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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ㅣ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지금 열하일기인가?
열하라는 공간은 18세기 후반 몽고와 티벳, 아라비아 등의 다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여기서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어느 한 가치에 머무르지 않는 유목적인 삶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현재 우리 세상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근대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던한 사회로의 이행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의식은 아직 근대나 전근대에 머물러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의 흐름과 의식의 불일치 속에서 더욱 많은 마찰음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하일기는 바로 200여년 전의 연암 선생의 열하기행문을 통해서 열하라는 공간이 주는 다문화적이고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라는 측면과 그런 열하일기를 쓴 연암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현실과 의식의 불일치를 극복해보려고 하는 시대적 코드로써 읽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우선 연암의 문체가 정조때의 '문체반정'이라고 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원조가 된다. 그의 문체는 시대의 무거움을 벗어난 역설과 재치, 해학과 웃음의 생생한 필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체 형식만 보아서는 그의 정신을 얻을 수 없다. 그의 문체 이면에는 그의 문장에 대한 생각을 또한 읽어내어야 한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었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해와 달이 비록 오래되었어도 그 광휘는 날마다 새롭다. 책에 실려 있는 것이 비록 방대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제가끔 다르다. 때문에 날고 잠기고 달리고 뛰는 온갖 생물 가운데에는 간혹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비밀스런 영이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서 지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한다." [초정집서]
따라서 옛글과 오늘의 글을 같게하는 것은 형식에 또는 문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법도에 맞아야 하며 이는 옛 글쓴이의 마음과 정신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옛 사람의 마음을 잃은 채 문장의 형식만 흉내낸다면 그것은 이미 법도를 잃은 것이 될 것이요. 옛 사람의 마음을 잃지 못하고 행동거지만 따라한다면 그것은 앵무새의 흉내에 다름아닌 것이다.
열하일기는 text의 미완성이란 점에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결여로써가 아니라 완결된 체계를 넘어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은 열하일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완결된 구조로서 우리들에게 강요되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의 창조과정을 따라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부러운 점이 있었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나누었던 우정이다. 벗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벗은 나를 알아주는 지기요 또한 인생이라는 배움의 장을 함께하며 질책해주고 위로해주고 때로는 경쟁자로서 때로는 스승으로서 때로는 삶의 동반자로서 우리들의 배움을 완성해가는데 필요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러한 벗에 대한 인류사의 명문장으로 나는 이덕무의 글을 빼놓을 수 없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간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선귤당농소]
아, 이덕무의 이 글을 읽고도 마음으로 애타게 그리는 지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정말 아직 친구를 잘못 사귄 것이 아닐까?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고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말없는 말을 교환하며 배움의 길에 있어 서로에게 회초리가 되기도 하고 붓이 되기도 하고 종이가 되기도 하는 그런 친구가 있다면 인생길은 그리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연암선생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박제가가 연암선생과의 첫만남의 인연을 쓴 [백탑청연집서]를 보면 나이를 넘어서도 벗이 될 수 있는 만남에 대해 청연과도 같은 인연임을 말한다.
"지난 무자, 기축년 어름 내 나이 18,9세 나던 때 미중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 입고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어보게 하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 다관에다 밥을 안치시더니 흰 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바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하셨다. 뜻밖의 환대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나는, 이는 천고에나 있을 법한 멋진 일이라 생각하고 글을 지어 환대에 응답하였다."
나이를 넘어서 벗을 만나고 그 귀한 벗을 대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일이 있다. 그의 집을 찾아간 날에 몸소 밥을 차려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 밥상을 정성스레 차려 준 밥을 가슴찡하게 먹은 기억이 있다. 그날 나는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벗의 우정을 먹은 것이다. 연암 선생의 벗을 대하는 마음에는 나이의 많고적음을 떠나 벗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또 그 대접을 받고 그 사람됨을 알아보는 박제가 선생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논객들의 만남다웠구나.
열하일기에서 문장의 빼어남으로 야출고북구기도 있지만 나의 마음을 흠뻑 앗아버린 문장은 바로 [일야구도하기]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 문장은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을 밟혀 뒷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두자, 한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음에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 나자, 내 귓속에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앉은 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았다. "
대학의 '격물치지'를 떠올리게 한다. 외부의 현상들이 감각으로 인식되는 생각들을 물리친 다음에야 비로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각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더더욱 두려움과 공포에 휘둘리어 공연히 제걸음에 발을 헛디디어 물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온갖 감각과 생각을 차단한 자리, 바로 그 자리가 진리의 자리가 아닌가? 그 자리엔 강물소리가 들릴리가 없다. 마치 있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 자유자재한 자리가 될 것이다.
연암 선생의 매력은 단지 문장력에 있지를 않다. 혼란하고 무거웠던 시대를 해학과 웃음으로 가볍게 뛰어넘은 그의 삶 속에는 이렇듯 삶을 바라보는 깊은 지혜가 있었다. 오늘날의 시대, 감각과 온갖 사상과 생각의 난무로 너무나도 복잡해져 삶의 정체성을 찾기 힘든 시대에 열하일기는 단지 그런 삶의 회피로서의 웃음과 역설이 아니라 삶의 깊은 관조와 진리를 향한 구도자로서의 방향제시로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나는 이렇게 열하일기를 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