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덫에 몰려드는 쥐새끼들_2011.08.28

(수 10:4, 개역)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 하매』

가나안 정복에 대한 전쟁기록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정복전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가나안 정복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다섯 왕과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는 이스라엘의 전쟁기록을 통해 분명히 하나님께서 전쟁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제 그 상황 속으로 go! Go!

우선 이 전쟁의 발단은 이스라엘의 전술적 선제공격이 아니라 가나안 다섯 왕들의 선제공격으로부터 시작된다. 강한 성읍 기브온이 이스라엘에 화친했다는 소식에 격분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주변의 왕들을 불러들여 동맹군을 결성한다. 그의 선동문은 이와 같았다.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결과적으로 이 외침이 그들이 총괄적으로 멸망하는 동기가 되었음은 이채롭다. 기브온을 치기 위해 그들이 결탁하겠다는 선동이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갔다. 계시록에는 역사의 마지막 전쟁을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계 16:16, 개역)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하나님은 예루살렘 왕의 영웅심과 호걸정신을 빌미로 멸망 받아야 할 왕들을 기브온으로 불러 올리셨다. 기억하자. 가나안 족속들은 파멸되어야 할 자들이었다. 그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했다. 지금 하나님은 우상과 윤리와 도덕의 패괴에 빠진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이다.

쥐를 잡기 위해 치즈 한 조각을 트랩에 올려놓는다. 우글우글 쥐들이 몰려든다. 그러므로 기브온은 치즈 한 조각에 불과했다. 그 치즈에 흥분된 가나안 왕들이 쥐새끼들처럼 몰려든다. 한 번에 소탕하자!

(수 10:11, 개역)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이스라엘의 칼날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객관적으로 이건 이스라엘 군대의 굴욕이다. 군대보다 우박! 우박이 가나안 군대를 섬멸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며, 하나님의 전쟁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고도 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표지 삼아 자신이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진멸하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신다.

가나안 군대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군대가 다 쫓아가서 섬멸하기에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박이 필요했다. 이 우박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우박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군인들을 정조준해서 던져서 때려 맞춘 우박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군대에게는 시야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태양이 중천에 머물도록 하셨다. 이왕에 개시된 전쟁을 더 이상 끌 필요가 없이 일망타진 하고자 했다.

(수 10:12, 개역)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우리는 무엇인가 일을 벌리게 되면 그 일이 끝마쳐질 때까지 중도에 멈추지 못하는 경험을 한다. 밤이 깊어가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한 시간 안에는 끝날 것 같아 그러면서 밤을 샌다. 하나님도 그러하셨나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싸우신다. 여호와는 용사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쟁기에 숟가락 하나만 올려 놓고 승전가를 부를 뿐이다. 내가 싸운다고 생각해선 오산이다. 여호와께서 싸워주신다. 단,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무모한 전쟁을 일삼지 말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 아닌 나의 영광과 이기심을 위한 목적에서 전쟁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우박을 던지시지 않는다.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며 전쟁을 하려는 것을 말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일 때 그것은 승리를 확신할 수 있고, 우리는 숟가락을 올려놓고 함께 승전가를 부를 기회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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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간 13바퀴_2011.08.14

(수 6:3-5, 개역) 『[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이미 앞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방법론에 대해 묵상해보았다. 거기서 좀 덧붙여 여리고성이 무너지기까지 성을 도는데 있어 요구된 두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여리고성은 하루 한 바퀴씩 6일 동안, 칠일째 7바퀴를 몰아서 돌아 총 7일간 13바퀴를 돌아야 했다. 그것은 단순히 성을 7일 동안 돌았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알게 한다. 7 일 뿐만 아니라 13바퀴도 채워져야 했다. 더불어 13바퀴만 도는 것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7일이 소요되어야 했다. 이것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데 필요한 두 가지의 충분조건이었다. 전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전 9:11, 개역)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시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연도 필요하다. 그 시기에 그것이 맞닥뜨려지는 것.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같은 순리에 절묘하게 부합된다. 행운도 불행도 그러하다.

우리는 종종 기막힌 사연을 듣는다. 대학생들이 봉사활동을 나간 그날 폭우가 쏟아졌고, 하필 그날 지금껏 없던 산사태가 일어났으며, 그 산 아래 봉사단은 숙소를 정하고 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봉사를 하러 간 그 시기에 폭우를 만났고, 산사태를 만났고, 그 산 아래 숙박함으로 생명을 잃었다. 그들의 봉사활동은 선한 목적과 동기에서 나아간 것이지만 그들은 실상 죽음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시기의 문제 때문에 심각할 정도로 시험을 당한다. 더디다는 사실만큼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는 것도 드물다. 우리는 기다리는 것에 너무나 익숙치 못하고 길들여있지 못하다. 자주 그런 경험을 했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기다리다 기다리다 자리를 떠서 돌아다닐 그 때. 그 사람이 약속한 장소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빗겨나간다. 시간은 더 소요되고 지체된다. 참다 참다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틀어버린 그 찰나, 목적했던 상황은 성취된다. 어쩜 시기와 우연은 그토록 우리를 빗겨 지나가고 또, 어처구니 없이 맞닥뜨려지는 것인지.

여리고성을 돌 때, 7 일째, 그 어떤 징조도 없었다. 13바퀴가 채워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만약, 그들이 6일만에 13바퀴를 다 돌았을지라도 여리고성은 견고히 서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에서 시기와 우연이 결합된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시기와 우연이 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만족되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위해 오래 기도하고 참고 기다리고 있는가? 한 가지 더 생각하자. 단지 오래 기다린 것만이 만족을 위한 충분조건일까? 아니다. 아직 13바퀴가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아직 7 일이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시기도 필요하지만 우연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소망하는 바를 성취하는데 꼭 필요한 아이템이 있다면 그것은 인내이며,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겸손한 것이다. 인내는 모든 성취의 밑거름이다. 포기는 모든 것을 불가능으로 만들어버리는 독초이다. 겸손은 인내의 뿌리이다. 겸손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 객기를 부리고 만다.

당신은 7일을 채워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신은 13바퀴를 돌아야만 한다. 그것이 고달픈가. 그것이 너무 지독한 조건이라 생각하는가.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생명을 담보로 한 치열한 사투가 없이 그 견고한 성을 손아귀에 넣었다. 우리의 사투는 인내하고 기다릴 줄 모르는 불평불만의 자아와의 사투이다. 우리의 싸움은 사실 그것일 뿐이다. 우리의 싸움은 포기하는데 익숙한 나약한 자아와의 사투이다. 겸손할 줄 모르고, 들레고 따지고 들고, 객기를 부리는 하찮은 자아와의 사투이다. 그것을 극복할 때 가장 견고한 성을 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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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11-08-3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내가 부족한 저에게 감사한묵상입니다. 잘 보고 가요 ^^
 

우리는 여리고성을 돌고_2011.08.14

(수 6:3-5, 개역) 『[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번째 성 여리고를 점령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 이 전쟁의 승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명운을 가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그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미 하나님의 이적과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그들은 믿음으로 뭉쳐져 있었다. 또한, 이미 정탐을 통해 가나안족속들이 두려워 떨고 있음도 알았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방법은 매우 독특했다. 하나님은 칼과 창으로 나가는 전쟁이 아니라 성을 돌라고 하셨다. 사실 아무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할지라도 아군의 사망자나 부상자가 전혀 없이 전쟁을 이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 만큼 하나님이 주신 방법은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여리고를 정복할 수 있는 것으로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입성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여리고를 첫날부터 한 바퀴씩 돌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여리고성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흔히들 비웃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반대이다. 이미 그들은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이적을 듣고 물 녹듯이 마음이 놓아있었다. 안타깝게 항복하지 않고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결사항전의 태세로 문을 굳게 닫고 방비했다. 그런 그들에게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고,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이 도는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스라엘의 어떤 종교적 행위 자체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통해 그들이 멸망할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여리고성을 그저 돌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적군에게 심리적인 부담과 피로를 압박시키는 고난이도의 전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7일 동안 13바퀴를 돎으로써 단 한 명의 사망자나 부상자조차 없이 여리고성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도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들의 명성으로 적군이 떨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여리고성을 돌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론에 대해 특별히 불만이나 의구심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믿음으로 그들은 무너질 것을 기대하며 돌았을 것이다.

한편, 6일 동안 13바퀴를 도는 것을 생각해보자. 여호수아는 그들이 도는 과정에서 단 한 가지의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수 6:10, 개역)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하나님의 방법론에 순종하되 잠잠히 순종하라는 것이다. 잠잠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사실 합해서 13바퀴를 도는 것은 하루 만에도 돌 수 있는 일 아니었을까? 성이 좀 컸다손 치더라도 중간에 조금씩 쉬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13바퀴를 하루 만에도 다 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6일 동안 고작 하루에 한 바퀴만 돌라고 하셨다. 하루 한 바퀴 성을 돌고 나면 딱히 다른 할 일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일주일간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하루 한 번 여리고성을 도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이 단순한 노동을 3일째 접어들면 어땠을까? 과연, 조용히 엄숙히 성을 돌았을까? 분명, 상당수가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옆 사람과 잡담을 하면서 웅성거리며 성을 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잠잠하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여리고성을 돌고 있다. 우리에게도 여리고성이 있다. 때로는 그것이 내가 전도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여리고일 수 있고, 어떤 것은 나의 아직 변화되지 않은 성품이나 기질의 여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리고성을 주어진 기간 동안, 주어진 바퀴만큼 채우고 나면 반드시 여리고성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 바퀴를 시작한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7일째 힘든 7바퀴를 연달아 돌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주어진 기간과 주어진 바퀴가 채워지면 여리고는 정복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6일 동안 단순히 성을 돌고 있는 그들에게 침묵이 요구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순종하는 행위 속에서 그 과정 속에서 잠잠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순종하면서도 들레고, 외치고, 소란스럽게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너무나 자주 잠잠하지 못한 채 여리고성을 돌고 있고, 집중하지 못한 채 성을 돌곤 한다.

하루 만에도 돌 수 있는 13바퀴를 왜 굳이 일주일 동안 돌아야 할까? 그리고 왜 6일은 하루 한 바퀴밖에 못 돌고, 일곱째 날은 7바퀴를 몰아서 돌아야 할까? 하루 일을 일주일 동안 하는 그 기간은 어쩌면 순종하는 우리의 행위 속에도 인내와 겸손, 잠잠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여리고성을 도는 모습은 이미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종의 행위는 일정기간 지속되는 가운데 성이 무너지기까지 인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고 잠잠히 묵묵히 참는 겸손이 요구되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여리고를 돌면서 인내가 요구된다. 겸손이 요구된다. 잠잠함이 요구된다.

한편, 어째서 하루 한 바퀴를 돌다 일곱째 날 마지막에는 일곱바퀴를 몰아서 돌았을까? 일곱째 날은 마지막 날이며,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날이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걍약의 조절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술적으로도 강약을 조절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호흡법에도 음악에도 강약의 조절이 중요하다. 6일 동안 하루 한 바퀴를 돌면서 페이스를 가다듬은 후 마지막 날은 7번을 몰아서 돌면서 무너지는 가장 중요한 날 에너지를 집중해서 터트렸다. 임팩트가 필요하다. 기회를 보는 가운데 결정적인 순간 몰아붙이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그렇다. 전도할 때도 그렇다. 우리가 정복해야 할 여리고성이 있을 때 우리도 같은 전략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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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ail한 가르침_2011.07.31


(레 18:6-18, 개역) 『[6]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7]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너는 범치 말지니라 [8]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9]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10] 너는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11]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12] 너는 고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비의 골육지친이니라 [13] 너는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의 골육지친이니라 [14] 너는 네 아비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백숙모니라 [15] 너는 자부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니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16] 너는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17]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치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취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들은 그의 골육지친이니 이는 악행이니라 [18]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지니라』


근친상간을 금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사실적이며, 구체적이기 까지 하다. 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성경의 표현과 내용들은 적나라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성경을 음란한 책이라고 폄훼한다. 일련의 종교경전들이 가진 경건함에 비해 성경이 다루는 성적인 비애와 묘사들은 지나칠 정도란 것이다. 그러나 정말 성경은 음란한 책일까? 오히려 그런 폄훼함이 지나친 감정적 모함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그런 음란함을 조장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라 철저히 정죄하고, 경계시킬 목적에서 쓰여졌기 때문이다.

한편,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해보게 된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토록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소위 근친상간은 안 된다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실 수는 없는 것일까?

언젠가 교회학교 부장교사 시절, 공과설교를 하면서 한 달 정도 공과주제가 아닌 ‘말’에 대한 주제설교를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욕설이 지나치다는 의견이 있어서 특별히 말에 대한 설교를 했었다. 그때 설교 중 한번은 안 좋은 말이 미치는 실제적인 악영향에 대한 영상을 보여주고 정리를 좀 한 후, 아이들의 욕설에 대해 언급했다. 굉장히 무게를 잡고 심상치 않게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그리고 실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애들이 있어. 야이, 개새끼야!, 이 씨발놈아! 그런 말…’

나는 설교 중에 아이들이 하는 실제 욕설을 들려주었다. 왜? 그것이 아이들의 하는 욕설의 잘못됨을 들춰내고, 훈계하기에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음란한 책 성경?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는가? 얼마든지 하나님도 ‘근친상간은 죄이니라’라고 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일일이 말씀하신다. ‘네 어미의 하체는… 너는 계모의 하체를…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고모의 하체를…’

실제 그런 끔찍한 근친상간이 범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흔한 것은 아니었는지 몰라도 그 모든 일련의 근친상간들은 실제로 발생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죄들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차단과 경계를 위해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언급하신다. 그것이 훨씬 효과적이며, 훨씬 강렬한 책망이 된다. 하나님은 그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추상적인 가르침이야 말로 비극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해서 그것을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에둘러 표현하면 결과도 모호해진다. 그런 방식은 구체적인 경계심과 각성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같은 말씀을 너무 진부한 형식으로 그것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계시다고 생각하지 말자. 근친상간이란 허울 안에 있는 실제적인 근친상간들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언급하심으로써 친척들을 대면할 때 죄가 범해질 위험이 있을 때 명확히 상기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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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 인하여_2011.07.23.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맴돌면서 그 길의 험악함과 그 길의 먼 여정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였다. 잠언에는 마음이 상하면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물었다. 가데스 바네아의 반역으로 인해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맴돌아야 했다. 형제 부족인 에돔의 적대로 인해 먼 길로 돌아가야 했던 그 긴 시간. 얼마든지 백성들의 마음은 상할 만 했다.

이스라엘의 반역, 그 불순종이 그들의 여정을 험악하게 했다. 그들의 여정을 너무나 고달프게 했다. 그들의 마음을 실망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다. 불순종의 대가는 이토록 쓰라린 것인가.

내 신앙의 여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불순종과 오만으로 인해 먼 여정을 되돌아가고 있다. 고달픈 시간을 보냈다. 그 길의 험악함으로 인해 낙심하기도 했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거의 2년 여 만에 나는 다시 되돌아온 기분이다. 불순종이 나로 시간을 허비하게 했다. 배운 것은 있지만 돌아오지 않았으면 더 나아갔을 것을 아쉬움이 남는다.

어떻게 하면 변함없이 겸손할까? 어떻게 하면 변함없이 순종할까? 어떻게 하면 세상의 목적이 아닌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내 삶의 목적과 주인으로 삼을까?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니은 진노하신다.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그 길의 여정을 험악하게 해놓고 매번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다니! 불뱀들이 백성들을 공격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급한대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아무리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해도 그들의 도움은 여전히 하나님께만 있다. 장대 위에 놋뱀을 달고 바라보라신다.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께 반성하고 도움은 구하지만 여전히 순종하지는 않는 모습.

하나님은 언제나 의중을 보신다. 마음의 진정성을 시험하신다. 정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반성하고 돌이킨다면 순종하는 행위로 증거되어야 한다. 놋뱀은 그들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도구가 되었다.

하나니은 길의 여정을 되돌아가는 나에게도 놋뱀을 보여주신다. 바라보라고 말이다. 내 생활의 무엇이, 어떤 현상이, 어떤 상태가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인 것일까?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무릎 꿇고 순종할 수 있길 기도한다.

길의 여정이 우리를 낙심케 한다. 얼마든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간구하자. 여호와의 도우심과 긍휼, 그 은혜를 말이다. 그리고 놋뱀을 찾자. 내 생활, 내 형편, 내 환경 어딘가에 세워져 있는 장대 위의 놋뱀을 말이다. 내 진정성을 살피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워두신 놋뱀을 찾아보자. 바라보자. 순종하자. 다시 굴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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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11-08-3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놋뱀을 보여주셔도 바라보지 않는 태도가 마치 제 모습을 보는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도 항상 두렵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스스로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 두렵습니다. 참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