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리고성을 돌고_2011.08.14

(수 6:3-5, 개역) 『[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번째 성 여리고를 점령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 이 전쟁의 승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명운을 가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그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미 하나님의 이적과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그들은 믿음으로 뭉쳐져 있었다. 또한, 이미 정탐을 통해 가나안족속들이 두려워 떨고 있음도 알았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방법은 매우 독특했다. 하나님은 칼과 창으로 나가는 전쟁이 아니라 성을 돌라고 하셨다. 사실 아무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할지라도 아군의 사망자나 부상자가 전혀 없이 전쟁을 이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 만큼 하나님이 주신 방법은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여리고를 정복할 수 있는 것으로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입성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여리고를 첫날부터 한 바퀴씩 돌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여리고성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흔히들 비웃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반대이다. 이미 그들은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이적을 듣고 물 녹듯이 마음이 놓아있었다. 안타깝게 항복하지 않고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결사항전의 태세로 문을 굳게 닫고 방비했다. 그런 그들에게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고,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이 도는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스라엘의 어떤 종교적 행위 자체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통해 그들이 멸망할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여리고성을 그저 돌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적군에게 심리적인 부담과 피로를 압박시키는 고난이도의 전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7일 동안 13바퀴를 돎으로써 단 한 명의 사망자나 부상자조차 없이 여리고성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도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들의 명성으로 적군이 떨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여리고성을 돌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론에 대해 특별히 불만이나 의구심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믿음으로 그들은 무너질 것을 기대하며 돌았을 것이다.

한편, 6일 동안 13바퀴를 도는 것을 생각해보자. 여호수아는 그들이 도는 과정에서 단 한 가지의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수 6:10, 개역)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하나님의 방법론에 순종하되 잠잠히 순종하라는 것이다. 잠잠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사실 합해서 13바퀴를 도는 것은 하루 만에도 돌 수 있는 일 아니었을까? 성이 좀 컸다손 치더라도 중간에 조금씩 쉬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13바퀴를 하루 만에도 다 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6일 동안 고작 하루에 한 바퀴만 돌라고 하셨다. 하루 한 바퀴 성을 돌고 나면 딱히 다른 할 일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일주일간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하루 한 번 여리고성을 도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이 단순한 노동을 3일째 접어들면 어땠을까? 과연, 조용히 엄숙히 성을 돌았을까? 분명, 상당수가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옆 사람과 잡담을 하면서 웅성거리며 성을 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잠잠하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여리고성을 돌고 있다. 우리에게도 여리고성이 있다. 때로는 그것이 내가 전도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여리고일 수 있고, 어떤 것은 나의 아직 변화되지 않은 성품이나 기질의 여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리고성을 주어진 기간 동안, 주어진 바퀴만큼 채우고 나면 반드시 여리고성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 바퀴를 시작한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7일째 힘든 7바퀴를 연달아 돌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주어진 기간과 주어진 바퀴가 채워지면 여리고는 정복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6일 동안 단순히 성을 돌고 있는 그들에게 침묵이 요구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순종하는 행위 속에서 그 과정 속에서 잠잠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순종하면서도 들레고, 외치고, 소란스럽게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너무나 자주 잠잠하지 못한 채 여리고성을 돌고 있고, 집중하지 못한 채 성을 돌곤 한다.

하루 만에도 돌 수 있는 13바퀴를 왜 굳이 일주일 동안 돌아야 할까? 그리고 왜 6일은 하루 한 바퀴밖에 못 돌고, 일곱째 날은 7바퀴를 몰아서 돌아야 할까? 하루 일을 일주일 동안 하는 그 기간은 어쩌면 순종하는 우리의 행위 속에도 인내와 겸손, 잠잠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여리고성을 도는 모습은 이미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종의 행위는 일정기간 지속되는 가운데 성이 무너지기까지 인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고 잠잠히 묵묵히 참는 겸손이 요구되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여리고를 돌면서 인내가 요구된다. 겸손이 요구된다. 잠잠함이 요구된다.

한편, 어째서 하루 한 바퀴를 돌다 일곱째 날 마지막에는 일곱바퀴를 몰아서 돌았을까? 일곱째 날은 마지막 날이며,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날이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걍약의 조절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술적으로도 강약을 조절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호흡법에도 음악에도 강약의 조절이 중요하다. 6일 동안 하루 한 바퀴를 돌면서 페이스를 가다듬은 후 마지막 날은 7번을 몰아서 돌면서 무너지는 가장 중요한 날 에너지를 집중해서 터트렸다. 임팩트가 필요하다. 기회를 보는 가운데 결정적인 순간 몰아붙이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그렇다. 전도할 때도 그렇다. 우리가 정복해야 할 여리고성이 있을 때 우리도 같은 전략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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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ail한 가르침_2011.07.31


(레 18:6-18, 개역) 『[6]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7]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너는 범치 말지니라 [8]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9]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10] 너는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11]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12] 너는 고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비의 골육지친이니라 [13] 너는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의 골육지친이니라 [14] 너는 네 아비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백숙모니라 [15] 너는 자부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니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16] 너는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17]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치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취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들은 그의 골육지친이니 이는 악행이니라 [18]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지니라』


근친상간을 금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사실적이며, 구체적이기 까지 하다. 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성경의 표현과 내용들은 적나라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성경을 음란한 책이라고 폄훼한다. 일련의 종교경전들이 가진 경건함에 비해 성경이 다루는 성적인 비애와 묘사들은 지나칠 정도란 것이다. 그러나 정말 성경은 음란한 책일까? 오히려 그런 폄훼함이 지나친 감정적 모함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그런 음란함을 조장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라 철저히 정죄하고, 경계시킬 목적에서 쓰여졌기 때문이다.

한편,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해보게 된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토록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소위 근친상간은 안 된다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실 수는 없는 것일까?

언젠가 교회학교 부장교사 시절, 공과설교를 하면서 한 달 정도 공과주제가 아닌 ‘말’에 대한 주제설교를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욕설이 지나치다는 의견이 있어서 특별히 말에 대한 설교를 했었다. 그때 설교 중 한번은 안 좋은 말이 미치는 실제적인 악영향에 대한 영상을 보여주고 정리를 좀 한 후, 아이들의 욕설에 대해 언급했다. 굉장히 무게를 잡고 심상치 않게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그리고 실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애들이 있어. 야이, 개새끼야!, 이 씨발놈아! 그런 말…’

나는 설교 중에 아이들이 하는 실제 욕설을 들려주었다. 왜? 그것이 아이들의 하는 욕설의 잘못됨을 들춰내고, 훈계하기에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음란한 책 성경?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는가? 얼마든지 하나님도 ‘근친상간은 죄이니라’라고 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일일이 말씀하신다. ‘네 어미의 하체는… 너는 계모의 하체를…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고모의 하체를…’

실제 그런 끔찍한 근친상간이 범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흔한 것은 아니었는지 몰라도 그 모든 일련의 근친상간들은 실제로 발생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죄들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차단과 경계를 위해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언급하신다. 그것이 훨씬 효과적이며, 훨씬 강렬한 책망이 된다. 하나님은 그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추상적인 가르침이야 말로 비극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해서 그것을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에둘러 표현하면 결과도 모호해진다. 그런 방식은 구체적인 경계심과 각성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같은 말씀을 너무 진부한 형식으로 그것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계시다고 생각하지 말자. 근친상간이란 허울 안에 있는 실제적인 근친상간들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언급하심으로써 친척들을 대면할 때 죄가 범해질 위험이 있을 때 명확히 상기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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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 인하여_2011.07.23.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맴돌면서 그 길의 험악함과 그 길의 먼 여정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였다. 잠언에는 마음이 상하면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물었다. 가데스 바네아의 반역으로 인해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맴돌아야 했다. 형제 부족인 에돔의 적대로 인해 먼 길로 돌아가야 했던 그 긴 시간. 얼마든지 백성들의 마음은 상할 만 했다.

이스라엘의 반역, 그 불순종이 그들의 여정을 험악하게 했다. 그들의 여정을 너무나 고달프게 했다. 그들의 마음을 실망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다. 불순종의 대가는 이토록 쓰라린 것인가.

내 신앙의 여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불순종과 오만으로 인해 먼 여정을 되돌아가고 있다. 고달픈 시간을 보냈다. 그 길의 험악함으로 인해 낙심하기도 했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거의 2년 여 만에 나는 다시 되돌아온 기분이다. 불순종이 나로 시간을 허비하게 했다. 배운 것은 있지만 돌아오지 않았으면 더 나아갔을 것을 아쉬움이 남는다.

어떻게 하면 변함없이 겸손할까? 어떻게 하면 변함없이 순종할까? 어떻게 하면 세상의 목적이 아닌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내 삶의 목적과 주인으로 삼을까?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니은 진노하신다.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그 길의 여정을 험악하게 해놓고 매번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다니! 불뱀들이 백성들을 공격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급한대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아무리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해도 그들의 도움은 여전히 하나님께만 있다. 장대 위에 놋뱀을 달고 바라보라신다.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께 반성하고 도움은 구하지만 여전히 순종하지는 않는 모습.

하나님은 언제나 의중을 보신다. 마음의 진정성을 시험하신다. 정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반성하고 돌이킨다면 순종하는 행위로 증거되어야 한다. 놋뱀은 그들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도구가 되었다.

하나니은 길의 여정을 되돌아가는 나에게도 놋뱀을 보여주신다. 바라보라고 말이다. 내 생활의 무엇이, 어떤 현상이, 어떤 상태가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인 것일까?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무릎 꿇고 순종할 수 있길 기도한다.

길의 여정이 우리를 낙심케 한다. 얼마든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간구하자. 여호와의 도우심과 긍휼, 그 은혜를 말이다. 그리고 놋뱀을 찾자. 내 생활, 내 형편, 내 환경 어딘가에 세워져 있는 장대 위의 놋뱀을 말이다. 내 진정성을 살피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워두신 놋뱀을 찾아보자. 바라보자. 순종하자. 다시 굴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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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11-08-3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놋뱀을 보여주셔도 바라보지 않는 태도가 마치 제 모습을 보는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도 항상 두렵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스스로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 두렵습니다. 참 두렵습니다
 

막중한 손해_2011.07.07

(막5:12-17)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에게 고하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거라사 지방에는 매우 지독한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귀신에 들린 채 일정한 거주지가 없이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을 정도였다. 그가 그 마을에서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력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잡아다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결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귀신의 능력을 힘입어 발작을 일으키면 그 쇠고랑과 쇠사슬을 끊을 정도로 괴력을 발휘하곤 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왜 그토록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드러났다.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로 하여금 돼지 떼에 들어가게 허락했을 때 무려 2,000마리가 넘는 돼지 떼가 바다에 내리달아 몰살했다.

이 사건은 굉장한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상황이다. 그 무시무시한 귀신들린 사람은 제 정신을 차린 온전한 사람으로 되돌아와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아와 일련의 사건 정황을 듣고, 확인했다. 산허리를 가득 메웠던 수천 마리의 돼지 떼는 보이지 않았다. 텅 비다시피한 목장이 보였다. 사람들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쇠고랑을 끊을 만큼의 괴력을 발휘하던 그 귀신들린 사람을 보면서 혀를 내두를 때 못지 않을 만큼 현재 벌어진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버린다.

그들에게 있어 귀신들린 사람이 제정신이 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어떤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못 되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그 사람을 고치셨다는 것도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그들의 소망은 2,000마리의 돼지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실제적인 부와 소득의 지표이면서 그들의 권력과 명예와 자부심을 보장해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그 모든 소망을 잃어버릴 처지에 놓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손해배상청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좀 더 의미이게 살펴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돌려보냄으로 인해 그들이 더 큰 손해를 자초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물질적인 타격을 입었다. 돼지 한 마리를 30만원으로 계산해 볼 때 무려 6,000만원의 금전적인 손해를 입었다. 부수적인 가치를 환산하면 그 금액은 더 커질 것이다. 그들은 그 막중한 금전적 손해에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돌려보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적소망도 호수에 빠진 돼지들처럼 되어버렸다. 그들은 영적인 막중한 손해를 연이어 초래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잃어버렸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한 손해를 자초한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인 손해로 인해 영적인 손해까지 초래할 수 있는 무지함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다. 그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돼지 떼를 키우던 부자들은 한 순간에 그들의 영적, 육신적 소망을 모두 잃었다. 그것은 실로 막중한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교훈은 분명 우리를 권면한다. 우리는 정말 우리의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우리의 믿음 역시 금전적인 손해가 영적인 손해로까지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사업의 실패, 직장의 실패, 기타의 모든 육적인 요건들을 잃는 것으로 인해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시험과 실족을 경험하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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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시험에 빠지다_2011.07.07


(마태복음14:25-32)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익히 바다 위를 걷는다는 얘기를 들었는가. 새벽 3시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어둠과 적막함. 오직 유유히 빛나는 달빛이 잔잔한 바다 위를 반짝이게 하고 있다. 누구든지 스산한 공포와 작은 인기척에도 민감해지는 시간이다. 그리고 바다 위. 어둠과 반짝임이 만나는 경계선 위로 무엇인가 다가온다. 유령이다! 예수를 닮은 유령님! 모두 고성을 지르며 기겁할 때 역시 우리의 베드로는 가장 용감했다. 유령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주님이시면 나로 하여금 주님처럼 바다 위로 걷게 해보십시옹! 저를 바다 위로 걷게 하실 수 있다면 당신은 유령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이 맞습니당!’

그리고 바다 위를 걷던 베드로 엉뚱하게 바람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혀 바다에 빠져들어갔다. 예수님보다 바람이 더 무서웠나?

비록 베드로가 물에서 건짐 받았지만 베드로의 시도는 아무래도 무모한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이 정말 예수님을 확인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예수님을 증명하기 위한 그의 방법은 오히려 자기 스스로를 시험에 빠트리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들다간 오히려 자기 자신이 시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한편, 베드로의 무모한 검증은 사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이기도 하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좀 도와주세요. 그럼 신앙생활 더 잘 할께요.’
그러므로 원하는 도움을 얻지 못하면 그에게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할 의무는 사라진다.

‘하나님께서 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이 고난과 어려움에서 건져주세요.’
그러므로 어려움이 지속되면 그에게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일상에서 아내들도 베드로와 같은 시험을 자초한다. ‘여보, 나 사랑해? 그럼 오늘 저녁에 올 때 파리바게트에서 케잌 사와! 기다릴께~ㅎ’ 남편이 업무가 바빠 늦었다. 못 사왔다. 미안하다고 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고. 그래도 아내는 서운하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날 사랑한다면 그 시간 못 냈겠어? 그래, 사랑이 식었다 이거지…’ 그러므로 아내들은 시험에 빠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나의 정체성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기 위해 이처럼 무모한 검증을 시도한다. 내가 요구하는 방법에 하나님이 부합되게 응답하실 때 우리는 마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응답 받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그러한 애교를 종종 용납하실 수도 있다.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신 것처럼. 그러나 또 다른 류의 문제가 개입된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문제는 베드로였다. 예수님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빠져가는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왜, 내가 주님이라고 말할 때 의심하였느냐! 처음 말할 때 믿었더면 스스로 시험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왜, 널 향한 변함없는 나의 사랑에 의구심을 품고, 확신하지 못하느냐. 언제나 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렇게 낙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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