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리고성을 돌고_2011.08.14
(수 6:3-5, 개역) 『[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번째 성 여리고를 점령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 이 전쟁의 승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명운을 가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그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미 하나님의 이적과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그들은 믿음으로 뭉쳐져 있었다. 또한, 이미 정탐을 통해 가나안족속들이 두려워 떨고 있음도 알았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방법은 매우 독특했다. 하나님은 칼과 창으로 나가는 전쟁이 아니라 성을 돌라고 하셨다. 사실 아무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할지라도 아군의 사망자나 부상자가 전혀 없이 전쟁을 이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 만큼 하나님이 주신 방법은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여리고를 정복할 수 있는 것으로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입성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여리고를 첫날부터 한 바퀴씩 돌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여리고성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흔히들 비웃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반대이다. 이미 그들은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이적을 듣고 물 녹듯이 마음이 놓아있었다. 안타깝게 항복하지 않고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결사항전의 태세로 문을 굳게 닫고 방비했다. 그런 그들에게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고,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이 도는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스라엘의 어떤 종교적 행위 자체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통해 그들이 멸망할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여리고성을 그저 돌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적군에게 심리적인 부담과 피로를 압박시키는 고난이도의 전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7일 동안 13바퀴를 돎으로써 단 한 명의 사망자나 부상자조차 없이 여리고성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도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들의 명성으로 적군이 떨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여리고성을 돌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론에 대해 특별히 불만이나 의구심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믿음으로 그들은 무너질 것을 기대하며 돌았을 것이다.
한편, 6일 동안 13바퀴를 도는 것을 생각해보자. 여호수아는 그들이 도는 과정에서 단 한 가지의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수 6:10, 개역)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하나님의 방법론에 순종하되 잠잠히 순종하라는 것이다. 잠잠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사실 합해서 13바퀴를 도는 것은 하루 만에도 돌 수 있는 일 아니었을까? 성이 좀 컸다손 치더라도 중간에 조금씩 쉬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13바퀴를 하루 만에도 다 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6일 동안 고작 하루에 한 바퀴만 돌라고 하셨다. 하루 한 바퀴 성을 돌고 나면 딱히 다른 할 일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일주일간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하루 한 번 여리고성을 도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이 단순한 노동을 3일째 접어들면 어땠을까? 과연, 조용히 엄숙히 성을 돌았을까? 분명, 상당수가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옆 사람과 잡담을 하면서 웅성거리며 성을 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잠잠하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여리고성을 돌고 있다. 우리에게도 여리고성이 있다. 때로는 그것이 내가 전도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여리고일 수 있고, 어떤 것은 나의 아직 변화되지 않은 성품이나 기질의 여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리고성을 주어진 기간 동안, 주어진 바퀴만큼 채우고 나면 반드시 여리고성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 바퀴를 시작한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7일째 힘든 7바퀴를 연달아 돌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주어진 기간과 주어진 바퀴가 채워지면 여리고는 정복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6일 동안 단순히 성을 돌고 있는 그들에게 침묵이 요구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순종하는 행위 속에서 그 과정 속에서 잠잠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순종하면서도 들레고, 외치고, 소란스럽게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너무나 자주 잠잠하지 못한 채 여리고성을 돌고 있고, 집중하지 못한 채 성을 돌곤 한다.
하루 만에도 돌 수 있는 13바퀴를 왜 굳이 일주일 동안 돌아야 할까? 그리고 왜 6일은 하루 한 바퀴밖에 못 돌고, 일곱째 날은 7바퀴를 몰아서 돌아야 할까? 하루 일을 일주일 동안 하는 그 기간은 어쩌면 순종하는 우리의 행위 속에도 인내와 겸손, 잠잠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여리고성을 도는 모습은 이미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종의 행위는 일정기간 지속되는 가운데 성이 무너지기까지 인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고 잠잠히 묵묵히 참는 겸손이 요구되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여리고를 돌면서 인내가 요구된다. 겸손이 요구된다. 잠잠함이 요구된다.
한편, 어째서 하루 한 바퀴를 돌다 일곱째 날 마지막에는 일곱바퀴를 몰아서 돌았을까? 일곱째 날은 마지막 날이며,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날이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걍약의 조절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술적으로도 강약을 조절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호흡법에도 음악에도 강약의 조절이 중요하다. 6일 동안 하루 한 바퀴를 돌면서 페이스를 가다듬은 후 마지막 날은 7번을 몰아서 돌면서 무너지는 가장 중요한 날 에너지를 집중해서 터트렸다. 임팩트가 필요하다. 기회를 보는 가운데 결정적인 순간 몰아붙이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그렇다. 전도할 때도 그렇다. 우리가 정복해야 할 여리고성이 있을 때 우리도 같은 전략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