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orn again Christian BH,G_2012.01.10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2.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나 자신의 첫 시작에 대해 회고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 복음 안에 들어왔던 것일까?

 

 

 

오늘 나는 내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데 조금도,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명백한 확신이 있으며, 나는 나의 복음을 증명할 수 있다. 심지어 내가 생활하는 교회 안에서도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복음에 대해 나는 완전히 자유로우며, 절대적으로 완전하다.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나 역시 한때는 조금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불교적인 가르침을 배우면서 자랐고, 나 스스로도 나의 종교적 감수성과 기초는 불교라고 믿었다. 나의 할머니는 정통 불교인 조계종을 따르는 분이셨다. 한때 나의 어머니는 불교도에서 원불교도로 전향하여 소태산 대종사님을 섬겼다. 어릴 적 누나와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주일이면 원불교 교당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곳은 비교적 신식불교를 구사하고 있었기에 토요일이면 학생회 모임도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특별한 종교적 감성이 있었다. 사실 어머니나 나는 불교나 원불교나 크게 가리지는 않았지만 생활적인 면에서는 보다 원불교에 가까웠다. 어머니께로부터 물려받은 종교적인 감성은 내게도 있었다. 겨울방학 때면 성지순례를 갔다. 전라도 영광군 백수면. 그곳이 대종사님의 출생지다.

 

 

 

나의 원불교 법명은 김종원이었다. 그 법명이 매우 좋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편, 희미한 기억인데 학생회 시절 설문조사 같은 걸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 등등 여러 질문이 있었다. 그때 나는 우담바라 꽃이라고 썼다. 어떤 질문의 답들에 대해서는 열심히 읽은 교전을 바탕으로 철학적으로 썼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만 어린이교전을 몇 번 독파했었다. , 학교수업이 끝나면 매일 도서관에 가서 2~3시간 책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심지어 그 나이에 한국판 계시록이라 할 격암유록을 다 읽었다. 어쨌든 나중에 교무님은 내 설문지를 보고서 천재가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지리적인 사정을 비롯 중학교 이후 사실상 나는 원불교와는 인연을 끝맺게 되었다. 적어도 6년 정도는 종교적으로는 무적의 신세였다. 그러나 불교적 감성은 여전했다. , 배운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 그러던 와중 고3 처음으로 교회란 곳을 가보게 된다. 드럼을 배우기 위해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 감성적으로 교회가 어색하고 거북했던 나는 이내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방언과 영안을 가진 동료를 만나게 되고, 어떤 특별한 체험을 통해 처음으로 기독교적 믿음을 가졌다. 물론, 그것이 구원은 아니었다. 그냥 기독교인이 되었을 뿐.

 

 

 

그 이후 나는 수개월 간 한 가지 기도에만 매달렸다. ‘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제게 알게 해주소서.’ 몇 달 뒤 대학에 진학한 나는 공교롭게 불교재단의 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거듭난 형제님을 만나서 인도함을 받고, 복음에 합류하게 되었다. 내가 기도했던 바대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내게 새로운 삶의 변화를 일으키진 못했다. 오히려 나는 심한 혼동과 내적갈등을 경험했다. 일반교회에서 배운 무속신앙 같은 종교적 습관과 감수성으부터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 인격적이고 이지적인 신앙에는 큰 괴리감이 있었다. 그것이 튜닝되는 동안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교정작업에 대해 나 스스로도 어떤 확신과 정립된 바가 없는 혼동의 연속이었다. 정신적 사고적인 재정립이 마무리 되어갈 즈음에는 또 다른 시련이 있었는데, 그건 날 인도해준 분이 교제로부터 이탈해 타락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술을 마셨고, 여자를 만났다. 심지어 나를 조롱하고 때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심한 정신적 충격에 한동안 추스릴 수가 없었다.

 

 

 

보혈의 주님은 만났지만 오히려 내 신앙의 문제는 무저갱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를 벗어나 간신히 교제 안에서 살아남고, 신앙이 정상적인 궤도로 오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고 훗날 그런 무모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아직도 나는 그런 내 신앙의 최초 단계에 대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바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앙이란 것은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굳이 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내가 얻은 유일한 해답일 뿐.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심한 고비와 후유증을 극복한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은혜로 대학기간 동안 신앙의 큰 진일보를 경험했다. 어릴 적부터 길러진 책에 대한 내공을 바탕으로 성경을 읽고, 신앙서적을 읽었다. 기도를 배우면서는 1시간 이상씩 기도하고, 많을 때는 2시간40분 이상 한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도 했다. 전도의 열매도 계속 있었다. 나의 첫 열매는 여전히 교회 안에 있고, 가족들도 전도했다. 경건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해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지나간다고 느껴질 때면 아예 그 방향으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음란한 포스터나 유인물도 아예 보지 않았다. 한동안은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이 느껴졌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시구나.’라고 읊조리곤 했다.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애물단지처럼 시작했지만 훗날 대학을 졸업하면서 교회를 떠날 때는 교회의 청년 기둥이 떠난다고 했다. 그 시간들은 내 신앙의 큰 자산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때 경험한 성령충만과 감동은 내 신앙에 대한 반성과 회개를 이끄는 표준이 되어 준다.

 

 

 

이후 군입대를 하면서부터 내 신앙은 또 한번 어둠의 시기를 맞았다. 상병 초 까지 내무반의 변변찮은 막내에 불과했던 나는 거의 1년을 죽고 싶을 만큼 힘들게 생활했다. 내 얼굴은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신앙적인 모든 성취와 만족과 자부심이 다 부러진 시간들이었다. 나는 거칠고 악한 마음을 품었고, 고참을 폭행하는 상상도 했으며, 자살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생수통을 들고 부대 교회로 가서 생수를 받는 동안 서재에 꽂힌 조지 휫필드의 전기기독교인물사등의 책을 잠시 읽고 있을 때는 잊었던 성령의 은혜와 도전과 감동이 내 몸을 전율케 해줬다. 화장실에 쪼그려 포켓 성경에서 시편을 읽으며 도망치는 다윗의 눈물과 심정을 공감할 수 있었다.

 

 

 

전역을 한 이후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고향으로 오면서 교회도 옮기고, 교제도 다시 시작해야 했고, 무뎌진 양심과 신앙적인 감수성을 되찾아야 했다. 그러나 직장의 문제와 구원받지 못한 부모님과의 동거 등 현실적인 문제들 등 어느 것 하나 순조로운 것이 없었다. 그것은 제2의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별로 두각을 나타낼 것도 없었고, 군생활의 고초로 인해 많이 무거워진 나는 지나치게 말이 없기도 했다. , 까칠했다.

 

 

 

그리고 대학시절과 달리 신앙적인 기복이 많아졌다. 기복은 언제든지 있었지만 그 양상이 좀 달랐다. 대학시절이 감정적인 경향이 좀 더 두드러졌다면. 이후에는 생활에 대한 염려를 얼마나 극복하느냐의 문제와 신앙적인 영역에 대한 투자를 얼만큼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좀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 신앙의 기본기나 내공은 이미 대학시절 상당부분 만들어져 있었다. 그때 배운 기초가 항상 나를 붙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녹록하지 만은 않았다.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처럼 나는 또 다른 환경과 또 다른 조건들 속에서 내가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배워야만 했다.

 

 

 

이때부터는 교회 안에서 목사님께도 호되게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유독 내게 모질게 대하셨다. 내가 좀 나태하거나 열심이 부족해 보이면 가차없이 책망을 하시면 분발하도록 채찍질 하셨다. 나의 인격적인 부분에 대해 내가 느끼지 못하는 모난 부분들을 치실 때는 정말 서러워서 혼자 엉엉 울기도 했다. 정말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어린 청년형제에게 너무 모질게 대하시는구나.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시지?’

 

 

 

그러나 나중에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실 때 알게 되었다. ‘병훈 형제 모난 부분을 다듬어서 쓰려고 했다. 병훈 형제는 각진 부분만 다듬으면 슈퍼 클래스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은 그것이었다. ‘병훈 형제 장가 못 보내고 떠나는 게 가장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약속했다. 결혼하게 되면 목사님께서 주례를 봐주시기로 말이다. 그러나 그 후로 시간이 4년 이상 흘렀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한편으로 그때가 내 신앙의 어떤 가능성과 비전이 끝났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몇 년의 시간동안 거의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기분이다. 더 배웠고, 더 지식이 늘었고, 더 융화되어 갔지만 내 개인의 신앙에 대한 철저한 주제의식과 불굴의 의지, 도전정신 같은 고상한 가치들은 퇴보를 거듭했다는 것이 나의 반성이다. 솔직히 나는 요즘 나는 이제 끝났다.’라는 좌절감을 느낄 정도이다. 하나님 앞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것들이 있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것이 있다. 아무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다고 느꼈지만, 이제 가능성의 시간들은 지나가버린 것만 갔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노력, 인간적인 타협을 거부하는 강인함, 신앙에 대한 투쟁심. 오히려 나약해진 의지를 본다. 육신의 문제, 경건의 문제, 내 삶의 목적에 대해 되묻곤 한다. 모두를 실망시킬만한 질문들을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지어 나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들을 다시금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일까?’ 어떤 의미에서 이런 질문들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위기에 봉착할수록 ‘to be basic’. 자존심이라든지 체면 같은 거 찾을 정신이 없다. 내가 바로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묻고, 재정립하고 싶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 나는 더 이상 큰 비전과 가능성은 포기했는지 모른다. 한때의 웅장한 비전은 없다. 그냥 본질에 대한 정립은 앞으로도 생존하기 위한 필수이자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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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 나는 그리스도인인가_2012.01…

 

[사도행전 11:26]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년간 모여 있어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출현과 집단의 형성.

초대 안디옥으로 부터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일까?

십자가 아래 뿌려진 보혈에 대한 자각과 믿음. 영원한 속죄와 성령의 인치심.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것으로 완벽한가.

 

오늘 나는 십자가 앞에 서서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그리스도인일까?’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일까? ‘What is 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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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G 2012-01-1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나의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그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고자 함은 아니다. 우리는 믿고 성령의 인치심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워지느냐가 본질적인 문제다.
 

 

(전 3:11, 개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유리창 같은 밤하늘 위 별은 빛나고, 바람은 차가운 12월의 겨울. 마지막 교사모임을 참석하고 돌아왔다. 해가 바뀌면 교회학교 아이들은 여전히 분반수업을 하고, 우리의 교사들은 여전히 선생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교사가 아니다.

 

 교회학교를 위해 내게 주신 달란트를 많이 투자했다.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경험이란 스승을 통해 값진 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와서 가장 많이 생각되는 것이 하나있다. 지식, 유능함, 많은 가르침. 덕의 요소는 너무나 많을 것이다. 그러나 리더의 중요한 의무중에 하나는 울타리를 잘 치는 것이었다.

 

 방목하는 양들을 위해 잘 건조된 풀, 고영양식의 사료, 포근한 잠자리. 그 모든 것이 우선되어야 되겠지만 울타리가 없다면 양들은 불안할 것이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이리와 늑대로 인해 편안한 마음으로 고급 양식을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할 것이다. 좋은 풀, 좋은 잠자리가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교사들이 즐거운 마음과 기쁨으로 봉사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의무였다. 그러나 처음엔 그걸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다그쳤고, 원망했고 또, 책망했다. 아니다. 나는 보호해야 했고, 평안한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힘써야 했다. 오늘 나는 익숙해진 코트를 벗으며 다시금 반성해본다. 위로를 주고 싶었던만큼 주지 못했던 것. 격려를 하고 싶었던만큼 하지 못했던 것. 아이들과 대화하려고 무릎을 꿇지 않았던 것. 그러므로 나는 너무나 해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린 마음을 다시 도닥여본다. 언젠가 또 다른 위치에서 앞을 걸어가야 된다라면 나는 초원의 평온한 양들을 바라보며 웃고, 한 손의 망치로 울타리를 고치고 있을 것이다. 단단히 못질을 하고 삐져 나온 못 끝을 망치로 쳐서 구부리며, 그래서 이리가 넘어오지 못하고 양들은 못에 찔려 상처받지 않는. 양들은 나를 보지 않겠지만, 안전하고 평온할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환경은 변해가며 모습들은 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 함께한 시간도, 그렇지 않은 시간도 나와 하나님에겐 모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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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my core value?_2011.12.19

 

연말 워크숍 때 유명강사의 교육시간을 가졌다. 유수의 대기업 회장들이 듣는다는 교육기관의 강사였다. ‘가치관 경영에 대한 4시간 강의를 들었다. 심플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경험한 사례를 곁들여 유익한 시간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기업을 이끌고, 고객을 파악하고 그것을 위해 얼마나 치열한 공부와 연구와 시도와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지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종종 혁신적인 아이디어, 혁신적인 마케팅 등을 통해 기업의 주도권이 바뀌고, 새로운 시장이 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복음의 기업을 확장해가는데 얼만큼 혁신적인 걸까? 많은 전도인들이 깊이 있게 공부하고 연구한다. 사실적인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복음전도에 나선다. 충분히 혁신적이다. 더불어 한국을 중심을 복음이 활발히 증거되는 것도 놀랍다. 그러나 좀 더 노력하자.

 

 알카에다는 목숨을 바쳐 그들의 신념을 위해 싸운다. 그들의 신념을 위해 임신부도 폭탄을 매고 자살테러를 감행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영광이며, 사명의 모두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조직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게 하는 것일까? 조직의 신념이 자신의 신념이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신념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그것은 정녕 목숨조차 버릴 수 있는 확고하고 위대한 신념이 되었을까? 신념을 액자에 담아 벽에 걸어두는 것으로 안주해버리기에 너무나도 많은 안락과 풍요와 핑계와 유혹이 도처에 가득하다.

 

 가치관 경영의 3가지 요소에 대해 들었다.

 

-사명(mission) : 왜 사는가? 존재이유. 그것을 생각하면 사명이 된다.

 -핵심가치(core value) :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액션 할 것인가?

 -비전(vision) : 무엇이 될 것인가?

 

 성경을 배울 때마다 늘 듣는 주제와 일맥상통했다. 우리의 사명, 우리의 행동방식과 삶의 모습, 우리의 비전. 교회는 이미 가장 모범적인 가치관 경영의 실례였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내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익숙해진 본질을 너무나 잊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은 정체성를 정립하는 질문이다. 물론, I’m a really Christian. 수학공식처럼 정답이 술술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되묻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액션 할 것인가? 내게 주어진 사명이 분명하다면, 나의 정체성이 분명하다면 내 삶의 모습은? 내 삶의 표준은? 내 삶의 방식은? 그러므로 나의 궁극적인 질문은,

 

 ‘What is my core value?’

 

 나의 핵심가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복음에 대해, 전도, 말씀, 기도, 교제, 성결, 뜨거움, 참됨, 순결, 정직, 소망, 사랑, 긍휼, 자비, 은혜, 도덕, 성실, 탐구, 갈망, 회개, 눈물, 호소, 열망, 바라봄, 경건, 겸손.

 

 사명은 있으나 핵심가치는 빠져있지는 않았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있으나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방식과 액션은 어디에 있는가. 현재에 만족할 수 없고, 안주할 수 없다. 회개하라 뜨겁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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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점 줄까?_2011.12.08

 

동서고금, 남녀노소,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바쁜 연말이다. 연말 인사고과를 진행중이다. 오늘 내 손에 한 뭉치의 평가표가 주어졌다. 이미 각 부서에서 부서원들이 자신의 팀장 리더십을 평가한 결과물이다. 평가항목별로 부여된 점수를 따라 합계점수가 잘 집계되었는지 검토하란 임무가 던져졌다.

 

 아니나 다를까 몇 군데에서 평가점수가 잘못 집계된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차츰 검토가 재밌어졌다. 팀장님이 할 일을 내가 하게 되니 자연스레 각 부서에서 팀장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한 장의 평가표에 불과하지만 마치 그 종이 몇 장을 통해 그 부서의 분위기, 팀장과 부서원의 남모를 신뢰와 공감을 다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

 

 한 가지 의미 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게 짧지만 의미 깊은 묵상을 던져준다. 동일한 부서의 동일한 팀장을 놓고 부서원마다 어쩜 그렇게 평가결과가 다른 것인지. 그 중에서도 품질관리팀이 내 사색의 문을 열어준다.

 

 품질관리팀장의 평가 최고 점수 98, 최하 점수 42.

 

 10여평 남짓한 품질관리팀 사무실에서 10명이 모여 근무하고 있다. 동일한 팀장을 놓고도 극적인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최하 점수의 곱을 해도 최고점보다 14점이 적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과 시각이 얼마나 다른가. 동일한 사람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롤모델이 되는 뛰어난 팀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장 짐 싸고 가야 할 팀장에 불과하다.

 

( 14:10, 개역)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정직한 것일까? 앞에 있는 사람은 항상 판단 받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는 98, 누군가에게는 42점 짜리다. 누가 옳은 것일까? 결론은 아무도 옳지 않다는 것. 바울은 자기 자신도 평가할 수 없었다.

 

( 119:137, 개역)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

 

 평가표를 다 넘기고 바닥이 드러날 때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그리스도인은 이 제일 뒷장에 하나님의 평가표가 있겠지? 앞에 아무리 98, 42점이 가득해도 마지막에 남은 하나님의 평가표만 정직하겠지.’

 

 그렇다. 사람의 평가를 들으면 낙심하기 쉬워지지만, 하나님의 평가를 들을 땐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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