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부터 부정적인 말을 쓰려니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게 되는데 (저 고양이 얼굴에 인상이라니) 나는 '심부름'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심부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이 시키는 일을 하여 주는 일'이지만, 대체로 이 단어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하여 주는'보다는 '시키는'에 방점이 찍히게 마련이다. 내 경우는 누가 굳이 시킨 게 아니면 딱히 하고 싶진 않은 일들이 심부름의 대상이었으므로 좋은 느낌이 들기가 어렵다. '심부름'의 항목이란 게 대체로 시키는 이가 하기 귀찮은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귀찮은' 이게 중요하다. 귀찮은데 안 할 수 없는 일. 누구한테 '시키고' 싶은 일. 적어도 내 기준으로 '심부름'에는 상하관계가 내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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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술자리는 회사 밖에서 어떤 상을 받으신 모 이사님의 한턱 자리였다.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축하의 말을 전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고 웃고 떠들고 심각하고 하느라 다들 바빴다. 자리도 무르익고 시간도 늦고 해, 슬슬 일어나려는 찰나에 게스트가 왔다. 지금은 퇴사한 OB 선배로, 우리 회사를 워낙 오래 다녔던데다가 지금도 한번씩 우리 회사 일을 외주로 해서 우리와 얽힌 것도 많고, 모임의 주인공 이사님과 친분도 상당하니 그 자리에 초대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간단히 한잔 하고 가려던 것이 2차까지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선배 옆에 앉았고 선배는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셈이 되었다. 나는 전에 그 선배에게 간단히 인사를 드린 적이 있지만 제대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어제의 자리에는 입사한 지 3개월 된 직원이 둘 있었으므로, 그 둘도 선배에게 인사를 했다. 가만 보니 선배는 둘에게 인사를 받고는 슬쩍 말은 놓았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초면에 반말, 제일 싫어요!) 자리 주인 다음의 연배로서 다른 이사님들께 "(성도 빼고) 누구 씨" 하며 반말을 하는 판이니 초면까지 따질 순 없었던 걸까?
이런 분들의 특징답게 선배는 목소리도 팔 동작도 컸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겠지만 꼭 이 회사에 함께 다니고 있는 분이 오신 것 같았다. 좌우를 넘나들며 대화하시는 것까진 좋은데, 바로 옆의 나는 귀도 아프고 팔에 맞을까봐 무섭기도 하고 그랬다. 대화의 내용은 대체로 현재 이사님들(선배에겐 "누구 씨") 무시하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모르고 이사님들과 그 선배만 기억하는 옛날의 사건사고, 그리고 새로 온 사람들한테 함부로 말하기였다. 나는 점점 불편했고 인상은 더 구겨졌다. (이 예쁜 얼굴이!!!)
그런데 가만 보니까 이 선배가 나한테는 반말을 안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의 말을 안 시킨 것이지만 여하간 그랬다. 거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내 표정 때문이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그 선배가 불쑥 물었다. "저기... 몇 살이에요?" (올것이 왔구나.) 몇 살이라고 얘기했더니 단박에 돌아오는 대답은 "응, 내 조카 또래네." (역시) 체했을 때처럼 속이 불편했다. 이미 술맛은 떨어진 지 오래. 내가 별 말 없이 계속 인상을 구기는 데 열중하자 선배는 다시 몸을 돌려 다른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던 선배가 맞은 편에 앉아 있던, 3개월 전 입사와 동시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배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담배심부름을. 그때 나는 갑자기 알게 되었다. 그 선배는 여자고, 나도 여자고, 맞은 편의 후배는 남자라는 사실이 현재 구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머릿속이 수세미가 됐다. 뭐야, 성이 다른 후배에게 더 함부로 하는 것은 그 옛날옛날에 살았다는 마초들의 근성 아닌가?
심부름을 '받은' 후배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지나갔겠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옆에서 누가 웃으면서 "후배 씨는 담배 연기 질색인데? 가기 싫을 거예요"라고 말했으나 선배가 눈을 부릅뜨는데 할 말이 없었다. 담뱃값 달란 거냐, 이제 돈 버니까 그 돈으로 사와라, 라는 말에(제발제발 농담이겠지) 예예, 하면서 후배가 일어나는데 나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한참 뒤 돌아온 후배는 난감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선배 근데 나 지금 정말 돈 없는데." 한다. (제 표정은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대로예요.) 내가 눈을 꼭 감자, 당황한 후배가 얼른 덧붙인다."돈 주시면 제가 사올게요." 그래서 내가 일어났다. "나도 담배 사야 하니까 내가 사올게." 나중에 생각해보니 대꾸가 그리 기지 넘치진 않았지만 난 적어도 '심부름'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표정이 불편한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나, 그리고 '입사 3개월' 두 사람. 젠장.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선배에 대한 존경과 배려와 후배에 대한 애정과 공감으로, 술꾼 대 술꾼으로 그렇게 만나서들 놀 순 도저히 없는걸까? 그런 세상은 언제 올까? 남자가 많은 회사에서 고군분투했을 젋은 시절의 그 선배가 있었기에 오늘 내 자리가 있을 테니 선배로서 대우하지 않겠다는 게 아닌데.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선배로선 그렇게 "쎄게" 나갈 수밖에 없었으려니 생각하니 한편 안쓰럽기도 하고,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난 허탈함에 그런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배는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가부장적인 태도라는 게 남녀 모두 조심해야 한다는 걸 환기하자니 이토록 험한 세상에서 정신 놓지 않고 여태 살아온 내가 새삼 기특하다. (긴 긴 긴 글의 끝은 언제나 그렇듯 엉뚱한 결론.)
심부름 말 (김수정 글 백보현 그림, 상출판사)
심부름을 갈 때마다 자길 태워주는 말을 가진 소년의 환상적인 심부름 이야기. 물론 이 경우의 심부름은 "미션"이지만. 말의 비례가 좀 불안한 컷이 몇 컷 있지만 그 상상의 내용은 매우 따뜻한 그림책. 이토록 험한 세상, 내게도 이런 말 한 마리 있었으면 좋겠구나. (글 길게 써놓고 창피하니까 괜히 책 얘기)
=3=3=3