은 진리의 말들이 거침없이 뿜어져나온다. 이러한 지극한 도를 겸비한 사람이 진인이라 했다. 삶과 죽음의 도가 한가닥으로 돌아가는 이, 그에게 있어 세상은 과연 어떠할까?

  그동안 책을 몸에 붙이지 못했다. 아니 책읽기가 인생의 중요한 가치라고 여겨져왔던 나에게 책없이 주어진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물어보는 기회가 되었다. 책없이 내 삶의 공부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책읽기란 나에게 그저 지식을 쌓는 공부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책을 놓고 난 뒤에도 스스로의 마음을 밑천삼아 공부할 수 없다면 그것은 세속의 취미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읽기가 자신의 마음으로 삶으로 녹아들지 못해서 단지 지식을 쌓고, 학위를 따고, 젠체하기 위한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아무 쓸모없는 '추구'가 되고 말 것이다.

  문자로 익힌 것을 암송하고 나아가 눈과 귀로 익혀서 알아야 하며, 이목지학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수역'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 뿐인가? 끝에 가서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오묘하고 불가사의한 경지에 들어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인생의 크나큰 의문에 부닥칠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참 앎이 된다고 말한다.

  이때까지의 나의 공부가 때로는 오감만을 불리는 공부가 되지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참다운 공부는 눈과 귀를 잃는 공부라고 했는데 눈을 더욱 선명하게 하고 세상 일에 더욱 귀기울이는 공부를 해온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 나 하나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데 어찌 가정의 일을 잘 해결할 수 있으며 나아가 세상을 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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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10-16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책이 오히려 눈에 누가 되는 경우도 흔한 듯 합니다.
공부가 사람을 살리지 못하면 옳은 공부가 아니겠지요.

달팽이 2006-10-16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엔 모처럼 구름이 끼었습니다.
하늘은 가을 하늘인데 햇살은 여름 햇살이더니...
이번주는 좀 어떨지 궁금하군요..

혜덕화 2006-10-16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진 만큼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부모가 행복해야 자식을 행복하게 키울 수 있겠지요.
따가운 햇살도 고맙긴 한데, 해인사의 나뭇잎들이 단풍도 들기 전에 말라 있는 것이 보기 안타까웠습니다. 비님이 오셨으면......

달팽이 2006-10-1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마다 자신의 보물을 발견할 때에라야 비로소 우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천지간에 홀로 설 수 있어야 비로소 벗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정이란 성숙한 인격과 영혼을 가진 독립적인 사람들의 만남이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고독의 길을 회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가을에 나뭇가지 가지마다 잎새들은 저만의 고독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란여우 2006-10-1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수 한대수씨가 '고독한 커피'라고 우깁니다.
저는 책을 읽는 행위를 '고독한 책읽기'라고 우기렵니다.
김현 선생은 '행복한 책읽기'라고 하셨지만
저는 활자가 주는 지식의 포만감과 지혜의 길을 따라
고독의 냄새를 한 마리 개처럼 킁킁 맡습니다.
행복은 어떻게 하냐구요? 먼저 고독해진 다음에!
낙엽이 아름다운 건 제 몸을 다 불살라 아무 욕망없이 돌아가기 때문 아닐까요?
아, 위에 혜덕화님 말씀을 들으니 해인사가 아니더라도
고즈넉한 산사 한 번 늦가을에 쓸쓸히 쓸쓸히 잔뜩 고독한 척 폼재고 가고 싶어요

달팽이 2006-10-1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의 고독은 개의 고독과 다르지 않고
그것은 또한 달팽이의 고독과도 다르지 않군요.
이름도 없는 작은 산사의 입구를 지키는 당주가 되어
파란 가을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싶습니다.
간혹 예쁘게 물든 낙엽이 내 손을 스치고 지날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노자
박영호 지음 / 두레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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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로 도덕경을 읽는다. 아무래도 한문읽기가 좀 익숙해지니 문장이 눈에 잘 들어온다. 그러나 아직 원문으로 읽어내릴 수준은 좀 모자라니 아무래도 주석서를 드는 것이 시간 대비 효율을 올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다음 번에 읽을 때에는 주석서와 더불어 원문을 그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주석서에 의존하게 되면 주석의 내용에 마음이 먼저 한계지워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최대한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 원문을 그대로 보게 되면 문맥의 이해가 쉽지 않은 반면 옥편을 찾아 한자 한자 문맥을 풀이해나가면 문맥에 대한 마음의 상들이 하나 둘 씩 떠오르게 되고 그렇게 공부하는 것의 매력이 날이 갈수록 나는 더욱 끌린다.

  박영호 선생님은 다석 유영모 선생님 아래서 공부했으며, 지금도 다석 사상을 연구하면서 마음공부를 해나가시는 분이다. 현재 다석 사상 연구회원으로 계시면서 다석의 사상을 책으로 펴내는 일을 하고 계신다. 몇 년 전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를 읽고서는 우리 근, 현대사에서도 이런 분이 계셨구나 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후 얼의 노래와 유명모 명상록을 사두었으나 모두 읽어내지 못했다. 올해엔 고전을 읽어보자는 가벼운 다짐으로 시작한 해이므로 논어에 이어 도덕경에 마음이 갔고 또 우연히 이 책이 인연에 닿게 되었다.

  우선 도덕경의 내용을 풀어낸 박영호 선생님의 주석은 유영모 선생님의 유, 불, 선 사상의 통합에 영향받은 것이다. 역시 풀이도 유교와 불교, 도교, 기독교의 사상을 넘나든다. 그리고 몸나와 제나 그리고 얼나의 구조로서 도덕경을 풀어낸다. 여기서의 도는 얼나와 같은 차원의 개념이다. 따라서 도덕경을 풀어내는 그의 마음은 얼나에 의거해서 풀어낸 것이라고 선생님께서도 밝히고 있다. 몸나나 제나에 의해 풀어낸 도덕경의 글은 노자의 마음으로부터 천리 만리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도덕경을 제대로 읽기 위해선 우선 얼나를 제대로 깨우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5장에 보면  "多言數窮 不如守中"이란 말이 나온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단 마음의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음만 못하다는 말. 수중이란 말이 참 좋다. 그래서 서재명을 한 번 바꾸어보았다. 나에겐 말을 할 때보다는 침묵의 한가운데 마음 속으로 깊어지는 순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첫장의 내용이      道可道 非常道 이다. 도는 말로 하면 항상 도가 아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도덕경의 내용도 모두가 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지 도가 아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도덕경은 그것을 읽어서 도를 찾아가는 책이라기 보다는 도의 마음으로 읽어내어 도덕경의 글에 도를 불어넣어라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들이 몸나나 제나의 끌림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깨끗해지지 않는 원래 그대로의 얼나를 깨우쳐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도덕경의 글들이 얼의 생명으로 살아 춤추게 될 것이다. 글의 주석은 달라질지라도 얼나의 사람이 풀이한 도덕경에는 도가 살아있게 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나를 떨쳐버리지 못한 내가 이 글을 읽으면서 손가락을 쫓아야만 하는 일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아쉬움도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영호 선생님은 도덕경의 다채로운 맛들을 얼나와 제나 몸나의 구조로만 풀어내어 좀 단순하고 지루한 맛을 풍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덕부분으로 넘어가면서는 주석은 대충 눈으로 넘기고 원문을 오랫동안 쳐다보게 되었다. 덕분에 다음에 볼 때에는 원문으로 도덕경을 읽어나가보리라는 기대가 생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나아가지도 재목으로 쓰여지지도 않은 변방의 촌로 노자, 하지만 그가 품은 뜻만큼은 온세상을 감싸고도 남았으니 과연 사람을 겉으로만 보아서는 모르는 법이다. 도인은 유약하며, 남의 뒤에 처하며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처하고 아무런 사회적 쓸모가 없음으로써 그 쓸모를 다한다. 그런 도의 작용을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은 도를 향한 미로속을 헤집고 다닌다. 마음 속의 의문과 도를 향한 의지가 한 점으로 모아지는 노력들이 우리들을 도의 세상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도덕경을 언젠가 한 번은 제대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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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6-03-1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원문으로 보는 게 좋아요. 책을 다 읽지 못한다고 해도 가까이 두고 아무 페이지나 열어도 아 합니다. 머리가 쭈볏쭈볏 서기도 하구요. 그런 감동들이 다 어디로 가 버린 것인지...물건처럼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삶이 될 때까지 들여다 보고, 또 보게 되나 봅니다. 守中처럼 지키는 것이 자주 나옵니다. 守靜, 守雌, 守辱...

달팽이 2006-03-11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래서 주위에 선생님이 감산 도덕경 풀이를 권해주었습니다.
한문으로 된 원전에 한문으로 아주 군더더기없는 짧은 설명으로 된 묶음책입니다.
앞으로 책꽂이에 두고 아무 장이나 펼쳐서 볼 생각입니다.

이누아 2006-03-11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산스님. 흐..감산 스님 팬이에요.

달팽이 2006-03-1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 있습니다. ㅎㅎ

글샘 2006-03-12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언삭궁, 불여수중... 참 어렵지요.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 마음속에 둠만 못하다...
근데, 노자는 넘 어렵습니다. ㅠㅠ

달팽이 2006-03-1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래도 또 끌리는 책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